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화
천일영이 마른 목소리를 내었다.
“하우의 육신은 사라졌으나 계속 살아 있다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이야기가 길어지겠구먼. 본래 삼황오제 시절, 하우의 가문은 태고의 신선에게 피를 받아 영약을 키우는 집안이었네. 하지만 태고의 신선은 피를 받은 자에게 약속을 받을 수밖에 없었지. 피를 나눠 받으면 보통의 사람과는 달리 거대한 힘을 얻으니, 무공을 배우지 말고 출세에 힘쓰지 말라는 것이었네.”
“하 가문은 사람의 마음이 욕심을 버리지 못한 모양입니다.”
“허허, 그렇지. 하우의 아버지 곤은 신선에게 받은 능력으로 요순시대에 큰 자리에 올랐지. 그런데 하필이면 거대한 홍수가 일어났고, 곤은 좋은 머리만 믿고 방관하다가 큰 피해를 보았네. 그래서 추방당하고 죽어 버리지. 그것을 아들인 우가 처리하여 나라를 세우는 발판으로 삼네. 그렇게 생긴 나라가 중원 최초의 나라인 하나라일세.”
“출세에 힘쓰지 말라는 약속을 어기고 왕이 된 것이었습니까.”
“그렇네. 그래도 태고의 신선은 기다렸지. 영약을 제때 키워 진상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하우는 나라를 아주 잘 다스렸거든. 그랬는데 어느 날부터 우는 영약을 조금씩 빼돌렸다네. 영약을 사용하면 자신이 더욱 강해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지. 그리고 그것을 태고의 신선이 알게 된 것이고.”
“태고의 신선이 노했다면 우가 어찌 아직도 존재는 없으나 살아 있다고 하시는 것입니까. 신선의 힘이 막강했을 터인데 말입니다.”
“태고의 신선이 실수한 것이지. 우는 죽기 전에 자기 아들만은 살려 달라고 했네. 태고의 신선이 두 명의 아들 중에서 백익을 살리고 계는 죽이는 것으로 혈통은 남겨 둔다고 했지. 계가 워낙에 사악하기도 했고, 하나라가 백성을 잘 보살피고 있었기 때문에 착하고 어진 백익에게 왕위를 물려주게 만든 것이었네. 그 당시에는 왕을 추대하는 방식이었지 아들에게 물려주던 시대가 아니었거든. 지금 황가가 왕위를 물려주는 것도, 그때 태고의 신선이 아들을 통해 왕위를 이으라고 한 것이 기원이지.”
“분명 계가 살아 있다고 하셨습니다. 백익이 살아남아야 했던 것이 아닙니까.”
“우는 마지막 도박을 한 것이지. 계를 백익으로 만들고 진짜 백익은 계가 죽였네.”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게까지 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신선을 속이는 것은 어려운 일일 터인데.”
무진은 느른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생각해 보면 영약의 용도는 참으로 다양했다.
설마 그 영약이 그런 방법으로 쓰여질 줄이야.
“영약으로 기운을 속였다네. 계는 이미 우와 함께 영약의 사용법을 터득했고, 그것을 몰래 사용해서 여러 가지 비법을 만들었지. 영약의 힘으로 순진한 백익의 기운을 계가 몸에 받아서 그인 척했고, 백익은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계의 손에 죽었네. 그리고 우는 노한 신선이 벼락을 떨어트려 죽였지. 일족에게 내려 준 피의 힘도 모두 거두어 가고. 하지만 계는 아버지 우의 심장을 빼돌려서 영약의 힘으로 뛰게 했다네. 그리고 그것을 숨겼지.”
“어르신! 그 말은!”
“계는 아버지를 부활시키려고 한다네. 그동안 영약의 힘을 사용해서 여러 가지 연구를 거듭했지. 아버지와 만든 모든 술법과 어둠의 지식을 가지고 지금 하나라를 부활시키려고 하고 있어.”
믿기지 않았다.
적어도 채홍이의 가문에 얽힌 이야기를 모른다면 믿지 않았을 것이다.
천일영은 내친김에 다시 무진에게 질문했다.
“신선에게 영약이 필요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또한 영약은 자연에서도 자라는데 키워야 할 사람이 필요한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신선은 수천 년, 수만 년을 살아간다네. 하지만 수십만 년, 수억 년을 사는 것은 무리지. 그래서 영약의 선기로 그 수명을 늘린다네. 영겁의 시간을 살아가기 위해서 말일세. 자연에서 태어난 영약은 그 효능이 뛰어나기는 하지만, 신선의 피를 물려받은 자가 키우는 영약에 비하면 한참 모자라네. 그래서 태고의 신선은 영약을 키우는 사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지.”
“그렇다면 영약을 키우는 가문은 하나가 아닙니까?”
“하나일세. 다만 영약을 키우는 가문을 악착같이 찾아서 계가 죽여 왔지. 신선의 힘을 떨어트리기 위해서였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선택을 받은 곳이 금씨 가문이었지. 이야기는 여기까지일세.”
금채홍의 가문이다.
천일영은 머리가 더욱 복잡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직 도달하지 못한 이야기가 분명히 있었다.
숨기는 것이 있다고 생각한 천일영이 문목화가 했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한 수를 두었다.
“이야기를 들으니 신선이 한동안 영약을 찾으러 오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뭔가 아시는 것이 있으십니까.”
“뭐라? 자네가 그것을 어찌 아는가!”
“아직 모든 것을 알려 주시지 않은 듯하니 저도 입을 다물겠습니다.”
“하하하. 역시 소문대로 천마의 머리는 비상하구먼.”
무진이 자신의 이마를 ‘탁’ 치며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이 늙은 여우는 역시 아직 숨기는 것이 있었다.
“오십 년 전. 그때의 일을 말해 주십시오. 그리해 주시면 제가 아는 것도 말씀드리겠습니다.”
“지천번회의 일이구먼. 계는 영약을 키우는 일족을 계속 죽여 왔었기 때문에 신선의 힘이 약해졌을 거로 생각했네. 수천 년에 걸쳐 계속해 온 일이었으니까. 그리고 때가 이르렀다고 생각한 계는 순진한 여자를 한 명 속였지. 심신이 지치고 망가진 여자였는데 그녀에게 새로운 세상을 약속하고 신선에게 빼앗긴 것을 같이 찾자고 했지. 계는 여자에게 살육이 없고 평화만 있는 곳을 보여 주겠다고 했네. 순진한 여자는 그것만 믿고 무인 삼천 명을 모았지. 그리고 계가 알려 준 선계로 통하는 길로 갔다네.”
“선계로 통하는 길?”
“청해성의 곤륜산에 길이 있지. 아무튼 계의 무인 일만 명, 그리고 지천번회의 삼천 명이 신선과 싸움을 벌였네. 싸움은 격해지고 결국 지천번회와 계의 무인들은 지상으로 다시 쫓겨났지. 신선들이 도망가는 그들을 쫓아 선계에서 내려왔는데 그것이 함정이었다네. 그들은 신선을 역공하고 몇몇을 죽이는 데까지 성공하지.”
“지천번화와 계의 무인들이 그 정도로 강했습니까?!”
“영약과 여러 가지 술법으로 육체를 강화한 사람들이었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상한 진법을 사용해서 신선들에게 금제를 걸고 힘을 쓰지 못하게 만든 게 주요했네. 하지만 신선이 인간을 우습게 본 것처럼, 그들 또한 신선을 우습게 본 것이지. 싸움은 격렬했지만, 결국 지천번회의 삼천 명은 몰살당했고 계의 무인도 일만 명이 모두 죽었네. 그리고 계는 신선에게 심장을 빼앗겼지.”
“심장을? 그렇다면 계는 죽었어야 합니다.”
거듭되는 믿기지 않는 이야기에 천일영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나는 죽은 사람들과 싸우는 것인가? 아니, 그게 가능할 리가!’
여간해서는 떨리지 않는 천일영의 손마디가 작게나마 경련을 일으켰다.
그만큼 놀랐다.
“신선은 죽을 지경에 몰리면서도 계를 처단했지만, 그는 영약의 힘과 술법으로 살아남았다네. 분명 그때는 죽었다고 신선들도 생각했을 것이야. 계가 혈투에서 진 다음, 신선들이 아버지 하우의 심장을 찾았는데도 움직이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지금 계는 심장이 없으면서도 오십 년째 멀쩡하지. 아버지 우의 심장이 지금까지 뛰는 것처럼 말일세.”
“거짓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만 선뜻 받아들이기도 어려운 이야기군요.”
“이번에는 내가 묻지. 천마께서는 신선들이 한동안 영약을 찾으러 오지 않았다는 것을 어찌 아는가. 오십 년 전의 싸움으로 신선들은 피폐해지고 다친 자들도 많았네. 선계 역시 발칵 뒤집힌 것이지. 그래서 영약을 찾으러 가지도 못했네. 그런데 그것을 알고 있다니?”
부드러운 듯 들리지만, 속에는 냉철함이 가득 담긴 무진의 목소리에 천일영은 잠시 망설였다.
이야기해도 좋을까 해서다.
‘채홍이는 소중한 사람이다. 혹시 잘못되기라도 하면 안 되는 일.’
천일영에게는 동생 천이영과 조카 혜령만큼이나 지키고 싶은 사람이다.
섣불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난감한 표정을 드러낸 천일영이 입을 다물자 무진은 웃음을 지었다.
“신중한 성격이구먼. 자세히는 이야기하지 않아도 되네. 내가 천마를 믿게 하기만 하면 되는 일일세.”
“아직 저를 믿지 않으시는군요.”
“자네도 나를 믿지 못하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일세.”
천일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진을 믿지 않았다.
아직 그에게는 가장 의심이 가는 부분이 남아 있었다.
그것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채홍이의 존재를 숨기는 것이 마땅하다.
하지만 천일영은 입을 열기로 했다.
이것이 일의 모든 것을 알아낼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니까.
“제가 금씨 가문의 마지막 후예를 데리고 있습니다. 그것을 알게 된 것은 거둔 다음이었지만요.”
무진의 눈이 커졌다.
생각할수록 이상한 인연이었다.
무진도 몸을 움직일 수 있었던 십몇 년 전까지만 해도 애타게 금씨 가문을 찾지 않았던가.
마지막 희망이었기에 그는 매일같이 노숙하면서도 중원의 온 산을 돌아다녔다.
원래 있어야 했을 곤륜산맥에는 금씨 가문이 없었으니까.
오십 년 전에 청해성에서 벌어진 신선과 혈천회의 싸움 때문에, 금씨 가문이 거처를 황산으로 옮긴 것을 몰랐던 무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천마께서는 혹 그 아이에게 무공을 가르치고 있는가?”
“그렇습니다.”
“하하…… 하하하핫. 이것 참 재미있는 일일세. 그래서 그 아이의 성품은 어떠한가.”
“조금 바보 같지만 올곧고 선한 아이입니다.”
“잘됐구먼. 천마께서는 그 아이를 열심히 가르치게. 아니지. 내가 나중에 도움을 줘야겠구먼. 그 아이는 빠르게 생사경에 들어설걸세. 태고의 신선이 나눠 준 피는 그만큼의 능력을 준다네.”
“어르신, 생사경의 경지가 지고하기 이를 데 없는데 신선이 피를 나눠 주었다는 것만으로 도달한다는 말입니까. 도대체 태고의 신선은 어떤 존재입니까.”
“신선의 정점일세. 신선이 존재하기 전부터 계셨던 분이시지.”
“그래서 혈천회는 태고의 신선이 가진 피를 되찾으려고 한 것이군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능력이네. 그분의 피를 이어받은 아이는 진정으로 천만금의 보석조차 빛을 퇴색하게 만드는 진정한 보물일세. 그 아이를 잘 지키게나.”
무진의 진중한 말은 천일영의 놀란 표정을 현실로 돌아오게 했다.
‘맹한 채홍이가 그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었단 말인가.’
믿기지 않았다.
무진의 말보다 더 믿기지 않는 것이 채홍이가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자신의 능력에 대해서 그렇게까지 모를 수 있을까.
금채홍이 바보인 게 확실해지는 순간이기는 하지만 천일영은 안도의 한숨부터 내쉬었다.
‘어찌 보면 다행이다. 혈천회의 계는 아미파의 속가제자 중에서 특이한 체질을 찾았지만, 오히려 그 덕에 채홍이의 혈통을 몰라봤다. 그리고 우연히 사혈련이 영약 밭을 건드리며 일족이 모두 죽었으니 채홍이는 완벽하게 계의 눈을 가리고 숨은 것과 마찬가지!’
모든 이야기가 물리며 하나로 이어졌다.
마지막 하나만 빼고.
천일영은 숨을 들이켜고 무진을 바라봤다.
“이제 마지막 질문입니다.”
“나도 마지막으로 대답하지. 서로 주고받을 것은 전부 나눈 것 같으니.”
“무진께서는 누구십니까. 오래전인 하우와 하계의 이야기를 모두 아시는 것뿐만 아니라, 그간의 모든 일을 상세하게 알고 계신 것은 불가능한 일일 터. 그 연유를 말씀해 주십시오.”
날카롭게 빛나는 눈 속에 숨은 의심의 빛이 무진에게도 보였다.
천일영은 지금 무진이 원래는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는 것이었다.
끝까지 무진을 믿지 않고 있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였다.
무진은 허탈한 한숨을 내쉬었다.
“천마께서 머리가 좋다는 것을 내가 또 잠시 잊고 있었던 모양이군. 이런 질문을 할 줄은 몰랐다네.”
“무진께서는 오십 년 전 종남파에 갑자기 나타났다고 들었습니다. 종남파의 무공을 모두 알고 있는 채로 말입니다.”
“거기까지 알고 있으면 더는 숨기는 것도 무리겠지.”
잠시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겼던 무진은 이내 천일영을 바라봤다.
“나는 신선일세. 아니, 신선이었던 자라고 해야겠군. 오십 년 전 지천번회와 혈천회의 싸움에서 지상까지 내려왔었네. 그리고 금제에 걸려 다시 선계로 돌아가지 못하고 지상에 남은 거라네. 나와 또 한 명. 우린 지금도 중원에서 살아가고 있지. 놈은 나를 살려 보겠다고 금제가 걸린 몸으로 중원에서 영약을 찾아다니고 있지만.”
“……!”
천일영의 눈매에 서렸던 의심이 빛이 확신의 광채를 띠었다.
혹시 하고 생각은 했었지만.
‘설마 신선이었다니!’
탈마의 경지에 올랐는데도 어째서 혈천회를 상대하지 말고 도망가라고 했는지 천일영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는 분명 생사경의 경지였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