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8화
다음 날 예랑을 데리고 연무장에 올라서자 처참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천일영은 수련을 할 때 죽을 지경으로 바닥을 구를 때면 그냥 내버려 두는 편이었다.
아주 잠깐만이라도 쉬라는 배려였다.
하지만 이곳의 광경은 전혀 달랐다.
“빨리 안 일어나?”
“살려 주세요!”
“죽이기 전에 일어나!”
후웅!
빠악!
금채홍의 엉덩이로 남궁무애가 든 검면이 내리꽂혔다.
“꺄아아아악!”
“앞으로 빨리 일어나지 않으면 두 대씩 때릴 거야.”
남궁무애는 언뜻 봐도 내공을 가득 실은 검면으로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때렸다.
개중에 어떤 무인들은 효율을 생각하여 쉴 때와 무공 수련하는 시간을 철저히 배분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제대로 수련시키고 있구나. 사경을 헤매야 깨달음을 얻을 테니 이런 부분에서는 가은이가 나보다 훨씬 나은 듯하군.”
“그건 내가 피도 눈물도 없는 여자라는 말처럼 들리는데?”
“하하하. 조금은 매정한 척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수련을 잘 시킨다는 말일 뿐이다. 그런데 가은아, 저 녀석은 왜 여기에 있는 것이냐.”
아픈 엉덩이를 문지르며 검을 휘두르고 있는 금채홍의 곁에 있는 또 한 사람의 여인.
백유화다.
원래 체구가 작아서 검도 그에 맞춘 것을 사용해야 하는데, 난데없이 커다란 도(刀)를 들고 땀을 흘리는 모습에는 의아한 마음이 들 수밖에 없었다.
물이 흐르는 듯 자연스럽게 도를 휘두르는 모습에는 감탄도 나왔다.
원래 검과 강선을 같이 쓰는 무공을 만든 백유화이니만큼 도에도 익숙한 것처럼 보였다.
그 순간.
후웅.
뻐어어어억!
남궁무애가 검면으로 백유화의 머리를 강타했다.
곁에서 무공을 수련하던 다른 사람들은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어 보이는 백유화가 맞은 것에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냥 무서웠다.
죽을 만큼 세게 때리기도 했고, 여인의 무자비한 행동에는 오금이 저렸으니까.
현경의 무인이 내공을 가득 담아 때린 만큼 백유화가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아아악! 내 대가리!”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 도를 휘두르는 동안 기가 흐트러지잖아. 몸에 두른 호신강기가 완벽한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고 했는데! 도법을 펼치는 동안 허리와 다리에 두른 호신강기가 조금 약해지잖아.”
“그러니까 연습을 해야지! 처음부터 잘될 리가 없잖아! 이 귀신 같은 여자야! 꺄으으윽. 내 두개골! 아무래도 쪼개진 것 같아. 크흑!”
“화경에 올랐는데 처음부터 잘해야지! 암튼 다시 해. 그리고 두개골은 멀쩡해!”
“지 대가리 아니라고 말하는 것 좀 봐. 끄아아아으으으읍!”
그때 바닥에서 구르다가, 몸을 일으키는 백유화의 어깨에 두른 호신강기가 살짝 일렁거렸다.
후웅.
빠아아아악!
다시 한번 내리꽂히는 남궁무애의 검면.
“꺄아아아악! 때린 데 또 때리지 마! 대가리 진짜 쪼개진단 말이다!”
“오늘은 온종일 거기만 때릴 거야. 맞기 싫으면 잘하든가.”
“아아아악! 분해! 분하다고!”
화가 나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바닥에서 파닥거리는 백유화를 잠시 보던 남궁무애는 빨리 일어나라는 표현으로 또다시 검면을 날렸다.
그것도 여러 번.
빠악. 뻐억. 퍼억.
“꺄악. 끄악. 캐액!”
결국 백유화는 죽도록 얻어맞고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표정이었다.
천일영은 흉신악살(凶神惡煞) 같은 행동을 인자한 표정으로 저지르고 있는 남궁무애에게 전음을 보냈다.
[유화도 가르치는 것이냐?]
[안 배우겠다고 버티는 걸 끌고 왔어. 내 맘대로 굴리는 중이야.]
[유화는 빠르게 깨달음을 얻고 화경에 올랐다. 그 누구보다 무재가 뛰어난 아이다.]
[응, 그래서야. 저런 무재라면 현경에 들어서야지.]
[그런 거라면 맡기마. 진짜 죽이지는 말고.]
[노력해 볼게.]
화경에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힘 조절이 힘든 백유화에게 안정된 기운을 가르치는 모양이다.
천일영은 남궁무애가 백유화에게 일부러 큰 도를 쥐여 준 이유를 눈치챘다.
작은 체구에 도법을 펼치다 보면 기다란 도가 땅에 닿을까 해서 신경을 쓰게 되고, 그때마다 호신강기가 흐트러지면 주의를 시키면서 기운을 안정시키는 것이었다.
주의를 시키는 방법이 죽도록 때리는 것이라 좀 그렇기는 하지만.
‘현경에 오른 무인이라고 할지라도 온몸에 두른 호신강기를 완벽하게 동일한 상태로 유지하는 것은 힘든데, 역시 남궁무애라고나 할까. 그것부터 가르치다니. 겸사겸사 유화가 도법도 배울 테고.’
생각했던 것보다 수련은 훌륭했다.
둘 이외에도 연무장에서 구르고 있는 천량도사와 도철용, 그리고 건청과 차경철에게 눈을 한 번씩 마주쳐 주고는 인사를 했다.
서하린에게도 눈을 마주치고 웃어 주었다.
더는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잘 가르치는 사람이 있으니 방해하지 않고 예랑과 별유천지로 내려오는 길.
이제 종남파로 떠나려고 했는데, 때마침 기감에 만나고 싶지 않은 인물이 느껴졌다.
그냥 갈까 말까를 잠시 고민하던 천일영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생각나서 별유천지를 지나 유의선과 황태자 앞에 섰다.
순간 나타난 천일영의 신형에 황태자가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허억! 뭐냐! 만나러 가고 있는데 언제 나타난 거냐.”
“혈천회를 찾겠다고 큰소리치고 나간 이후 소식이 없길래 어찌 됐는지 궁금해서 만나러 왔다.”
“크흠! 그놈들은 아직 찾는 중이다. 금세 찾을 테니 거…… 걱정하지 말아라.”
“설마 아무런 단서도 못 찾은 것은 아니겠지?”
“아니! 차…… 찾았다. 조금 더 확실해지면 그때 말해 주려고 했을 뿐이다.”
“그렇군.”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면서 시선을 피하는 황태자에게는 한숨만 나왔다.
그 많은 황실의 인맥과 무인을 사용해도 꼬리조차 잡지 못하다니.
무능력의 표상과 같은 녀석 같으니.
‘뭐 그럴 줄 알고 있었지만.’
천일영은 슬금슬금 눈치를 보는 황태자에게서 나는 향을 맡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옷은 보통의 백성처럼 입었다만 이 향은 무엇이냐.”
“향? 아! 이건 사향(麝香)이다. 아무래도 시장통이나 골목에서 나는 냄새에는 익숙하지 않아서 말이다.”
“누가 사향의 향인지 모르느냐. 전에는 화려한 옷을 입고 다니더니 이제는 사향? 이 귀하고 비싼 것을 싸구려 옷에 뿌리고 다니면 몰래 민심을 보러 나온 황태자니까 죽여 달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아, 정말로 대명국은 괜찮은 것이냐? 이런 게 황태자라니.”
“네! 네놈이 또! 감히 황태자인 나에게 막말을 일삼다니!”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손가락질을 하는 황태자의 얼굴에는 수치심이 가득 차올랐다.
그러든 말든 천일영은 황태자의 앞에서 대놓고 큰 한숨을 내쉬었다.
“나에게 볼일이 있는 모양인데 무슨 일이냐.”
“크흠! 황제 폐하께 이야기를 들어 보니 네놈이 천마신교와 거래를 하여 혈천회의 위치를 찾으려는 것 같더군. 신용을 위해서 황실과 거래 품목을 늘리려는 것 같아서 황태자 전용 물품도 넣으라는 말을 하려고 했다. 내가 쓰는 물건을 전담해서 넣는다고 하면 상단 사이에서는 크게 소문이 돌 거다.”
“나쁜 머리에서 제법 좋은 생각이 떠올랐군. 오늘은 비가 오려나?”
“크윽! 네놈은 정말로 말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뭐, 네놈이 나를 보는 시선은 잘 알고 있고, 내가 철딱서니 없는 황태자인 건 안다.”
“진짜 비가 올 모양이군. 평소 황태자에게서 나올 만한 말이 아닌데.”
표정의 변화도 없이 신랄한 말을 내뱉는 천일영의 모습에 황태자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지만, 그는 이내 마음을 안정시키고 다시 입을 열었다.
“젠장, 나도 대명국을 걱정하는 마음만큼은 황제 폐하에게 뒤지지 않는다는 것만 말하고 싶었다. 마침 가야 할 일도 있었으니 일단 나는 북경으로 돌아가서 물품의 목록을 작성하도록 하지.”
“아니, 돌아가지 말아라. 지금 가면 위험할 수도 있다.”
“위험? 누가? 내가?”
황태자의 신분인데 황자로서 활동하고 있는 그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은 극히 적었다.
게다가 상시 보이지 않는 곳에서 호위 무인 열 명이 지키고 있다.
그런데 위험하다고?
황태자가 멀뚱한 표정을 짓자.
천일영의 입에서 나오는 한숨이 황태자의 얼굴을 가득 덮었다.
“전에 했던 이야기를 기억하느냐? 내가 너를 죽이는 방법 말이다.”
“그 괘씸한 이야기라면 기억난다. 정1품의 관리들을 전부 죽이면 대명국에 일 년간의 혼란이 일어나고, 그 틈을 타서 나를 죽이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라는 발칙한 이야기를 했었지.”
“딱 그것이 지금의 혈천회에서 쓸 법한 방법이다. 놈들은 지금 궁지에 몰린 상태니까.”
“……!”
황태자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
그 모습이 다행스럽게 느껴지기는 했다.
말의 뜻을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멍청한 황태자는 아니라서.
“당장 북경으로 돌아간다. 승선포정사사는 최대한 빠르게 가는 방법을 마련하라! 황제 폐하께서 위험하시다.”
“가지 말라는 말을 듣기는 한 것이냐.”
“이런 때일수록 가야 한단 말이다. 어찌 아버지가 위험한 것을 아는데도 자식인 나에게 가만히 있으라는 것이냐. 말릴 생각은 하지 말아라. 내 네놈이 막말하는 것까지는 봐줘도 내 몸에 손을 대면서까지 말리는 것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나도 황태자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이 섣부른 행동인 것은 알고 있다.”
“……?”
의외로 순순히 천일영이 수긍하자 황태자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놈이 이렇게 고분고분할 리가 없는데.
그때 천일영이 황태자를 보며 씨익 웃었다.
“예랑아, 물어.”
“컹컹.”
주변에 호위 무인이 있다 해도 코앞에 있었던 예랑이 달려드는 것을 막아 내는 것을 무리.
황태자가 비명을 질렀다.
“아아악. 아파! 아프다!”
예랑이 황태자의 엉덩이를 잘근잘근 씹었다.
그렇지 않아도 커다란 덩치만큼 큰 이빨을 가지고 있으니, 그것이 엉덩이에 박혀 들어갈 때마다 황태자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천일영은 엉덩이를 내주고 바닥을 기는 황태자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놈들은 바보가 아니다. 황제의 곁에는 백 명이 넘는 고수뿐만 아니라 수많은 기관 장치가 있다. 무공의 신위가 높은 금군도 있고 금의위도 있지. 위험을 감수하고 실패할 위험이 큰 황제를 죽이려 드느니 정1품의 고위 관리와 창위를 노릴 거다. 황실을 마비시키는 것이 목적이니까. 그런데 그곳에 네가 있다고 생각해 봐라. 가장 우선하여 죽이는 건 바로 네놈이다.”
“크윽! 그 말은!”
“겨우 십여 명의 호위 무인을 데리고 황실에 있느니, 차라리 여기에 있는 게 도와주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혈천회가 황실을 노릴지 확실하지도 않고.”
“알았다! 알았으니까 이 늑대부터 떨어트려 다오!”
“반 각 후에. 말을 듣지 않은 벌이다.”
천일영은 말캉말캉한 엉덩잇살을 만족스럽게 물고 있는 예랑을 내버려 뒀다.
호위 무인들도 천일영의 무공을 알기에 함부로 나서지 못했다.
그런데.
“예랑아! 사람을 물면 안 돼!”
“컹컹.”
혜령이 학당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 광경을 봐 버리고 말았다.
예랑이 고개를 들고 멈칫하자 혜령이 예랑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진정시키다가 황태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오빠야? 괜찮아요? 많이 아파요?”
“젠장!”
탁!
혜령이 내민 손을 거칠게 때린 황태자가 엉덩이를 문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감히 어디라고 더러운 손을 내밀어? 내가 누군지 아느냐! 정녕 죽고 싶은 것이냐!”
“어? 흐흑.”
혜령이 놀란 눈을 하며 급히 몸을 물렀다.
도와주려고 한 건데.
오빠야를 살려 주려고 한 건데.
서운한 감정이 몰려들어 눈물을 터트리려는 혜령을 보고 천일영이 화가 나서 황태자에게 다른 벌을 주려는 순간.
혜령의 입에서 울먹거리는 목소리가 나왔다.
“예랑아, 물어.”
“컹컹.”
“아아아악!”
예랑이 다시 황태자를 덮쳤다.
오른쪽 엉덩이만 내줬으면 됐을 것을, 왼쪽 엉덩이까지 내준 황태자가 끓어오르는 듯한 비명을 토했다.
“꼬! 꼬마야! 내가 잘못했다. 이 늑대 좀 치워 다오!”
“치워 드리기는 할 건데 오빠야는 벌이 필요한 거 같아요. 훈장님이 사람은 서로 도와 가며 살아가는 거라고 했는데 오빠야는 그러지 못했으니까 반 시진 후에 예랑이를 데리고 갈게요.”
“끄헉? 반 시진?”
혜령의 말에 황태자의 동공이 흔들렸다.
누가 천이영의 딸이 아니랄까 봐 혜령은 착하면서도 화가 나면 무서워지는 제 어미의 성격을 쏙 빼닮았고.
정말로 황태자는 혜령의 말대로 반 시진 동안 비명을 질러야만 했다.
엉덩이가 걸레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