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화
난 영문도 모른 채 피아노 반주에 맞춰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아아.”
내 시창청음 능력은 꽤 괜찮은 수준이었기에 피아노 음에 맞춰 목소리를 조절하는 것 정도는 손쉽게 해낼 수 있었다.
물론, 건반이 88개나 있는 피아노와 달리 사람의 목엔 한계가 있다.
한 옥타브는 비교적 힘을 들이지 않고 가볍게 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A5, 즉 라 음에서 살짝 목에 힘이 들어가더니 C6이 되어선 목소리가 잘 나지도 않았다.
색색거리며 고개를 내리자, 피아노 앞에 앉아 있던 폴리나 선생님이 잠시 건반을 멈추고 말했다.
“더 힘껏 해 보자.”
“더요?”
폴리나 선생님이 진지하게 이야기했다.
“그래. 체면, 창피 그런 걸 가지고 있으면 제대로 된 목소리를 낼 수 없단다. 물론 처음부터 잘하긴 힘들겠지만, 최선을 다해서 음을 내 보렴.”
“…….”
지금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말할 순 없었다. 선생님의 지적은 정확했다.
어린 류보비만 보더라도 그녀는 세상 그 누구보다 진지하게 고양이 소리를 내기 위해 스스로 고양이가 되어 연습을 할 정도로 정열적이고 진취적이었다.
조금 생각이 바뀌었다.
평생을 기악만 해 오다가 성악을 하려니 쉽지가 않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점잖 빼고 있다가 아무것도 얻어 가지 못하면 그런 바보 같은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
최선을 다해 음을 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무언가 가르침을 받은 것은 없지만 마지막 C6음은 평범하게 해선 안 되겠다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머리가 빠르게 돌기 시작했다.
난 성악에 대해 잘 모르지만 그 기본적인 원리가 기악과 똑같다는 것은 안다.
피아노를 예로 들자면 현을 때려서 소리를 울리게 한 뒤 그것을 음향판을 통해 증폭시키게 된다.
사람 역시 똑같았다. 응축한 호흡을 성대를 통해 일정한 음으로 만들고, 그것을 입으로 증폭시켜서 내면 된다.
내가 최선을 다할 수 있는 것은 이런 부분이었다.
원리를 안다면 조금 더 의식적으로 몸을 제어할 수 있다.
난 열 손가락을 다루며 손가락 끝 하나까지도 내 통제하에 두는 것을 업으로 하고 있던 사람이다.
가슴을 펴고, 배 아래로 호흡을 한다는 기분으로 들숨을 빨아들였다.
그리고 잠시 숨을 멈췄다가 고개를 살짝 들고 성대를 가늘고 길게, 소리를 뽑아낸다는 느낌으로 유지시켰다.
“아……!”
성대가 혹사당하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이런 긴장과 진동에 내 성대는 익숙하지 않았다. 하지만 생각보단 잘 버텨 주었다.
“…….”
한차례 음을 뱉어 내고 나자 침묵이 감돌았다.
머리에 피가 쏠렸는지 현기증이 살짝 돌 정도였다. 난 어지러운 와중에도 내가 해당 음을 이탈하지 않고 제대로 냈다는 것을 확신했다.
옆을 보니 폴리나 선생님이 내 쪽을 보고 있었다.
선생님은 흐뭇하게 웃고 계셨다.
“그것 보렴, 하면 되는…….”
“딸꾹.”
“…….”
본의 아니게 선생님의 말을 끊어 버렸다.
창피함에 다시 얼굴에 피가 쏠렸다.
“잠…… 잠깐만요, 죄송…… 딸꾹.”
“아하하하. 괜찮아. 괜찮아. 발성 후에 횡격막을 어떻게 컨트롤해야 할지 몰라서 내버려 두면 긴장해 있던 것이 놀라서 그래. 자, 자. 류보비. 타티아나에게 물 한 잔 가져다주렴.”
“예.”
류보비가 얼른 레슨실 한구석에 있는 주전자에서 물을 따라 주었다.
“여기요, 언니.”
“고마워요.”
류보비가 가져다준 물을 마시고도 한참이나 딸꾹질이 가라앉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내 테스트는 잠시 쉬게 되었다.
내가 진정하는 사이 폴리나 선생님은 류보비의 레슨을 시작했다.
“자. 다시 해 보자. 시작.”
류보비가 고양이 흉내를 내 가면서까지 연습했던 고양이 이중창이었다.
제대로 레슨에 들어가자 류보비의 태도가 돌변했다.
“미야아아옹.”
계속 장난스럽던 태도는 온데간데없고, 약간 새침하고 뾰로통한 고양이가 여기에 있었다. 류보비는 짐짓 표정까지 완벽하게 변화시켰다.
검은 고양이는 야옹거리며 관심을 끌려는 것처럼 굴다가도, 시선을 주면 곧 홱 돌아서곤 했다.
그 귀여운 모습에 난 작게 웃음을 머금었다.
하지만 이 고양이 이중창은 마냥 청중들을 웃기기 위해 존재하는 곡이 아니었다. 엄연히 음계와 가사가 있는 곡인 것이다.
“류보비.”
“…….”
폴리나 선생님의 목소리가 조금 안 좋았다.
류보비 역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아는 듯했고, 그 옆에 있던 나도 알고 있었다.
류보비는 음감이 조금 약했다.
악보를 조금 유심히 보던 폴리나 선생님이 다시 한 번 해 보자고 하신 뒤 피아노를 쳤고, 류보비는 다시 고양이 소리에 들어갔다.
이번에도 음계가 불안정했다.
“11마디 보렴, 류보비. 자, 소리 내 보자.”
“미야웅.”
“다시.”
그리고 피아노 소리가 들어갔다. 순식간에 음이 흐트러졌다. 폴리나 선생님은 약간 곤란하다는 듯 말했다.
“시창 연습 열심히 하고 있니?”
“……예.”
“열심히 하는데 잘 안 되는구나?”
“…….”
류보비는 어리지만 그래도 자존심이라는 걸 가지고 있는 음악가였다. 그녀는 이를 앙다물며 대답하지 않았다.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고 있는 류보비를 보며 폴리나 선생님이 다시 말했다.
“계속해 보자. 소리를 이중으로 들을 수 있어야 한단다. 피아노 소리를 네 뒤에서 널 밀어 준다는 듯한 느낌으로만 들어야 해.”
“예.”
“여기서 중심을 잃고 흐트러져 버리면 성악을 할 수가 없어.”
“…….”
단호하지만 옳은 말이었다. 성악은 여러 명이서 각자 다른 음을 부르면서도 자신의 소리를 잃지 않아야 했다.
그래야 그 소리들을 한데 엮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폴리나 선생님이 말했다.
“류보비. 시창 공부를 더 열심히 하지 않는다면…….”
“열심히 하고 있어요. 그래도 잘 안 된단 말예요.”
잠자코 수긍하던 류보비가 발끈했는지 고개를 들었다.
여덟 살밖에 안 된 아이에겐 해도 해도 잘 안 된다는 것이 조금 불합리하고 억울하게 느껴질 만도 했다.
폴리나 선생님 역시 류보비가 어떻게 현 상황을 받아들이고 있는지 안다는 듯, 조금 달래는 투로 말했다.
“류보비는 정말 좋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어. 그걸 올바르게, 정확하게 낼 수만 있으면 된단다.”
“…….”
류보비가 성악과에 오게 된 것은 기본적인 목소리가 아주 예뻤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 외의 음감이니 시창이니 하는 것들은 훈련하고 기르면 되기 때문에 사실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당장 류보비의 앞을 가로막은 것이 바로 그 훈련해야 할 부분들이었다.
지금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느낀 폴리나 선생님이 말했다.
“일단…… 타티아나, 조금 괜찮아졌지?”
“예.”
“그럼 아까 하던 것 계속해 보자. 류보비는 잠시 쉬면서 타티아나를 보렴.”
그리고 다시 이것저것 테스트들이 이어졌다.
편안하게 내가 평소 낼 수 있는 음을 내 보라고 몇 번이나 시키고, 최대한 숨을 들이마셨다가 소리를 얼마나 길게 낼 수 있는지도 테스트했다.
또 이어서 피아노로 음을 치면서 내겐 정확하게 한 옥타브 아래의 음을 내 보라고 하시고, 위아래로 음계를 따라 몇 번이고 불러 보기도 하고, 리듬감을 테스트하는 듯 부점이 달린 음계를 한 번 쳐 주시곤 똑같이 따라 불러 보라고 하기도 하셨다.
그 모두가 살아생전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것들이었지만 난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테스트에 임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목소리가 조금 탁해져서 물을 한 잔 더 마시는 사이, 폴리나 선생님이 떨떠름하게 물었다.
“……너 정말 처음 맞니?”
“예. 처음이에요.”
“하긴, 복식호흡에 서툰 건 확실해 보이니.”
폴리나 선생님이 헛웃음을 흘렸다.
“그래도 피아노과라 그런지…… 소리를 어떻게 끌어내야 하는지 선험적으로 터득하고 있구나.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 말이지. 정말 놀라운걸.”
성악의 세계엔 처음 들어왔지만, 소리와 화성학에 대해선 기존에 배운 것들이 있었다.
“감사합니다.”
칭찬에 담백하게 대응하자 폴리나 선생님이 날 유심히 바라보며 말했다.
“굉장히 괜찮아, 굉장히……. 보기엔 리리코이지만 목소리는 드라마티코…… 이론에는 아주 박식한 것 같고 기본적으로 소리를 낼 줄도 알고……. 피아노과에선 초인이라도 키울 생각인 건가?”
무슨 말씀인진 잘 모르겠지만 나쁜 말씀은 아닌 것 같았다.
얌전히 듣고 있자니 선생님이 이어 말했다.
“좋아. 길게 끌지 말자꾸나. 시간이 많지 않다고 그랬었지?”
“예. 다음 주까지예요. 죄송해요.”
“죄송할 게 뭐 있니? 사람 사정이란 게 그런 거지. 자 그러면…… 일단 호흡법은 이번 주 주말까지 해서 어디까지 할 수 있나 해 보고. 다음 주엔 본격적으로 발성법을 익히고 노래를 해 볼까?”
아무리 급하다지만, 조금 파격적일 정도로 폴리나 선생님은 내 상황을 고려해 주셨다. 기초를 이렇게 날림으로 해서 괜찮을까 싶을 정도였다.
“마음 같아선 두어 달쯤 집중적으로 기초를 쌓고 싶지만…… 괜찮지 않겠니?”
“…….”
이 또한 폴리나 선생님이 자존심을 굽혀 주신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리 동료 선생님에게 부탁받아서 잠깐 맡아 가르치는 것이라 할지라도 평소 가르치시던 교수법이 있다면 그걸 억지로 내 시간에 맞춰 주실 필요는 없는 것이었다.
차라리 거절하면 거절했지 이렇게 속성으로 가르치는 걸 원하진 않으실 것이다.
하지만 내게서 어떤 가능성을 보셨는지, 폴리나 선생님은 가볍게 다음 주엔 노래를 해 보자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노래를 한다는 말이 나옴과 동시에 옆에 얌전히 있던 류보비가 눈을 빛내며 슬금슬금 다가왔다.
“선생님.”
“그래, 류보비.”
“타티아나 언니 다음 주부터 노래해요?”
순간 나도, 폴리나 선생님도 류보비의 속셈을 알아차렸다.
류보비가 지금 연습하는 곡은 고양이 이중창.
두 명의 성악가가 불러야 하는 이중창이었다.
폴리나 선생님이 요 녀석 보게? 하는 표정을 하시더니, 다 알면서도 모른 체 말했다.
“그래. 간단한 가곡들부터 하나씩 불러 보게 할 생각이란다.”
“그, 그러면……!”
“타티아나는 피아노과라면 초견력도 굉장히 좋겠지? 거기에 시창도 뛰어나니 아마 하루에 몇 곡이라도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싶단다.”
“저기 선생님, 저랑…….”
“어디 보자…… 일단 차이코프스키부터 조금씩 해 볼까?”
급기야 류보비는 울상이 되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 속내가 훤했다.
하지만 폴리나 선생님은 날 류보비에게 내어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폴리나 선생님이 말했다.
“류보비도 시창 연습을 열심히 해야 다른 곡들을 하겠지? 타티아나 언니처럼.”
“하지만…… 전 타티아나 언니 같은 천재가 아니잖아요.”
그 말엔 나도, 폴리나 선생님도 놀랐다.
선생님이 굳어 있는 사이 류보비가 다시 칭얼거렸다.
“저렇게 정확하게 음을 맞추지도 못하고요. 저처럼 음감이 없는 애가 절대음감이 있는 피아노과 언니를 제가 어떻게 따라가요?”
“…….”
오늘 분명 성악이 처음이라 했던 내가 의외로 잘 해내자 류보비는 조금 박탈감마저 느낀 것 같았다.
난 류보비에게 다가가서 무릎을 낮춰 눈높이를 맞췄다.
“류보비.”
“네에…….”
“전 절대음감이 없어요. 왜 그렇게 생각하나요?”
“……? 거짓말 마세요.”
류보비가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난 고개를 저으며 다시 말했다.
“정말이에요. 전 절대음감 같은 건 가지고 있지 않아요. 물론 타고난 음감이 있다면 편하겠지만…… 아쉽게도 공부해서 익힌 상대음감뿐이네요.”
“말도 안 돼. 그치만 언니는 선생님이 피아노를 아무렇게나 쳐도 모두 따라서 불렀잖아요?”
“그게 우리가 이 학교에 다니는 이유예요, 류보비. 절대음감은 음악에 큰 영향을 주지 않아요.”
난 그녀의 팔을 토닥이며 웃었다.
“제가 류보비보다 나은 음감을 가지고 있는 건 단순히 제가 몇 학년 더 높기 때문이에요. 분명 제 나이가 되면 류보비는 저보다 훨씬 나은 성악을 할 수 있을 거예요.”
“……언니도 2학년엔 못했어요?”
여덟 살 때? 기억도 잘 안 난다. 그때 학교에서 뭐 하고 있었더라. 구구단도 제대로 못 했던 것 같은데.
“당연하죠. 류보비보다 훨씬 못했어요. 전 그때 음감이라는 게 뭔지도 몰랐어요.”
“그래요……?”
조금 풀이 죽어 있던 류보비가 기운을 차린 듯했다.
난 걱정 말라는 뜻으로 그녀를 가볍게 안아 주었다. 음악은 결코 쉽게 그 문을 열어 주지 않는다.
하지만 난 류보비가 훌륭한 성악가가 될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