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6화 (196/212)

마룡을 해치웠으니 기쁠 만도 한데.

왜인지 그의 표정은 흉흉하기 그지없었다.

한달음에 다가온 그가 잠시 나를 쏘아보다가, 이내 니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뭐 하는 거지?”

“보시다시피…… 약제사님과 승리의 기쁨을 나누고 있습니다.”

전부터 느꼈지만, 니세는 황태자 한정으로 그 앞에서는 눈치가 죽는 모양이었다.

어깨까지 으쓱이는 걸 보면, 저 시뻘건 눈깔이 무섭지 않은 것인가.

“체통을 지키도록 해. 보는 눈이 많다는 것을 모르나?”

“기쁨을 나누는 데 왜 보는 눈을 신경 써야 하지요?”

“교황씩이나 돼서 한 사람만 싸고돌고 있으면, 다른 자들이 뭐라 생각하겠나.”

“진짜 싸고도는 사람이 할 말은 아닌 듯합니다만.”

“너…….”

꼬박꼬박 대꾸하는 니세의 말에 카셀의 이마에 빠직 힘줄이 잡혔다.

‘용 잘 해치워 놓고 왜들 이래! 싸우려면 나 없는 데서 싸우라고!’

점점 험악해지는 분위기에 도망갈 틈을 노리던 순간이었다.

“전하.”

“누나!”

누군가 동시에 나와 카셀을 불렀다.

돌아보니 이쪽으로 다가오는 아담과 일레인이 보였다.

“그린 마스크!”

나는 이때다 싶어 얼른 일레인에게 달려갔다.

부상을 입은 건지 그는 절뚝거리고 있었다.

“괜찮아? 어디 다쳤어?”

“조금 까졌어요.”

“어디 봐.”

일레인이 머쓱한 얼굴로 몸을 돌려 한쪽 종아리를 보여줬다.

새카맣게 탄 피부를 보자 앓는 소리가 절로 흘러나왔다.

“조금이 아니잖아!”

나는 재빠르게 [S급 힐링 포션]을 꺼내 부었다.

다행히 상처가 천천히 아물었다. 환부가 넓고 심한 편이라 아무래도 포션이 더 필요할 듯했다.

“더 다친 곳은?”

“없어요. 괜찮아요.”

“그나마 다행이네.”

심각한 표정으로 일레인의 상처를 보던 나는, 이내 포션 몇 병을 더 꺼내 들이부었다.

그런 내게 일레인이 대뜸 지껄였다.

“누나, 저 죽으면 다른 노예는 들이지 마요.”

“닥쳐. 이제 네가 부어.”

“아, 왜요오!”

놈에게 포션병을 넘기며 실랑이를 벌이고 있을 즈음.

카셀과 아담은 상황을 정리했다.

“하산할 준비는.”

“일단 챙길 수 있는 것만 챙겨 내려갈까 합니다.”

본의 아니게 그들의 대화를 엿듣게 된 나는 고개를 돌려 다시금 마룡의 사체 쪽을 바라보았다.

다쳐 쓰러진 사람들을 제외한 나머지 열댓 명의 용사들이 마룡의 사체를 둘러싼 채 아이템을 챙기고 있었다.

살점이나 비늘 따위를 가져가려는 듯 연신 이곳저곳을 찔러도, 죽은 마물의 몸뚱이는 꿈쩍하지 않았다.

‘……쓸데없는 기우였나.’

하지만 그렇다기엔 아직까지 엔딩 크레딧이 뜨지 않았다.

[HP 497 / 990]

여전히 절반 가까이 남아 있는 HP창을 석연치 않게 바라보던 나는, 이내 그쪽으로 가 보기로 결심했다.

어쨌든 제작자들에게 엔딩에 관해 물어보려면,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야 했다.

‘마룡의 사체 뒤편이 좋겠어.’

겸사겸사 죽은 마룡도 살펴볼 겸.

“저는 그럼 다른 부상자들도 확인하러 가보겠습니다.”

슬그머니 메인 캐릭터들로부터 멀어져 분화구 쪽으로 향하던 찰나였다.

푸홧―!

별안간 목이 잘린 마룡의 사체 단면에서 오염된 기름처럼 시커멓고 찐득한 무언가가 터져 나왔다.

“읏! 저게 뭐야?”

근방에 있던 용사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것을 관찰했다.

‘저건……!’

그것을 알아본 나는 눈을 부릅떴다.

수도에서 심장에 검을 박아 넣었을 때, 내 몸을 옭아매려 했던 정체 모를 검은 액체였다.

“모두 피해요! 가까이 가면 안……!”

나는 곧장 그쪽으로 내달리며 소리쳤다.

하지만 늦었다.

줄줄 새어 나오던 그것이 일순간 살아 있는 유동체처럼 꿈틀거렸다.

그리고, 파앗!

“우웁!”

그것의 출처를 확인하기 위해 가까이 다가서던 용사 한 명을 덮쳤다.

내게 그랬던 것처럼, 그것은 용사를 잘린 단면으로 끌고 갔다.

꿀꺽.

무언가를 삼키는 듯한 소리와 함께, 용사 하나가 눈 깜짝할 새 사라졌다.

“헥토르!”

“무, 무슨…….”

“우선 다들 물러서!”

갑작스럽게 닥친 상황에 사람들은 우왕좌왕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액체로부터 재빨리 뒷걸음쳤지만, 검은 액체가 한 발 더 빨랐다.

“악!”

“웁!”

“끄악!”

꿀꺽!

순식간에 용사 네다섯 명이 마룡의 잘린 단면 속으로 사라졌다.

“도망쳐!”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는 빠른 공격에 사람들이 겁에 질린 얼굴로 도망쳤다.

그러나 네다섯 명으로는 만족이 되지 않는지 검은 액체는 꿈틀거리며 도망가는 사람의 뒤를 쫓았다.

놈이 또다시 사냥감을 삼키려는 순간.

“스턴.”

나는 나지막이 외쳤다.

파즈즈즈즛!

검은 액체의 겉면 전체로 곧장 푸른 스파크가 튀어 올랐다.

수도에서 이미 써 봤지만, 저 알 수 없는 액체에게는 공격이 통하지 않았다.

다만 움직이는 속도를 조금 늦출 뿐.

예상대로 무섭게 사냥감의 뒤를 쫓던 놈이 튀어 오르는 푸른 불꽃에 주춤 움직임을 멈췄다.

그러더니 이내 방향을 달리했다. 마룡의 잘린 대가리가 있는 쪽으로.

이유는 모르겠지만, 덕분에 용사들이 도망갈 시간을 충분히 벌었다.

“약제사님! 여기 있으면 안 됩니다!”

나는 나를 스쳐 지나가며 외치는 용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우두커니 선 채 검은 액체의 행보를 쫓았다.

스멀스멀 용의 대가리 쪽으로 기어간 놈은 이내 잘린 단면에 스며들었다.

그 바람에 검은 액체가 마룡의 몸뚱이와 목 사이를 껌처럼 연결한 기이한 광경이 펼쳐졌다.

‘뭘 하는 거지?’

긴장한 눈으로 그것을 지켜볼 무렵.

스륵, 스르륵.

떨어진 마룡의 목과 몸통의 거리가 조금씩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마치 떨어진 곳을 다시 붙이려는 듯.

‘잘라내야 돼……!’

마룡의 목과 몸뚱이가 다시 붙게 되면 왠지 안 좋은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나는 멈췄던 몸을 움직여 마룡의 사체를 향해 마저 달려가려 했다.

하지만, 타악―!

누군가 그런 내 팔을 거칠게 잡아챘다.

“벌써 내 명령을 잊었나?”

“…….”

“위험하니까 다가설 생각하지 마.”

“……전하.”

익숙한 얼굴에 몸에 바짝 들어가 있던 힘이 풀렸다.

나는 흔들리는 눈으로 카셀을 올려다보다가 말했다.

“하지만…… 누군가는 저 검은 액체를 잘라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필요하면 내가 해.”

“…….”

“그리고 소용없다.”

“무슨…….”

“날붙이로 자를 수 있는 존재라면, 삼켜진 놈들도 뚫고 나왔겠지.”

무심히 읊조린 그는 이내 내게서 고개를 돌렸다.

그를 따라 시선을 옮기자, 어느덧 분리된 목과 몸통이 거의 다 붙은 마룡의 모습이 보였다.

‘게이지가 괜히 있는 게 아니었는데.’

나는 처음부터 전투에 뛰어들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죽은 마룡이 되살아날 줄 난들 어찌 안단 말인가.

‘이런 미친 게임 같으니라고. XX, XX.’

제작자와 게임을 향한 원망으로 속이 쓰릴 무렵.

비로소 잘린 단면끼리 맞닿으며 마룡이 완전해졌다.

“컥! 크륵!”

미동 없던 용의 거대한 몸뚱이가 전기 충격이라도 받은 것처럼 움찔거리며 튀어 올랐다.

멎었던 호흡을 재개하듯 꺽꺽대던 놈이, 이윽고 천천히 일어섰다.

시뻘건 눈이 나와 카셀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크르르르르…….”

제 목을 벤 적을 알아보듯 마룡이 섬뜩하게 목을 울렸다.

그러나 그도 잠시.

“크르르…… 크륵, 킥. 킥!”

기이하게도 으르렁거리는 듯한 괴수의 울음소리는 점차 웃음소리처럼 변해 갔다.

마침내 마룡이 거대한 신형을 완전히 일으켜 세운 순간.

“킥, 킥…… 크하하하!”

별안간 파안대소가 놈의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

카셀이 불쑥 한 걸음 옮겨 내 앞을 막아섰다.

놈은 카셀과 똑 닮은 시뻘건 눈으로 그런 그를 마주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리석은 황가의 마지막 핏줄이자…… 내 저주의 화신이여.”

“……….”

“너는 그렇게 되풀이하고도 또다시 멍청한 선택을 했구나.”

벌어진 놈의 입을 타고 익숙한 음성이 쏟아졌다.

수도에서 들었던, 음산하면서도 천진난만하게 느껴지던 그 목소리.

“요, 용이…… 용이 말을 한다!”

누군가 기겁을 하고 소리쳤다.

나는 그제야 퍼뜩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전투 중에는 단 한 번도 말을 하지 않았어.’

정해진 패턴으로 공격만 할 뿐.

왜일까. 그 순간 아리의 채팅이 뇌리를 스쳐 지나간 것은.

― [GM아리] : 죄송합니다, 샤리 님. 고대 마룡은 최종 보스답게 약간의 인공 지능을 부여하긴 했습니다만…….

― [GM아리] : 이렇게 돌발적으로 튀어나올 줄은 정말 예상치 못했어요.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목이 잘리기 전의 마룡은 나도, 제작자들도 알고 있는 최종 보스와 똑같았다.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수도에서처럼 돌발 상황도 벌어지지 않았다.

어쩌면 그래서 나도 모르게 안일하게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새어 나온 검은색 액체와 말을 하는 용은, 분명 제작자들이 버그라고 했으니까.

그때였다.

“네가 아끼는 자들의 수를 늘리면…… 이번엔 뭐가 달라질 거라 여긴 건가?”

놈이 소름 끼치는 눈으로 카셀의 뒤편에 있는 용사들을 한바탕 훑으며 지껄였다.

“그러면 ‘진정한 희생과 헌신’의 조건을 지키고 날 죽일 수 있을 테니까?”

마룡의 말이 이어질수록 점점 알 수 없는 위화감이 발끝을 타올랐다.

단순한 버그라기엔, 놈이 카셀을 향해 내뱉는 말이……

너무나도 이상하지 않은가.

‘꼭, 리르의 서재에서 본 세계관을 알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부쩍 드는 위화감에 쐐기를 박듯, 용이 또 한 번 천진한 웃음을 터뜨렸다.

“킥, 킥…… 그딴 건 없다는 것을 왜 믿질 못해?”

“…….”

“난 죽지 않아! 내가 바로 이 땅의 신이자, 죽음인걸!”

“닥쳐라.”

내내 마룡의 말에 답하지 않던 카셀이 사납게 뇌까렸다.

“죽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몇 번이고 다시 네 목을 잘라내고 또 잘라낼 거니까.”

“오, 이런 무서워라!”

그러나 그런 카셀을 조롱하듯 놈이 킬킬거렸다.

“불쌍한 카셀, 진짜 소중히 여기는 걸 꼭꼭 숨겨두면, 내 눈을 속일 수 있을 거라 생각했겠지?”

“…….”

“너와 내가 한 몸인 이상, 내가 모를 리 없는걸! 하하하!”

알 수 없는 말들을 지껄이던 마룡이 별안간 웃음을 멈추고 말했다.

“선택해라, 카셀 루크비히.”

“…….”

“이대로 나와 함께 세상의 멸망을 지켜볼지. 아니면 또다시 끝없는 굴레를 반복할지.”

스르렁.

놈의 헛소리에 카셀은 검을 꺼내 드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그것을 알아들은 듯 용이 한동안 물끄러미 카셀을 응시했다.

“……멍청한 카셀. 이번 생에도 고통스럽게 죽겠구나.”

나지막한 중얼거림도 잠시.

펄럭!

놈이 거대한 두 날개를 펼쳤다.

서서히 허공으로 날아오르는 놈의 몸뚱이가 벌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드레곤 브레스의 징조였다.

“이번에도 사람들이 죽는 건. 다 너 때문이야, 카셀.”

심장 부근으로부터 용암 같은 불꽃을 목 끝까지 끌어 올리며 놈이 사악하게 속삭였다.

왜인지, 내내 카셀에게 못 박혀 있던 소름 끼치는 시선이 그의 뒤편에 있던 내게 닿은 순간.

“네가 이번 생에서 그토록 지키고 싶어 하던 것도, 꼭꼭 숨긴 마음도.”

“…….”

“영원히 불타올라 재가 되…….”

“온슬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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