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꺄아아악!”
천일영의 명대로 무공을 수련하던 백유화가 비명을 질렀다.
죽을 것 같은 고통을 참고 몸을 움직이는데 갑자기 천일영이 ‘훅’ 하고 나타나자, 백유화는 초절정 고수라는 이름도 아까울 지경으로 엉덩방아를 찧으며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가…… 갑자기 나타나시면 어떡해요. 놀라서 죽는 줄 알았네. 내 심장! 아직 멀쩡히 뛰는 건가?”
“미안하구나. 하지만 급하다. 유화야, 나하고 같이 가야겠다.”
덥석.
백유화가 대답하기 전에 뒷덜미를 잡아 올려 버린 천일영이 놀란 토끼 눈을 하는 예서란에게 말했다.
“이것 좀 가지고 가마.”
“나는 왜 항상 이것이라고 불리는 거죠?”
주둥이가 삐죽 나온 백유화가 투덜거리자 예서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가지고 가시는 걸로 알고 있을게요.”
“야! 그건이라니!”
백유화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훅.
천일영과 백유화의 신형이 사라졌다.
* * *
경공과 하늘을 나는 것의 중간 정도로 종남파를 향하는 천일영의 품에는 백유화가 안겨 있었다.
평소라면 옆구리에 걸치고 가겠지만 지금은 평소보다 높고 빠르게 움직이고 있어서 품에 안았다.
평소라면 좋아했을 백유화였겠지만, 지금만큼은 얼굴이 새빨개진 채 비명을 질렀다.
“아아아악. 왜 깨끗할 때는 안아 주지 않으시고! 땀이랑 먼지, 몸에서 나오는 기름으로 범벅이 돼서 악취가 풍기는 이때 안아 주시는 거예요.”
“무인의 몸에서 땀 냄새가 나는 것이 어때서 그러느냐.”
“무인이기 이전에 여자라고요. 그보다 높아! 너무 높아요. 저 높은 산이 왜 발밑에 있는 거야! 꺄아아악.”
한참을 벌게진 얼굴로 빽빽 소리를 지르던 백유화가 눈을 까뒤집고 반쯤 기절했을 때 천일영은 종남파에 도착했다.
장문인 청강에게 이야기도 하지 않고 무진이 있는 방문을 연 천일영은 백유화에게 진맥을 시켰다.
“저는 공자님처럼 몸 안을 들여다보지는 못하지만, 맥을 짚어 보니 앞으로 길어야 일주일 정도입니다.”
“오는 동안 너에게 이야기한 대로다. 환단의 성분을 바꿔서 중단전을 열 수 있겠느냐.”
“가능합니다. 다만 오래된 영약을 사용해서 저렴하게 복제한 것으로는 안 되고 제대로 된 새로운 환단을 만들어야 합니다. 신선한 영약도 필요하니 청해성에 있는 채홍이의 친구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요?”
“전서구로 받으면 삼 일 정도려나. 급하면 내가 다녀오마.”
“알겠습니다.”
천일영은 백유화와 함께 무진이 있는 장원에서 내려와 종남파 한가운데를 걷다가 청강과 눈이 마주쳤다.
청강의 눈이 놀라서 튀어나올 듯 휘둥그레졌다.
“헉! 공자가 왜 여기에 있는 것이오? 장원에서 갑자기 사라져서 한참을 찾았었는데! 게다가 저 여자는 무엇이오?”
“무진의 몸 상태가 며칠을 버티지 못할 거 같아서 의원을 데려온 것이다.”
“무진께서 며칠을 버티지 못한다고?”
각오하고 있기는 했지만, 막상말로 전해 들으니 청강의 마음이 새삼 묵직해졌다.
청강은 백유화를 바라보며 혀를 차며 못마땅한 얼굴을 했다.
“근데 의원이라면서 꼴이 왜 이 지경인지. 산에서 열 번은 굴러떨어진 몰골인데……. 실력은 있는 사람이오?”
“실력은 보증하지. 그보다는 무진을 살려 보려고 한다. 종남파 안에 작은 거처를 마련해 줬으면 하는군.”
“안 될 말이오. 당장 나가시오. 아무리 사천당문의 당문주가 신용을 보증했어도 종남파 안에서 거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오. 게다가 아무도 손을 못 댄 병을 고친다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하시오.”
“무진의 병을 고칠 만한 근거가 있다.”
“천하의 명의도 맥을 짚자마자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소. 우리라고 가만히 있었던 것이 아니오. 그나저나 정문을 지키는 놈들은 어찌 감시했길래 종남파 안에서 여 의원과 무공도 모르는 공자 따위가 마음껏 활개를 치고 다니는 것인지. 내 이놈들을 가만히 놔두면 안 되겠군.”
천일영 옆에서 무진의 몸에 변화를 주고 중단전을 열려면 약재를 어찌 혼합해야 할지 궁리하던 백유화가 청강의 말에 눈을 치켜떴다.
“야, 너 지금 우리 공자님께 막말한 거야?”
“야? 너? 이 여인이 미친 게 아닌가! 감히 종남의 장문인인 나에게 함부로 말을 지껄이다니! 내가 장문인인 것을 모르고 그런 것 같으니 지금이라도 당장 사과하거라. 그리하면 이번만은 용서해 주마.”
“닥쳐. 이 족제비랑 여우를 비벼 놓은 것 같은 상판대기를 한 놈아. 겨우 종남의 장문인인 주제에 감히 우리 공자님에게 따위? 이게 오늘까지만 살고 싶나!”
“뭐…… 뭐라고? 네가 진정 미친 게로구나!”
“중원 오십 대 고수에 겨우 들어서는 놈이 개소리가 길다. 그 족제비 같은 혓바닥부터 뽑아 줄게.”
오랜 수련으로 심신이 피폐해지고, 무진의 몸과 환단의 구조.
그리고 화경으로 들어서는 깨달음의 단서가 복잡하게 머리에서 얽혀 있어 그렇지 않아도 머리가 아팠던 백유화가 열이 뻗쳐 강선을 뽑으려 할 때였다.
찢어 죽일 표정으로 청강을 노려보던 백유화의 표정이 갑자기 멍해졌다.
갑자기 모든 것이 하나로 모이며 이어졌기 때문이었다.
“어라? 혈도는 이렇게 이어지는 거고, 기도가 중단전에 이어지는 과정이 이건가? 무진이라는 저 노인네의 뒤틀린 맥을 짚어 보니 모든 게 확실해지는…….”
화아아아아악!
순간 백유화의 기운이 새로운 길을 찾으면서 중단전이 활짝 열렸다. 그러곤 이내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이…… 이게 무슨 일…….”
“유화야, 화경의 경지에 들어섰구나. 빨리 앉아서 운기조식을 하여라.”
“예? 저 진짜 화경인가요? 아…… 알겠습니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운기조식을 시작하는 백유화에게서 거대한 기운이 뿜어지는 것을 본 청강의 입이 쩍 벌어졌다.
중원에 단 한 명도 없는 화경의 경지를 눈앞에서 본 것이었다.
손이 떨리고 몸이 무너질 만큼 강대한 백유화의 기운 앞에서 청강의 눈이 뒤집히자 천일영이 말했다.
“다시 한번 묻지. 우리가 거할 거처는?”
“지…… 지금 바로 마련하겠소. 가장 좋은 곳으로 준비하겠소이다. 그런데 저 여인 진짜 의원 맞소?”
“맞다. 그리고 일단은 거처를 마련해 줘서 고맙군.”
청강은 백유화가 운기조식이 끝날 때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그 과정을 끝까지 지켜봤다.
곁에 모인 다른 종남파의 무인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화경이라는 경지가 얼마만큼 대단한 것인지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 가슴속에 불같은 마음이 지펴졌다.
무인으로서의 상승심이었다.
‘저런 난쟁이 똥자루 같은 여자도 화경에 이르는데 우리라고 경지에 못 오를 이유가 없지.’
백유화가 중원 십육 대 고수라는 것을 모르는 종남파의 무인들은 뭔가를 크게 착각하며 끓어오르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했다.
* * *
청해성에 있는 문목화에게 영약을 구해 오자 백유화는 바빠졌다.
백여 번에 이를 정도로 성분을 바꾼 환단이 제대로 무진의 몸에서 작용하는지를 검토했고, 천일영도 기운을 밀어 넣는 시간을 계산하는 나날이었다.
아주 작은 실수만 해도 무진은 죽기 때문이었다.
종남파에 도착한 지 오 일째 되는 날.
백유화와 천일영은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된 것 같구나.”
“네, 무진 영감탱이를 깨우러 가 볼까요.”
천일영과 백유화가 무진이 있는 산꼭대기의 숨겨진 장원으로 가기 전에 청강을 불렀다.
“지금부터 무진의 몸을 고칠까 한다. 장문인도 같이 가지.”
“하아. 우리도 의원을 불러서 알아보니 남은 목숨이 이삼일이라고 했소. 어차피 가실 분이니 공자의 뜻대로 한번 해 보지요.”
백유화가 환단을 소중하게 안은 채 걸었고, 천일영과 청강이 그 뒤를 따랐다.
오늘따라 구름이 잔뜩 낀 날씨가 불길하게 느껴졌지만, 청강은 무진이 있는 장원에 도착하자 헛바람을 들이켰다.
“이…… 이건!”
“보기 힘든 장면이구나.”
구름 낀 하늘의 틈새로 햇살이 쏟아져 무진이 있는 장원만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햇살이 얼마나 따사롭고 화사하게 느껴졌는지 백유화가 장원의 문을 여는 모습이 마치 선녀가 무진에게 다가가는 것 같았다.
‘입이 더럽고 성격도 개 같은 선녀기는 하지만.’
청강은 왜인지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천일영과 함께 무진의 방으로 들어섰다.
팔을 걷어붙인 백유화가 말했다.
“이제 시작할게요.”
씹어 삼키지 못하는 무진을 위해 물에 갠 환단을 목으로 넘긴 백유화가 시간을 쟀다.
약 일각의 시간이 지나자 무진의 몸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지금입니다.”
“알았다.”
극음의 기운을 온몸에 모으고 있던 천일영의 손길이 거칠게 무진의 가슴 위로 올라갔다.
스으으윽.
무진의 몸으로 극음의 기운이 흘러 들어갔다.
남자는 양기를 받아들여야 하지만, 반대되는 극음의 기운을 강제로 집어넣어 중단전을 찢듯이 여는 것이었다.
천일영은 자신이 가진 거의 모든 기운을 쏟아부었고, 기운은 환단으로 조금 열린 중단전에 빨려 들어갔다.
진땀을 흘리는 천일영이 다급히 말했다.
“유화야, 지금이다. 중단전이 열리기 시작했다.”
“혈도에 침을 박아 넣어서 기운이 역류하는 것을 막겠습니다.”
꿀렁이며 중단전으로 몰려드는 기운 중에서 몇 개는 금제를 거스르지 못하고 심장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파바바바밧.
이런 일이 있을까 이미 예상한 백유화는 화경의 경지답게 청강이 보지도 못하는 속도로 대침을 박아 넣었다.
“공자님! 역류는 막았습니다.”
“중단전도 완전히 열렸다. 이제는 진기를 넣어서 뒤틀린 기도와 혈도를 일제히 잡는다.”
스으으윽.
극음의 기운을 거두고 천일영이 진기를 쏟아부었다.
대침으로 겨우 역류하는 기운을 막는 찰나의 순간에 해내야 하는 일이었다.
‘유화와 백번이 넘도록 연습하기를 잘했군.’
뚜두두둑.
진기를 밀어 넣자 그간 얼마나 크게 기도와 혈도가 뒤틀렸었는지 뼈가 부러지는 듯한 소리가 무진의 몸에서 울렸다.
일각이 지나고 천일영이 말했다.
“이제 됐다. 완전히 정상이 되었구나.”
“공자! 무진께서 진정으로 살아나시는 것이오?”
한눈에 보기에도 안색이 달라진 무진의 모습에 청강은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힘든 시기에 종남파를 맡게 되어 마음고생이 심했던 청강은, 종남파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무진을 살렸다는 절절한 마음에 천일영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 * *
다음 날 종남파에서 존경받고 살아 있는 양심이라 불리는 무진이 눈을 뜨고 한 첫마디는 이것이었다.
“고기.”
“네에? 종남파는 도교에 속한 곳인데 어찌 고기를 찾으십니까.”
“네놈은 환자한테 벽곡단을 먹일 테냐. 아니면 풀뿌리만 먹으면서 병이 나으라…… 이 말이냐.”
“그게 아니라…… 고기를 가지고 있지도 않고 잡아 오기에도 좀…….”
“시장.”
“네?”
“시장에서 사 와라. 시장이 왜 있겠느냐. 빨리 가서 사 와라. 나는 닭이 좋다.”
“헉!”
“두 마리다.”
매섭게 노려보는 무진의 안광에 청강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왜인지 자신이 이야기를 듣지 못하도록 따돌리는 느낌도 들었지만 어쩔 수 있겠는가.
무진이 있는 장원에는 그 누구도 얼씬도 못 하게 했기에 청강은 심부름할 사람을 찾아 산길을 내려갔다.
무진은 청강이 나가자 몸을 일으켜 앉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저놈은 아직도 눈치가 저렇게 없어서야.”
“몸은 어떠십니까.”
“믿기지 않는구나. 금제를 어찌 푼 것이냐.”
“이 여인이 금제를 풀 실마리를 찾고 직접 환단까지 만들었습니다.”
백유화와 천일영의 설명을 들은 무진이 놀란 눈으로 말했다.
“목숨을 빚졌구나. 공자가 원하는 것은 지천번화와 혈천회였나.”
“아닙니다. 지천번화와 혈천회뿐만 아니라 무진께서 알고 계시는 모든 것을 원합니다.”
“하하하. 죽다 산 노인에게 욕심도 많군. 그렇게 욕심 많은 사람이 천마의 자리를 그만두다니.”
호탕하게 웃는 무진이었지만, 웃음의 끝에는 냉정한 시선이 남아 있었다.
“살려 준 사람에게 안 된다고 말할 수는 없는 법이니 거절을 할 방도가 없구먼.”
목을 넘기는 물 한 잔이 무진의 마음을 조금 달래 주었는지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천마께서 찾는 혈천회의 주인은 원래 태고의 신선에게 피를 나눠 받은 자일세. 그는 예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존재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살아가겠지. 다만 그의 육신은 지금 이 세상에 없다네.”
“태고의 신선? 게다가 존재하는데 육신이 없다는 말씀의 뜻을 모르겠습니다. 육신이 없으면 혈천회가 존속하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 혈천회를 움직이는 사람은 주인이 아니라네. 주인의 아들이지. 원래 혈천회의 주인은 하나라를 세운 하우. 그는 지금 잠들어 있고 아들인 하계가 혈천회를 이끌고 있지.”
무진의 입술이 잠시 닫히자 천일영의 심장은 내려앉을 듯한 느낌으로 쿵쾅거렸다.
하나라.
수천 년 전에 생긴 중원 최초의 나라이자, 기억에서 사라졌을 만큼 오래전에 멸망한 곳.
‘그 하나라의 왕이 살아 있다고? 게다가 태고의 신선이 피를 나눠 준 자라면 채홍이와 같지 않나. 그렇다면 채홍이와 혈족?’
천일영은 그들이 왜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천천히 대업을 도모했는지 이제야 이해가 갔다.
과거의 망령이 어둠에서 기어 올라오고 있었다.
다시 세상을 집어삼키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