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화
대화가 제대로 안 되는 나와 한승우는 그 이후론 별 말없이 실기시험장에 도착했다.
원래는 연습실로 쓰는 곳인데 이 시즌이 되면 시험장으로 변신하는 듯했다.
한승우와 함께 간이 안내데스크로 보이는 곳으로 가니 여성 한 분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지원생분들이신가요?”
“예.”
“지원 서류랑 신분증명서 주시죠.”
서류라 할 건 별것 없었다. 미리 준비한 지원서랑 내 이름이 있는 입학안내서, 14세가 되면 받을 수 있는 신분증 정도가 전부다.
걱정이던 한승우도 서류는 꼼꼼히 준비했는지 내가 하는 것을 보곤 가방에서 서류 뭉치를 꺼내 내밀었다.
잠시 후 우리는 번호표를 하나씩 받을 수 있었다.
나는 10번, 한승우는 9번이었다.
그렇게 지원생이 된 우리는 살짝 주저하며 실기장 옆 교실 문을 열었다.
“…….”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휙 날아와 꽂혔다. 이렇게 사람이 많을 줄은 모르고 있다가 깜짝 놀랐다.
교실에 대기하고 있던 것은 비단 열댓 명의 학생뿐이 아니었다.
학부모로 보이는 어른들이 학생보다 더 많이 있었다. 지금 여기에 보호자 없이 온 건 나랑 한승우뿐인 것 같았다.
가족들 모두 오늘 중요한 일이 있어서 못 온 것이지만 갑자기 조금 서글퍼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빅토르라도 데리고 올 걸 그랬다.
“너라도 있어서 다행이다, 동지.”
“?”
못 알아듣는 한승우를 이끌고 구석에 가서 앉았다. 그때까지도 수십의 시선이 우리를 따라왔다.
하지만 한승우는 주위를 휙 둘러보고는 스마트폰을 꺼내 내려다보았다. 별로 위축된 것 같진 않았다.
음악에 미쳐서 이 먼 타지까지 유학을 올 마음을 먹었다면, 자기 실력에 자신만 있다면, 겨우 이 정도 시선에 움츠릴 이유가 없는 것이다.
나 역시 시선들을 신경 쓰지 않았고, 우리 쪽을 향하던 흥미 어린 시선들은 곧 사그라들었다. 그제야 다시 교실에 이러저런 대화가 돌아왔다.
드문드문 들리는 대화 내용들은 거의 비슷비슷했다.
그 대부분이 오늘 먹은 아침이 얹힌 것 같다, 실기곡 다 까먹은 것 같다, 미미파레미도레솔. 대충 뭐 그런 귀여운 소리들이었다.
모두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실기를 앞두고 긴장해 있는 학생들, 옆에서 흐르는 피아노 소리, 가만히 앉아 듣고 있으면 묘하게 기시감이 든다.
곧 있을 연주, 엄격한 심사위원들, 난 이 익숙한 분위기에 조금씩 흥분되는 것을 느꼈다.
짜릿한 열기가 목 뒤를 타고 오른다.
오로지 음악에 살고 음악에 죽는, 이 세계에 돌아왔다는 실감.
바로 이곳이 내가 살던 세계였다.
오늘 아침만 해도 진짜 모조리 다 그만둘까 진지하게 생각했던 것이 거짓말인 것처럼 느껴졌다.
일단 들어가서 생각해 보라는 예고르의 말은 정확했다. 대체 이곳이 아닌 어디에서 내가 살아 있음을 느끼겠는가?
예고르가 날더러 군인 같다고 했던가. 그래서 더더욱 이렇게 느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정말…… 한번 전장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그런 기분이었다.
각오는 되어 있나?
단지, 이번엔 내 마음대로 죽지 못한다는 것만이 분명했다.
내가 연주자로서의 나를 지켜 내지 못한다면 그다음은 타티아나밖에 남지 않는다. 타티아나의 삶이 날 존속시킬 것이다.
이러저런 상념을 되뇌며 멍 때리고 있는데 앞자리에 있던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나이는 내 또래로 보이는데 미소년 소리를 꽤나 들었을 법한 금발의 남자애였다.
눈이 마주친 건 정말 한순간이었다. 그런데 이 녀석, 곧장 이쪽으로 다가왔다.
잠깐만, 뭐야, 진짜로 지금 나한테 오는 건 아니겠지?
“올해 편입생?”
녀석이 내 바로 앞자리까지 오더니 의자를 쭉 빼선 털썩 앉았다.
세상에, 뭐 이렇게 붙임성이 좋아?
바로 눈앞에 시원스럽게 웃는 얼굴이 보였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니 조금 부담스럽긴 했지만 딱히 어려워할 이유는 없었다. 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그래요.”
“몇 학년□□ □□□□□?”
“8학년요.”
“이야, □□ □□□□?”
아, 말이 너무 빠르다. 잘 못 알아듣겠다. 여전히 나는 상대방이 조금만 말을 빨리 하면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편이었다.
녀석은 푸른 눈을 빛내며 불쑥 손을 내밀었다.
“오늘 □□□ □□□. 내 이름은 에르네스트 스테파노비치 베샤스트니흐. 넌?”
베샤스…… 뭐?
여태 들어 본 이름 중에 가장 어렵게 들렸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라고 해요. 반가워요.”
어쨌거나 인사를 마다할 이유는 없었기에 악수를 받아 주었다. 혹시 이대로 친구 한 명 사귀게 되는…….
“나도 반가워. 어디 볼까.”
취소다.
“이 손을 보니 피아노를 □□ 치진 □□□□. 손톱□ □□□□ □□□…… 8학년 편입생은 □□ 많지 않단 말이지.”
에르네스트는 내 오른손을 탁 낚아채더니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대충 듣기에 무슨 감평을 하는 것 같았는데 순간 목덜미에 소름이 쫙 끼쳤다.
모르는 사람에게 내 손을 맡긴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한 몫 했다.
조금 기분 나쁘다는 듯 손을 홱 빼자 에르네스트가 그제야 자신이 무례했음을 알아차렸는지 사과했다.
“미안해. 놀라게 할 생각은 아니었어.”
“…….”
놀란 건 사실이지만 정작 그렇게 보였다니 짜증이 났다.
내가 입을 다물고 있자 에르네스트는 정말 미안하다는 듯 말했다.
“□□□ □□□ 없었어. 그저 궁금했을 뿐이야. □□□□□□□.”
“…….”
“난 동생 입학시험□ □□□□□. 그런데 네가 같은 학년에 편입한다길래 □□□□ □□□.”
“동생?”
“응. 저기.”
에르네스트는 본래 앉아 있던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곳엔 열 살도 채 안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와 그 부모님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요컨대…… 에르네스트는 지금 이곳 8학년에 재학 중이고, 저기 있는 동생은 이제 입학하는데 그걸 부모님과 함께 따라왔다는 것 같다.
형제가 쌍으로 중앙음악학교 학생이 된다면 그것도 참 축복받은 유전자와 가정환경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난 순수하게 감탄했다.
“대단하네요.”
“그렇지? 물론, 내가 더 대단하지만. 나 땐 □□□□ 훨씬 □□□□□ □□□□ 들어왔다고.”
뭔진 몰라도 수석입학이라도 했나?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는 에르네스트는 잘난 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잘난 것처럼 보였다.
그래도 내 앞에서 자기자랑을 하는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8학년이라면 겨우 열네 살밖에 안 되지 않은가? 일단은 그냥 귀엽게 봐주기로 했다.
대화는 주로 에르네스트가 말하고 난 맞장구를 치는 정도였지만 그렇게 난 중앙음악학교에 와서 처음으로 러시아인 학생과 이야기를 나누며 조금씩 적응해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내 사정을 알고 편의를 봐 주는 베르체노프가 사람들과 이야기 할 때와는 또 다른 실전회화연습이었다.
이 대화는 아버지로부터 전화가 올 때까지 이어졌다.
에르네스트는 자연스레 자리를 피해 주었고, 전화를 받아 들자 아버지는 노력한 만큼 그에 따른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해 주셨다.
거기다가 대고 겨우 6개월짜리 노력이면 떨어져야 정상일 텐데요, 라고 말할 수는 없는지라 최선을 다하겠다고만 답했다.
전화를 끊고, 생각난 김에 메신저로 오빠인 루슬란에게 메시지를 보냈더니 대번에 읽씹 당했다.
진짜 차가워도 너무 차가웠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벌써 반년이나 이 상태였다. 언젠가 한번 날을 잡고 이야기를 해 봐야 할 것 같다.
하는 수 없이 마가리타 선생님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놀고 있자 금방 순번이 다가왔다.
한승우가 먼저였다.
“9번 지원자. 실기장으로.”
“…….”
“9번 지원자.”
“…….”
기가 막혀서 웃음조차 안 나온다.
숫자 9를 못 알아들어서 자기를 부르는 줄도 모른다. 나 얘를 정말 어떡하면 좋니…….
뒤돌아서 쿡쿡 찌르자 그제야 깜짝 놀라서 멍청한 자기 얼굴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래 너.
한승우랑은 오늘 처음 본 사이지만 그래도 한국에서 왔다는 게 자꾸 마음에 걸렸다. 잘 좀 했으면 좋겠는데…….
슬쩍 따라 일어나서 복도로 나갔다. 하는 짓은 맘에 안 들지만 어디 실력은 괜찮나 좀 들어 봐야 했다.
제일 중요한 실력이 엉망이면 약간이나마 도와줄 필요가 전혀 없기 때문이었다.
이곳은 세계를 노리고 모인 천재들의 각축장. 모든 것은 실력으로 평가되고 실력으로 정당화된다.
한승우 역시 이곳에 뛰어들었다면 이 냉혹한 세계의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다.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면 빨리 떨어져 나가는 것이 피차 이롭다.
재기불능으로 물어뜯기고 음악을 증오하게 되기 전에.
“음…….”
난 그와 같은 입시생 신분이라는 것도 잠깐 망각하고 진지하게 귀를 기울였다.
한승우가 실기장에 들어가고 잠시 후, 하이든 소나타가 시작되었다.
“…….”
첫 소절을 듣고 놀랐다.
1분쯤 들었을 땐 감탄했다.
후반부에 가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빠르다. 하지만 자신감 있고 정확한 터치가 이 곡은 이 속도가 맞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거기에 본래 약간 지루할 수도 있는 곡인데 지루할 틈 없이 밀고 당기는 음악성까지 갖추고 있었다.
한승우는 열네 살의 나이에도 충분히 세계에 통용될 만한 실력과 잠재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게 기웃거리던 때였다.
“뭐 해?”
“까, 깜짝이야…….”
어느샌가 다가온 에르네스트가 말을 걸고는 내가 놀라자 장난스럽게 웃고 있었다.
동생 따라 왔다더니 할 일 없나…… 나한테 왜 이래?
“감상 중이었어요.”
“감상?”
“예.”
에르네스트는 코웃음을 픽 치더니 말했다.
“감상은 □□□ □ 연주자의 □□ □□□□. □□□ 것을 감상한다고 □ □□ □ □□?”
“……뭐라는 거예요?”
말 좀 천천히 해라.
에르네스트는 살짝 얼굴을 찌푸리더니 말했다.
“들을 필요 없다고.”
“방금 것 들었어요?”
“아니? 그걸 들어 봐야 아나?”
“그럼 조용히 해요.”
매섭게 쏘아붙이자 에르네스트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할 말 많은데 내가 조용히 하라고 하니까 그냥 잠자코 다물어 준다는 표정이었다.
이걸 그냥 확 받아 버릴 수도 없고.
약간의 텀이 있었고, 두 번째 곡인 쇼팽의 화려한 변주곡이 시작되었다.
혹시나 하이든보다 못할까 봐 살짝 걱정이 들었는데, 이번에도 확신을 얻는 데에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딱 1분 만에 난 에르네스트에게 말을 걸 수 있었다.
“들을 필요 있지 않아요?”
“…….”
그는 조금 심각한 얼굴로 턱을 만지작거렸다. 저딴 건 연주도 아니라고 어깃장이라도 놓을 줄 알았는데, 그는 조용히 집중하고 있었다.
그래도 듣는 귀는 있나 보네? 만약 저 쇼팽을 듣고도 헛소리를 했으면 진짜 철저하게 박살 내 줬을 텐데.
나와 에르네스트는 그렇게 말없이 한승우의 쇼팽을 끝까지 다 들었다.
곡이 끝났다.
여전히 우리 사이엔 아무 말도 없었지만 암묵적으로 에르네스트가 종전에 했던 말을 책임지기 위해선 무언가 평을 해야 한다는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난 굳이 입을 열어 재촉하지 않고 가만히 기다렸다. 절대 봐주지 않겠다는 표시였다.
내가 쉽게 넘어갈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에르네스트는 약간 힘없이, 시원하게 웃었다.
“인정할게. 괜찮네, 저 □□□.”
그가 이렇게 깔끔하게 나올 줄은 몰랐다. 난 조금 웃을 수 있게 되었다.
에르네스트는 자신의 선입견을 조금이나마 철회했다.
속마음이 어떤진 모르겠지만 겉으로나마 인정하면서 박수까지 두어 번 쳐 줬으니 이 정도면 충분했다.
“저 사람, 입학할 수 있겠어요?”
“확실하진 않지만…… 충분히 잘하네. □□ □□□□□□ □□ □□□□□.”
에르네스트는 빠르게 중얼거리면서 말했다. 잘 모르겠지만 입학엔 문제없다는 것 같았다.
난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이 실기시험의 마지막인 자유곡을 기다렸다.
이전에 친 하이든과 쇼팽이 생각보다 괜찮았던 편이라 난 한승우의 자유곡을 꽤나 기대하고 있었다.
무난하게 베토벤 소나타를 치는 것도 좋을 것 같았고, 기교적인 부분을 약간 과시하고 싶다면 리스트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 정도 파격적인 면은 보여 주었으면 좋겠다고 내 멋대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
하지만 내 기대는 이상하게 되돌아왔다.
난데없이 들려오는 굉음에 난 놀라서 어깨를 떨었다.
“뭐야 이 곡?”
옆에 있던 에르네스트도 놀랐는지 중얼거렸다. 그가 내 쪽을 돌아보았다.
“저거 뭐야? 클래식 아니지? 뉴에이지?”
“아뇨.”
내 목소리는 스스로 듣기에도 무서울 정도로 싸늘해져 있었다.
한승우는 어느 영화 OST를 편곡해서 연주하는 중이었다.
너무 당혹스럽다 못해 화가 났다. 저건 패기도 뭣도 아닌 그냥 만용이었다.
아무리 자유곡이라지만 피아노 전공자를 뽑는 입시장에서라면 최소한 입시라는 목적에 부합한 선곡을 해야 할 것 아닌가?
더군다나 이 학교는 세계 최고의 음악학교 중 하나였다. 어떻게 그런 학교의 시험을 보면서 영화 주제곡을 자기 입시곡으로 연주한단 말인가.
“한승우…….”
너무 어처구니가 없다 보니 턱이 다 덜덜 떨렸다. 살다 살다 별 꼴을 다 보겠네, 정말.
그리고 그 어이없음은 분노가 되었다.
대체 뭐 하자는 짓거리야.
앞서 친 하이든과 쇼팽엔 정말 많은 노력과 연구가 담겨 있었다. 그게 아깝지도 않은 거야?
아예 처음부터 엉망으로 쳐 버리고 말았으면 이렇게 화가 날 일도 없었을 텐데……
“아아…….”
떨어질 것이라는 직감을 느끼며 난 탄식했다.
소신껏 객기를 부린 것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그 결과는 냉혹할 것이다.
분노는 곧 우울함이 되었다.
같이 학교에 다니게 된다면 이것저것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어려울 거 같다. 난 힘없이 어깨를 늘어뜨리며 벽을 내려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