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23화 (23/1,277)

##  23화

오늘 첫 교시는 시창청음 시간이었다.

시창이란 악기 없이 악보만을 보고 노래할 수 있는 능력으로 특히 보컬을 쓰는 음악가들에게 중요하지만 클래식 연주자들에게도 중요하게 여겨지는 능력이었다.

시창이 강해지면 악보를 처음 보고 읽는 초견과 작곡에 굉장히 큰 도움이 된다.

거기에 이조훈련까지 병행하면서 음악가들은 음악의 언어에 익숙해지게 된다.

그리고 청음은 악기 소리를 듣고 악보에 써 내릴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소위 절대음감이니 뭐니 하는 것들이 여기서 두드러진다고 하는데 난 솔직히 절대음감을 기반으로 한 고정도법 청음은 무식하기 짝이 없다고 생각 하는…….

이론적인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겠지.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이 중앙음악학교의 천재들과 한 반에 있다는 것이었다.

조금 긴장되기도 했지만, 약간 기대되기도 했다.

난 클래식 역시 학문이라 생각한다.

비록 그 형태는 예체능, 스포츠의 모습을 하고 있다지만 조금 더 사견을 가미하자면 클래식 음악은 수학과 철학을 섞어 놓은 학문에 가까웠다.

물론 선천적인 천재성이 엄청난 비중을 차지하지만, 얼마나 공부하고 집중해서 연구하느냐에 따라 그 천재성은 빛을 발하기도 하고 허무하게 사그라들기도 한다.

어디까지나 공부 없인 대성할 수 없는 것이다.

나 역시 그 때문에 예술고를 나와 음대에 다녔었고, 화성학도 꽤나 열심히 공부해서 그냥 피아노 연주자치고는 기초 이론에 박식한 편이었다.

아무리 여기 있는 애들이 천재라지만 그래도 내가 그간 쌓아올린 경험과 지식은 아무렇게나 따라올 수 없는 것이라 생각했다.

지금 이 반에서 내 위치는 어디쯤일지 궁금했다.

그렇게 첫 시간, 선생님은 언젠가 봤던 분이었다.

“내 소개는…… 굳이 해야 하나?”

“예!”

1분 1초라도 수업 시작을 늦추고 싶어 하는 학생들의 합창이 이어졌다.

선생님은 알면서도 절대 속아 주지 않겠다는 듯 칠판에 이름을 빠르게 휘갈겨 썼다.

『구세프 바실리예비치 알레니체프』

내 실기시험에 감독관으로 계셨던 분이다. 날 굉장히 안 좋게 생각하고 있으실 분이라 살짝 움츠러들었다.

그렇다고 이미 입학한 학생을 개인적인 감정으로 대하진 않으시겠지만 조금 무서운 것은 사실이었다.

구세프 선생님은 그리고 바로 준비해 온 종이를 교탁 위에 턱 하고 올려놓았다.

“우선 실력 테스트부터 하자.”

“아!”

“너희들도 다 아는 내 이름을 묻지 않았나. 새 학년, 새 출발. □□ □□□□□□. 그러니 나도 너희들 실력 테스트부터 해 봐야지.”

반박할 수 없는 논리에 학생들 몇몇이 신음성을 삼키며 애꿎은 책상에 머리를 박았다. 우리 무덤을 우리가 팠구나.

난 이 광경이 꽤 재미있어서 흥미진진하게 지켜보았다. 구세프 선생님은 경력도 길고 학생들을 꽤나 잘 파악하고 있는 분인 것 같았다.

그리고 거기에 휘둘리지 않을 정도로 강직하기도 했다. 선생님이 아니라 경찰 같은 걸 해도 잘 어울리셨을 것 같다.

시험지가 배포되었다. 시험지엔 문제가 따로 있지 않았다. 그냥 빈 오선지였다.

“선생님. 출석 안 부르시나요. 안 온 애 있는데요.”

“시험지 맨 위에 이름 써서 내라.”

구세프 선생님은 아주 약간의 시간낭비도 허락하지 않았다.

난 얌전히 오선지를 받아 들고 상단에 내 이름을 썼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 열심히 연습한 글씨체는 스스로 보기에도 꽤 멋들어졌다.

이름을 쓰고 기다리자 구세프 선생님이 물었다.

“준비되었나.”

“예.”

“일단 4성부부터 가자.”

조금 흠칫했으나 크게 놀라진 않았다. 역시 학교 수준이 있다 보니 단선율이나 2성부부터 차근차근 시작하진 않는 모양이었다.

4성부 청음이라면 소프라노, 알토, 테너, 베이스. 이렇게 4개의 음이 동시에 진행되는 것을 악보에 적어 내는 것을 뜻했다.

화성뿐만 아니라 선율도 같이 병행된다.

이 4성부 작법은 작곡을 하기 위한 기초적인 작법이고 규칙과 합리성을 토대로 추론 능력을 필요로 하는, 수학에 가까운 것이었다.

애초에 화성학이라는 게 수학이나 매한가지이긴 하다.

어쨌건, 난 별로 놀라지 않았다. 예술고에서도 수없이 했었던 수업이었다.

물론 수학을 포기한 수포자가 있듯이 화성학을 포기한 화포자가 있기도 하지만…… 나는 화성학에 한해선 꽤 우등생이었다.

박자와 마디 수, 장조인지 단조인지 조를 미리 알려 준 다음 교실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

어렵지 않게 다 적어 냈다. 펜을 놓고 고개를 드니 당연하다는 듯이 아무도 오선지를 보고 있지 않았다.

난 약간 당황했다. 4성부 청음이 크게 어렵지 않다는 이야기는 내 수준에서의 이야기였다.

얘들은 열네 살이지 않은가? 진짜 한 번 듣고 다 따라 쓴 거야? 이 학생들 전부가?

구세프 선생님이 좌중을 훑더니 말했다.

“다시 들려줄 필요는 없겠군.”

“예.”

“다음 가자. 5성부.”

구세프 선생님은 너무 당연하다는 듯 한 단계 난이도를 올렸다. 헛웃음이 나왔다. 설마 했는데 정말 시키고 있었다.

5성부 청음은 4성부에서 단순히 음 하나가 추가된 정도가 아니다.

한 음으로 한 차원이 바뀌는 문제다.

이건 진짜 귀도 좋아야 하고 화성학에도 밝아야 하며 무엇보다 많이 타고나야 했다. 보통 이렇게까지 하진 않았다.

음대 작곡과 입시 때나 보는 시험이었다. 열네 살 피아노과 아이들이 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하지만 여기 있는 아이들은 그 누구 하나 평범한 아이가 없었다. 난 고정관념을 버려야만 했다.

다시 새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살짝 긴장한 탓인지 어질어질했다. 귓가에 음들이 스쳐 지나갔다.

잠깐 기다려 봐! 극도로 집중하며 도망치는 음들을 잡아다가 귓속에 욱여넣었다.

이걸 그냥 단순 D로 봐야 하나? 잠깐만, 저 음이 왜 저기 흩어져 돌아다녀? 이걸 밀집형개리라고 보면 대충 이쯤에 찍으면…….

찍신께서 강림하길 빌며 열심히 따라 적었다.

고개를 들자, 이번엔 머리를 싸매고 있는 학생들이 꽤 많이 보였다. 난 하마터면 웃을 뻔했다. 역시 이건 좀 어렵지 얘들아?

“한 번 더 들려주마.”

“예.”

똑같은 스케일이 한 번 더 진행되었고 난 쓴 답을 노려보며 이걸 고쳐야 할지 말아야 할지 뇌내 전쟁을 벌였다. 결국 세 개 정도 고쳐 썼는데…… 모르겠다.

“종료.”

“흐엑.”

“방학 동안에 공부 안 하고 논 게 □ □□□. □□. 나중에 □□□□ 점수 낮은 녀석들은 공개하겠다.”

“선생님 제발 한 번만 더 들려주세요.”

“시끄럽다.”

청음에 세 번은 없었다. 보통 몇 번은 반복해서 들려주는데…… 여기선 딱 두 번뿐이었다.

한 방에 학생들을 조용히 시킨 구세프 선생님이 손으로 교탁을 탁탁 두드리더니 말했다.

“다음 6성부다.”

“?”

난 진짜 어이가 없었다.

6성부 청음? 무슨 초인이야?

대체 그게 왜 필요한데. 여기 피아노과는 화성 음악만 한창 하던 고전 오페라곡이라도 쓰는 거야?

하지만 주변을 보니 기막혀하는 건 나뿐이었다. 나머지 학생들은 집중을 가다듬고 있었다.

조금 막연하게만 생각하고 있었던 것들이 갑자기 확 와닿았다.

여긴 이런 곳이었지.

중앙음악학교. 다른 음악학교 피아노과에선 다루지도 않을 5성부 청음은 물론이고 난생처음 들어 보는 6성부 청음도 당연하다는 듯 하는 곳이었다.

조금 경외감을 느끼며 시험에 임했다.

세계 어디서도 안 할, 이 6성부 청음은 내게 있어선 거의 찍기 테스트나 다름없었다.

그냥 잘 안 들릴 뿐만 아니라 몇 마디는 아예 불협화음정이라서 화성학적 기술도 큰 의미가 없었다. 사실상 절대음감 테스트에 가깝게 느껴졌다.

그래도 집중력을 최대로 끌어 올리며 내 오선지를 채워 나갔다.

물론 나만 어려워하는 건 아니었다.

시험에 방해되지 않으려고 아무도 소리를 내지 않고 있고, 나 역시 문제에 집중하느라 고개를 들 틈 따윈 없었지만 시험장의 공기가 엄청나게 무거워진 것이 느껴졌다.

모두가 고민하고 힘들어하고 있었다. 6성부 청음은 시험이자 동시에 훈련인 것이다.

문제가 한 번 지나가고, 구세프 선생님이 말했다.

“다시 들려주겠다.”

“예.”

다시 한 번 더 문제가 흐른다.

“거기.”

집중하려는 찰나 구세프 선생님이 누군가를 불렀다.

고개를 드니 선생님은 뒤쪽을 보고 있었다.

“집중 안 하나?”

선생님이 보는 쪽을 따라 뒤편을 봤더니, 낯익은 유학생이 보였다.

한승우. 그는 시선들이 자신을 향하자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는 듯 눈을 좌우로 굴렸다.

아니, 넌 또 왜 찍혀서 그래.

생각해 보니 왜냐고 물을 것도 없이 이유는 충분했다. 한승우는 실기 날부터 벌써 구세프 선생님에게 단단히 꼴통으로 찍혔음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물론 나도 같이…….

어쨌든 난 지은 죄가 있으니 알아서 얌전히 지내려고 했는데, 저 녀석은 왜 또 눈에 띄고 난리야?

구세프 선생님이 인상을 팍 찡그리며 문제를 멈췄다.

“유학생. 집중 안 하나?”

“……?”

“미치겠군. 대체 예비학기도 안 지내고 어떻게 바로……. 예브게니아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보는 나도 답답한데 선생님은 오죽하겠나 싶다.

구세프 선생님이 거의 포기했다는 듯 말했다.

“아무래도 좋다. 하지만 언어적 문제가 내 수업에 큰 영향을 미치진 않을 테고, 아무리 어렵다 해도 집중하지 않고 딴청을 피운다면 밖으로 나가 줘야겠다.”

뭔가 했더니 6성부 청음 문제를 두 번째로 들려줬을 때 딴청을 피운 모양이었다. 진짜 간이 배 밖으로 나왔나 보다.

한승우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무언가 항변하려다가 말을 만들지 못하고 도로 입을 다물었다. 본인도 답답하겠지.

그때, 한승우의 옆자리에 있던 한 학생이 그의 자리를 힐끗 보더니 떨떠름하게 말했다.

“선생님. 그런데 얘 다 썼는데요.”

모두의 고개가 돌아갔다. 구세프 선생님은 눈썹 하나 까딱 않고 말했다.

“그래서? 답지를 다 채운 학생은 여기도 많다. 하지만 모두 두 번째에도 집중하고 있지.”

구세프 선생님은 본때를 보여 주겠다는 듯 교탁에서 내려와 한승우 쪽으로 향했다.

“대체 얼마나 자신만만이길래 이딴 식으로 구는 거냐? 한번 보자.”

난 한숨이 절로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고 그 꼴을 지켜보고 있었다. 제발 조용히 살자, 승우야.

그런데 한승우의 오선지를 낚아챈 구세프 선생님의 표정이 가면 갈수록 이상하게 변했다.

당장 호통이 떨어지리라 생각했는데 기묘한 침묵이 이어졌다.

“…….”

불현듯 깨달았다.

한승우도 한국에 갔던 예브게니아 선생님이 그 자리에서 내정자로 삼은 천재였다.

구세프 선생님이 조용히 한승우의 답지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약간 어이가 없다는 듯 그에게 말했다.

“하나도 틀리지 않았군. 너 대체 뭐냐.”

갑자기 반에 한바탕 난리가 벌어졌다.

자리에 앉아 있던 학생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일어나서 한승우가 쓴 답지를 보기 위해 아우성쳤다.

구세프 선생님은 말릴 생각도 없는지 조금 물러서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아무리 첫인상이 안 좋아도, 하는 짓이 건방져도 그가 정말 붙잡아야 하는 사람이라는 것엔 동의할 수밖에 없으리라.

난 나대로 조금 뿌듯함을 느끼고 있었다.

물론 내정자였으니 이 학교에서 떨어질 일은 없었겠지만, 내가 그를 일찍이 알아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 않은가?

이 6성부 청음은 타고난 절대음감이 없다면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초고난이도의 청음이었는데, 한승우는 그걸 한 번에 다 적어 냄으로써 엄청난 수준의 절대음감을 가지고 있음을 증명했다.

흘러가는 소리들을 놓치지 않는 것을 보면 기억력 또한 굉장한 것이 분명했다.

“이 유학생 대체 어디서 온 □□□? 저번 학기엔 못 봤는데.”

“한국에서 편입한 것 같던데.”

“미쳤어, 이걸 쓰는 놈은 처음 봤다고.”

한승우는 거의 한 번에 일약 스타덤에 올라섰다.

물론, 한승우 옆에 몰려든 학생들은 모두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천재들이고 그중엔 절대음감을 지닌 아이들도 수두룩했다.

하지만 절대음감 내에서도 수준과 격차가 엄연히 존재해서 아주 단순한 절대음감은 악기로 연주되는 단선율 정도를 읽어 내는 데에 그치지만 수준 높은 절대음감은 지저귀는 새소리도 음으로 읽어 낼 수 있을 정도다. 그 정도로 차이가 크다.

그리고 저 정도면 한승우의 절대음감은 새소리를 듣는 수준 보다 더 위쪽이었다.

노력과 훈련으로는 범접할 수 없는 신의 영역.

그가 듣는 세계가 도무지 상상이 안 갈 정도였다.

“…….”

옆자리를 보니 에르네스트가 한승우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내 시선을 느꼈는지 눈을 마주치고는, 깜짝 놀라서 도로 앞을 바라보았다.

난 에르네스트의 심정이 이해되었다.

음악가로서 저런 어마어마한 무기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아무 감정도 안 들 수는 없었다. 사람인 이상 어쩔 수 없이 느끼는 감정이었다.

난 개인적으로 기악을 하는 데에 있어서 절대음감은 그렇게까지 필요하진 않다고 생각한다.

진짜다.

정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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