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58화 (58/1,277)

##  58화

“가시죠.”

“…….”

흥분해서 언성을 높이거나 하지 않고 냉정하게 함께 가 달라고 하는 빅토르는 정말 무섭기 짝이 없었다.

리처드 역시 거절하지 않았다. 내가 크게 다친 것도 아니고 고의성이 있지도 않았지만 그는 한승우와 함께 집에 와서 사과를 할 생각인 것 같았다.

하지만 내 생각은 약간 달랐다.

“리처드.”

난 그를 말리고 싶었다. 난 실제로 부상을 입거나 하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은 날 위해 리처드와 한승우가 만들어 낸 일련의 쇼였다.

제대로 설명해 주진 않았지만 리처드는 나에게 이것이 선물이 되리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최소한 악의가 있어서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설명이야 학교에서 들어도 될 일이고, 집에 가서 혼나는 것은 내가 맡아서 감수하면 될 일이었다.

“타티아나.”

리처드가 날 부르더니 피식 웃었다. 그러곤 주위를 슬쩍 살피더니 작게 말했다.

“또 그런 얼굴을 하는구나.”

“……?”

“그냥 즐겨. 그래도 괜찮아.”

즐기긴 뭘 즐기란 말인가? 우리 집에 가면 아버지가 너희 둘을 죽일지도 몰라.

물론 아버지는 작은 사고로 딸이 조금 다쳤다고 열네 살짜리들에게 무슨 짓을 할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냥 웃고 넘기실 분도 아니었다.

내가 얼마나 걱정하는지도 모르고, 리처드는 쿨하게 가장 먼저 벤츠에 탑승했다.

내 옆에 있던 한승우가 물었다.

“손은 괜찮아?”

“……너 아까부터 대체 몇 번을 묻는 건지 알긴 해?”

한승우는 계속 나에게 괜찮냐고 묻고 있었다.

본인이야말로 나와 부딪혀 넘어지면서 온몸으로 날 감쌌기 때문에 등이고 팔이고 안 아픈 곳이 없을 텐데, 혹여나 내가 진짜 다치지 않았는지 전전긍긍인 모양이었다.

하기야, 지금 손목 보호대를 차고 있어서 겉보기엔 진짜 다친 사람처럼 보이긴 한다.

난 일부러 손목 보호대를 찬 오른손으로 그의 팔을 툭 치며 말했다.

“괜찮다니까. 그리고 너야말로 괜찮아? 우리 집에 꼭 같이 안 가도 되는데?”

“가야지. 사과하러.”

한승우는 리처드보다 더 강단 있게 대답했다. 난 한숨을 내쉬었다.

“으휴…… 그래 일단 가 보자. 설마 죽이기야 하시겠니.”

* * *

“…….”

나 지금 숨 쉬고 있는 것 맞지?

거실에 우리 셋은 나란히 앉아서 아버지와 예고르의 시선을 받아 내고 있는 중이었다.

지옥에나 있을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기분이었다.

리처드는 아버지와 눈이 마주치고, 자기소개를 하고는 이후로 한 마디도 못 하고 있었다. 한승우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어른스러워 보여도 결국은 열네 살.

더군다나 아버지가 어디 보통 사람인가? 러시아에서 내로라하는 사업가들 중에서도 손에 꼽는 분이셨다.

평범한 10대들이 어떻게 이겨 낼 수 있는 상대가 절대 아니었다.

그나저나 얘들 진짜로 계획 없이 몸으로 때우려고 했던 거야?

“…….”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고 우릴 노려보던 아버지가 먼저 입을 열었다.

“타티아나.”

“예. 아버지.”

“큰 병원에 가 보지 않아도 되겠냐.”

리처드가 움찔했다. 얼핏 완벽해 보이는 그의 계획엔 헛점이 수없이 많았다.

굳이 2층에 병원이 있는 볼링장에 예약을 해서 날 그 병원으로 유도한 것도 훌륭했고, 또 의사와 어떻게 연줄이 있어서 이렇게 진단서를 끊게 만들었는지 그 수완도 대단했지만, 결국 그의 손이 닿지 않는 다른 곳에 가면 모든 것이 탄로 나는 건 순식간이었다.

“괜찮아요, 아버지.”

하지만 이 쇼에 동참해 주기로 결정했으니 나도 알아서 협조를 해야 했다. 난 의사에게서 받아 온 진단서를 내밀었다.

“그 병원도 신아르바트 한복판의 큰 병원이었어요. 초음파와 MRI 촬영도 마쳤고요.”

“더 검사할 방법은 없나? 예고르.”

“제가 알기론 없습니다, 유리 님.”

옆에 있던 예고르가 대답했고, 아버지는 예고르의 말이라면 거의 신뢰하시는 편이었다.

의사 소견에도 특이사항이라 할 것은 없었다.

아버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리를 쓸어 넘기며 한참이나 더 진단서를 노려보시더니 한숨을 쉬며 예고르에게 건넸다.

“진단서가 날아오는 건 몇 번 받아 봤어도 타티아나 네 진단서는 처음 보는구나.”

“……예?”

“아무것도 아니다.”

아버지는 고개를 내저으며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내 과거 이야기를 극도로 꺼려 하시는 분이셨지만 가끔은 이렇게 스쳐 지나가듯 말씀하시기도 했다.

잠시 그렇게 우릴 지켜보던 아버지는 예고르가 건넨 스마트폰을 받아 들고는 손가락으로 위아래로 움직여 무언가를 보시는 듯했다.

스마트폰으로 보고 계시는 것이 뭔지 의아해하기도 전에, 아버지가 리처드와 한승우를 차례로 바라보았다.

“두 사람 모두 신원은 확실한 것 같고……. 고의성도 없었고. 맞지?”

리처드가 얼른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유리 알렉세예비치. 그저 사고였습니다. 한승우, 어서 사과드려.”

“죄송합니다.”

“나도 잘 안다. 그럴 수도 있어. 이해하지.”

아버지는 그렇게 쉽게 납득하시는 것처럼 말씀하시더니 돌연 도끼눈을 치켜뜨고 둘을 노려보았다.

“그런데, 내 딸을 밖으로 불러낸 것은 고의성이 다분하잖나?”

“……!”

“타티아나를 불러낸 건 둘 중 누구지? 내가 보기엔 리처드 피츠앨런 하워드, 자네인 것 같은데.”

내가 아나스타샤가 아닌 남학생들을 만나러 나가는 순간, 이런 광경이 벌어지리란 것을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아버지는 내 생각보다 더 무섭게 반응했다.

열네 살짜리한테 그렇게 무섭게 대할 필요까진 없지 않냐고 말리지도 못할 정도였다.

리처드가 꿀꺽 침을 삼키곤 대답했다.

“예, 접니다.”

“피츠앨런 하워드, 영국의 공작가로군.”

“그렇습니다.”

얼핏 영국 귀족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지만 그게 진짜라는 것을 리처드의 입에서 들으니 새삼 그가 신기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런 것에 별로 연연하지 않았다.

“그 멀리서 놀러 온 것도 아닐 테고…… 학업에 조금 더 집중하는 게 낫지 않겠나?”

“…….”

날카로운 팩트 공격에 리처드가 할 말을 잃고 침묵했다.

난 그제야 방금 아버지가 예고르로부터 받아서 확인한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두 사람에 대한 신상정보였던 것이 분명했다. 거기에 학교 성적에 관한 것까지 적혀 있었으리라.

물론 리처드는 성적을 일부러 중위권으로 유지하는 특이 케이스였으니 난 개의치 않지만 아버지가 보기엔 못마땅하게 보였을 수도 있었다.

아버지는 그다음 한승우를 돌아보았다.

“그 옆의 한승우, 자네는 타티아나와 함께 편입해 왔다고 했지.”

“예.”

“그래서, 자넨 내 딸과 친한가?”

아버지의 물음에 한승우가 자신 있게 대답했다.

“아니요.”

기세 좋은 대답에 아버지가 되레 약간 당황하신 듯했다. 같은 반 친구입니다, 라든지 이 상황에 맞는 좋은 대답이라면 얼마든지 있지 않은가? 미진한 러시아어 실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그와 별개로 난 그가 너무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해서 살짝 뿔이 나려고 하고 있었다. 그냥 좀 친하다고 해 주면 어디 덧나는가?

약간 불퉁하게 옆을 돌아보자, 한승우가 내 쪽을 보며 웃었다.

“하지만 앞으로 친해질 수 있다 생각합니다.”

“…….”

난 당황했고, 아버지는 약간 흥미롭다는 듯 이쪽을 바라보았다.

우리 셋이 무슨 관계인지 궁금해하시는 것 같았다.

물론 아버지가 딸의 남자관계에 대해 가지는 호기심은 결코 상냥하거나 애틋하지 않다.

아버지의 눈에 시베리아에서 불어오는 듯한 서슬 퍼런 냉기가 감돌았다.

급히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버지, 오늘은 제가 먼저 리처드에게 볼링을 가르쳐 달라 한 거예요.”

“왜 볼링이었지?”

“그, 저, 아니…… 얼마 전에 어쩌다 보니 보게 되었는데 재미있어 보여서…….”

“스포츠도 좋지만 되도록 부상 위험이 없는 스포츠를 했으면 좋겠건만…… 그런데, 볼링이라면 스포츠센터에 볼링장이 있는데 왜 굳이 밖으로 나가느냐?”

“무슨 센터요?”

“외부 숙소 옆에 있는 스포츠센터 말이다.”

“예?”

처음 듣는 소리였다. 우리 집에 스포츠센터 같은 것도 있었어?

무심결에 예고르를 보니 그가 이마를 짚고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었다.

운동이라고 해 봐야 스트레칭이나 산책 정도만 하고 살았지, 내가 생전에 운동이라고는 질색을 하니 권유할 생각도 아예 없었던 모양이다.

그래도 그렇지 9개월이나 이 저택에서 살았는데 아직도 이 부지 안에 뭐가 있는지 제대로 모른다는 게 참…… 아버지가 얼마나 기막혀하실지 안 봐도 훤했다.

아버지는 맥이 빠진다는 듯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되었다. 이쯤 하지. 어쨌든 간에 책임감 있게 사과까지 하러 왔으니…… 타티아나 네게 큰 문제가 없다면…… 괜찮겠지.”

생각보다 이야기가 쉽게 마무리되는 것 같았다. 단번에 리처드와 한승우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아무리 깡 좋고 혈기 넘치는 그들이라도 이런 자리는 어마어마하게 불편했던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상황을 정리한 아버지가 이젠 한결 가벼워진 태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저녁이나 들고 가게.”

“……아, 아니 괜찮습니다, 유리 알렉세예비치.”

“사과를 하러 왔다고 해도 손님은 손님. 그냥 보낼 순 없지.”

그런데 말투는 손님을 대하는 말투가 아니었다.

아버지는 약간 심술궂게 웃으며 말했다.

“딱 저녁만 대접하고 우리 차량으로 기숙사까지 데려다줄 테니 걱정 말게.”

“…….”

리처드와 한승우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 * *

저녁식사는 성대한 만찬이 차려졌다.

물론 아버지와 함께 식사를 하면서 리처드와 한승우는 식사를 코로 하는지 입으로 하는지 모를 지경이었을 것이다.

질문 자체는 친구들에게 하는 평범한 질문들이었지만 리처드는 부담감을 느끼는 것이 보일 지경이었다.

그렇게 식사가 끝나고.

디저트로 나온 마롱글라세를 멀거니 바라보던 리처드가 피곤해 죽겠다는 듯 고개를 돌려 날 보며 중얼거렸다.

“그냥 신경 쓰지 말걸…….”

아무리 귀찮아도 그렇지 이렇게 사람 면전에 대고 그냥 신경 쓰지 말 걸 그랬다는 듯 후회 섞인 한탄을 하면 난 뭐가 되는가?

뾰로통하게 대꾸했다.

“……그러지 그러셨어요.”

“가만 못 놔두겠더라고.”

리처드는 그렇게 말하더니 온화하게 웃었다.

어쨌든 난 기다릴 만큼 기다렸다고 생각했고, 주변을 살폈다. 듣는 사람은 우리 외에 아무도 없었다.

“이젠 설명을 좀 해 주세요.”

“그래. 어디서부터 말해야 하는 거지.”

물어볼 것은 많았지만 현실적으로 궁금한 것은 병원 일이었다.

난 아직도 차고 있는 손목 보호대를 들어 올리며 물었다.

“제 진단서,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예요? 설마 의사를 매수하기라도 한 건 아니겠죠?”

“뭐? 푸핫, 아니야.”

리처드는 오해라는 듯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예전에 나도 그 선생님한테 신세를 좀 진 적이 있거든. 그때 이후로 꽤나 친해져서 내 부탁이라면 잘 들어주시는 편이야.”

“그러니까 그 부탁이라는 게 말이 부탁이지 실제로는 사주잖아요.”

“아니라니까. 말 그대로 부탁했을 뿐이야. 학생 중에 좀 쉬어야 할 것 같은 애가 있는데 도와주실 수 있냐고.”

“그런 말을 한다고 도와준다고요?”

“그 선생님은 그런 분이야.”

리처드는 정말 결백하다는 듯 그렇게 말했다. 난 약간 눈을 흘겼다.

부탁이 어쨌든 그 나이 지긋한 의사가 멀쩡한 내 손목에 가짜 진단서를 쓴 것은 사실이었다.

겨우 2주짜리이기도 하고 너무 까다롭게 굴 생각은 없었지만…….

“어쨌든 간에 이건 불법이에요.”

“선처 부탁하지.”

길게 변명도 않고 짧게 인정해 버리니 뭐라 더 할 말도 없었다. 열네 살 주제에 정말 배짱도 좋았다.

난 다음 질문으로 이어 갔다.

“왜 절 쉬게 만들었죠?”

처음 내기 내용으로만 보자면 난 구세프 선생님의 지도에만 안 따르면 되는 것이었다. 그 어디에도 내가 피아노를 쉬어야 한다는 내용은 없었다.

하지만 리처드는 그 내기를 이행하면서 구세프 선생님으로부터 올 불이익이나 문제들을 해결해 주겠다고 이야기했고, 그게 바로 이 손목 인대 부상 쇼였다.

정말 단순무식하기 짝이 없는 방법이었지만 아주 효과적이었다. 난 꼼짝없이 진단서에 적힌 2주간은 쉬게 생겼다.

리처드는 별것 아니라는 듯 말했다.

“그냥, 너한텐 휴식이 필요할 것 같았어.”

“그냥요? 그게 말이 되나요?”

“난…… 잘 안 될 땐 붙잡고 있어 봐야 더 하기만 싫어지더라고. 가끔은 아예 손에서 놔 버리는 것도 괜찮아.”

리처드가 식탁을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렸다.

“타티아나, 너 피아노 제대로 시작한 이후로 제대로 쉬어 본 적 있어?”

“쉬는 거야 주말이면…….”

“아니, 그것 말고. 하루 종일 건반을 한 번도 안 쳐 본 적 있냐고.”

그의 말을 듣고 난 곰곰이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하지만 기억을 아무리 돌려 보아도 하루 종일 쉬어 본 기억이 없었다.

내 표정을 본 리처드가 말했다.

“그렇게 죽자 살자 하다가 슬럼프에 빠지면 사람이 돌아 버려. 특히 할 줄 아는 거라곤 건반 두드리는 것밖에 없는 우리 같은 사람들이면 더욱 피아노로 어떻게든 해결하려다가…… 답도 안 나오지.”

“……제가 슬럼프에 빠져 있다고요?”

“응. 아니라고 할 수 있어?”

“…….”

지금 내가 처해 있는 상황은 약간 달랐지만, 리처드는 원인요법이 아닌 대증요법만으로도 충분히 효과를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뭔진 모르겠지만, 그냥 쉬어 버려. 피아노고 뭐고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그는 무슨 자신감에서인지 그렇게 느긋하게 말했다.

난 정말 대책없이 말하는 리처드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결국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래, 좋다. 리처드가 옳다 치자.

난 슬럼프에 빠져서 답도 없이 무너져 가는 상황이었고 그에 대한 대증요법으로는 쉬어 버리는 것이 옳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말로 하면 될 일 아닌가?

“리처드, 그래도 이렇게까지 할 건…….”

“넌 말로 해선 안 듣잖아.”

살짝 어이가 없었다.

“말로 해 본 적은 있나요?”

“말로 해서 설득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그 구세프 밑에서도 한 달이나 악으로 버티고 있는 걸 내가 어떻게 설득해? 좀 쉬라고 해 봐야 넌 또 웃으면서 거절했겠지. 괜찮다고 하면서.”

“…….”

“그래서 일부러 알리지 않고 했어. 네게 이런 상황을 주면.”

리처드가 손가락을 하나 들었다.

“너도 조금은 다른 생각을 해 줄 것 같았거든.”

그의 말대로 나는 지금 이 보호대를 풀고 다시 피아노 앞에 앉을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리처드는 어디까지나 편하게 생각하라는 투로 말했다.

“딱 2주일만 쉬어 봐. 난 그러면 보통 괜찮아지더라고. 너도 괜찮아지리라 생각해.”

솔직히 그리 친하다고 할 수도 없는 리처드가 내게 이렇게까지 해 주는 이유를 잘 모르겠다.

리처드 역시 나처럼 슬럼프에 빠졌던 적이 있는 것 같긴 하지만, 단지 그 이유만으로 내게 이렇게 푹 쉴 수 있는 상황을 조성까지 해 줄 필요는 없었다.

난 약간 고마움을 느끼기도 했지만 버겁기도 했다.

“리처드, 하나만 약속해요.”

“그래.”

“이렇게 위험한 일은 오늘로 그만둬 주세요.”

“물론 위험해 보였지만 난 승우와 그 상황을 수없이 시뮬레이션하고 연습한…….”

“그래도 안 돼요.”

너무 위험했다. 한승우나 리처드 역시 피아노를 치는 연주자의 길을 걷는 사람들이었다.

난 연주자가 얼마나 쉽게 망가지는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쓸데없는 생각을 뇌리에서 지워 버리고, 짐짓 활기차게 말했다.

“어쨌든, 그럼 앞으론 뭘 해야 하죠?”

난 정말 피아노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었다. 갑자기 쉬어 버리자니 막막했다.

그런 날 보며 리처드는 무심하게 타르트를 쿡 찌르며 말했다.

“나도 모르지.”

“……끝까지 책임져 주셔야 하는 것 아닌가요?”

“네 친구들 있잖아. 아나스타샤랑 발렌티나. 걔들하고 놀아.”

“…….”

리처드는 자기가 할 일은 다 끝났다는 듯 태평하게 말했다.

난 솔직히 아나스타샤와 노는 것도 좋았지만, 리처드나 한승우와 노는 것도 꽤 즐거웠기에 그가 이렇게 선을 그어 버리자 살짝 섭섭해졌다.

어쨌든 이렇게 내 인생에 있어 처음으로 휴가가 주어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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