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화감이고, 자시고. 저 오글 터지는 흑염룡 대사를 더 들어 줄 수가 없었다.
“샤리 아즈라엘!”
뒤늦게 나를 잡아채려는 카셀의 손을 간발의 차로 피한 나는, 마룡을 향해 튀어 오르듯 달려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놈은 카셀과 대화를 하겠답시고 땅 쪽으로 목을 쭉 빼고 있는 상태였다.
충분히 손이 닿을 만한 거리.
타다닥!
전력을 다해 질주하던 나는, 중간에 솟아오른 커다란 바위를 발판 삼아 위로 휙 뛰어올랐다.
그리고. 퍼억―!
곧장 용의 아래턱에 주먹을 갈겼다.
“크헉!”
마룡이 가스 빠진 라이터처럼 푸쉬식 힘을 잃은 불꽃을 뿜으며 허우적거렸다.
나는 땅에 떨어지기 전, 막간의 틈을 이용하여 놈의 대가리를 한 대 더 후려쳤다.
괘씸하지 않은가?
최종 보스라 한들 기껏해야 마물 주제에 어디 남주에게 가스라이팅을 시전한단 말인가.
‘지가 뭔데.’
퍼억!
“크워어어억!”
마룡은 괴성을 내지르며 완전히 중심을 잃고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애초에 아직 높이 날아오르지 않은 상태여서 추락까진 금방이었다.
쿠우우웅―
육중한 굉음과 진동을 동반한 또 한 번의 흙먼지 폭풍이 일어났다.
타악!
나는 그 주변에 어렵지 않게 착지했다.
휘이이이잉…….
몰아치는 바람과 함께 시야를 가로막던 뿌연 먼지가 차차 가셨다.
그리고 드러난 광경.
바닥에 처박힌 용과 나를 번갈아 보며, 용사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야, 약제사님이…….”
“맨손으로 마룡을 때려눕혔어……!”
민망하게도 그렇게 돼버렸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처음부터 카셀의 명 따윈 무시하고 공격에 가담했어야 했을까.
그때였다.
“누나!”
“샤리!”
나를 부르는 소리에 흠칫 고개를 들자, 니세와 일레인이 빠르게 이쪽으로 뛰어오는 게 보였다.
넋을 놓고 있던 다른 용사들 또한 무기를 빼 들며 주춤주춤 다가왔다.
아마 나를 도와 마룡을 공격하기 위해서일 터.
“섬멸.”
화르륵!
나는 재빠르게 나와 용 주변으로 원형의 불꽃을 피어올렸다.
“다가오지 마세요, 위험하니까!”
그렇게 외치자 사람들이 멈칫 불꽃 장벽 앞에 멈춰 섰다.
“하, 하지만…….”
“누나 혼자 어떡하게요!”
니세와 일레인이 우려 섞인 표정으로 연신 나를 불렀다.
“샤리 아즈라엘.”
거기에 아담 또한 가세했다.
“돕겠다.”
푸른 눈이 묵묵히 나를 응시했다.
이번 여정에서 제일 놀라운 건 아담이었다.
내 정체를 알고도 카셀에게 꼰지르지 않고 묵묵히 도와주겠단 그에게 뒤늦은 고마움이 들었다.
‘맞다, 카셀……!’
그러던 중 문득 잊고 있던 카셀이 떠올랐다.
황급히 그쪽으로 고개를 돌린 순간.
사악―!
한 줄기 섬광이 내가 만든 불꽃 장벽을 갈랐다.
내 정체가 밝혀진 와중에도, 놈은 무표정하게 불을 베어내며 이쪽으로 다가오려 했다.
‘아니, 미친놈아……! 다가오지 말라니까?’
전혀 놀란 기색이 없는 그의 행동거지에 되레 당황하는 건 나였다.
그때였다.
“망할! 망할 이방인 계집!”
쿠웅, 쿵!
지반이 울렸다.
떨어진 충격으로 한동안 잠잠하던 마룡이 거대한 몸을 일으키는 동작에서 파생된 진동이었다.
“크르르르…… 감히, 또 내 앞을 막아서?!”
완전히 몸을 일으킨 놈이, 살기 어린 눈으로 나를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네가 아는 게 전부일 것 같아? 날 죽이면 모든 게 끝이 날 것 같냐고!”
[HP 493 / 990]
주먹을 맞고 찔끔 깎인 놈의 HP 게이지를 확인한 나는, 이내 태연히 응수했다.
“내가 뭘 모르는데?”
“멍청한 계집! 이미 뒈져버린 놈들이 시키는 대로 꼭두각시 노릇을 하는 줄도 모르고……!”
놈은 뒤이어 알 수 없는 처음 듣는 언어로 딱 봐도 욕 같은 말을 지껄였다.
하지만 용이 앞서 한 말들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라도 태반이 이해할 수 없는 내용뿐이었다.
‘그치만 굳이 이해할 필요가 있을까?’
어차피 죽이면 그만일 마물인데.
마룡의 말을 귀담아듣는 것을 포기한 채 한 손으로 귀를 후비고 있을 무렵.
번뜩, 놈의 말에서 모순되는 점 하나가 뇌리를 스쳤다.
“……너.”
“…….”
“내가 널 죽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구나?”
내 말에 쩌렁쩌렁 악을 쓰던 마룡이 흠칫 입을 다물었다.
그 반응 덕에 확신할 수 있었다.
생각해보니, 놈은 수도에서도 내게 이와 비슷한 말을 했었다.
“나를, 아니…… 이 마물을 죽이면, 모든 게 끝날 거라, 생각 하나 보지?”
엔딩을 내든 못 내든 간에.
결국 그 말은 어쨌든 내가 놈을 죽일 수 있다는 것 아닌가.
“넌 날 못 죽여.”
마치 그런 내 생각을 간파한 듯 마룡이 빠르게 부정했다.
“왜?”
“두려웠잖아? 내 본체가 널 옭아매는 순간, 영영 검은 수렁에 갇힐까 봐.”
“본체……?”
본체라면, 그 검은 액체를 말하는 것인가?
차갑고 축축한 그것에 옭아매여 꿈쩍도 못 했던, 그 섬뜩한 기억을 떠올릴 때였다.
별안간 놈이 킬킬거렸다.
“그래. 너 말고도 지금까지의 모든 이방인들이 그랬지.”
“…….”
“인간들은 다들 제 목숨을 가장 소중히 여기기 마련이거든. 먼저 잡아 먹힌 인간들을 구할 노력조차 하지 않고 도망친 저놈들처럼 말이야.”
놈이 고개를 돌려 내가 만든 불꽃 장벽 너머에 있는 용사들을 응시했다.
“읏…….”
그러자 그들이 하나같이 움찔거리며 고개를 떨궜다.
마룡의 질 낮은 비난에 뒤늦은 죄책감이 들어서인 듯했다.
나는 또다시 가스라이팅을 하는 놈을 서늘하게 노려보았다.
“억지 부리지 마. 그랬으면 분명 네가 함께 공격했겠지.”
“억지인지 아닌지는 지금부터 알 수 있을 거야.”
놈이 뱀처럼 찢어진 눈깔을 내 쪽으로 도로록 굴리며 불길하게 웃었다.
“과연, 여기서 누가 동료를 구하기 위해 제 목숨을 희생할까? 헤헤.”
펄럭!
그와 동시에 놈이 두 날개를 펼쳐 허공으로 빠르게 날아올랐다.
갑자기 불어치는 돌풍에 얼굴을 가리며 물러서는 순간.
“읏!”
“우선 남은 것들 먼저 잡아먹은 후에, 너는 마지막에 카셀 앞에서 가장 고통스럽게 찢어 죽여주마.”
놈이 좀 전과는 달리 하늘 높이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드레곤 브레스를 온전히 내뿜을 때까지, 내게 중간에 공격당하지 않도록 수를 쓰는 듯했다.
“좌절해서 제 목을 찌르는 카셀 루크비히를 보는 것만으로도 이번 생은 재밌게 끝나겠는걸!”
‘XX새끼, 자꾸 선 넘네?’
천진한 목소리로 마지막까지 카셀을 조롱하는 놈에게 울컥하는 마음이 치솟았다.
“샤리 아즈라엘!”
그때, 기어이 불꽃 장벽을 뚫은 건지 카셀이 나를 부르며 험악한 얼굴로 달려왔다.
‘아오, 대체 어떻게 그걸 또 뚫었지?’
그런 그에게 미안하게도, 나는 반대편으로 내달렸다.
그리고 힘껏 휘파람을 불었다.
“휘익―!”
“꾸웨에에엑!”
산 위에 있어서 좀 늦을까 걱정했는데.
채 1초도 지나지 않아 어디선가 돼지 멱따는 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후욱!
얼마 안 가, 큼지막한 그림자가 머리 위를 덮쳤다.
“꾸웨에엑!”
가까이서 들리는 익숙한 울음에 고개를 돌리자, 어느덧 천둥이가 나를 따라 낮은 고도로 날고 있었다.
타닥!
나는 곧장 천둥이의 등 위로 뛰어올랐다.
“위로!”
그렇게 외치며 슬쩍 밑을 내려보자, 간발의 차로 나를 놓친 카셀이 일그러진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체 얼마나 빨리 쫓아온 건지, 까딱했으면 놈에게 잡혔을 거란 생각에 오싹한 한편.
‘……왜 저런 얼굴일까.’
높이 날아올라 잘 안 보일 때가 되어서도 그의 얼굴이 선명히 그려졌다.
마치 소중한 것을 강제로 빼앗긴 아이처럼 허망하고, 절박한 표정 같았는데…….
“불쌍한 카셀, 진짜 소중히 여기는 걸 꼭꼭 숨겨두면, 내 눈을 속일 수 있을 거라 생각했겠지?”
왜 하필 이 순간, 마룡이 했던 말이 떠오르는지 알 수 없었다.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
나는 재빨리 고개를 저어 상념을 털어냈다.
지금은 마룡을 상대하는 데 온 신경을 기울여야 할 때였다.
놈은 끝도 없이 위로 치솟고 있었다.
후우우우우웁!
그러면서 드레곤 브레스를 생성하고 있었다.
“천둥아, 속도 줄여.”
내 말에 빠른 속도로 마룡의 뒤를 쫓던 천둥이가 곧장 속도를 줄였다.
마룡이 하려는 짓을 대충 알 것 같아서였다.
저렇게 나를 유인한 후에, 방심한 틈을 타 내가 아닌 용사들을 쓸어버릴 작정이다.
‘그렇게 놔둘 순 없지.’
나는 주머니 속에서 하나 남은 [S급 마력 증폭 포션]을 꺼내 들이켰다.
거추장스럽지만 이번엔 로브를 벗지 않았다.
그만큼 방어력이 중요했다.
“너도 준비해. 돌아가면 곧장 반격할 수 있도록.”
“꾸웨에에엑!”
천둥이의 머리를 두어 번 두드리며 말하자, 놈이 기특하게 대답했다.
그렇게 적당한 거리를 둔 채 얼마쯤 마룡의 뒤를 쫓았을까.
끝도 없이 높이 치솟던 놈이, 별안간 날갯짓을 멈추고 내 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내 예상이 맞았다. 놈은 아마 내가 당황하여 우왕좌왕하길 바라는 것일 터.
“천둥아, 우리가 더 빨리 용사들 쪽으로 가야 해.”
“꾸웨에에엑!”
“할 수 있지?”
“꾸웩, 꾸웨에엑!”
마치 그건 자신의 전문이라는 양, 천둥이가 듬직하게 울었다.
마침내 공격적으로 내게 다가오는 듯하던 놈이, 불쑥 날갯짓을 멈추고 아래로 빠르게 하강하기 시작했다.
“지금!”
후욱!
내 외침과 동시에 천둥이 또한 엄청난 속도로 하강하기 시작했다.
놀이 기구에 올라탄 듯한 아찔함이 전신을 덮쳤다.
공격력으로는 당연히 최종 보스가 압승일지 모르겠으나, 속도로는 [천둥 코끼리 새]를 따라잡을 마물이 없었다.
그걸 알기에 암시장에서 개고생하며 펫 마물로 길들인 거니까.
“꾸웨에에에엑!”
그리고 내 예상대로, 천둥이는 마룡을 훌쩍 앞질러 용사들의 머리 위에 도달했다.
화악!
그와 동시에 뜨거운 열기가 빠르게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역시.’
활강하면서 드레곤 브레스를 내뿜을 생각이었는지, 놈이 불꽃 덩어리가 맺혀 있는 주둥이를 쩍 벌린 채 이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계속해서 커지던 불꽃의 구체가 마침내 폭발하듯 일직선으로 쏘아진 순간.
“천둥아, 광선빔!”
콰아아아아악!
천둥이의 입에서도 푸른 광선이 쏘아져 나갔다.
콰앙――!
붉고, 파란 광선들이 중간에서 격돌하며 엄청난 폭음을 자아냈다.
그와 동시에 천둥이의 등에서 뛰어내린 나는, 그 폭발 옆을 아스라이 스쳐 지나갔다.
스르렁.
찰나, 빠르게 꺼낸 루미에카르가 빛을 발했다.
“크워어어억!”
한발 늦게 접근하는 예기를 느낀 마룡이 방향을 바꿔 내게 드레곤 브레스를 쏘았다.
엄청난 열기를 동반한 불길이 나를 스쳤다.
그 잠깐 스친 것만으로도 마력 증폭 포션을 먹은 것이 무색할 만큼 방어 아티팩트가 곧장 깨지고, 로브가 화르륵 타들어 갔다.
그러나 다행히도 전처럼 HP는 깎이지 않았다.
그 모든 것을 깨달았을 때는.
푸욱―.
루미에카르를 마룡의 심장에 찔러 넣은 직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