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화
타티아나 아가씨가 아버지인 유리 님의 의지를 꺾었다!
이 소식은 베르체노프가를 순식간에 달구어 놓았다.
“처음이지 않아? 작년 이맘때를 생각해 보면…… 그때 아가씨도 대단했지만 유리 님은 꿈쩍도 하지 않았잖아?”
“유리 님도 마음이 많이 약해지셨겠지. 생각을 해 봐. 아가씨 그렇게 쓰러지시고 나서 분위기가 어땠는지……. 그리고 기억상실까지 걸리셨잖아? 아무리 그 강철 같은 유리 님이라도 버틸 재간이 없지.”
“그런데 웬 피아노래? 아가씨 원래 피아노 치셨어? 난 여기서 일하면서 피아노 소리라곤 들어 본 기억이 없는데.”
“그것도 원래 타고나셨던 건데 유리 님이 막았다는 소리가 있…….”
“거기! 뭐 하는 겁니까!”
소곤거리는 메이드들 뒤편에서 갑자기 불호령이 떨어졌다.
“지, 집사장님.”
베르체노프가의 집사장 예고르 블라디미로비치 스메르틴이 사납게 인상을 쓰고 있었다.
메이드 중 한 명은 너무 놀란 나머지 딸꾹질까지 해 댔다.
로마노프 왕조가 무너지고 소비에트가 들어섰다가 다시 무너지는 과정에서 러시아에 있던 귀족은 모두 사라졌다.
베르체노프처럼 간신히 그 명맥을 잇는 가문들이 남아 있지만 이젠 자본으로 그 귀족성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지금 현대에 와서는 집사건 메이드건 사실상 다 똑같은 근로계약서를 쓴 고용인으로, 서로 역할만 다른 평등한 관계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집사장 예고르는 20년 근속의 집사장이라는 직책을 떠나서도 무시할 수 없는 분위기를 지니고 있는 사람이었다.
베르체노프가에서 일하는 고용인들은 모두 암묵적으로 예고르를 유리 다음으로 여기고 있었다.
괜히 그의 눈 밖에 나서 봉급도 좋고 사실상 종신고용에 가까운 일을 잃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예고르가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
“근무 중 이러저런 담소를 나누시면서 일하는 것에 대해선 뭐라고 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그 내용이 예민한 사항이라면 최소한 듣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 하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저…… 그…….”
“이렇게 사방이 뚫린 복도에서 유리 님의 이야기를 그렇게 쉽게 하시다니, 대체 생각이 있는 겁니까, 없는 겁니까!”
“죄송해요! 죄송합니다!”
메이드들은 큰 소리고 사과하고는 각자 일터로 흩어졌다.
“쯧.”
예고르는 혀를 차며 집무실로 돌아왔다.
도통 마음에 드는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본래 예고르는 군에서 복무하던 군인이었다.
그는 높은 업무 능력과 강직한 성품을 바탕으로 승승장구하며 높은 자리까지 오를 인재란 평가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운명이란 가혹한 법. 예고르는 훈련에서 입은 부상으로 젊은 나이에 불가피하게 퇴역하고 말았다.
평생을 러시아를 위해 헌신하겠다고 생각했지만 퇴역 후 남은 것은 별로 없었다.
보장되어 있다고 생각했던 연금과 아파트는 기대하지도 말라는 선임들의 말에 예고르는 더더욱 절망했다.
성치 않은 몸으로 이렇다 할 기술도 없이 당장 먹고살 걱정이 문제일 정도였다.
하루하루를 최악으로 버텨 나가던 그를 고용한 것이 유리였다.
그 명망 높은 베르체노프가의 가주.
유리 알렉세예비치 베르체노프는 다른 건 아무것도 보지 않고 오로지 일자리가 없는 퇴역 군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예고르를 고용했다.
황망해하는 예고르에게 유리는 이런 말을 했다.
‘어머니가 편찮으시다면 형제끼리 도와야 하지 않겠소.’
그 자리에서 예고르는 유리에게 충성을 다짐했다.
그가 평생토록 만나 본 그 어떠한 남자보다 유리 알렉세예비치 베르체노프는 존경할 만한 사내였다.
그런데 불과 몇 년 사이 대체 무슨 소문들이 도는가?
부인과 사별하고 유리에게 남은 것은 두 명의 자식뿐이었지만 하루하루가 바람 잘 날 없었다.
특히 타티아나의 폭력적인 행동은 모두들 두 손 들고 항복할 지경이었다.
예고르는 날이면 날마다 안 좋은 소식들이 들리고, 유리의 얼굴이 계속 어두워지는 것을 보며 진정으로 가슴 아파했다.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타티아나에게 심각한 기억장애가 생겼다는 진단이 내려졌을 때, 아주 조금이라도 안도의 한숨을 쉬지 않았다고 한다면 거짓이리라.
백지 상태의 타티아나를 지금부터라도 잘 교육시킨다면 최소한 그녀에게서 비롯되었던 문제들은 해결할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유리가 백기를 들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예고르는 황당했다. 말도 제대로 못 하는 타티아나가 대체 어떻게?
메이드들의 말마따나 지금 유리는 아버지로서 마음이 약해져 있을지도 모른다. 그건 흉이라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앞으로도 이런 식이라면 곤란했다.
“유리 님을 뵈어야겠군.”
* * *
“유리 님.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오게.”
허락이 떨어지자 예고르는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베르체노프가의 가주, 유리의 방은 화려하지도 멋들어지지도 않았다. 되레 흔한 그림 하나 없어 얼핏 보기엔 조금 삭막했다.
하지만 책상 위는 노트북과 모니터, 그리고 산더미 같은 서류들로 이를 데 없이 화려했다.
유리는 예고르를 힐끗 일견하더니 노트북 화면을 가리키며 예고르를 불렀다.
“이것 좀 보겠나.”
“후…… 유리 님, 죄송합니다만 전 집사에 불과합니다. 사외비적 일을 저에게 물으신들…… 뭡니까 이게?”
“이걸 자네에게 묻지 그럼 누구에게 묻겠나?”
예고르는 노트북에 뜬 쇼핑몰 창을 보면서 재빨리 상황 파악에 나섰다.
홈시어터…… 스피커…… LP플레이어…… 대체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유리를 돌아보자 그가 피식 웃었다.
“별관에 피아노 한 대 더 있지 않나?”
“예, 그렇습니다.”
“거기에 타티아나의 연습실을 만들 생각일세.”
“연습실 말입니까?”
“그래. 응접실에 있는 것도 꽤 괜찮은 것들이지만…… 내가 찾아보니 더 좋은 제품들도 많더군. 알아보고는 있지만 사적인 일이라 직원들 시키기도 그렇고. 결국 믿을 건 자네밖에 없군.”
기업을 스무 개도 넘게 거느리면서도 공사 구분이 확실한 유리가 직원들에겐 시킬 수 없는 사적인 일이라며 부탁해 왔다.
그것만으로도 예고르는 어마어마한 책임감과 뿌듯함을 느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딸에게 어떤 선물을 해 주어야 기뻐해 줄까, 하고 즐거운 고민이 가득한 유리를 보며 예고르는 약간의 두려움마저 느꼈다.
이분이 이러실 분이 아닌데…….
“이것 보게. 세 번째 물건. 괜찮지 않나?”
칠백만 루블짜리 홈시어터.
물론 여기는 베르체노프다. 유리에게 금전적 능력이 부족하진 않다.
이 정도야 선물 삼아 얼마든지 해 줄 수 있는 능력이 있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과하지 않은가?
참고 있던 예고르가 운을 뗐다.
“유리 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뭔가?”
예고르는 빠르게 해야 할 말들을 정리했다.
결코 좋게 들리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해야만 했다. 그렇다면 집사장인 자신밖에 없지 않잖은가?
그렇게 각오를 하고 막 입을 열려던 차에 유리가 먼저 툭 내뱉었다.
“타티아나에 대한 이야기라면 안 듣겠네.”
“……예?”
예고르는 바보처럼 되묻고 말았다. 유리가 짐짓 놀리듯 재확인시켜 주었다.
“내 딸에 대한 이야기라면 안 듣겠다고 했네.”
“유리 님. 이건 아주 중요한…….”
“예고르.”
유리는 의자를 돌려 예고르와 마주 보았다. 이미 모든 것을 결정한 눈이었다.
유리가 차분하게 말했다.
“여태껏 내가 예고르 집사장의 고언을 가볍게 여기거나 무시한 적은 한 번도 없었지. 알고 있나?”
“알고 있습니다…….”
그 말대로였다. 유리는 중대한 회사 일이나 심지어 국가적 사안에 대한 것도 예고르에게 보여 주고 의견을 얻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배운 것 없는 한낱 군인에 불과했고 지금은 집사장에 불과한 자신에게 이런 중요한 일을 묻는 유리의 생각을 알 순 없었지만 예고르는 그때마다 성심성의껏 소신 있게 대답했다.
그때마다 유리는 심각하게 예고르의 말을 경청했다.
유리가 이렇게 단호하게 예고르의 말을 듣지 않겠다고 한 것은 정말 처음이었다.
“나는 예고르 자네의 눈과 현명함을 상당히 신뢰하는 편일세. 자네는 자신의 눈으로 본 것을 스스로 판단하고 세상에 맞추어 볼 줄 아는 현명함을 지녔어.”
“그렇지 않습니다. 과찬이십니다.”
“지금 자네가 잔뜩 긴장한 채 나에게 하려고 했던 말들…… 아마 옳을 걸세. 자네 판단이 옳을 거야. 듣지 않아도 아네.”
조용히 인정하던 유리가 순간, 눈빛을 달리했다. 매서운 안광이 빛을 발한다.
“하지만, 나는 이번 단 한 번만큼은 타티아나를 존중해 주기로 결정했네.”
예고르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무엇을 본 것인가.
대체 무엇을 보았기에 유리 알렉세예비치 베르체노프가 이토록 강한 신뢰를 보낸단 말인가.
유리가 말을 이었다.
“원래 같았으면 고민할 것도 없이 자네 생각대로 되었을 걸세. 물론 타티아나는 내 딸이지. 그것도 죽음의 위기에서 간신히 구해 온 딸이고, 기억까지 잃어버린 안타까운 딸이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자네 생각대로 되었을 거야.”
새 캔버스처럼 순수해져 버린 그 아이를 지킬 수 있는 것은 그녀의 아버지인 자신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한 번 실패했던 만큼, 이번만큼은 더더욱 신중을 기해야 할 차례였다.
하지만 아무것도 칠해지지 않은 듯 보였던 캔버스는 이미 흰 물감으로 바탕이 칠해져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그 앞에 붓을 들고 있는 화가는 유리가 아니었다.
화가는 혹여나 붓을 놓칠까 양손으로 꽉 쥐고 있었다. 그 누가 오더라도 절대 넘겨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레종데트르Raison d'etre…… 혹시 아는가?”
“프랑스어입니까?”
“그렇긴 하다만, 들어 본 적 없나?”
예고르는 허하게 웃었다. 얼핏 들어 본 것 같은 느낌은 있다.
하지만 프랑스어가 상류계층의 언어였던 19세기 러시아 귀족도 아니고, 그가 프랑스어를 알 리가 없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존재의 이유, 라는 뜻일세. 우리가 왜 존재해야 하는가.”
유리는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치며 중얼거렸다. 단어를 입으로 내뱉으면서 스스로도 정리하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건 다른 누가 가르쳐 줄 수 없는 것이겠지……. 그 중앙음악학교의 선생이 타티아나를 두고 천재이니 어쩌니 피아노를 반드시 해야 하니 저쩌니 하는 소리? 다 필요 없네. 무의미해.”
오로지 타티아나 본인만이 느끼고 확신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에 대한 어떤 근거도 논리도 없다.
하지만 무릎을 꿇은 타티아나에게 ‘네가 틀렸다.’라고 말 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없었으리라. 그 열정과 믿음. 뚜렷하게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유리는 다시금 기억을 떠올리며 웃었다.
“타티아나, 그 아이는…… 그 아이는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모르고 있네. 하지만, 무엇을 해야만 하는진 분명하게 알고 있는 듯했지…….”
유리가 코웃음 쳤다.
그는 선생 한 명이 치켜세운다고 해서 얼씨구나 그렇다면 가서 피아노로 세계를 재패하려무나, 하고 떠밀 만큼 시야가 좁고 현실감각이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결국 허락했다.
“난 알 수 있네. 타티아나는…… 그 선생이 없었더라도 언젠가 분명 내게 똑바로 전했을 걸세. 피아노를 하겠다고 말이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유리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렇게까지 하고 싶다면 해야지. 어떻게 하겠나?”
“유리 님…….”
“내 딸이 갑자기 어찌 된 영문인진 나도 잘 모르겠네. 하지만 나조차도 잘 모르겠는 스스로의 레종데트르를 내 딸이 희미하게나마 손에 쥐려고 하는데…… 내가 어찌 막겠는가?”
“…….”
“모르지 않네. 웃기는 소리처럼 들릴 거야. 그저 모두 내 착각일 수도 있겠지. 내 딸은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에 불과하고 난 그런 딸에게 넘어간 팔불출에 불과할 수도 있네.”
자조적으로 중얼거리던 유리가 불쑥 외쳤다.
“하지만 그게 뭐 어떻단 말인가?”
예고르는 이렇게 활기찬 눈을 한 유리를 본 기억이 없었다.
그간 해 왔던 타티아나에 대한 모든 고민이 한 번에 날아갔다. 이 정도로 기뻐하시는데 대체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그렇죠. 그게 뭐 어떻습니까?”
20년 지기의 두 남자는 서로를 바라보며 한참을 웃었다.
유리는 체통도 잃고 거의 킬킬거리며 자신이 믿고 아끼는 집사장에게 말했다.
“모든 전권을 위임하겠네. 어차피 해 줄 일, 자네가 생색이나마 내고 타티아나와 친해지는 게 훨씬 그림이 좋아 보이는군.”
“아닙니다, 유리 님. 아가씨는 분명 유리 님을 훨씬 좋아하실…….”
“물론 내 딸은 나를 더 좋아하겠지. 그러니 자네와 얼마큼 가까워진다 한들 아무렇지도 않아.”
너무 당당하게 말해서 황당할 지경이었다. 정말 사람이 바뀌어도 너무 바뀐 것 아닌가?
하지만 유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예고르 자네는 타티아나가 깨어난 후로 제대로 이야기도 해 본 적 없지 않나?”
자네가 언제까지고 내 딸을 믿지 못한다면 난 매우 슬플 걸세.
“한 번 직접 보게나. 그 눈으로.”
유리는 확고한 아버지의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