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닷없이 떠오른 시스템 창은 얼마 안 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평소의 알림 지속 시간에 비하면 훨씬 짧은 편이었다.
아마도 난이도를 위해 일부러 스치듯 보여주는 일종의 트릭일 테지만.
‘미친…… 이러니까 유저들이 제대로 못 보고 난리 치지.’
나는 제작자들의 악랄함에 혀를 내둘렀다.
굳이 이렇게 짧게 알려주지 않아도, 당장 [어둠의 숲]에서 수도까지 가는 건 어려웠다.
이동 마법을 써줄 마법사도 없고, 스크롤 및 마도구조차 쓸 수 없는 상황…….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번뜩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근데 난 갈 수 있잖아.”
나는 황급히 주머니를 뒤적였다.
그리고 지난 사흘간 단 한 번도 꺼내 본 적 없던 아이템을 꺼냈다.
[S급 황궁 소환 유물]
[어둠의 숲]에 진입할 때 카셀이 내게 준 아이템이었다.
마도구 사용 불가 지역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것을 보니, 아마 황궁의 비보쯤으로 여겨지는 전설급 사기템일 확률이 컸다.
그런 걸 왜 내게 줬을까.
더는 태평하게 그딴 것이나 헤아릴 새가 없었다.
“……수도로 갈 수 있어.”
나는 유물과 단검을 양손에 쥔 채, 그것들을 내게 준 주인공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깊은 잠이 들었는지 눈을 감고 있는 카셀은 다소 평온한 안색이었다.
재앙이 도래했으니 분명 악몽을 꾸고 있겠지만, 어쨌든 겉보기엔 단잠에 빠진 것 같았다.
생각지 못한 아이템으로 인하여 내게 뜻밖의 선택지가 주어졌다.
재앙을 끝내기 위해 직접 개고생해 가며 구르는 것과 잠든 카셀을 단검으로 찔러 깨우는 것.
고민할 것도 없이, 어느 면으로 봐도 후자가 훨씬 깔끔하고 간편했다.
‘게다가 직접 찌르라고 준 거잖아.’
헤일리에서도 그토록 통증으로 잠을 깨우라고 닦달한 남자이니, 단검으로 찔러도 화를 내지 않을 것이다.
그와 척지지 않는 이상 앞으로의 게임 진행에도 문제가 없겠지.
뭣하면 회복을 돕는 약초와 희석된 힐링 포션을 사용하여 찌른 상처를 재생시키면 되기도 하고…….
나는 단검을 쥔 오른손에 힘을 꽉 준 채로 그에게 주춤주춤 다가갔다.
그와 함께 머릿속으로 재차 되뇌었다.
‘이건 카셀의 의도다.’
그의 의도대로, 가장 쉽고 빠르게 재앙을 통제할 수 있는 방법.
알고 있다.
잘 알고 있는데도…….
막상 미동 없는 남자의 앞에 바짝 다가서자, 차마 단검을 내리찍을 수 없었다.
달빛이 때마침 곤히 잠든 얼굴을 비춰서일까.
아니면…….
“하…….”
나는 결국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한 채, 깊은 한숨을 쉬며 카셀의 앞에 쭈그려 앉았다.
“전 글러 먹었어요, 전하.”
반쯤 울먹이듯 하소연해도, 잠든 이에게선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천생이 개고생하면서 굴러먹을 팔잔가 봐.”
“…….”
“그러니까 나한테 왜 선택지를 줬냐구요……!”
괜한 불똥이었다.
설령 카셀이 내게 유물을 주지 않았더라도, 놈을 단검으로 찔렀을 거라는 보장이 딱히 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수도로 갈 수 있게, 일찍부터 여지를 남겨둔 남자가 원망스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또 한 번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쉰 나는, 이윽고 들고 있던 단검을 위로 휙 쳐들었다.
그리고. 콰직―!
날카로운 단검이 카셀의 등 뒤에 있는 나무 기둥에 박혔다.
정확히 그의 옆구리와 팔이 닿는 틈 사이에.
‘이 정도면 일어나서 찔렀다고 생각하겠지.’
갑옷의 이음새에 아슬아슬하게 맞닿아 있는 칼날의 위치를 확인한 후 이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이제 손에 쥔 황궁 소환 유물을 발동시킬 차례였다.
재앙을 막기 위해 속히 수도로 가야 했기 때문이다.
수도로 가서 뭘 할 거냐고?
당연히 단검에 뚫리지 않은 카셀 놈의 몸 대신 내 몸으로 때울 것이다.
수도에 아무런 피해가 가지 않도록.
최전방에 서서 미친 듯이 스킬을 갈기다 보면, 잠자는 왕자님께서도 꿈에서 깨어나는 때가 오겠지.
‘두 시간 정도만 버티면 돼.’
남의 영상을 통해 보았던 카셀의 수면 시간을 되새기며.
나는 차마 떼어지지 않는 입을 억지로 떼어내어 읊조렸다.
“……제니스의 빛이여, 영원하라.”
* * *
“크르르르…….”
꿈속에서 그는 한 마리의 라이칸이 되어 좁은 골목을 빠르게 내달리고 있었다.
주둥이 밖으로 튀어나온 기다린 송곳니에서는 노란 독액이 뚝뚝 떨어졌고, 새어 나오는 숨결에 푸른 화염이 뿜어져 나왔다.
휘익―!
앞, 옆, 위.
어딜 봐도 득실거리는 동료들이 함께 내달리고 있었다.
‘죽여!’
푸른 불꽃을 내뿜으며 동료들이 울부짖었다.
‘인간들을 죽여!’
‘살점을 뜯어먹어!’
‘이 땅을 죽음으로 물들여!’
짐승의 울음소리와 더불어 사람들의 비명, 살이 찢기고 피가 터지는 소리가 마구잡이로 뒤섞였다.
“아우우우우―!”
“끄아아아악!”
“마물이 나타났다!”
“사, 살려줘! 살려……!”
“크르르륵!”
코를 가득 메우는 피 냄새가 기분을 잔뜩 고양시켰다.
카셀은, 아니, 라이칸은 동료들과 같이 펄쩍 뛰어올라 도망가는 인간의 뒤를 덮쳤다.
날카로운 발톱이 숭숭 돋아난 큼지막한 발로 머리통을 짓누르고, 맥박이 뛰는 목덜미를 그대로 물어뜯으려던 찰나.
번쩍.
한 줄기 섬광이 라이칸의 몸뚱이를 갈랐다.
그는 단말마조차 내지르지 못한 채 그대로 쓰러졌다.
“쯧. 졸도했군.”
절명하기 직전에 본 것은 낯익은 금발 머리의 사내였다.
검에 묻은 라이칸의 피를 털어내는 사내의 주변으로, 자신과 같이 쓰러진 동료들의 사체가 보였다.
“부상자들은 신전으로 옮기고, 기절한 이들을 서둘러 피신…….”
멀어지는 음성을 뒤로한 채 의식이 뚝 끊겼다.
수면 위를 떠다니듯 어둠 속을 막연히 부유하던 그는 이윽고 다시 눈을 뜨게 됐다.
이번에 그는 활활 타오르는 들불이었다.
폐와 식도가 새까맣게 타들어 가는 듯한 지독한 열화가 느껴졌다.
그는 그 뜨거움을 견디지 못하고,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높다란 담벼락, 견고하게 지어진 주택들, 분주하게 움직이는 생명체, 그 사이사이 소담히 핀 풀 한 포기조차.
‘모든 것을 집어삼키면, 이 타들어 가는 것 같은 열기가 사라질까.’
그 생각에 매료된 들불은 찢어질 듯 아가리를 벌리고 돌진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촤아아악―!
정신이 번쩍 들 만큼 한기가 온몸에 내리쳐졌다.
“루치아 사제님. 다른 사제님들을 데리고 북쪽 우물에서 물을 길러 와 주십시오. 마르코 신관님! 제가 준 잎으로 유혹해서 삼색 마물들부터 대피시키라 하지 않았……!”
은빛 머리를 지닌 인간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물동이를 날랐다.
이어서 연신 타오르는 들불에 물이 끼얹어졌다.
얼음장같이 차가운 물에 닿을 때마다 몸집이 시시각각 줄어들면서 숨쉬기가 어려워졌다.
하지만 오히려 그는 그 감각이 기꺼웠다.
드디어 이 죽음 같은 열기 속에서 해방될 수 있겠구나…….
가물가물하던 의식이 또 한 번 뚝 끊겼다.
얼마 안 가 또 다른 마물로 눈을 떴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칼끝이 몸을 관통했다.
그의 앞에 서 있던 수염이 덥수룩한 용사 한 명이 얼떨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뭐, 뭐지? 아직 안 베였는데, 이게 왜…….”
“느려, 아저씨. 그러다가 마물에게 머리통을 뜯긴다고.”
그 순간, 허공에서 뿅 하고 솟아난 초록 머리 소년이 카셀을 벤 단검을 혀로 핥으며 씨익 웃었다.
“으헉! 그, 그린 마스크?! 대, 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거냐……?”
대경실색하는 용사의 목소리를 뒤로 한 채, 의식이 끊겼다.
다시 다른 마물로 눈을 떠도, 또 다른 마물로 눈을 떠도.
무수히 반복해도 마찬가지였다.
‘죽여, 죽여!’
‘인간들을 죽이고, 이 땅을 정복해!’
머리와 가슴을 울리는 알 수 없는 울림은 번번이 인간들의 손에 가로막혔다.
또다시 아득한 어둠 속에서 마구 휩쓸려 다니던 카셀은 그것을 보며 점점 이지를 되찾았다.
그러자 마물이 되어 눈을 뜨는 빈도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이제 조금만. 조금만 더 버티면…….’
정처 없이 이어지던 악몽 속에서, 조금씩 출구를 찾아 나아가던 순간이었다.
한동안 잠잠하던 의식이 마구 뒤흔들렸다.
이윽고 머리채를 잡혀 끌려가듯 어딘가를 향해 속절없이 끌려 들어가는 느낌과 함께 암전이 찾아왔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는 높다란 시야를 아래에 둔 채 유유히 상공 위를 활보하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자 풀 한 포기 없는 황량한 고원, 그리고 그 너머 끝없이 펼쳐진 검은 늪이 보였다.
겉으로 보기엔 숲과 같았지만, 그것은 늪이 분명했다.
한 번 발을 들이밀면 죽을 때까지 빠져나갈 수 없으니까.
생명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이 어두컴컴한 대지에는 더 이상 적수가 없었다.
묘한 실망감과 지루함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그때였다.
‘저기로 가자. 저쪽에 가면 재밌는 게 있을 거야.’
어딘가에서 작은 속삭임과 함께 일말의 부추김이 들렸다.
카셀, 아니, 미지의 존재는 망설였다.
그 망설임을 알아챈 듯, 간사한 속삭임이 멈추지 않았다.
‘끝을 보고 싶어 했잖아. 그곳에 가면 드디어 끝을 볼 수 있을 거야.’
펄럭.
그 말에 그는 망설임 없이 날개를 펄럭여 날아가기 시작했다.
날개가 워낙 큰 탓인지, 몇 번 휘젓지 않았음에도 그는 쏜살같이 검은 숲을 지나 북쪽 대지를 가로질렀다.
‘더 멀리. 더 멀리.’
귓가에서 발광하던 속삭임이 마침내 잦아들었을 무렵.
저 멀리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반짝이는 별들이 수놓아진 밤하늘을 그대로 땅 위에 옮겨둔 것처럼.
거대한 성채를 중심으로 빛나고 있는 도시는 황홀하고 아름다웠다.
‘저것들 때문이야.’
잠잠하던 속삭임이 또다시 귓가에 간사하게 울렸다.
‘저것들이 내 땅을 빼앗고 자리 잡고 살아서, 그래서 네가 이 꼴이 된 거라고! 끝도 없이 영원을 반복하는 꼴!’
무엇이 그리도 우스운지 속삭임이 깔깔깔 그를 비웃었다.
그러자 분노와 증오를 담은 감각들이 가슴속에서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카셀은 힘차게 날갯짓을 했다. 그리고 남은 거리를 단숨에 좁혔다.
그는 높다란 성채 위를 한 바퀴 빙 돌다가, 이내 거대한 몸이 땅에 닿을 만큼 낮게 활강했다.
그의 몸통과 꼬리가 스친 건축물들이 모래성처럼 부스러졌다.
아직 직접적인 공격은 시작도 하지 않았건만, 그것만으로도 인간들은 충분히 겁에 질려 혼비백산했다.
‘인간들은 이토록이나 나약한 존재구나.’
카셀은, 아니, 미지의 존재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대로 숨결 한 번만 토해내도, 속삭임이 원하는 대로 인간들을 모조리 전멸시키고 빼앗긴 땅을 되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면 마침내, 제게도 끝이 오리라.
희열에 가득 찬 그가 느릿느릿 뜨거운 숨결을 들이마실 무렵이었다.
“아니, X발!”
불쑥 펑퍼짐한 로브를 입은 작달 만한 인간이 튀어나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화가 난 건지 인간이 뒤집어쓴 후드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그와 동시에 탐스러운 분홍색 머리가 꽃잎처럼 흐드러지며 튀어나왔다.
“이게 말이 돼?!”
자수정처럼 반짝이는 보라색 눈을 가진 작은 여자가, 그를 매섭게 쏘아보며 소리쳤다.
“여기서 고대 마룡이 왜 튀어나오는 거냐고, 이 미친 망겜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