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화
“학교까지 모시겠습니다, 아가씨.”
저택 앞으로 나오자 양복 차림에 선글라스를 쓴 세 명의 남자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검은색 벤츠도 함께했다.
밖으로 나갈 땐 반드시 경호가 붙어야 한다는 말에 막연히 영화 같은 장면을 상상했다.
하지만 진짜 세 명이나 되는 남자가 따라붙으니 조금 무서워질 지경이었다.
이 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직도 이럴 때면 소시민적 소심함이 고개를 들었다.
결국 내 입에서 나온 것은 덜떨어진 소리였다.
“누구세요?”
“아가씨! □ □□□□□□□! 또다시 기억상실이라도 걸리신 겁니까?”
키가 제일 큰 남자가 선글라스를 벗으며 말했다. 그제야 알아봤다. 저택의 보안을 담당하는 경호원들 중 한 명인 빅토르 이바노비치 키셀로프였다.
가끔 볼 때면 그는 내 팬 1호를 자칭하며 넉살 좋게 친한 척해 오곤 했다.
겉보기엔 훤칠한 미남이고 실력도 꽤 괜찮다는 듯하지만 언행이 조금 가벼운 사람이었다.
지금만 해도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르는 것 같지 않은가?
아니나 다를까, 옆에 있던 남자가 빅토르의 옆구리를 후려쳤다. 빅토르가 옆구리를 부여잡고 끙끙거리는 사이 그를 때린 남자가 대신 내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괜찮아요. 이제 알겠네요. 소로킨 니콜라예비치?”
“예. 말씀 편히 하시죠.”
“음…… 소로킨. 그러면 제가 정답 맞혔으니까 선글라스 벗어 보세요.”
“선글라스는 왜…….”
“얼굴 잊어버렸어요.”
소로킨 니콜라예비치 게라시모프는 운전기사였다. 아버지가 차로 이동할 일이 있으면 운전을 하는 것이 그의 일이다.
하지만 소로킨은 척 봐도 보통 운전기사는 아니었다.
떡 벌어진 어깨와 이마에 난 흉터를 보면 여기 오기 전에 택시 같은 걸 몰진 않았을 것 같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남자가 남았다. 떡대 좋은 빅토르나 소로킨과는 달리 조금 왜소한 체격의 남자였다.
내가 살짝 눈짓을 했는데도 그는 묵묵부답이었다.
결국 직접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거기 계신 분은?”
“아, 이쪽은 제 □□□□□. 신경 쓰실 것 없…….”
“빅토르는 조용히 해 보세요.”
“왜 저만…….”
“괜찮으시다면 선글라스 좀 벗어 보시겠어요?”
부탁을 하니 그제야 남자가 선글라스를 벗었다. 일견 평범하게 생겼지만 깊게 들어간 눈은 그 역시 보통 사람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굳이 말하자면 경호원보다는 검사나 회계사가 어울리는 얼굴이었다.
그가 고개를 까딱해 보이며 말했다.
“자하르 야코비치 자이체프입니다.”
“반가워요, 자하르 야코비치. 우리 처음 보는 거죠?”
“예.”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예.”
“…….”
“…….”
“…….”
이 사람 나한테만 이러는 건 아니겠지? 힐끗 빅토르는 보니 한숨을 푹푹 쉬고 있다. 다행히도 원래 붙임성 없는 사람인 모양이다. 다행인 게 맞나?
어쨌든 어마어마하게 호화로운 등굣길이 될 것 같았다. 이것도 익숙해지는 날이 오겠지…….
“가시죠.”
소로킨이 검은색 벤츠의 뒷좌석 문을 열어 주었다. 살짝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하고 올라탔다. 소로킨은 운전석에, 자하르는 조수석에 앉았다.
빅토르는 내 옆자리였는데 앉자마자 품속에서 권총을 꺼내 점검하기 시작했다.
검은색 광택에 살짝 질려서 슬금슬금 문 쪽으로 붙자 룸미러로 그걸 발견한 소로킨이 냅다 소리를 질렀다.
빅토르는 아차 싶었는지 다시 권총을 집어넣었다. 이 사람 너무 마이페이스라서 좀 그렇다.
“음…….”
한바탕 소란이 지나가고 나서야 내 좌석을 살펴볼 수 있었다. 생전 처음 타 본 벤츠는 무슨 차가 아니라 비행기 좌석 같은 느낌이었다.
주변의 버튼도 창문 여닫는 것 외에도 뭔가 많았다.
조금 신기해하며 뭔지 모를 버튼을 누르니까 갑자기 내 머리받침이 뒤로 넘어가더니 좌석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깜짝 놀라기도 잠시, 이게 마사지 기능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순식간에 난 마사지 기능에 빠져들었다.
“아가씨…… 그 나이에 벌써 마사지에 맛들이시면 안 되는데…….”
“가만있어 봐요, 빅토르. 이거 좀 더 세게 안 되나요?”
“제발…….”
빅토르는 난처하다는 듯 말꼬리를 흐렸으나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무슨 자동차에 이런 게 달려 있어? 이게 말이 되나? 5단계로 세분화된 다양한 마사지……?
난 놀라워하며 마사지 기능을 만끽했다. 늘 몸이 차갑고 저린 내게 있어서 이런 마사지는 일종의 의료서비스였다.
“이거…… 장난…… 아닌데……? 으르르르…….”
“맙소사, 아가씨.”
빅토르가 탄식했다. 웃기는 소리지만 이 와중 약간의 승리감마저 느꼈다.
당신이 막 나가는 사람이라는 건 잘 알겠지만 나도 막 나가기로는 어디 가서 안 꿀리는 사람이야.
지난 반년간 명문가의 아가씨로 교육받았다.
아주 기초적인 걸음걸이부터 시작해서 온갖 행동 양식, 교양 있는 말씨까지 모조리. 마가리타 선생님이 무척이나 신경을 써 주었다.
하지만 그렇게 수준 높은 교육을 받았어도 원래 채신머리없는 본성이 어디 가진 않는 것이었다.
아가씨의 체면이고 뭐고 그렇게 한동안 몸에 쌓인 피로를 풀고 있는데 앞자리에서 소리가 들렸다.
“풉……!”
뭔가 싶어 고개를 살짝 드니까 내 바로 앞자리, 조수석이었다.
내 옆의 빅토르는 무슨 귀신이라도 본 듯한 목소리로 망연히 중얼거렸다.
“자하……르……?”
“푸……크크큭…… 마사지…… 아가씨…… 큽…….”
그렇게 무뚝뚝하던 자하르가 소리 내어 웃고 있었다.
난 첫인상이 조금 차가웠던 그를 웃겼다는 사실이 조금 즐거웠지만 소로킨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자하르.”
“픕…… 죄송, 죄송……합니다…….”
끝까지 말끝을 푸들거리는 그를 보며 소로킨이 다시금 한 마디 하려고 장전하는 순간, 내가 끼어들었다.
“괜찮아요, 자하르. 제가 웃기면 웃을 수도 있죠. 안 그래요?”
“아니, 아가씨…… 지금 잘하신 게 아닌데요…….”
“빅토르는 자하르를 웃겨 본 적 있나요?”
거의 확신을 가지고 물어본 질문이었다. 예상대로 빅토르는 오만상을 쓰며 고민하더니 대답했다.
“없……습니다.”
“그럼 제가 빅토르보다 낫네요.”
“하아…… 유리 님이 절 죽일 겁니다…….”
침통하게 말하는 빅토르가 너무 재미있어서 난 웃고 말았다.
그 후로도 난 괜히 빅토르에게 농을 걸며 첫 외출이자 등굣길을 즐겼다. 빅토르도 적당히 내 장난을 받아 주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소로킨이 말했다.
“도착했습니다.”
난 창밖을 내다보았다. 차이코프스키 모스크바 국립 음악원 부속 중앙음악학교는 모스크바 음악원과 같은 캠퍼스를 공유하고 있진 않았다.
몇 블록 떨어진 곳에 홀로 위치해 있는 것이다.
당연히 모스크바 음악원보다 더 작았고 부지도 좁았지만, 5층의 거대한 건물은 사방팔방에 위치한 건물들 틈바구니에 들어서 있으면서도 그 존재감을 보란 듯이 표출하고 있었다.
그 앞에 차를 세운 소르킨이 날 내려 주고는 깍듯이 인사했다.
“다녀오십시오, 아가씨. 저희도 □□□ □□□ □□□ □□□□□□□.”
소로킨이 날 배웅했다. 학교 안까지 따라붙어서 경호하진 않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경호원 세 명을 대동하고 학교를 다닐 자신은 없었기 때문이다.
“다녀올게요.”
난 세 명에게 짧게 인사를 건네고, 중앙음악학교로 들어갔다.
* * *
정문에 들어서자마자 입구에서부터 인상 험악한 아저씨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학교 안에 있는 경비원이 이렇게 무서워도 되나 싶을 정도로 무시무시했다.
그냥 지나가려다가 눈이 마주쳐서 먼저 인사했다. 마가리타 선생님에게 배운 교육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신가!”
의외로 아저씨는 웃으며 내 인사를 받아 줬다. 상상 이상으로 활기차게 받아 주니 단순히 인사를 나눴을 뿐인데 기분이 좋아졌다.
안으로 들어와선 두리번거리며 구경했다.
여긴 중앙음악학교, 그야말로 음악에 미친 귀재들만 모이는 곳이다. 유학을 와 버린 기분이었다.
평소 막 그렇게 유학을 가고자 하는 열망은 없었지만 막상 이렇게 눈앞에 주어지니 느껴지는 게 달랐다.
잘 적응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난 천천히 복도를 거닐었다. 방학이라 그런지 사람은 별로 없었다.
1층을 그렇게 탐색하면서 시험장을 찾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의 애타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 미치겠네, 진짜.」
자동적으로 고개가 휙 돌아갔다.
입구 쪽이었다. 난 무엇에 홀린 것처럼 그쪽으로 향했다.
코너에 붙어 고개만 빼꼼 내밀고 살펴보니 입구에 서 있던 아저씨와 커다란 남자애 하나가 설전을 벌이고 있었다.
“러시아어로 해라!”
「시험장…… 시험장이 뭐라고 하더라. □□□? □□□□?」
“무슨 소리냐, 도대체.”
러시아어처럼 들리지도 않는 뭔 되도 않는 웅얼거림을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난 알아들을 수 있었다.
시험장을 애타게 찾는 목소리는 한국어였기 때문이다.
한 발자국 더 나가니 그 남자애와 눈이 마주쳤다.
내가 빤히 바라보자 그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더니, 고개를 탈탈 털었다. 무슨 개 같다.
선하게 생긴 얼굴에 앳된 기가 아직 가시지 않았다. 얼핏 보니 중고등학생쯤? 그런데도 키가 거의 180은 되어 보였다.
난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그쪽으로 걸어갔다.
만리타향에서 고생하는 꼬맹이를 돕겠다든가…… 그런 오지랖에서 비롯된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냥 정신을 차리고 보니 끼어들고 있었다. 아, 이게 오지랖인가.
“저기…….”
내가 말을 걸자 경비 아저씨의 얼굴이 순식간에 풀어졌다.
“무슨 일이지?”
“그쪽 분, 실기시험장을 찾으시는 것 같은데요.”
“시험장? 아, 그 소리였나.”
“제가 저분을 안내해 드릴게요.”
“그렇게까지 할 건…….”
“괜찮아요. 저도 실기시험장에 가는 길이거든요.”
경비 아저씨는 그렇다면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 남자애를 인계받고 따라오라고 손짓했더니 그는 우물거리면서 조금 따라오나 싶더니 날 멈춰 세웠다.
「잠깐만요.」
아무 말도 않고 쳐다보았다.
알아들었다는 티는 내지 않고, 그저 뒤에서 뭐라고 부르길래 반응했다는 듯한 표정으로 뚱하게 쳐다보고 있자니 남자애가 절찬리 삽질을 시작했다.
「저기…… 전 피아노과에 가려는데…… 입시장 어딘지……. 아 나, 이런다고 알아들을 리도 없고……. 그, □□□□ □□□□ □□□?」
한국어로 중얼거리다가 이게 아닌가 싶었는지 더듬거리면서 러시아어를 하는 걸 보니 분명 공부를 하긴 한 것 같은데 아직 누군가와 대화하는 것은 서툰 듯했다.
서툰 정도가 아니라 발음이 너무 엉망이라 무슨 소린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다.
그래도 어물거리는 폼이 재밌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서 싱글거리며 보고 있자니 손짓 발짓을 하다가 결국 천장을 바라보며 죽고 싶다는 표정을 짓는다.
조금 더 장난을 쳐 보는 것도 재미있겠지만 난 이 애를 너무 괴롭히진 않기로 했다.
“피아노. 따라와.”
러시아어로 말하며 손짓했다. 반년 만에 한국인을 처음으로 만나서 반갑긴 했지만 그렇다고 한국어나 영어로 말할 순 없었다.
난 유학을 온 것이 아니라 러시아에서 나고 자란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로서 입학하게 되는 것이다. 이 점은 확실히 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다행히 남자애는 내 말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한시름 놓았다는 듯 안도하는 것이 온 얼굴에 드러나는 게 우스워서 나는 또 웃었다.
시험장으로 가면서 난 일부러 남자애한테 이것저것 러시아어로 물어보았다.
“이름이 뭐야?”
“어…… 한승우.”
“어디에서 왔는데?”
“……뭐라고요?”
“심각하네.”
이 정도로 간단한 말도 못 알아들으면 고생길이 훤한데……. 보통 입학 전에 1년 정도 어학 공부를 마치고 오게 되어 있는데 대체 공부 안하고 뭘 한 거야?
음악학교라서 해서 온종일 악기만 붙잡고 사는 게 아니다.
기본적으로 음악의 역사부터 시작해서 작곡가들에 대한 공부…… 음악이론으로 넘어가 대위법, 화성학, 악식론, 선법, 악기론 등등 어마어마하게 많다.
여긴 대학교도 아니고, 피아노학과이기 때문에 심도 있게 배우진 않겠지만 그래도 결코 쉽진 않을 것이다.
더 문제인 것은 배워야 할 것이 음악에 국한된 교과목들뿐이 아니라는 점이다.
음악가들을 길러 내는 곳이지만 이곳 역시 학교이기 때문에 당연하다는 듯이 러시아어, 수학, 과학, 종교 등 평범한 교과목들도 커리큘럼에 짜여 있다.
책을 놓고 공부해야 하는 시간이 상당히 많다.
그런데 러시아어를 이 정도로 못한다면 설령 실기를 잘 쳐서 붙는다고 해도 답답해진다.
“……에휴.”
남 걱정 해 주다 보니 그럴 상황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엉망이긴 마찬가지다.
전부 러시아어뿐인 초급 교재로 치열하게 6개월 만에 배운 것치곤 잘하는 편이었지만 솔직한 말로 지금 눈앞에 러시아어 교과서를 들이밀면 옆에 사전을 두고 읽어야 했다.
그나마도 마가리타 선생님이 열성적으로 가르쳐 주지 않으셨다면 아직도 유치원생 수준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나도 그렇지만…… 너도 참 대책 없구나…….”
“여권이요?”
“……말을 말자.”
반년 만에 만난 한국인 유학생 친구는 내 모든 걱정을 다 빼앗아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