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화
한승우가 구세프 선생님에게 한 방 먹인 것으로 교실은 계속 떠들썩했다.
심지어 다른 반에서까지 학생들이 찾아왔다.
한승우가 러시아어를 알아듣지 못하자 누군가가 다른 반에 있는 한국인 유학생을 통역 삼아 데리고 온 모양이었다.
간신히 같은 한국인을 만나 화색을 띠며 이야기하는 한승우를 보며 나는 잘되었다고 느끼면서도 조금 섭섭하기도 하고, 복잡한 심정이었다.
“……?”
아니지, 내가 왜 아쉬워해야 해?
잘됐다고 함께 기뻐해 주면 그만일 일이라고 마음을 먹으니 한결 속이 편해졌다.
그런데 에르네스트는 아직도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 앞만 보고 있었다. 발렌티나가 자리를 비운 사이 살짝 말을 건넸다.
“에르네스트.”
“어, 응?”
가만히 부르자 멍 때리고 있던 그가 화들짝 놀라 내 쪽을 돌아보았다. 또 처음 보는 일면에 난 웃음을 터뜨렸다.
“무슨 생각 하고 있었어요?”
“아니 뭐…… 그냥.”
별로 말하고 싶지 않은 듯했다. 그렇다고 내버려 둘 내가 아니지.
난 정말 곤란하다는 듯 운을 뗐다.
“그런데 6성부 청음 같은 거 자주 하나요? 전 하나도 모르겠더라고요.”
“자주 하진 않지……. 어차피 그걸 할 수 있는 □□□ 정해져 있거든.”
갑자기 또 생각났는지 그가 인상을 썼다. 매사 자신 넘치는 그도 6성부 청음은 한계였던 것 같다.
난 너스레를 떨며 맞장구를 쳤다.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할까 싶어요.”
“아무 의미 없어. 그냥 쇼야.”
“그러게 말이에요. 보기엔 확실히 신기하긴 하지만요.”
“타티아나, 네 □□□□…… 우린 연주자잖아? 그렇지?”
“그래요. 그리고 절대음감은 연주자에게 필수적인 조건이 아니죠. 차라리 방해가 되면 될지도 모르겠네요.”
“그렇지. 꼭 무대에 올라가서 사고 치는 □□ □□ □□□□ 조율 탓하면서 자기 음감 이야기 한다니까.”
“그렇게 음감이 좋으면 연주자 말고 지휘자나 하지 말예요.”
“그래, 맞아.”
귀여워라. 난 흐뭇하게 웃으며 그의 기분을 조금 풀어 주었다.
에르네스트는 간만에 말이 잘 통하는 상대를 만났다는 듯 신이 나서 이야기했다.
나 역시 음악에 관해서 이렇게 말이 통하는 상대라면 그 누구라도 환영이었다.
그간 쌓인 게 조금 많았는지, 종국에 에르네스트는 절대음감을 거의 무슨 음악가의 적인 것처럼 떠들기 시작했다.
그건 좀 너무 나간 것 같은데,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싱겁게 웃으면서 받아 주었다.
그가 느끼는 심정이 적나라하게 보여지다 보니, 이런 지기 싫어하는 면도 어떻게 보면 조금 귀엽게 느껴졌다. 나도 저럴 때가 있었지…….
지금은 결코 아니다. 난 어른이라고.
“저 바보들에게 해 줄 말이 많겠어.”
“예?”
“여기 기다려.”
조금 자신감을 되찾은 에르네스트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는 한승우가 있는 쪽으로 갔다.
그러곤 한승우와 그 옆의 학생들에게 뭐라 떠들기 시작하는데…… 난 멀거니 쳐다보다가 그만 얼굴을 감싸고 책상에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도저히 낯 뜨거워서 못 보겠다.
정말 근본적으로 나쁜 애는 아닌데…… 쟤를 정말 어떻게 하면 좋지.
* * *
“자리에 앉으세요.”
다음 교시는 음악 시간이었다. 난 또 조금 긴장했다. 이미 8학년이 배우는 역사와 음악이론 등은 상당한 수준에 올라 있었다.
듣자 하니 저번 학기엔 각자 좋아하는 음악가를 한 명씩 골라서 연구하고 에세이를 쓰는 것이 학기말 숙제였다고 하니…… 조금 무섭다.
러시아 피아니즘에 담겨 나오는 아카데믹함은 어설프게 만들어진 것이 아닌 것이다.
나도 그간 한 공부가 있긴 하지만 아까 시창청음 시간 때도 느꼈듯 이 애들을 우습게 봤다간 정말 몇 년, 아니 몇 달도 지나지 않아서 고꾸라질 것이다.
괜히 아는 척하고 으스대지 말고 얌전히 열심히 공부나 하는 게…….
“우선…… 편입생 있었죠?”
“……?”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고개를 드니 선생님이 출석부를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예.”
“일어나 보세요.”
되도록 눈에 안 띄고 싶었는데 어림없었다.
선생님의 지명에 자리에서 일어나자 이목이 내 쪽으로 쏠렸다. 이 반에 편입생은 나와 한승우 단둘뿐이었다.
반 친구들 사이에서 먼저 한승우가 청음 능력으로 주목받았고, 그다음 내 차례가 온 것이다.
조금 긴장하며 기다리고 있자니 음악사 선생님이 말했다.
“본 교사가 타티아나 학생에 대해 아는 게 없어서 몇 가지 물어볼 겁니다. 괜찮죠?”
“예.”
“많이 긴장할 것 없어요.”
선생님은 가볍게 물었다.
“가장 좋아하는 작곡가가 있나요?”
“한 명만 골라야 하나요?”
“예. 한 명만.”
“그렇다면…… 세르게이 바실리예비치 라흐마니노프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난 쇼팽도 라흐마니노프도 거의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좋아한다. 하지만 굳이 둘 중 하나를 무조건 골라야 한다면 라흐마니노프였다.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이시더니 재차 물었다.
“라흐마니노프의 곡 중 가장 좋아하는 곡은요?”
“소나타 2번을 좋아합니다.”
“특이하군요. 학생들이 그렇게 좋아할 만한 곡은 아닌데. 왜 좋아하는지 설명하실 수 있나요?”
설명을 하자니 어려웠다.
현대에 와서 그럭저럭 연주되어지긴 하지만 라흐마니노프의 소나타는 그리 인기가 많은 편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라흐마니노프의 소나타 2번은 난이도도 굉장히 어려운데, 거기에다가 장황하고 감정 과잉이라는 혹평을 많이 받아서 라흐마니노프가 개정판도 냈고 결국엔 본인의 레퍼토리에서 삭제해 버리기까지 한 비운의 곡이었다.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에게 편곡권을 넘겨 버리기까지 했고.
말도 많고 탈도 많지만…… 난 이 곡을 좋아했다.
“전반적으로 몰아치는 비르투오주적 그…… 빠른 느낌과 중반의 낭만? 떠다니는 느낌이…….”
“정리를 좀 해서 말해 보겠어요?”
“그냥…… 멋있어서요.”
뭐 이런 바보 같은 감상이 다 있담.
한심해서 한숨이 나올 지경이다. 러시아어가 익숙하지 않다보니 설명이 잘 안 된다.
선생님은 살풋 웃더니 말했다.
“어느 부분이 마음에 들었나요?”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어느 부분이 마음에 들었냐니?
“특정 악장을 말씀하시는 건지……?”
“아뇨. 특정 주제라든지 패시지라든지, 보다 좁은 □□□□□.”
이거 무슨 심리 테스트 같은 건가?
난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안경 너머로 날 바라보는 선생님의 눈길에서 정말 뭔가 구석구석 분석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약간 소름 끼치기까지 했다.
솔직하게 대답해 버리면 선생님에게 모조리 파악당하고 말 것 같다는 기묘한 생각이 잠깐 들었다가 곧 사라졌다.
순간적으로 스치고 지나간 생각에 불과했지만 너무 얼토당토않게 웃겨서 난 속으로 코웃음 쳤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좋아하는 작곡가와 곡을 안다고 해서 한 사람에 대해 알 수 있다는 건 어디까지나 아주 큰 범위에서의 이야기다. 다 맞는 것도 아니고.
락을 좋아한다고 모두 반항적이고 클래식을 좋아한다고 모두 보수적이진 않다.
사람의 성격이란 게 얼마나 다양한데 그걸 단순히 음악 취향으로 가를 수 있단 말인가?
그저 처음 보는 학생에 대해 알아보겠다고 이것저것 묻는 것일 뿐이다. 덩달아 이론적 지식은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 테스트도 하고.
바라시는 건 그 정도겠죠 선생님? 더 구체적인 걸 듣는다고 저에 대해 뭘 더 아시겠어요?
난 허리를 펴고 바른대로 말했다.
“1악장의 코다를 제일 좋아해요.”
“비밀이 많은 학생이로군요.”
“!”
난 정말 대경실색해서 어깨를 떨었다.
“뭐, 무…… 어?”
“한창 비밀이 많을 나이긴 하지만, 학생 본인에겐 심각한 문제겠지요. 혹시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찾아와요. 제 사무실은 2층에 있으니.”
“…….”
아니…… 뭐야, 이 선생님?
입만 뻐끔거리고 있자 선생님이 그만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난 그야말로 넋이 나가서 멍하니 앉았다.
몇 마디 하지도 않았다. 겨우 그것만 듣고도 내가 숨기는 게 많다는 것을 알아차렸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사무적으로 교과서를 읽어 내리는 선생님이 갑자기 무슨 괴물처럼 보였다.
이건 진짜 말도 안 되는…….
“…….”
바로 전 시간에 6성부 청음 테스트를 치렀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말이 안 된다는 건 내 수준에서, 내 상식에서의 이야기였다.
내가 절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일들이 빈번이 일어나는 곳이 바로 이 중앙음악학교인 것이다.
모든 작곡가와 곡들을 세세하게 분해해서 파악하고, 질문을 던진 다음 몇 가지 대답을 종합해 거기에 일종의 심리적인 해석을 덧붙여 마음을 읽어 낸다.
거의 무슨 초능력에 가까운 소리 같지만 실제로 당하고 나니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어처구니가 없다 못해 무서울 지경이었다.
충분히 각오했다고 생각했었는데 각오가 모자란 모양이었다. 난 아직도 내 고정관념으로 이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긴 원래 이런 곳이니 모두 내려놓자고 그렇게 생각했는데도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난 비밀도 많고, 미련도 많은 인간인 것이다.
* * *
시창청음, 음악, 두 시간 모두 연달아 우물 안 개구리 같던 소견이 박살 나고 나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갈수록 자신감은 사라져만 가고 결국 남는 것은 연주자로서의 정체성 하나뿐이었다. 하지만 이 또한 얼마나 갈지…….
아나스타샤와 식사를 한 뒤 레슨을 받으러 갔다. 일주일에 두 번쯤 돌아오는, 미하일 선생님에게 레슨을 받을 수 있는 시간이 바로 오늘이었다.
레슨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스마트폰으로 무언가를 보던 미하일 선생님이 날 돌아보곤 환히 웃었다.
“왔구나, 타티아나.”
“안녕하세요.”
“이리 와서 앉거라.”
“예, 선생님.”
레슨실엔 두 대의 그랜드피아노가 놓여 있었다. 한 대는 학생을 위해, 다른 한 대는 레슨을 하는 선생님이 시범을 보이기 위해 준비된 것이었다.
중앙음악학교의 모든 레슨실은 이런 형태였다.
피아노 앞에 가서 앉았다. 미하일 선생님은 바로 레슨을 시작하기보단 이것저것 사적인 안부를 물어 왔다.
“첫 레슨이니 오늘은 편하게 이야기나 잠시 나누자꾸나. 과제곡도 없지?”
“예, 아직요.”
“그럼…… 나흘밖에 안 되었지만 기분은 어떠냐.”
“좋아요.”
좋긴 무슨, 나흘 만에 완전 박살 나 버렸는데.
미하일 선생님은 허허롭게 웃었다.
“타티아나. 사실 넌 조금이라도 늦기 전에 □□□ □□□ 들어온 것이기 때문에 적응하기에 힘들 수도 있다.”
“…….”
“하지만 크게 걱정할 필요 없다. 내 귀가 정확하다면 넌 저 아이들 사이에서도 최고가 되기에 충분하니까.”
“…….”
확고부동한 믿음.
미하일 선생님은 원래 이런 분이었다. 오로지 날 음악가로 만들고 말겠다는 일념 하나만 지니신 분이었다.
그건 내가 여기까지 오는 데에 정말 큰 힘이 되었지만…….
“일정이 급하다. 우선 다음 주에 있을 로스토프나도누 콩쿠르에 참가하고, 올해 음악원에서 하는 재학생 연주회는 물론이고 협연도 준비할 예정이다. 네가 곡을 소화해 내는 속도를 보면 □□ □□□□ 얼마든지 빨리 준비할 수도 있…….”
“잠시만요, 선생님.”
난 나도 모르게 선생님의 말을 막았다. 뱉어 놓고도 왜 그랬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왜 그러나.”
“…….”
연주회, 오케스트라와의 협연. 모두 내가 바라 마지않는 것들이었다.
난 연주자로서 하루라도 빨리 무대 위로 복귀하고 싶었고 그 시기는 되도록 빠를수록 좋았다.
물론 내 연주는 아직 불완전하기에 내 것이라 할 수 없었지만…… 시간이 흐른다고 완전히 되찾을 수 있다고 자신할 수도 없는 것인데 무작정 차일피일 미룰 수도 없는 문제였다.
조금 이기적이고, 욕심에 불과할지언정 난 무대에 서고 싶었다.
한 점 거짓말 없는 본심이었다.
하지만 난 더듬거리며 거부했다.
“저…… 그, 저 연주회는 처음이니…… 작은 것부터 하는게 좋지 않을까요.”
“그게 무슨 소리냐? 넌 타고난 연주자야.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자마자 아무에게나 연주회를 선보이던 게 바로 타티아나, 너 아니더냐?”
연주회라면 밥 먹다가도 숟가락 놓고 뛰어나오던 내가, 이제 와서 무슨 부담스럽다는 듯이 말하니 미하일 선생님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투였다.
미하일 선생님은 연주자로서의 내 태도를 좋아하셨다.
난 피아노가 있고 청중이 있다면 죽는 한이 있어도 최선을 다해서 연주에 임하는 편이기 때문에 그 점을 높게 보시는 듯했다.
물론 앞으로도 내 태도는 변함없을 테지만……. 죄송합니다, 선생님. 지금은 저도 잘 모르겠어요.
“위클리 연주회 이후에 생각해 볼게요.”
어차피 학교에서 한 학기에 한 번은 학생을 무대에 세우기 위해 하는 위클리 연주회는 참석할 수밖에 없었다.
매주 학생들이 돌아가면서 하기 때문에 내 순번은 한 달쯤 뒤에 있다. 난 그 위클리 무대에는 서 보고, 다음 결정을 내리고 싶었다.
선생님은 조금 납득이 안 된다는 듯 말했다.
“그래도 상관은 없다만…… 왜 그렇게 겁을 먹고 있지, 타티아나.”
“선생님. 저 피아노를 배운 지 반년밖에 안 되었어요.”
“그게 무슨 상관이지? 지금 네 실력이 저기 10년 동안 피아노만 친 학생들보다 모자라다고 생각하느냐?”
내게 주어진 시간은 반년이었지만 그사이 반칙처럼 끌어올린 내 테크닉은 평범한 학생들의 시간을 성큼 앞서 나갔다.
겨우 열네 살에 나처럼 방대한 레퍼토리와 해석을 갖춘 학생은 없다고 장담할 수 있었다.
천재 이전에, 하루 24시간을 사는 인간이라면 어쩔 수 없는 한계이다.
거꾸로 말하자면 결국 시간문제란 뜻이었다. 열 네 살이니 가능한 격차지, 스물네 살이 된다면 아무 의미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지금 격차를 보여둬야 하는가? 잘 모르겠다.
이러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미하일 선생님이 조용히 말했다.
“내가 너무 급하다고 생각하나 본데, 결코 그렇지 않다. 넌 이미 충분해. 지금은 한 번이라도 많은 연주회를 가지고 네 커리어를 끌어 올려야 할 때야. 지금 세상은 널 아직 모른다.”
내가 그토록 원했던 것들을 선생님은 당연하다는 듯 제시했다.
지금 난 열네 살. 아주 늦지도 않았지만, 결코 빠르지도 않은 나이였다.
제대로 된 연주자가 되려면 지금부터라도 커리어를 만들어야 한다는 미하일 선생님의 말은 하나도 틀린 게 없었다.
그렇지만…….
“위클리 때까지만 기다려 주세요.”
“타티아나…….”
“부탁드려요.”
시간이 주어진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란 걸 잘 알지만, 난 시간이 조금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