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화
시선이 느껴진다.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자리에 서서 떨었다.
스산하게 주위를 돌다가, 돌다가. 내려앉는 느릿하고 음울한 작은 새.
새가 부리를 뗀다.
난 그것이 너무 두려워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아악!”
비명을 지르며 이불을 걷어찼다.
“하악, 하악…… 하…….”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쿵쿵거리는 심장 소리가 너무 커서 몸이 터져 버릴 것 같았다. 두 눈을 감은 채 한참을 그대로 있었다.
“후…….”
호흡이 조금 안정되자 짜증부터 확 치밀었다. 온몸에 식은땀이 흥건하다. 축축하게 젖은 잠옷이 기분 나쁘게 달라붙는다.
스마트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5시가 갓 넘은 이른 시간. 동이 터 오고 있었다.
스케줄 일람에 메시지가 하나 떠 있다.
[실기일]
한숨을 푹 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슬슬 일어날 시간이었다.
얇은 가운만 하나 걸치고 방 밖으로 나오니 복도에 나제즈다가 있었다. 그녀는 날 보더니 그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아가씨! 또 그런 차림으로 □□□□□……!”
“잘 잤어요? 나제즈다.”
“저야 잘 잤…… □□□□ 아가씨. 무슨 소리 못 들으셨어요? 아가씨 방에서…….”
“잘 모르겠네요. 잘못 들으신 게 아닐지?”
“분명 들었는데…….”
메이드인 나제즈다는 이쪽 복도와 내 방을 전담하는 사람이라 얼굴을 꽤나 자주 보는 편이었다.
이럴 땐 빨리 도망치는 게 상책이다.
“전 샤워할게요.”
“예? 아, 예. 아가씨. 도와드릴까요?”
“괜찮아요.”
그녀를 보내고 욕실로 들어섰다.
번쩍거리는 욕실도 이제는 평범하게 느껴졌다.
이 몸으로 살게 된 지 반년 남짓. 많은 것이 바뀌었다. 나는 러시아어를 구사할 수 있게 되었고, 여자로서 사는 것에도 꽤 익숙해졌다.
거울을 보니 가운을 걸친 내가 서 있었다.
반년 사이 머리가 더 길었고 키도 조금 더 컸다.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단지 연주자로서 활동하기엔 더없이 약한 몸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재활도 열심히 하고 산책도 자주 했지만 난 여전히 허약했다.
예고르는 내가 운동을 하길 바랐지만, 아주 작은 부상도 곧 은퇴로 이어지는 연주자들은 운동도 제대로 할 수가 없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주어진 조건만으로 피아노에 매달렸다. 그렇게 반년 동안 느낀 점이 많았다.
난 불안했다.
만약 운명이 내게 피아노를 허락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
답이 나오지 않는 생각은 미뤄두자.
난 가운과 슬립을 벗고 샤워룸에 들어가 따뜻한 물에 대충 샤워를 했다.
돌아가신 어머니, 베르체노바 부인 대신 날 가르친 마가리타 선생님이 보면 또 어마어마한 잔소리를 늘어놓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저녁이라면 또 모를까, 아침부터 샤워가 아닌 목욕을 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시간 낭비였다.
배운 대로라면 그 어떤 일이 있더라도 샤워만 하고 치우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제대로 몸을 씻는 방법은 훨씬 더 복잡하고 사치스러웠다.
기본적으로 무슨 입욕제들을 종류별로 다 넣어서 들어가면 마법 같은 거라도 걸릴 것 같은 욕조를 만든 다음 거기에 들어가서 무슨 스트레칭 무슨 마사지를 순서대로 시행하고 나와서는 바디 워시에 로션에 에센스 오일에 영양크림에…….
답도 없다.
그 어마어마한 공정을 빠짐없이 스스로 해야만 내 의무를 다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난 타협안을 찾기로 했다.
내 이름은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
그와 동시에 여전히 의식주가 안 되고 뻔뻔하고, 스스로를 연주자라고 정의하는 사람이었다.
간단하게 샤워를 하고 드라이도 화끈하게 마친 후 방으로 돌아가서 옷장을 열었다.
지금 내게 가능한 가장 가벼운 복장은 네글리제 원피스 정도였다. 카디건도 함께 꺼냈다.
모스크바의 8월은 이게 진짜 여름이 맞나 싶을 정도로 선선했다. 더군다나 이런 새벽이면 조금 추웠다.
대충 옷을 입고 저택을 나왔다. 당연히 아무도 없었다.
베르체노프가는 저택을 나온다고 자동차가 씽씽 다니는 도로가 나오거나 하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전부가 사유지라고 보면 된다.
상쾌한 새벽 공기를 마시며 정원을 얼마나 걸었을까, 누군가 날 알은체했다. 난 반갑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벨카!”
“왕!”
벨카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꼬리를 흔들기에 머리를 쓰다듬었고, 내 앞에 앉기에 턱을 쓸어 주었더니 종국엔 드러누웠다.
음, 아주 욕심쟁이시로군요. 하지만 제가 이 정도 서비스는 해 드려야죠.
신나게 배를 간지럽혔더니 헥헥거리며 거의 숨넘어갈 정도로 좋아라 했다. 덩달아 조금 우울했던 나도 기분이 좋아졌다.
벨카는 똘망똘망한 눈과 복실복실한 털이 사랑스러운 알래스칸 말라뮤트였다.
이 저택엔 벨카 외에도 많은 개와 고양이, 심지어 말까지 있었지만 난 그중에서 벨카와 가장 친했다.
그도 그럴 것이 벨카는 내 생명의 은인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에게 피아노를 하고 싶다고 말한 뒤, 중앙음악학교 입학이라는 목표가 생긴 나는 본격적으로 기초를 다지기로 했다.
그리고 아버지와 예고르가 별관에 내 개인 연습실을 만들어 주었는데, 마음껏 연습할 수 있다는 사실에 하루 종일 피아노를 붙잡고 있다가 현기증으로 쓰러졌고 벨카가 사람을 데려와서 날 구해 줬다는…… 그런 웃기지도 않은 이야기가 우리 사이에 있는 것이었다.
“기분 좋으십니까?”
“왕!”
그런 일이 없었더라도 난 분명 벨카를 좋아했을 것이다.
이 녀석 너무 귀엽거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벨카와 놀다가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마성의 견공 같으니라고……. 하마터면 아무것도 못 하고 아침을 다 보낼 뻔했다.
미안해, 벨카. 너는 상팔자겠지만 나는 이 세상에 원죄를 안고 태어난 인간에 불과하거든……. 눈물을 머금고 벨카에게 이별을 고한 뒤 별관으로 향했다.
“…….”
아무도 없는 별관. 말이 별관이지 어지간한 저택만큼 큰 건물이다.
수십 개의 방 중 내가 지난 반 년간 들락날락거린 방은 1층의 구석의 한 방이었다.
방문을 열자 그곳에 익숙한 광경이 있었다.
소리도 좋고 건반도 착 달라붙는 피아노.
벽 한편에 세워진 책장 가득이 꽂혀 있는 수많은 악보들.
그 옆에 또 가득 쌓여 있는 음반들.
수백만 루블을 호가하는 오디오 시스템.
그 모든 것이 날 위해 준비되어 있는 것들이었다. 처음엔 여기가 천국인지 현실인지 헷갈려 거의 울 뻔했지만 이젠 익숙해졌다.
피아노 앞에 앉아 건반 덮개를 올렸다.
연습의 시작은 비슷비슷하다. 하농 연습곡에서 바흐 평균율. 다시 하농 혹은 모차르트 소나타. 가끔은 바르톡의 미크로 코스모스.
모든 곡을 다 칠 수는 없기에 중요한 테크닉 연습곡만 추려서 치는 편이었다.
“음…….”
오늘은 컨디션이 꽤 괜찮다. 간단하게 손가락을 푼 다음 스케일 연습을 시작했다.
12조 장음계와 그에 따른 화성단음계와 가락단음계, 반음계를 끊임없이 부드럽게 치는 연습이다.
물론 이게 끝이 아니다. 그다음은 아르페지오, 4중 트릴, 3도 레가토, 옥타브 스케일, 옥타브 아르페지오…… 인간의 손을 피아노에 맞게 개조하기 위해 존재하는 연습곡들이다.
당연히 인간의 사정 따위 고려하진 않는다. 음계를 계속 바꿔 가며 치다 보면 그야말로 끝도 없는 안드로메다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마저 든다.
처음엔 딱 30분 만에 녹초가 되었지만 이젠 상당히 익숙해졌다.
바흐로 넘어오면 인벤션, 신포니아, 평균율. 각각 두 개, 세 개, 네 개의 독립된 선율을 치는 곡들이 있다.
처음엔 인벤션을 깔끔하게 치는 것조차 어려웠지만 이젠 거의 평균율만 집중해서 치는 편이다.
이 정도면 기본 다지기는 꽤 성공적이라 할 수 있었다.
종종 찾아와 내 레슨을 봐주는 미하일 선생님은 날 거의 천재로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분은 여태껏 내가 독학을 하다가 딱 6개월 집중적으로 연습한 줄로 아시니 그럴 만도 하다.
이렇게 단기간에 수준을 끌어 올릴 수 있었던 이유는 내 머릿속에 피아니스트로서의 기억이 있기 때문이었다.
하농도 바흐도 겨우 6개월만 연습한 것이 아니다. 지난 기억을 모두 합한다면 거의 10년 정도 난 여기에 몰두했었다.
난 어떠한 방법으로 기초를 닦아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알렉산더 테크닉으로 신체의 균형을 찾고, 손목을 릴렉스하고 손끝을 컨트롤한다.
감각만으로도 제대로 되었는지 잘못되었는지 파악하고 잘못된 습관이 들지 않도록 자체 교정이 가능했다.
이것만으로도 타인이 가르쳐 주는 것과는 효율 자체가 달랐다.
덕분에 난 어마어마한 속도로 성장할 수 있었다.
워밍업을 마친 나는 입시곡으로 준비한 하이든의 소나타를 시작했다. 4분 정도의 곡은 그리 까다롭지 않았다.
이어서 쇼팽의 화려한 변주곡도 쳐 봤다. 미묘한 부분이 없는 건 아니었으나 나름 화려하다 해 줄 수 있었다.
이 정도면 훌륭하지 않나?
러시아 최고의 중앙음악학교 입시를 내가 치러 본 것은 아니지만, 이 나이 때쯤 피아노로 한국 최고 예술고등학교의 입시를 뚫어 본 내가 듣기에 이 정도면 중앙음악학교라고 못 갈 건 없어 보였다.
마지막으로 자유곡으로 준비한 곡을 시작했지만 바로 그만두었다.
“……지저분해.”
모든 게 좋지만은 않았다.
과거의 기억을 토대로 현재 스스로의 수준에 대해 보다 정확하게 파악하고 앞으로 청사진을 그릴 수 있는 만큼, 난 불안해졌다.
터를 닦고, 잡석을 고르고, 기초 공사를 하다 보면 자연스레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여기에 세워질 건물을 얼마나 높게, 견고하게 지을 수 있을지. 모든 건축물의 한계는 그 기반이 결정한다.
작은 주택이나 지을 수 있는 기반에 빌딩을 올릴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난 알 수 있었다.
벌써부터, 처절하게 체감하고 있었다.
“하아…….”
신경질적으로 손을 뻗어 건반을 눌렀다. 딩, 하고 탁한 소리가 났다. 이 소리가 정말 내 것인가?
내가 부를 수 있는 노래는 결코 이따위 것들이 아니었다.
“…….”
지난 반년간은 연주자로서 내 마음대로 살아 본 시간이었다.
타티아나로서 지켜야 할 것들도 잘 지키려 노력했지만 무엇보다 연주자로서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필수적으로 배워야 할 것들을 배운 뒤에는 거의 온종일 피아노에만 매달렸다.
내가 지금 여기에 다른 아이의 몸을 빌려 존재하는 이유가 다름 아닌 피아노에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록하지만은 않아서, 난 내가 할 수 있다고, 해내야만 한다고 믿었지만…… 이따금 가슴 한편이 싸늘해짐을 느꼈다.
일부러 무시하고, 내팽겨쳐 두었지만…… 중앙음악학교 입학을 앞둔 이젠 정말 마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지막까지 미뤄 두었던 중요한 질문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앞으로도 계속 내 마음대로 해도 되는 걸까?
할 수 있을까?
반년 전이었다면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할 수 있다고 부르짖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 것이 아닌 몸을 거의 억지로 이끌고 여기까지 오면서, 난 종종 고개를 가로젓게 되었다.
육체적 조건과 재능의 한계를 깨닫는 데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팔이 저릿거리고 손목이 힘없이 꺾일 때마다 지독한 절망감을 느낀다.
모르겠다, 이젠.
피아노에 내 얼굴이 비쳤다. 기분이 나쁜 듯 찌푸려져 있던 눈가에, 갑자기 웃음기가 스며들었다.
누군가가 비웃는 듯한 목소리가 들린다.
그렇게 네 것을 말아먹고도 정신을 못 차리고 왜 미련이 남아서 아직도 추하게 버둥거리고 있지? 웃겨 정말. 주제 파악도 못 하고, 무식하고 멍청해.
반년이나 허송세월을 하고 나서야 그딴 소리를 하는 거야? 설마 내가 내 걸 너한테 내주었다고 해서 네 기대에 부응해 주리라 희망한 건 아니겠지?
대체 언제부터 착각을 한 거야?
“…….”
이제 와서 다 접고 살수는 없는 노릇이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하지만 덜컥 실기에 붙어 중앙음악학교에 가자니 그건 또 그것대로 아찔하다.
붙는 게 문제가 아니라 내가 그 괴물들 틈바구니에서 이 몸으로 대체 뭘 어떻게…….
멍하니 앉아 건반만 툭툭 건드리고 있는데 벨소리가 울렸다. 미하일 선생님이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선생님.”
- 혹시나 해서 전화했다. 타티아나. 잠은 잘 잤나?
러시아에서 가장 유명한 음악학교 중 하나인 중앙음악학교의 선생님이 실기 날 개인적으로 모닝콜까지 해 주다니 황송할 따름이다.
최대한 밝게 대답했다.
“그럼요!”
- 목소리 좋구나. 오늘은 나도 □□□□□ 많아서 전화로밖에 □□□□ □□□□□.
“별말씀을 다 하시네요.”
이러저런 대화가 오갔으나 난 러시아어가 아직도 서툴렀고 미하일 선생님은 그런 날 붙잡고 긴말 해 봐야 소용없다는 걸 아는 사람이었다.
- 그럼 실기 잘 치르고…….
“선생님.”
전화가 끊어지기 직전, 불현듯 선생님을 불렀다.
- 왜 그러지?
“…….”
하지만 막상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가닥이 서지 않았다.
불러 놓곤 아무 말도 않자 선생님이 말했다.
- 실기를 앞두고 많이 불안한 모양이구나.
“아뇨, 그게 아니…….”
- 연습하던 대로 하면 된다. 긴장 풀거라.
더듬거리며 말하려는 차에 미하일 선생님이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 다음에는 교실에서 보자.
난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