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보다 연인을 거칠게 다루는 편이군.”
앞서 걷던 초록 머리 남자가 흘끔 나를 돌아보며 지껄였다.
지익, 직―
그 뒤에 있던 나는, 카셀의 양다리를 잡고 질질 끌고 가고 있는 중이었다.
덜컹, 쿵!
때마침 동굴 바닥에 솟은 턱을 지나는 바람에 누워 있던 카셀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뒤통수가 제법 큰 소리를 내며 땅에 부딪히는 것을 본 남자가 눈살을 찌푸리며 몸을 한 차례 떨었다.
“어우!”
정작 당사자는 찍소리도 않고 기절해 있는데, 왜 자기가 대신 아픈 척을 해?
어처구니가 없어서 나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도와줄 거 아니면 입 좀 다물죠?”
“하핫, 도와주고 싶지만 몸이 이런지라.”
“아오.”
반투명한 상태인 손을 내밀며 얄밉게 어깨를 으쓱이는 꼴에 나는 차오르는 분을 삼켰다.
어째서 이 게임 제작자란 놈들은 하나같이 한 대 쥐어 박고 싶은 콘셉트를 유지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다 문득, 어느 순간부터 나만 예의를 차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런데 왜 자꾸 반말하세요?”
“허허. 요즘 어린 것들이란 하여튼 예의를 몰라.”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되묻자, 놈이 뻔뻔스럽게 “짐이 그대보다 훨씬 나이가 많다네.” 하고 지껄였다.
실제 나이는 둘째 치고, 젊고 잘생긴 번드르르한 얼굴로 그런 말을 하니 조금 우스웠다.
“세라랑 콘셉트 좀 겹치는 것 같기도 하고…….”
“어헛! 어디서 그 무식한 놈과 이 우아하고 고매한 본좌를 비교하는 것인가!”
혼잣말이었는데 그걸 들은 건지 별안간 놈이 벌컥 화를 냈다.
아까부터 느꼈지만, 다른 제작자들과도 꽤 잘 알고 지낸 사이였던 듯했다.
잘 구슬리면 게임 탈출 후에 놈들을 엿 먹일 수 있는 약점을 캐내는 것도 가능하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 혓바닥을 닭 벼슬처럼 팔락이는 닭대가리 같은 놈……!”
이런 내 음흉한 속도 모르고 홀로 열불을 토해내고 있는 남자를 가볍게 무시한 후 말했다.
“그냥 리르라고 부르면 되죠?”
“뭐 말이냐?”
“닉네임이요. 이상한 별들이랑 섞여서 리르라고 적혀 있는데요.”
“아.”
흘끔 그의 머리 위를 턱짓하며 말하자, 괴상한 이름의 남자, 리르가 일순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그는 이내 약간 침울해진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제 두 손을 들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이 형체도 사라질 때가 다 된 모양이군.”
“데이터가 어떻게 사라져요.”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던 나는 문득 든 깨달음에 덧붙였다.
“아, 서버 초기화하면 그럴 수도 있겠다. 제가 나가서 꼭 얘기할게요. 웬 퇴사한 제작자 중 한 명이 이상한 이스터에그를 심어 두고 갔다고.”
“……쯧쯧, 까마득하게 어린 것이, 심보가 참으로 고약한지고.”
‘그럼 넌 몇 살인데, 새꺄!’ 하고 따져 묻고 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았다.
‘……참자. 미친놈 상대해봤자, 똑같은 미친놈이 될 뿐이야. 나는 지성인이다.’
힘겹게 입을 다물고 묵언 수행을 할 때쯤이었다.
“용사여, 어떤 것이든 영원한 것은 없다네.”
문득 리르가 아득한 허공을 바라보며 회한에 젖은 눈으로 중얼거렸다.
“지금 겪고 있는 고난도 운명 앞에선 모두 찰나의 순간인 것을.”
‘왜 갑자기 혼자 새벽 감성이야?’
나는 뜬금없이 명언을 제조하는 그를 쳐다도 보지 않고 그저 카셀을 끌며 앞서 나아갔다.
“쯧쯧, 저 고얀……!”
뒤에서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로 일관했다.
리르를 따라 끝없이 이어진 동굴을 얼마쯤 걸었을까.
마침내 우리는 막다른 길에 이르렀다.
히든 루트의 배경인 듯, 동굴 암벽에 자그마한 문이 있었다.
리르가 그쪽으로 다가가자 문이 저절로 열리기 시작했다.
끼이이익―
낡은 경첩 소리와 함께 열린 문 안쪽은 온통 컴컴했다.
‘이거…… 맞는 걸까?’
그런데 왜일까.
별거 아닌 낡은 문에 불과한데도, 순간 불안해져서 안으로 들어가는 게 썩 꺼림칙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애써 그런 마음을 내리누르며 끌고 온 카셀의 발목을 고쳐 쥐었다.
이 안에 있는 것이 괴물이든 뭐든.
어차피 빨리 끝내야 여기서 벗어나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그래도 GM 마크를 달고 있는데 설마 유저를 사지로 몰겠어……?’
나는 옆에 있는 리르의 머리 위를 흘끔거렸다.
그런 내 시선에 담긴 불신을 읽었는지 그가 기가 막힌단 표정을 지었다.
“어서 들어가게. 마물 같은 건 없다네. 오히려 키메라랑 싸우는 중에 소환돼서 감사해야 할 상황 아닌가?”
“뭐…… 의심한 건 아닙니다.”
나는 우물쭈물 변명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지익, 직―
덜컹, 쿵!
“어우.”
그 뒤로 문틈에 사정없이 머리를 찧은 카셀과 대신 그 고통을 표현해주는 리르가 따라 들어왔다.
안으로 들어서자 어디선가 촛불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했다.
나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문 안은 조금 전에 걸어온 어두컴컴하고 음습한 동굴 길과 이어진 곳이라곤 믿기지 않을 만큼 광활한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질서정연하게 자리한 책장들, 그리고 그 안에 빽빽하게 꽂혀 있는 수많은 책들.
그 광경은 꼭…….
“……도서관 같잖아?”
“이보게, 용사!”
어리둥절한 채 가만히 서 있는데, 앞서 걸어갔던 리르가 문득 나를 불렀다.
“그대의 연인은 이쪽에다가 좀 눕히게.”
그가 서 있는 도서관 한편엔 벽난로와 카우치 등 편히 책을 읽을 수 있는 아늑한 공간이 존재했다.
마침 카셀에게 필요한 것들이기에 나는 군말 없이 그쪽으로 걸어갔다.
사실 더는 연인이 아니라고 부정하기도 입 아팠다.
나름 미안한 마음을 담아 내내 바닥에 끌려 다니던 남주를 푹신한 카우치에 눕힌 나는 그 옆에 앉아 한시름 내려놓았다.
그리고 리르를 돌아보며 물었다.
“여기가 어디예요?”
“나는 그냥 황궁의 비밀 서고라 부르는 중일세.”
“비밀 서고……?”
“실제로 황궁의 지하에 있기도 하다네.”
황궁에서 벌어지는 퀘스트 중에서 지하를 배경으로 하는 것은 없었다.
심지어 키메라와의 전투 또한 유저는 호수 밖에서 거들 뿐이니, 이곳의 존재를 그 누구도 모를 만했다.
‘제대로 숨겨두고 갔네.’
나는 퇴사 전에 이런 짓을 벌이고 간 미친놈을 아연한 표정으로 응시했다.
그리고, 그걸 꾸역꾸역 찾아내어 들어오게 된 나 또한…….
“……그래서, 이제 뭘 해야 하는데요?”
눈물이 앞을 가려 잠시 침묵하던 나는 이윽고 입을 열었다.
예전에 [헤일리 백작 저]에서 아담의 여동생을 치료했던 것처럼, 여기서도 뭘 찾거나 해결해야 하는 게 아닐까.
빨리 뭘 해야 하는지나 알려달라는 의미로 리르를 빤히 쳐다보는데, 그가 조금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용사여, 좀 둘러보는 시늉이라도 하는 게 어떤가?”
“제가 왜요?”
“여기서 안 나갈 건가?”
“그러니까 뭘 해야 하는지 알려줘야죠.”
“허, 참…… 여기까지 온 몇 없는 용사들 중 그대처럼 이렇게 뻔뻔하고, 날로 먹으려 드는 자는 처음인지고.”
뭐라 하든 상관없었다.
안 그래도 듣도 보도 못한 히든 루트에 진입해서 짜증이 나 죽겠는데, 날로 먹기라도 해야지.
그 와중에 좀 의외인 건, 나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이곳에 들어온 인간들이 또 있긴 한 모양이었다.
‘커뮤니티에 왜 안 올려줬담.’
아마 자기만 알고 있으려는 극소수의 고인물들이거나, 어찌어찌 운 나쁘게 들어오게 된 뉴비일 것이 분명했다.
아무튼 알려주기 전까진 절대 움직이지 않겠다는 의지를 피력하며 그저 앉아 있기만 하자, 리르가 마지못해 내뱉었다.
“이곳을 둘러보고 마음에 드는 책을 한 권 골라오게.”
“왜요?”
“뭘 해야 할지 알려 달라 하지 않았는가? 그게 전부라네.”
“엥…….”
나는 마침내 주어진 임무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책 한 권을 골라 오라고? 그게 끝?’
생각보다 별거 없었다.
이 넓디넓은 공간에서 뭘 찾기라도 하라고 할 줄 알았는데…….
나는 거들떠도 보지 않았던 책장 쪽으로 주춤주춤 다가갔다.
아까는 미처 보지 못했지만, 책장마다 번호가 붙어 있었다.
나는 가장 가까이 있는 ‘202’라 쓰여 있는 책장 라인으로 들어가 책들을 대충 훑어보았다.
“뭐야.”
그런데 황당하게도, 수없이 많은 책이 꽂혀 있는데 책에 제목이 없었다.
게다가 책 표지마저 다 똑같은 검은색으로 되어 있어서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202 책장뿐만 아니라 그 옆의 203도, 204도 똑같았다.
아무리 ‘마음에 드는 책’ 한 권을 골라오라 했다지만, 책들이 모두 다 똑같이 생긴 상황이니 마음에 들고 자시고 할 게 없었다.
‘그냥 아무거나 들고 갈까……?’
일일이 열어보기엔 너무 많지 않은가.
일순 그냥 하나 골라 들고 갈까 하는 마음이 샘솟았다.
그러나 여러 번 이곳을 둘러보라고 강조했던 리르의 말을 되새기니, 그리 쉽게 해결될 것 같지 않았다.
나는 일단 다시 복도로 나와 쭉 걸음을 옮겼다.
리르의 말대로 대충이나마 둘러본 후 책을 가져갈 요량이었다.
‘설마. 이거 뭐, ‘표지가 다른 책을 찾으시오’ 같은 건 아니겠지……?’
다시금 복도로 나와 걸음을 옮기는데, 도서관을 목도 했을 때 느꼈던 불안감이 불쑥 샘솟았다.
만약 정말 그런 거라면 큰일이었다.
‘이 정도면 사막에서 바늘 찾기 수준이잖아……!’
불만스럽게 리르 쪽을 한 번 돌아본 나는, 둘러보는 김에 서고의 가장 끝에 가 보기로 했다.
일일이 매겨진 번호의 끝이 어디까지인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서 못 하겠다고 따지든지 해야지.’
그 생각으로 움직이던 나는 마침내 가장 마지막 책장에 이르렀다.
“308……?”
공교롭게도 책장에 쓰여 있는 번호가 낯이 익었다.
내가 갇히게 된 이 망겜의 최신 베타 버전 숫자.
어느새 아득해진 이 게임의 제목을 떠올린 나는, 새삼스러운 감상으로 책장 모퉁이를 천천히 돌았다.
그리고 마주한 책장은 텅 비어 있었다.
단 한 권을 제외하고.
“뭐지……?”
나는 순식간에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하필 308버전에 갇힌 나와, 하필 308 책장에 꽂힌 단 한 권의 책.
우연치고는 조금 소름 끼치지 않는가.
나는 찝찝함을 숨기지 않은 채 천천히 손을 뻗어 한 권뿐인 책을 집어 올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책은 지금껏 지나쳐 온 여타 책들과 똑같은 표지였다.
“휴…….”
표지에 ‘샤리 아즈라엘 생존기’라고 크게 쓰여 있기라도 했다면 비명을 지르며 불태울 뻔했다.
“기분 탓인지 다른 것보다 좀 더 얇은 것 같기도 하고…….”
괜히 머쓱하게 중얼거리던 나는, 이내 그 책을 가지고 리르가 있는 쪽으로 돌아갔다.
텅 빈 책장과 단 한 권뿐인 책.
왜인지 그가 가져오라는 책이 이것일 거란 강한 확신이 들었다.
‘뭐, 아니어도 상관없지.’
이 책이 마음에 들었다고 우기면 뭐라 할 거란 말인가.
서둘러 리르에게 도착한 나는, 가지고 온 책을 당당히 내밀고 물었다.
“이거, 맞죠?”
확신에 가득 찬 내 물음에 리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보기보단 눈치가 있는 편이었군.”
“칭찬으로 들을게요.”
나는 이를 악물고 웃으며 답했다.
이런 게임 속 미니 게임이야 뻔한 일이었다.
어쨌든 표지는 똑같지만, 뭐가 다르긴 한 책을 찾았으니 퀘스트는 완료다.
이제 나갈 차례를 기다리는데, 별안간 리르가 뜬금없는 말을 했다.
“그럼 그대의 연인 곁에 앉아서 그것을 좀 읽게.”
“네?! 무슨…….”
“읽는 것까지가 ‘퀘완’이라네.”
어이가 없었다. 차라리 전투가 익숙한 나에게는, 전혀 예상치 못한 퀘스트였기 때문이다.
“아니, 뭔 책을 읽는 게 퀘스트야…….”
나는 투덜거리면서도 책을 들고 벽난로 앞의 카우치 위에 앉았다.
당황스럽긴 했지만, 사실 마물과 싸우는 것보다 훨 나은 일이긴 했다.
대충 넘겨보고 다 봤다고 하면 되는 일일 테니까.
다소 가벼운 마음으로 책 표지를 막 넘긴 순간이었다.
쿠워어어어어―
별안간 책이 마구 진동하더니, 종이 위로 검은 안개가 뭉게뭉게 치솟아 올랐다.
“악!”
나는 반사적으로 비명을 질렀고, 책을 놓쳐버렸다.
타닥!
바닥에 닿은 충격 때문인지, 책장이 다음으로 넘어갔다.
책에서 솟아오른 검은 안개들이 꾸물꾸물 사라지더니, 곧장 우주의 은하계 같은 형상이 홀로그램처럼 떠올랐다.
“……그림책이었냐고.”
나는 얼이 쏙 빠진 얼굴로 그것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미리 좀 알려주지, 하여튼 사람 놀라게 하는 방법도 가지가지인 게임이다.
촤르륵.
그때, 조금도 손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페이지가 자동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드디어 게임 속 그림책에 걸맞게 허공에 글씨가 새겨졌다.
「태초에 두 존재가 있었다. 삶과 죽음.
그들은 존재의 의미를 찾기 위하여 까마득한 무저갱 속에서 끝없이 헤매고, 싸우고, 투쟁했다.」
「오랜 전쟁은 삶의 승리로 이어졌다. 삶은 값진 땅을 쟁취하고 죽음에게 저주를 내린 후 쓸모없는 땅으로 멀리 내쫓았다.」
“아, 뭐야!”
그것은 모든 RPG 게임이 꼭 갖고 있는, 배경을 설명하는 프롤로그였다.
나는 당황하여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소리쳤다.
“스킵 없어?! 스킵, 스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