205화
천지일축공의 한계를 넘어선 속도로 달리는 천일영은 실상 날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산이 나오면 허공으로 날아올라 넘고.
달려야 할 곳이 나오면 나는 것과 비슷한 속도로 달렸다.
그렇게 네 시진이 넘도록 달리니 아무리 천일영이라고 해도 조금씩 지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천일영의 얼굴에서 흐르는 땀줄기가 남궁무애의 얼굴에 떨어지자.
안겨 있던 남궁무애가 천일영의 옷깃을 당겼다.
“공자, 잠깐만 멈춰 줘.”
“쉬지 않고 달렸더니 자세가 불편해서 힘든가 보구나.”
“나는 괜찮은데 공자가 힘들어서 그래. 반 각만 쉬자.”
“…….”
다급한 마음에 알았다는 대답도 못 한 채 천일영이 천지일축공을 멈췄다.
품에 안겨 있던 남궁무애가 천일영의 품에서 폴짝 뛰어내려 몸을 풀었다.
우두둑.
뼈가 맞춰지는 소리가 들린다.
팔을 이리저리 움직이고.
앉았다 일어서며 다리의 뭉친 근육까지 풀어낸 남궁무애가 말했다.
“잠시 안아도 될까?”
“으응?”
천일영의 대답이 나오기도 전에.
남궁무애가 천일영을 안아 들었다.
“뭐…… 뭐 하는 것이냐. 내려놓아라.”
“여기부터는 내가 공자를 데리고 갈게.”
파아앙.
남궁무애의 신형이 항주를 향해서 튀어 나갔다.
하마터면 천일영은 방심하고 있다가 고개가 꺾여 뒤로 젖혀질 뻔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다.
여인에게 안기는 경험을 처음으로 당한 천일영은 끓어오르는 창피함에 얼굴이 새빨개졌다.
응당 남자인 자신이 여인을 안고 달려야 하는 것을.
천일영은 품에 안긴 채 더욱 빨개지는 얼굴로 조용히 입술을 달싹였다.
“나보다 더 빠르잖아…….”
항주에 도착할 때까지 천일영은 남궁무애의 품에 곱게 안겨 있었다.
얼굴이 터져 나갈 것 같았지만.
남궁무애가 더 빠르니까 그냥 참았다.
* * *
항주는 다른 곳보다 훨씬 그 피해가 덜하다고는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전쟁이 지나간 자리에 남는 비참함은 똑같았다.
항주의 바닷가 앞에 한 줄로 길게 늘어서 있던 시장과 집들이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부서지고 박살이 난 채 잔해만이 뒹굴고 있었다.
항주로 날아드는 포탄을 막기 위해 피해를 감수하고 가로로 줄지어 막고 있던 군함들도.
해적이 침입을 시도한 지 이틀하고도 반나절이 지났지만 지금도 흰 연기를 뿜으며 불타오를 정도였으니.
피어오르는 연기 사이에서 천일영은 허망함을 감추지 못했다.
“쓸데없을 정도로 해적 놈들이 크게 일을 벌였구나.”
“빨리 공자의 집으로 가 보자. 무사하다고는 했지만 다들 공자가 오기만을 기다릴 거야.”
천일영은 급히 별유천지로 갔다.
타다다닷.
객잔 앞에 도착한 천일영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에.
조금 전 집이 부서지고 군함이 불타는 것은 별것도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별유천지는 개점을 하지 않고 항주의 피난민들에게 밥을 주거나.
커다란 천막을 연이어 이어 붙여 그늘을 만들고 환자를 뉘어 놓고 있었다.
그중에는 뒷골목의 무뢰배들이 붕대며 환자를 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땀 흘리며 별유천지에서 돈을 풀어 사들인 식량을 쌓아 두고 있었다.
“공자님 아니십니까. 이제 돌아오셨군요.”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유의선 승선포정사사가 서 있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전에 공자님과 함께했던 해남도 사건에서 사라진 군함을 해적과 왜구들이 타고 나타났습니다.”
“빌어먹을, 그 배들이 지천번회로 넘어간 것이었나.”
천일영이 지천번회를 입에 담자 남궁무애의 몸이 조금 움찔거렸다.
‘어째서 공자가 지천번회를 아는 것이지?’
괜찮아 보이는 겉모습과는 다르게 남궁무애의 심장이 떨어질 듯 내려앉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며.
주변을 둘러보는 남궁무애의 눈에도 언뜻 비참함이 스며들었다.
피 냄새와 비명, 그리고 아이들의 울음소리.
남궁무애는 평소 같으면 아무렇지도 않았을 광경이었지만.
오늘만큼은 이상하리만치 괴롭다는 생각이 들어서 눈을 감았다.
특히나.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계속 귓가를 울리며 미치게 했다.
남궁무애는 떨리는 입술로 천일영의 옷깃을 잡았다.
“나는 잠시 쉴게. 이야기 나누고 있어.”
“미안하다. 여기까지 오느라 힘을 많이 썼는데, 챙기지 못했구나.”
“괜찮아.”
천일영은 축 처진 남궁무애의 몸과.
손마디 끝에 조금 남아 있는 떨림이 자신보다도 빠른 경공으로 달렸기에 힘들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아직은 무공이 부족한 자신 때문이라고 탓하며 유의선을 바라보자 그는 남은 이야기를 이어 갔다.
“항주의 피해는 극히 적습니다. 모두 별유천지의 식구들 덕분입니다. 복건성과 강소성은 각각 이만 명에서 삼만 명씩 죽었고, 실종자가 사만 명에 달합니다. 그런데 항주는 사망자가 일백구십 명, 실종자는 없습니다.”
“내가 있었다면 한 명의 사망자도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하필이면 내가 자리를 비웠을 때 이런 일이.”
“아닙니다. 공자님이 저들을 거두지 않았다면 이곳에서도 수만의 사망자가 나왔을 것입니다.”
문득 천일영은 별유천지의 가족들이 해적을 막았다는 말에 금채홍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언제나 나를 가장 일찍 발견하고 오던 녀석인데, 오늘은 어째서 보이지 않는 것이지? 설마!’
백유화와 애영, 그리고 화영은 천막 밑에 누워 있는 환자들을 돌보는 데 여념이 없었다.
천이영도 눈이 마주치자 고개만 끄덕였을 뿐.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을 만큼 정신없이 바빴기에 자기 일에 매달렸다.
천일영은 객잔의 뒤에 있는 집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금채홍의 방문을 여는 순간.
“훌쩍. 훌쩍.”
방 한구석에 쪼그리고.
무릎을 한껏 끌어 올려 고개를 처박은 채 울고 있는 여인의 신형.
천일영은 심장이 덜컥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채홍아?”
“고…… 공자님?”
금채홍이 얼굴을 들자.
온통 눈물이 범벅이었고.
그동안 한숨도 잠들지 못했는지 눈 밑에는 짙은 그림자가 배어 있었다.
천일영은 달려가 금채홍을 들어 올려 안았다.
“미안하다. 내가 없는 사이에 이런 일이 생겨서 네 손에 피를 묻히게 했구나.”
“어떡해요. 저 잠을 잘 수가 없어요. 눈을 감으면 원망하면서 죽은 사람들의 얼굴만 떠올라요. 아무리 씻어도 피 냄새가 떠나지 않아요. 손의 떨림이 멈추지도 않고, 음식을 입에 댈 수도 없어요.”
서럽게 우는 금채홍의 동공은 이미 텅 비어 있었다.
망가지고 있는 것이 한눈에 보일 정도다.
‘적을 상대해서 이긴다는 게 아니었다. 무조건 죽이는 싸움이었을 터. 그것도 하루에 수백의 사람을 죽인다면.’
오랜 세월 손에 피를 묻힌 사람도 견디기 쉽지 않은 일이다.
하물며 목숨 줄을 끊어 본 경험이 적은 금채홍이 견딜 만한 일이 아니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사람을 죽인다.
이 모순이 마음을 찌르고.
처음에는 괜찮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선명하게 머릿속에 피의 붉은색만이 남게 되면.
동공이 비어 가고 마음도 죽는다.
“저 어느 순간부터 웃고 있었어요. 내가 마음먹은 대로 사람을 죽인다는 게 즐거워졌었어요. 내가 적들보다 강하다는 게 더할 나위 없이 좋았어요. 미쳤나 봐요. 핏빛이 그렇게 아름답다고 느끼다니. 정말로 미쳤나 봐요. 흐흐흑.”
“그건 아니다. 누구나 검을 든 무인이라면 한번은 지나가는 길이다. 너는 그것이 한꺼번에 찾아온 것뿐. 나도 지나온 길이지만 이렇게나 멀쩡하게 있지 않으냐.”
“정말인가요.”
거짓말이다.
그럴 리가 없다.
한번 손에 묻은 피는 절대로 지워지지 않는다.
“정말이다. 괜찮아진다.”
괜찮다는 거짓말에.
눈은 울고 입은 웃는 금채홍의 얼굴을 마주하지 못할 것 같아 가슴이 찢겨 나갈 것 같았다.
“오래도록 잠들지 못했구나. 강제로라도 잠자리에 들게 해야겠다.”
“제발…… 어떻게 해서든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쓰러지게 해 주세요.”
파파팟.
천일영은 정신을 잃게 만드는 혈도를 짚었다.
이것으로 하루 정도는 눈을 뜨지 못한 채 누워 있게 될 터.
곱게 침상 위에 금채홍을 눕힌 천일영은 눈물 자국을 옷소매로 닦아 냈다.
그리고 밖으로 나와 묵묵히 자신도 피난민을 위해 일을 시작했다.
* * *
늦은 밤.
남궁무애를 소개하는 목적도 있지만.
그간의 일을 이야기하려고 유의선까지 포함한 모두가 별유천지에 모였다.
천일영이 말했다.
“미안하구나. 내가 없을 때 이런 일이 생겼다.”
“공자님께서 채홍이를 강제로 재웠다고 하시니 하는 말입니다만, 정말로 큰 공을 세웠는데 마음이 많이 다쳐서 걱정입니다. 천천히 피를 묻히며 경지에 올라도 끝내는 견디기 힘든데, 청해성에서의 일이 얼마나 지났다고 한 번에 수백을 죽이게 되었으니.”
건청의 대답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백유화도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첫 살인 때 복수였기 때문에 기분이 좋아서 춤까지 추고 싶었는데. 나에게 못된 짓을 했던 수백 명을 죽일 때마다 점점 기분이 좋아졌거늘.”
아니.
그건 네가 살인귀라서 그런 거야.
네가 특이한 거지, 다른 사람까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좀…….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는 동안.
시선만큼은 남궁무애에게 모여들었다.
도대체 누구길래 공자님께서 이런 자리에까지 데리고 왔단 말인가.
눈빛에 떠오른 궁금증을 눈치챈 천일영이 말했다.
“흑룡강성에서 만난 남가은이라는 소저다. 꽤 많은 도움을 받았는데 이번에 항주에서 일이 생겼다니까 걱정된다며 동행해 주었다.”
“흑룡강성? 그렇다면 만난 지 얼마 안 되신 분이네요? 믿을 수는 있으신 분인가요?”
살아온 길이 그랬기에 경계심이 많은 천일영이 이렇게나 쉽게 마음을 열었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아 백유화가 되물었다.
“만나 온 세월이 중요하겠느냐. 만난 지 하루 만에 나를 위해서 검을 들어 주는 사람이었다.”
“무인치고는 기운이 영 흐린데요. 실력은 있는 분이던가요?”
의심의 눈길을 지우지 않은 백유화가 계속 꼬리를 잡고 늘어지자.
남궁무애는 손가락으로 슬쩍 뺨을 긁으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약하지는 않아. 그러니까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강해도 문제인데. 강한 무공으로 우리 공자님의 목에 검을 들이밀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기는 한가?”
“공자에게는…… 절대 검을 겨누지 않을 거야. 그 무슨 일이 있어도.”
그때 남궁무애와 백유화의 대화에 천일영이 끼어들었다.
“유화야, 네 마음도 알지만 잠시 지켜보는 것은 어떠하냐. 내가 믿는 사람이라 너도 믿으라고는 하지 않겠다. 그래도 처음부터 몰아붙이는 것은 너답지 않구나.”
“뭐, 워낙에 낯을 가리는 성격이라 의심도 많아서 그럽니다. 그리고 공자님께 위해를 가하는 사람이라면 무조건 죽여 버릴 겁니다.”
백유화가 씩씩거리자.
유의선이 분위기를 풀어 볼 요량으로 끼어들었다.
“황실에서 별유천지의 분들에게 상을 내릴 것입니다. 항주를 구해 주신 은혜에 대한 보답입니다. 금화가 내려올 것이고, 별유천지에서 피난민들을 구제한 돈도 모두 황실에서 감당할 것입니다.”
“그보다는 다른 문제부터 처리해야 하지 않나?”
백유화가 유의선을 노려보았다.
“항주가 안전하다는 소문이 퍼져서 각지의 사람들이 몰려든다고 한다. 그중에는 피해가 많이 생겨서 약탈질을 못 하니까 항주를 밥줄로 생각하고 오는 놈도 섞여 있을 것이고, 해적의 간자도 숨어들겠지. 그놈들은 어찌할 생각인가.”
“외곽 지역에 있던 무뢰배들을 고용할까 합니다. 이번에 그들이 큰 공을 세웠습니다. 피난민들을 보호했지요. 그래서 아예 그들을 현청 소속의 자경단(自警團)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승선포정사사치고는 제법 머리를 굴렸네.”
“속까지 나쁜 놈들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니까요. 아 참, 그리고 자경단의 단주는 월영입니다.”
“네에?”
월영이 기겁한 표정을 지었다.
유의선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말을 이어 갔다.
“외곽 지역에서 오래 사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무공을 가르쳐 주시고 관리를 해 주시길 바랍니다. 무뢰배들이 월영 형님이라면 따르겠다고 하더군요.”
“아니, 그게…….”
망설이는 월영에게 천일영이 단호하게 말했다.
“하여라. 너에게 딱 맞는구나. 항주에서 못된 짓 하는 놈들의 씨를 말려 버리거라.”
“공자님의 명이라면 해야죠. 알겠습니다.”
월영이 고개를 끄덕이자 다시 유의선이 말했다.
“다음은 해적과 왜구들의 이야기입니다만, 해남도에서 사라진 군함이 유독 항주로만 왔더군요. 다른 지역에는 천자뇌포는 등장했을지언정 군함까지 오지는 않았습니다. 지천번회가 무슨 생각을 하…….”
덜컹.
그때 남궁무애가 급히 몸을 일으켰다.
“그건 내가 들어도 되는 이야기가 아닌 것 같네. 아직 나는 의심받는 처지이기도 하고.”
“허허…… 그러고 보니 소저가 워낙에 자연스럽게 앉아 있는 통에 생각지 못했군요.”
“나는 나가 있을게.”
남궁무애가 밖으로 나왔다.
바닷가로 나와 모래사장에 앉아 있으니 바람이 불어왔다.
흑룡강성보다 따뜻한 바람.
하지만 남궁무애의 가슴은 차갑게 식어만 갔다.
‘공자가 쫓는 사람이 나인 건가. 내가 지천번회의 주인인데. 그리고 이 일은 혈천회가 한 일이고.’
어째서 이렇게 되었을까.
백 년 만에 겨우 마음 놓고 곁에 있을 사람을 찾았는데.
남궁무애는 천일영이 자신의 혈족인 남궁천을 죽이고 남궁세가를 멸문시킨 사람이라는 것을 모른 채.
자신이 지천번회의 주인이라는 사실에.
따스한 바닷바람이 자신의 마음을 헤집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