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2화 (152/212)

‘GM이라고……?’

일순 사고가 정지했다.

머리 위에 떠 있는 이름표를 보니, 제작자라는 말이 거짓은 아닌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처음 보는 이름인 것을 차치하더라도, 어떻게 제작자가 게임 속에 직접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지…….

‘참. 나도 NPC였지.’

문득 든 의문은 금방 사그라들었다.

제작자든 일개 헬퍼든. 어차피 베타 버전이니, 개인이 캐릭터를 만들어 플레이하는 것은 자유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의심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지금 서버 막아둬서 아무도 접속 못 할 텐데.”

로그인이 가능했더라면, 제작자들이 아무 말도 안 했을 리 없었다.

게다가 지금까지 보아온 극성스러운 반응들을 고려했을 때 그놈들이 제일 먼저 로그인하여 직관했을 것이다.

“호오, 그런가?”

여전히 경계심 가득한 내 날 선 반응에도, 남자는 그저 새로운 사실 하나를 알았다는 듯 태평하게 반응했다.

‘그런가……?’

그 탓에 의심이 가중된 나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연신 캐물었다.

“당신도 버그 때문에 갇혔어? 그런데 GM이라면서 왜 채팅창에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지?”

“쯧쯧, 그 치들은 아직도 열일 중이군. 적당히 하며 살 것이지…… 참고로 열심히 일하다의 줄임말이라네.”

“뭔 헛소리야. 어떻게 접속했냐니까?”

“하하하. 그대 설마 ‘열일’을 모르는가? 이런, 이런. 나의 이 시대를 초월한 트렌디함이란……”

‘안 되겠다, 저 새끼.’

어투와 생김새는 전혀 달랐지만, 낯익은 초록 머리와 정신 나간 듯 지껄이는 남자는 누군가를 연상케 했다.

자꾸만 헛소리를 하는 것을 보니, 일단 몇 대 패고 시작해야 할 듯싶었다.

GM이건 뭐건, 어쨌든 내 눈앞에 버젓이 나타났으니 허깨비는 아닐 거 아닌가?

안 그래도 제작자들 패 죽이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잘됐다.

“…….”

스컹―.

나는 말 없이 바닥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쳐 있던 카셀의 검을 주워들었다.

“필…….”

“지, 진정하게, 용사여……!”

이어서 나지막이 스킬을 외울 즈음.

내 낌새를 눈치챘는지, 그제야 놈이 제대로 된 답 비슷한 것을 내뱉었다.

“그대가 보고 있는 나는 실체가 아닐세. 그저 남아 있는 흔적에 불과하달까.”

물음에 대한 대답을 들었지만, 나는 그 대답이 무슨 의미인지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검을 고쳐 들며 음산하게 되물었다.

“뭔 헛소리냐고 두 번 물었다.”

“잘 보게.”

남자가 두 팔을 양옆으로 펼쳐 보이며 내 앞으로 한 걸음 훌쩍 걸어 나왔다.

주춤 물러서며 경계 태세를 갖추던 나는, 환한 불빛 아래 드러난 그의 모습을 보고 당황했다.

“어…….”

그림자 진 곳에 있을 땐 미처 알지 못했다.

밝은 불 아래 선 남자는, 동굴이란 장소에서 마주치기엔 몹시 휘황찬란한 차림새였다.

영롱한 빛을 내는 의복과 장식, 머리 위에 쓴 처음 보는 왕관이 무척 돋보였다.

사슴의 뿔처럼 삐죽삐죽 위로 솟은 왕관이 태양처럼 남자의 얼굴을 둥글게 감싸서 귀가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근엄한 목소리가 아니었더라면, 여자라고 의심할 정도로 중성적이고 아름다운 외모였다.

‘물론 나보단 덜하지만.’

남자를 유심히 살피던 나는, 문득 깨달은 사실에 눈을 크게 떴다.

그의 몸이, 반투명했다. 마치 유령처럼.

빛이 남자의 몸을 그대로 투과하여 맞은편 동굴 벽을 비추었다.

남자의 상태는 한눈에 봐도 제대로 된 접속 상태가 아니었다.

“이제 무슨 소린지 알겠지? 나란 존재는 이해하기 쉽게 말하자면, 음…….”

단어가 기억이 나지 않는지, 남자가 턱을 쓰다듬으며 말끝을 흐렸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검을 든 손을 들어 놈의 팔 주변을 칼끝으로 툭 건드렸다.

“이게 무슨, 무엄하도다!”

그러자 그대로 칼이 통과하면서 남자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너른 마음을 먹고 진실을 알려주고 있건만, 그런 저주받은 철의 산물로 짐을 공격하려 하다니!”

놈은 내게 찔린 팔을 소중히 감싸 안으며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콘셉트 한번 지독하네…….’

아까 몇 대 팰까 싶었을 때도 그렇고, 자신이 생성한 캐릭터를 소중히 여기는 ‘오타쿠’인 듯했다.

물론 그건 나 또한 만만치 않았으므로, 이해하지 못할 건 아니었다.

“……진짠가 해서.”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머쓱하게 대꾸했다.

그러자 노기를 조금씩 가라앉히던 남자가 별안간 번뜩 손뼉을 치며 말했다.

“아! 그렇지. 이제 생각났군! 본좌는 이스터에그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지.”

“이스터에그……?”

‘이스터에그’란 게임 개발자가 게임에 재미로 숨겨놓은 메시지나 기능을 말한다.

그러나 나는 생경한 단어를 들은 것처럼 멍하니 그 말을 반복했다.

“그래. ‘열일’처럼 무슨 뜻인지 설명해줘야 하는 것은 아니겠지?”

남자가 거만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그에 욱하는 마음이 치솟았다.

“이스터에그를 누가 이딴 식으로 숨겨 놔!”

보통 이스터에그는 게임 플레이와 전혀 관계없는 게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나는 개고생을 하며 키메라랑 싸우다가, 절체절명의 순간에 히든 루트랍시고 반강제로 끌려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보통 이스터에그는 간단한 메시지나 소품 같은 것에 불과한데, 이렇게 정교하게 AI로 만든 데이터를 남겨두는 건 또 뭐란 말인가.

“그리고, 다른 제작자들은 전혀 모르는 것 같던데, 이게 말이 돼?!”

이곳에 히든 루트나 뭔가 숨겨진 게 있었더라면 제작자들이 조금이라도 언질을 줬을 것이다.

힘내라든지, 내가 돌발 행동을 해서 변칙이 생겼다든지와 같은 변명 혹은 내 탓을 먼저 했을 거란 말이다.

하지만 마지막에 채팅할 때까지만 해도, 그들은 그저 원래대로 진행되고 있다는 말만 했을 뿐, 별다른 말은 없었다.

‘……설마.’

거기까지 생각하던 나는 문득 드는 위화감에 번뜩 고개를 내렸다.

발치에 카셀의 검과 같이 아무렇게나 벗어 내팽개쳐 뒀던 [산소마스크]가 눈에 들어왔다.

‘이게…… 언질?’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남자가 내가 느낀 섬뜩한 위화감을 부정했다.

“그 치들은 아마 내 흔적이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모를 걸세.”

“…….”

“이것을 남길 즈음, 나는…….”

불현듯 남자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제작자나 운영진 중에 죽은 사람이 있단 소리는 못 들었는데.’

나는 남자의 얼굴을 보면서 속으로 회사 다니던 때를 떠올렸다.

버그를 고치다가 미쳐서 입원한 사람이 있다는 흉흉한 소문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실제로 이 미친 버그 망겜에 갇혀 있어 보니, 과로로 죽은 사람 한 명 정도는 있을지 모른다는 합리적인 판단이 들었다.

나는 덩달아 숙연한 마음이 되어 입을 열었다.

“유감입니…….”

“퇴사했거든.”

“미친.”

돌아오는 답에 나도 모르게 욕이 저절로 튀어 나가 버렸다.

비밀스럽게 이스터에그를 심어 놓고 퇴사해 버린 인간이라.

보통 미친놈이 아니겠단 생각이 들면서, 번뜩 풀렸던 경계심이 되살아났다.

그러는 사이 남자가 빠르게 화제를 전환했다.

“아무튼, 대충 설명은 끝난 것 같으니 빨리빨리 진행하도록 하지. 여기까지 온 것을 보면 그대도 무척 바쁠 테니 말이야.”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난 대체 언제 이 호수를 빠져나가고, 이 미친 게임은 대체 어디로 흘러가는 거냐고.

이러다 진짜 엔딩을 볼 수는 있는 거냐고.

아직 묻고 싶은 게 한가득이었다.

하지만, 진짜 인간이 접속한 것도 아니고.

그저 데이터 쪼가리에 불과한 것에게 더 묻는 것도 무의미했다.

‘빨리 숨겨둔 메시지인지 뭔지나 보고 나가자.’

보아하니 그것을 봐야만 히든 루트를 완료하고 이곳에서 나갈 수 있는 듯했다.

그런 생각으로 앞서가는 남자의 뒤를 바로 뒤따라 걷는데, 문득 그가 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다.

“안 챙기나?”

“……뭘요?”

“뭐긴! 그대가 찐하게 입 맞춘 그대의 왕자 말이야!”

어리둥절한 내 얼굴을 본 남자가 내 뒤편을 손가락질했다.

그것에 덩달아 뒤를 돌아본 나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한 카셀을 발견했다.

“키스를 해줬는데도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다니. 쯧쯧, 나약한 놈인 듯.”

남자가 혀를 차며 괴상한 말투로 덧붙였다.

왜인지 얼굴이 화끈거리며 열이 올랐다.

나는 괜스레 가슴 한편이 쿡쿡 찔리는 느낌에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저기 포션 병 안 보여요? 그런 거 아니에요. 그리고 유저는 저니까, 저만 확인하면 되지 뭘 저놈까지 데려가요.”

“그럴 수야 없지. 연인을 그렇게 매정하게 내팽개쳐야 쓰나? 차도녀인가 보군.”

“으느르그으!(아니라고요!)”

“여긴 물 근처라 온도가 무척 낮은 편이라네. 저렇게 그냥 내팽개쳐 뒀다간 저체온증으로 사망할 테지. 그럼 엔딩을 보지 못할 텐데 괜찮겠나?”

“……아오!”

카셀 놈은 두고 가고 싶지만, 남자의 말도 나름 일리가 있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투덜거리며 카셀에게 다가갔다.

「[황태자 카셀 루크비히]는 현재 상태 이상으로 움직일 수 없습니다.」

포션으로 긴급 처방해 둔 덕분인지 얼굴은 훨씬 나아졌으나, 그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포션 중독이란 게 이토록이나 지독하고 위험한 병이었다.

‘에휴. 그러니까 제때 좀 치료받지, 이 등신…….’

호수에 빠지기 전 황제가 했던 말을 떠올리면,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한 것이 온전히 카셀의 잘못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다른 방도조차 찾지 않고 본인을 방치하기만 한 놈이 답답한 건 매한가지였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그가 착용하고 있는 갑옷을 하나씩 벗겼다.

어차피 키메라에게 물린 탓에 반쯤 부서져 있어 못쓰게 된 데다, 끌고 가려면 조금이라도 무게를 덜어야만 했다.

“아니, 뭘 이렇게 중무장을 한 거야?”

견갑, 건틀릿, 군화까지.

끝도 없는 아이템들을 하나씩 벗기는데, 불만이 절로 새어 나왔다.

황궁이면 그래도 제가 나고 자란 집이나 다름없는데.

오밤중에 제 아버지를 상대하기 위하여 이렇게 단단히 무장을 하고 나온 남주 놈이 황당하면서도, 조금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제작자 잘못 만나서 이 무슨 박복한 팔자란 말인가.

카셀의 갑옷을 모두 벗기자 비록 물에 젖었지만, 한결 가벼운 옷차림이 되었다.

나는 여전히 미동 없는 그의 파리한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이윽고 주섬주섬 겉에 걸치고 있던 후드를 벗었다.

내가 쓰는 ‘섬멸’ 스킬은 나에게만 파워 드라이기지, 다른 사람에겐 살벌한 공격이었다.

때문에 한참 전에 ‘섬멸’ 스킬을 써서 몸을 말린 나와는 달리 카셀은 비 맞은 생쥐 꼴이었다.

‘몸도 성치 않은데 저체온증으로 어이없이 죽으면 안 되지.’

선심 한번 크게 쓴 나는, 바싹 마른 후드를 그의 몸에 휘둘렀다.

“휘휴~”

옷깃을 여며주고 있는데, 문득 뒤에서 능글맞은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사랑하는 연인을 위해 옷까지 벗어주길 마다하지 않는 희생과 헌신이라…… 이 얼마나 아름다운 광경이란 말인가!”

“닥치세요.”

저거 그냥 몇 대 패고 갈까?

폭력적인 상상을 하던 나는, 칼이 통과하는 놈의 몸뚱이를 떠올리고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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