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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9화 (9/1,277)

##  9화

예고르는 쓰는 일이 드물던 별관을 대청소하고, 전문가들을 불러 연습실이 될 방엔 음향 장비들을 설치하고, 악보에서 메트로놈까지 피아노 교습에 필요한 것들을 차례로 구입해서 채워 넣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연습실을 보고 타티아나는 감격해서 울먹거리기까지 했다.

심지어 이 모든 것을 진두지휘한 것이 예고르라는 것에 더더욱 놀란 듯했다.

예고르는 타티아나를 볼 때마다 언짢은 듯한 기색을 비추었기 때문에 타티아나는 저도 모르게 예고르를 조금 어려워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이렇게까지 해 줄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예고르 블라디미로비치.”

물기를 머금은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예.”

“정말 고마워요.”

“별말씀을.”

타티아나의 올곧은 감사 인사에 예고르는 약간 쑥스럽기까지 했다.

그간 제대로 마주하지 않고 있었지만…… 정말 같은 사람이 맞는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

물론 타티아나의 이런 변화가 그녀 자신이 개심한 결과가 아니라 기억상실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을 잊지는 않았다.

예고르는 여전히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지금이라도, 바로 지금이기에 피아노 같은 것에 시간을 쏟지 말고 제대로 된 교육을 집중적으로 받게 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 여전히 그의 머릿속에 맴돌고 있었다.

하지만…….

“음…….”

심각한 표정으로 악보가 꽂힌 책장을 올려다보는 타티아나를 보니 그런 생각들이 모조리 증발해 버렸다.

그녀는 지금 취미로, 놀려고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팔짱을 끼고, 짝다리를 짚고, 올 게 왔다는 듯이, 하지만 결코 등 돌려 도망치지 않고. 앞으로 상대해야 할 적수들을 당당히 마주하는 자세로 이 방을 대하고 있었다.

수백 개의 악보, 수백 개의 음반, 클래식이 쌓아 온 수백 년의 시간. 그 자체가 그녀의 상대였다.

열네 살 소녀의 뒷모습에서 느껴지는 패기와 박력에 예고르는 신음성을 삼켰다.

문득 유리와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정말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안단 말인가? 저 작은 아가씨가?

예고르는 유리가 대체 타티아나의 어느 부분을 보고 확신을 얻었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저 진지함과 경건함은 결코 교육으로 만들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그 누가 저걸 빼앗을 수 있단 말인가.

* * *

일주일 만에 사고가 터졌다.

“집사장님! 타티아나 아가씨가 쓰러지셨습니다!”

“뭐라고?”

집무를 보던 예고르가 벌떡 일어서서 별관으로 달려갔다.

타티아나는 침대에 누워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밭은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이게!”

“벨카가 난데없이 집 안으로 뛰어 들어오더니 제 치맛자락을 물고 늘어지지 않겠습니까? 무슨 일인가 해서 벨카를 따라 별관으로 왔더니…… 아가씨가…….”

벨카는 베르체노프가에서 키우는 알래스칸 말라뮤트였다.

공격성이 약하고 순해서 경비견으로 쓰기엔 부적절했지만 가주인 유리는 벨카를 상당히 아꼈다.

그 벨카가 유리의 딸을 구해 낸 것이다.

“개가 사람보다 낫군…….”

벌써 밤 8시다. 이 늦은 밤에 연습실에 틀어박혀 있던 아가씨가 쓰러졌다는 것을 수십 명의 고용인들 중 아무도 몰랐는데 오직 개만이 알아차렸다.

옆에서 혀를 빼물고 헥헥이는 벨카를 보며 예고르는 약간의 패배감마저 느꼈다.

그간 타티아나의 건강은 많이 좋아졌다.

밤늦도록 별관 연습실에서 연습에 매진하는 것도 일주일 내내 있었던 일이다. 이제 슬슬 모든 게 일상으로 안착되었다고 생각할 법도 했다.

그렇게 안심하고 있을 때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예고르는 큰 문제가 아니길 빌며 곧장 주치의에게 전화를 걸어 타티아나의 상태를 설명하고 응급조치를 취했다.

다행히 몇 분 지나지 않아 타티아나는 빠르게 안정을 되찾았다.

예고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보다 가벼운 일인 것 같았다. 무리한 연습으로 인한 일시적인 증상이었으리라.

현 상황에 대한 정리를 마친 예고르가 돌연 고용인들을 향해 쌍심지를 확 켜려 할 때였다.

“예고르, 블라디미로비치…….”

얇은 이불을 덮고 누워 있던 타티아나가 예고르를 불렀다. 그러곤 눈이 마주치자 이어 말했다.

“제 잘못……입니다.”

“예?”

뭐라고 한 마디 하지도 않았는데 타티아나는 예고르가 어떻게 행동할지 다 알고 있다는 듯 말했다.

“용서해 주세요.”

“…….”

짧은 러시아어로 타티아나가 구사할 수 있는 것은 이 정도였다.

예고르는 조금 놀랐다.

결코 쉽게 넘어갈 사안이 아니었다. 당장 예고르 본인도 그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타티아나는 이 상황을 정확히 파악히고 고용인들을 변호하고 있었다.

정말 이 작은 아가씨가 지금 자신이 쓰러진 사태로 인해 책임질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인가?

“…….”

아니다.

결코 그런 것이 아니었다.

예고르는 피로로 어두워진 그녀의 눈 뒤에 존재하고 있는 감정을 읽어 냈다. 그리고 곧 경악했다.

용서? 변호? 결코 그런 말랑말랑하고 상냥한 것이 아니었다.

전의.

그 무엇보다도 뚜렷한, 꺼지지 않고 화려하게 불타고 있는 전의였다.

이번엔 어쩔 수 없이 패배했지만 이대로 물러설 생각은 전혀 없으니 아무도 싸움에 끼어들지 말라는 의지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이번 일에 여러 사람이 문제 되게 된다면 앞으로 그녀의 연습실에 사람이 상주하거나 연습 시간을 줄이는 등 여러 가지 제약이 붙을 확률이 높았다.

예고르 역시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었다.

타티아나는 그것이 싫은 것이다.

연습실에 틀어박혀서 피아노와 투쟁하는 시간은 그 누구에게도 방해받기 싫은 것이다.

타티아나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다만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부탁할 뿐이었다.

일을 크게 만들지 말아 주세요.

“아가씨…….”

예고르는 할 말을 잃었다.

대체 무엇이 세상 아쉬울 것 없는 베르체노프가의 영애를 이렇게까지 몰아붙인단 말인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예고르는 연거푸 한숨만 쉬었다.

* * *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아가씨.”

“예고르!”

피아노 소리가 멎고, 타티아나가 뛰어나와 예고르를 맞이했다.

“시간이 많이 늦었습니다. 그만 쉬시지요.”

“벌써요?”

타티아나가 놀라며 시계를 보았다. 시침은 저녁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녀는 조금 고민하는 듯하더니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지 해맑게 웃었다.

“예고르! 제가 피아노 쳐 줄게요.”

이 아가씨가…….

늦은 시간이라 눈치가 보이니까 예고르를 핑계로 조금이라도 더 피아노 앞에 붙어 있고 싶은 모양이었다.

예고르는 한숨을 쉬며 타티아나의 손에 이끌려 방으로 들어갔다.

싱글거리는 웃음을 매단 채, 피아노 앞에 앉은 타티아나가 말했다.

“뭐가 좋아요?”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이 듣고 싶군요.”

“아이, 그러지 말고요.”

타티아나는 까르르 웃었다. 이제 두 사람은 서로 가벼운 농담도 주고받을 정도로 친해져 있었다.

과도한 연습으로 타티아나가 쓰러진 날, 예고르는 어떻게 해야 할지 수없이 고민했다.

타티아나의 의지력도 존중했지만 집사장의 역할이라는 것 역시 엄연히 존재했다.

고민하던 예고르는 결국 타티아나와 테이블에 마주 앉아서 협상을 하기로 했다.

주된 내용은 시간 약속이었다. 개인 연습은 아침과 저녁, 두 번에 나눠서 하되 저녁엔 아무리 늦어도 9시가 넘지 않아야 했다.

물론 여기서 엄청난 의견 충돌이 있었지만 극적으로 9시 타협안이 통과되었다.

그 외에도 매 시간마다 적절한 휴식과 가벼운 산책, 적절한 간식 섭취 등등 수많은 조건이 붙은 서류가 완성되었다.

짧은 러시아어와 온갖 바디랭귀지가 동원된 성과였다.

예고르는 철저하게 그 서류에 사인까지 받아 내고야 말았다.

타티아나는 기가 막힌다는 듯한 얼굴이었지만 결국 예고르의 권고에 따라 두 장의 서류에 사인할 수밖에 없었다.

타티아나도 자신이 무리하고 있었다는 자각은 있었다.

그런 부분에서 예고르는 적당히 타티아나를 지켜 줄 능력과 상식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예고르는 타티아나의 가장 강력한 조력자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렇다면…… 아가씨가 추천하시는 곡으로 듣도록 하겠습니다.”

“음?”

“아무거나 괜찮습니다.”

“아하. 아무거나요?”

그제야 화색을 띠며 타티아나가 피아노 앞에 앉았다. 그러곤 악보도 없이 주저 않고 바로 연주에 들어갔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23번, 열정이었다.

예고르는 클래식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타티아나의 수준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 정도는 느낄 수 있었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부드럽게 건반을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조차 힘들어했지만 지금은 훨씬 유려하고 깔끔해져 있었다.

미하일 선생이 하루가 멀다 하고 타티아나를 천재라고 주장하는 게 빈말은 아니었던 듯하다.

기분 좋게 소나타에 빠져들어 가던 예고르가 문득 정신을 차렸다.

“……?”

타티아나의 얼굴에 어두운 음영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 좋아하는 피아노를 치면서도 입은 앙다물었고, 눈은 어딘가 먼 곳을 보는 듯 동떨어져 있었다.

초점은 분명히 있다. 하지만 그녀가 보는 것은 이 방 안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음산한 눈동자가 빛을 발한다. 피아노의 음색에 분노와 열망이 뒤섞여 휘몰아친다.

예고르는 아무런 말도 못 하고 그 광경을 지켜만 봤다. 도저히 끼어들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잠시 후, 연주가 끝나서야 예고르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아가씨?”

저도 모르게 예고르가 물었다. 타티아나는 햇살처럼 웃으며 예고르를 돌아보았다.

신뢰하는 집사장에게 보내는 따뜻한 미소. 그 어디도 이상한 것은 없었다.

하지만 예고르는 어딘가 모를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저 해맑게만 보였던 그녀의 웃음, 그 뒤편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는 무언가가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 * *

“타티아나 말입니까? 물론 천재죠.”

미하일 표도로비치 볼콘스키는 단언했다. 정말 그런 것인가? 예고르는 조금 더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가씨의 배움이 빠르다는 잘 알겠습니다만…… 중앙음악학교 편입이 얼마나 어려운지에 대해선 들은 바가 많습니다.”

미하일은 헛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물론 어렵죠. 하지만 충분히 가능합니다. 천부적인 감성과 리듬감은 본래부터 가지고 있었고, 지금 바닥을 다진 지 딱 세 달 만에 그녀가 얼마나 빠르게 성장했는지 아십니까?”

기분 좋다는 듯 미하일이 말했다.

“타티아나는 자신의 목표를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스스로 익혀 나가고 있어요.”

미하일이 이 정도로 말하니 예고르는 할 말이 없었다. 입을 다문 예고르를 보며 미하일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재능은 한마디로 설명하기도 힘들 지경입니다. 거의 초인적인 초견 능력과 리듬감. 요즘 말이 느는 속도를 보니 머리도 좋은 듯하더군요. 거기서 비롯되는 암보력. 독자적인 특유의 감성과 더불어 클래식을 전공한 사람에게서나 찾아볼 수 있는 아카데믹한 감성.”

미하일은 엄청난 찬사를 퍼부었다. 보기 드문 재능에 흥분한 목소리가 떨리기까지 했다.

“정말 하루 종일 해석에만 몰두해도 한두 줄 겨우 읽어 낼 수 있을까 싶은 것들을 타티아나는 음반을 한 번 듣고 악보를 한 번 보는 것만으로 바로바로 건반 위로 끌어냅니다. 말도 안 되는 재능이에요. 입학 후 타티아나를 어떻게 키워야 할지 오로지 그 고민뿐입니다.”

미하일은 중앙음악학교에 들어오는 것 정도는 아무런 문제가 아니라고 단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고르는 마냥 기뻐할 수 없어 신음성을 삼켰다.

중앙음악학교의 선생이 극찬할 정도의 재능과 연습하다가 쓰러질 정도로 강인한 의지력.

그런데도 대체 무엇이 그녀를 하여금 매일같이 사투를 벌이게 만드는가.

미하일을 보내고, 예고르는 복잡한 머리 그대로 별관의 연습실로 향했다. 타티아나는 아직 연습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아가씨, 식사하셔야…….”

열려 있는 문틈 사이로 본의 아니게 보고 말았다.

타티아나는 깜짝 놀라 예고르 쪽을 돌아보았다. 막 울었는지 눈가에 눈물 자국이 선명했다.

예고르는 할 말을 잃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방금 미하일은 타티아나에게 칭찬밖에 하지 않았다. 그가 야단을 치거나 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타티아나는 스스로에게 화가 나 있었다.

미하일 선생이 아무리 극찬을 하고 치켜세워도 자기 자신을 칭찬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예고르…….”

타티아나는 급히 눈가를 부비며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등허리를 쭉 펴고 말했다.

“식사 시간이군요. 가요.”

“…….”

예고르는 앞장서 나가는 타티아나를 붙잡았다.

“뭐예요.”

평소 같지 않은 불퉁한 목소리가 툭 튀어나왔다.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던 모습을 예고르에게 들켜 버린 것이 어지간히 싫었던 모양이다.

예고르는 그녀에게 조언을 건네고 싶었지만 스스로의 기준을 가지고 있는 타티아나에겐 그 어떤 말도 공허하게 전해질 것 같았다.

생각을 정리한 예고르가 조용히 말했다.

“한 곡 쳐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예?”

“아가씨가 제게 제일 처음 들려주셨던 그 곡으로.”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타티아나는 갓 일어나서 눈을 비비고 주변을 둘러보더니, 거동도 불편한 상태로 피아노부터 찾아 그 앞에 앉았다.

그러곤 자신의 모든 것을 끌어내어 쏟아붓는 것처럼 한 곡을 연주하고 그 자리에 쓰러졌었다. 모든 것을 만족한다는 듯이.

타티아나는 분명 음악과 함께 살아야 하는 사람이었다.

이토록 치열하게 음악과 싸우는 것 또한 음악과 함께 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일이리라.

그런데 지금, 타티아나는 음악과 싸우는 것을 목적으로 여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때 아가씨는 정말 멋있었죠.”

뜬금없는 예고르의 신청곡에 타티아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의아해하다가, 노려보다가, 결국은 웃어 버렸다.

“후후, 좋아요.”

그 웃음 뒤에 숨어 있는 우울함은 여전했지만, 타티아나는 청중을 나 몰라라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다시 돌아가 피아노 앞에 앉는 타티아나를 보며 예고르는 조금이나마 그녀가 평안하길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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