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화
약한 모습을 보이면 지는 거라 생각했다.
3시간 내내 거의 백 곡 가까이 치고 80%는 욕을 얻어먹은 것 같지만, 그사이 구세프 선생님과 싸우거나 우는소리 한 번 않고 버틴 것도 일종의 오기와 승부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런데 마지막의, 내가 음악에 대한 존경도 없이 도구로 쓰고 있을 뿐이란 말에 결국 한 마디 대꾸하고 말았다.
“그러면 안 되나요……?”
안다. 나도 잘 안다.
현재 음악을 대하는 내 동기는 매우 불순하다.
오로지 개인의 사적인 이기심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것은 음악가가 지녀야 할 동기 중엔 굉장히 지엽적인 것에 속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사용할 수 있는 도구는, 무기는 오로지 음악뿐이었으니까.
“저한테 남은 건 이제 이것뿐인데…….”
음악을 그렇게 사유화하면 안 된다는 것은 알지만, 이것마저 욕심부리지 않고 놓아 버리면, 정말 나에겐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하지만 뜬금없이 이런 소릴 해 봐야 내 사정을 모르는 이상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겠지.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해서 죄송합니다.”
난 급하게 눈가를 문질렀다. 타인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렇게 울먹이면서 하게 될 줄은 몰랐다.
“……타티아나.”
당장 헛소리 집어치우라고 고함이 날아들어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했었는데, 처음으로 구세프 선생님이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나지막하게 날 불렀다.
난 이어질 말을 기다리며 대답했다.
“예.”
“담배 한 대 피우자.”
“……?”
생각해 보니 레슨을 시작하고 구세프 선생님은 한 번도 담배를 꺼내지 않았다.
그러시라고 대답했더니 구세프 선생님은 그간 참았던 것을 푼다는 듯 담배를 꺼내 들더니 바로 불을 붙였다.
그러곤 차분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리다고 각자 고충이 없진 않겠지. 뭔가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있으리라 본다. 잘 이겨 냈으면 좋겠고.”
“…….”
“하지만 네가 스스로를 음악을 배우는 학생이라고 생각한다면, 난 음악을 가르치는 선생으로서 조언을 해 줄 수밖에 없다.”
구세프 선생님은 음악 선생님이었다. 3시간이나 열을 올려 가며 날 질타하는 와중에도 한 번도 냉철함을 잃거나 기분에 좌우되지 않았다.
그 말이 조금 험악할지언정, 잘못된 부분은 한 군데도 없었다.
“예…….”
“네가 스스로를 증명하고 싶다 함은, 지금 너는 네 자신을 인정하고 있지 않다는 말이 된다. 맞느냐?”
“…….”
대답하지 않았지만, 대답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입장을 바꿔 내가 구세프 선생님이었다면 철딱서니 없이 굴지 말고 정신 차리라고 호통을 쳤을 것이다.
러시아에서도 손꼽는 재벌인 베르체노프에서 남부러울 것 없이 누릴 것 다 누리고 살면서 대체 뭐가 불만이란 말인가?
하지만 선생님은 더 묻지 않고 진지한 시선으로 날 바라보았다.
“네 몸은 자연스럽게, 네가 할 수 있는 음악을 향해 나아가고 있어. 그냥 내버려 두면 될 일을, 그걸 네 정신이 자꾸 뒤틀고 있다.”
내가 중얼거린 몇 마디와 음악만으로 구세프 선생님은 상당히 진실에 근접해 가고 있었다.
재떨이에 담배를 두드리며 구세프 선생님이 나에 대한 평가를 정리했다.
“자꾸 마음에 안 든다고 제동을 걸고, 곡이 더 이상해지고, 더 마음에 안 들고. 그러니 곡이 자꾸 이상해지는 게다. 악순환이 계속되는 것이지.”
“하지만…… 공부를 계속하면 음악도 바뀌지 않나요?”
“정신력이 전부는 아니지. 기본적으로 네게 부여된 것들은 바뀌지 않아. 네 말은 의지력으로 눈동자 색이나 지문을 바꾸고 싶다는 말과 똑같다.”
말문이 막혔다.
가끔은…… 절대 불가능한, 무의미한 일을 가지고 방황하고 있는 것 같단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이 몸의 주인, 타티아나가 할 수 있는 것에서 그쳐야 할지도 모른다.
얼마간이라도 있는 잠재력을 최대한 끌어내어 상당한 테크닉을 되찾았지만, 소리만큼은 되돌아오지 않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면 난 아예 헛짓거리를 하고 있는 것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반년이란 시간은 고민하기엔 길지만 결정을 내리기엔 짧았다.
난 아직도 고민 중이었다.
정말 내가 불가능한 일을 하는 중인가? 할 수 있지도 않을까?
“하지만 전 실제로 부분적으로는 찾아내기도 했…….”
“현실적으로 보자.”
구세프 선생님은 담배를 한 모금 빨더니 반박했다.
“네가 연주할 수 있는 수백 곡들을 이어붙이면 최소 수십 시간은 되겠지. 그런데 거기서 몇 초를 찾아냈다고 그게 네 것이라 생각하느냐? 단순히 운이 좋아서 얻어걸렸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내가 할 수 있어서 해낸 것이 아니라 그저 그 순간의 여러 조건들이 운 좋게 맞아 들어갔을 뿐이라는 말이었다.
순간 나도 모르게 내 표정이 안 좋아졌음이 분명했다. 구세프 선생님이 보다 언짢은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음악 전체를 망쳐 버리는, 한 마디씩의 편린만 추구해서 뭘 하겠단 거냐? 혹시 계속 그렇게 보물찾기를 계속해서 퍼즐 맞추기를 하면 뭐라도 될 것 같다고 생각하나?”
“…….”
“그냥 스스로 감당이 안 된다는 것을 왜 모르나?”
구세프 선생님은 딱하다는 듯 말을 맺었으나, 결코 내 사정을 봐주거나 듣기 좋은 소리를 해 주진 않았다.
어디까지나 음악을 가르치는 선생님의 입장에서 전하는 조언인 것이다.
한 마디도 대꾸할 수 없다는 것이 분했다.
그리고 선생님의 말에 점차 설득되어서, 가슴 한편에서 자꾸만 모조리 놓아 버리고 싶어진다는 것이 더욱 분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구세프 선생님은 담배만 연거푸 빨아들였고 난 약간 반항적인 눈빛으로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밖에서 날 보는 선생님의 입장은 이해가 간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고 하시는 말씀이지. 내가 어디에서 왔고, 누구를 사사했고, 어떤 사람이었는지. 전혀…….
“내가 보기에…… 넌 자신을 증명하고 싶은 게 아니라 다른 걸 찾는 것같이 보인다.”
구세프 선생님이 담배 연기를 훅 내뱉더니 말했다.
다른 게 뭔데? 그런 것 없다. 난 어이가 없다는 듯 되물었다.
“……예?”
“네가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그 음악. 네 선생이 가르친 것이겠지.”
순간 경계심에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구세프 선생님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네 전 선생이 가르친 거냐? 미하일은 아니지?”
“……예.”
입을 다물고 있으면 이상해 보일까 봐 가까스로 대답했다. 속이거나 할 수도 없었다.
이미 구세프 선생님 앞에서 워낙 많은 곡들을 보여 주었고, 그것은 이제 막 편입해서 미하일 선생님에게 사사하기 시작한 학생이 보일 수 없는 수준이었으니까.
구세프 선생님은 한숨을 푹 내쉬더니 말했다.
“정말 이상한 선생이군……. 왜 이딴 □□□□ 짓을? 되지도 않는 걸 들려주고 따라서 치게 했단 말이야?”
“……?”
“□□□□□ 정신 나간 선생 아닌가? 직접 그 얼굴 한 번 보고 싶군.”
“선생님. 그만해 주세요.”
“뭘? 내가 못할 말 했나? 그 □□□□ 선생이…….”
“그만하시라고요. 제발.”
나도 모르게 공격적인 태도로 쏘아붙이고 말았다.
내 욕을 하는 것은 상관없었다. 하지만 박 교수님에 대한 이야기라면 도저히 참고 들어 줄 수가 없었다. 당신이 그분에 대해 뭘 안다고 함부로…….
“혹시나 했는데, 정말이군.”
“……?”
“넌 정말…… 아까 미하일에게 매달리던 것도 그렇고. 조금 선생에게 집착을 하는 경향이 있구나. 의리가 있다고 해야 하나…….”
“…….”
속았다…….
일부러 날 떠보기 위해서 자극적으로 말씀한 것이었다.
창피함에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구세프 선생님은 내가 이렇게까지 반응할 줄은 몰랐다는 듯 약간 미안해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선생에게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 타티아나.”
“그분은…… 달라요.”
박성재 교수님은 내게 있어서 그냥 피아노를 가르친 교수님이 아니라 그 이상의 존재였다.
부모님과 절연해 버린 날 제자로 거두면서 가르친 것은 비단 피아노뿐만이 아니다.
그분에게 받은 것들은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니었다. 내 근간, 내 음악이 많은 영향을 받아 있었다.
난 그것들을 제대로 지켜 내지도 못한다.
“……흑.”
갑자기 울컥해서 고개를 돌려 버리자 구세프 선생님은 뭔가 더 깊게 캐묻진 않았다.
침묵 속에서 눈가를 비비며 생각했다. 러시아인으로 살기로 마음먹고 지금까지 잘 참아 오지 않았는가.
다른 나라를 그리워한다든지, 타티아나로서 보여선 안 되는 이상한 행동들은 삼가야 했다.
물론 한승우를 도와주고, 에르네스트에겐 한국인 교수에 대한 언급을 하기도 했지만, 거기까지였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선 안 되는 것이다. 내가 나 자신에게 온전히 허락하고 고집을 부릴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음악뿐이었다.
조금 진정된 후 선생님이 말했다.
“타티아나, 심플하게 하자. 일단은 네가 하고 싶은 것들을 버려라.”
“……예?”
이렇게까지 심플하고 직설적인 말은 처음이었다.
진정되었던 머리가 다시 혼란스러워지려는 찰나, 구세프 선생님이 재차 정리했다.
“네가 하고 싶다는 것. 어렴풋하게 알겠지만 지금 네가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다 버려. 의리를 지키는 것도 좋지만 현실적으로 되는 게 있고 안 되는 게 있다.”
그리고 조건을 내걸었다.
“앞으로 3년 정도면 너도 다 클 테지. 그때 다시 시도해 봐라.”
3년.
까마득하게 긴 시간이다. 말 그대로 내가 다 커 버릴, 완전히 잡아먹히고도 남을 시간.
난 더듬거리며 반론했다.
“에르네스트는요? 선생님. 에르네스트는 자신이 하고 싶은 길을 찾아가고 있잖아요.”
“그 애는 원하는 대로 몸이 따라가 주는 천재다. 이미 충분히 궤도에 올라 있어. 그에 비해 너는…… 머리는 좋은 것 같지만 몸이 안 따라가 준다. 스스로도 알지 않느냐.”
가슴이 답답했다. 지금 안 되는 것이 그때 된다는 보장도 없었다. 내가 열 살 미만이었다면 또 모를 일이다.
하지만 열네 살이면 이미 재능에 대한 견적은 충분히 낼 수 있어야만 했다.
단언컨대 내 몸은 그렇게 높은 잠재력을 지니고 있진 않았다.
단순히 여자라서가 아니다. 난 여성 피아니스트가 갖춰야 할 재능도 상당히 부족한 편에 속했다. 약하고, 느렸다.
그것은 벌써부터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다.
하지만 구세프 선생님의 그 날카로운 통찰력으로도 내가 경험으로 신체적 부족함을 메꾸고 있다곤 꿈에도 생각하진 못하시는 모양이었다.
“넌 충분히 곡들을 완성할 능력이 있어. 하지만 어느 정도 완성 단계에 이르려 하면 네가 원하는 완성품으로 끌고 나가려다가 실패하고 만다. 그렇게 하지 마라.”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죠.”
“스스로를 완전히 죽이고 악보대로만 따라서 쳐라. 그렇게 기본적인 것부터 완성시키는 것이 1단계다.”
선생님은 내 상태에 대해선 잘 모르시지만 역시 하나도 틀린 말이 없었다.
지금 난 한 곡씩 완성하기보단 조금 무리해서 이것저것 많은 곡들을 다시 일깨우고, 떠올리는 데에 집중하고 있는 편이었다.
마음이 조급했기 때문이다.
급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3년은 너무 길어요. 전 버티지 못할 거예요.”
내 말에 구세프 선생님은 어이가 없다는 듯 물었다.
“왜? 도대체? 난 네 나이 때부터 지금까지 30년 이상이나 미완성인 곡도 있다. 3년도 못 견딘다는 것은 너무 성급한 것 아니냐.”
평생이 걸려도 완성하지 못하는 대곡들이 세상엔 굉장히 많았다.
그렇게 크게 본다면 단시간에 어떻게든 내 음악을 찾아내려는 모습이 가소롭게 보일지도 모른다.
“……안 돼요.”
하지만 난 절박했다. 구세프 선생님의 진단처럼 내 몸은 이미 나름의 음악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최소한 음악에 있어서 거기에 저항하지 않는다면, 내가 매몰되어 버리는 것은 순식간일 것이다.
난 음반을 낸 적도 없다. 내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음악들은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고 그저 내 머릿속에 맴돌고 있을 뿐이었다.
나만이 알고 있었고 나만이 재현해 낼 수 있었다.
그런데 불과 반년이 지난 사이, 벌써부터 몇몇 곡들은 가물가물하다.
이렇게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흐려지고, 이 귀로 듣는 소리에 덮어씌워질 것이다.
그렇게 서서히 희미해지다가, 결국 하나도 되찾지 못하고 다 잊어버리게 된다면…… 난 끝난다.
내게 주어진 시간은 길지 않다.
“선생님…… 한 곡도, 한 곡도 안 될까요?”
“말귀를 못 알아듣는 거냐?”
“알아들었어요, 선생님. 알아요. 저도 그렇게 욕심이 많진 않아요. 하지만 어떻게 한 곡이라도 가질 수 있다면…… 3년이고 30년이고 버틸 수 있어요. 정말이에요.”
이 레슨실에서 3시간 동안 수많은 곡들을 연주했다.
구세프 선생님이 날 일부러 괴롭히기 위해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어디까지나 계산적으로, 나에게 맞는 곡이 무엇인지 찾아내기 위해 다양한 곡들을 들어 봐 주신 것이다.
그렇다면 뭔가 해답을 찾아내셨을지도 모른다.
미숙한 나는 반년을 뒤져도 한 소절 찾는 데에 그쳤지만 세상에 존재하는 수백, 수천 곡들 중에 단 한 곡이라도…….
“……딱 하나 거기에 근접한 곡이라면 있다.”
“!”
손이 다 덜덜 떨렸다.
정말 있다고?
“그게…… 무슨 곡이죠?”
하지만 구세프 선생님은 심드렁하게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말했다.
“말해 주지 않겠다.”
“선생님……!”
“3년 후에 말해 주도록 하지.”
사람 놀리는 것도 아니고 대체 무슨 짓인가, 이게.
순간적으로 온갖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좀 더 애원해 볼까? 가만있어 봐. 나만 한 딸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 내가 정말 자존심이고 뭐고 없이 매달린다면 사람인 이상…….
내가 얼핏 광기를 내비친 모양이었다. 구세프 선생님이 손가락을 세 개 들었다.
“3년 후엔 나와 미하일, 중앙음악학교 모든 선생이 달라붙어서라도 네가 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
끔찍했다. 정말 끔찍했다. 구세프 선생님은 내게 있어서 3년이 얼마나 치명적일 수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다.
볼멘소리가 절로 나왔다.
“……저 선생님을 원망할지도 몰라요.”
“하나도 안 무섭다.”
구세프 선생님은 피식 웃기까지 했다. 당장 저 강철 같은 음악가를 거꾸러뜨릴 뾰족한 수가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거냐? 내 말대로 해 볼 테냐?”
“…….”
치사한 것도 정도가 있었다. 아무리 좋은 의도로 말씀하시는 중이라고 해도 싫다고 대꾸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간 구세프 선생님이 쥐고 있을 곡의 이름을 아는 것도 영영 요원해진다.
3년을 꼬박 채우지 않더라도 그사이에 알아낼 방법들을 궁리해 보려면 지금 구세프 선생님의 비위를 맞추는 척이라도 해야 했다.
“그렇게 할게요…….”
지금 여기서 무언가 약속을 한다고 해서 무슨 법적인 효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난 내 마음대로 하면 그만일 뿐이다.
“좋다. 당장 위클리부터 보겠다.”
아, 내 마음대로 하기도 글렀구나. 위클리 리사이틀은 당장 이번 주였다.
내 표정이 일그러지자 구세프 선생님이 까불지 말라는 듯 담배를 훅 빨아들였다.
“그리고 곡은 슈만 소나타 3번으로 해라.”
“……슈만요?”
“그래.”
슈만 소나타라면 미하일 선생님이 처음 추천해 주었던 곡 그대로였다.
“미하일은 나처럼 널 3시간이나 □□ □□ 않았지만 그래도 너와 함께 있으면서 피부로 알아차린 거다. 당장은 슈만이면 된다.”
“…….”
“물론 연주는, 아까 약속한 대로다. 철저하게 악보대로. 알겠나.”
“…….”
“대답해.”
“예.”
이를 갈며 대답하자 구세프 선생님이 흡족하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좋다. 가 봐라. 다음은 무대에서 보지.”
“……예.”
“수고했다.”
“…….”
의자에서 일어나니 현기증이 핑 돌았다. 온몸이 저렸다. 중간 휴식도 한 번 없이 3시간을 앉아 있었더니 기절할 것 같다.
하마터면 다리를 절다가 넘어질 뻔했으나 필사적으로 힘을 주었다.
쓰러질 땐 쓰러지더라도 절대 이 레슨실에서 쓰러지진 않으리라는 일념으로 문 앞까지 가서 손잡이를 잡고, 마지막으로 구세프 선생님을 돌아보고 말했다.
“오늘…… 감사했……습니다.”
“오냐.”
밖으로 도망치기 직전에 잔뜩 비꼴 생각이었는데 힘이 빠져서 전혀 그렇게 안 들렸다.
구세프 선생님은 태평하게 받아넘길 뿐이었다. 얄밉기 짝이 없었다.
문을 닫고 나오니, 문밖에 붙은 출입금지 A4 용지가 보였다.
구세프 선생님이 이 레슨실 문을 잠그면서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이 레슨실에서 답을 찾든지 죽든지 해야 나갈 수 있다고 하셨지.
“…….”
난 답을 찾은 걸까,
아니면 죽어 버린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