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71화 (71/1,277)

##  71화

오후에 성악 수업을 받게 되어 학교에 남게 되었지만 피아노처럼 서너 시간씩 투자할 순 없었다.

목소리를 내는 것은 성대를 쓰는 일이었고, 무작정 혹사시키기보단 적절한 관리가 필요했다.

폴리나 선생님은 결코 내가 무리하는 걸 바라지 않았고 나 역시 내가 목이 쉬면 얼마나 심각하게 쉬어 버리는지 알고 있기에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만 했다.

어쩔 수 없이 오후 시간은 두어 시간가량 붕 뜨게 되었다.

레슨 없이 내가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은 이론공부나 복식호흡 연습뿐이었다.

“타티아나.”

“…….”

“바쁘니?”

바쁘진 않지만, 대답할 형편은 안 되네요.

배 쪽으로 들이쉰 숨을 잠시 머금었다가, 천천히 내뱉었다.

아무 생각 없이 쉬던 호흡을 의식하는 건 생각보다 무척이나 신경 쓰이는 일이었다.

한차례 복식호흡 사이클을 마친 뒤, 대답했다.

“아뇨, 괜찮아요.”

“……보면 볼수록 신기한 애라니까.”

“왜요?”

“가만히 앉아서 1시간도 넘게 복식호흡만 하고 있으면 안 힘들어?”

“1시간이요?”

“그래 나가서 숨도 좀 돌리고……. 아니, 숨 쉬는 거 연습하는 애한테 무슨 소리지.”

사실 난 그렇게 시간이 흘렀는지도 잘 몰랐다.

아나스타샤가 기가 막히다는 듯한 눈빛을 했다. 난 그녀가 날 생각해서 저런 말을 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웃으며 말했다.

“그만할게요.”

“그래…… 그러면…… 지금 뭘 꺼내는 거야?”

“책이요.”

어차피 비어 있는 시간 동안 할 것이 없어서 도서관에서 빌려 온 성악 전공서적이었다.

발성과 조음에 대한 매커니즘을 자세하게 다루고 있는 책이었다.

“이론 공부는 해도 되죠?”

“해…… 그런데 공부는 도서관 가서 하는 게 낫지 않아? 내 피아노 소리 시끄럽잖아.”

“아뇨. 이건 소리를 내 봐야 아는 것이라.”

책에서 설명하는 것들을 그대로 외워선 알 수 있는 것에 한계가 있었다. 어디까지나 몸을 직접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도서관에서 직접 소리를 내어 목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알아볼 순 없으므로 이 책을 가지고 공부를 하겠다면 목소리를 내어도 상관없는 연습실이 최고다.

아나스타샤가 약간 흥미가 생긴 듯 피아노 의자에서 일어나 내 쪽으로 왔다. 그러곤 내 옆에서 책을 들여다보고는 작게 중얼거렸다.

“이게 무슨 소리야……?”

황당한 듯 중얼거리던 아나스타샤가 더듬거리며 책을 읽어 나갔다.

“발성과 조음엔 성대의 텐션을 일으키는 근육들이 움직이는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고음을 낼 때의…… 윤상갑상근? 과 저음의 내갑상……피열근이 있고…… 발성 자세와 턱의 움직임으로 후두의 위치를 상하향시키는 것으로 통제에 둘 수 있는…….”

발음대로 읽으면서도 무슨 단어인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모를 만도 했다.

나도 저 근육들의 이름 때문에 스마트폰으로 사전을 찾아 가면서 읽었다.

한껏 인상을 쓰고 책을 읽던 아나스타샤가 잠깐 책을 달라 했다. 내가 넘겨 주자 그녀는 목차부터 살피더니 그 뒤로 몇 장을 휙휙 넘겼다.

잠시 책을 노려보던 그녀가 내게 말했다.

“타티아나. 이건 무슨 해부학 서적 같은데.”

“아주 다르진 않지요? 공기를 흡입하는 폐와 성대가 위치한 후두와 그 위의 공명강이 어떻게 서로 조화를 이루어서 말소리를 만들어 내는지에 대한 책이니까요. 그 부분에 대해선 의학 서적들보다 조금 낫지 않을까요?”

“폐니 후두니 뭐니……. 너 그런 말 하는 거 너무 무서워…….”

아나스타샤가 진저리를 쳤다.

조금 무섭게 들리리란 것도 이해는 간다. 폐가 없는 사람은 없지만 막상 그걸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면 조금 징그럽게 느껴질 만도 하다.

하지만 기초적인 이론을 모르고 어떻게 스스로 몸을 통제할 수 있겠는가?

“너 피아노도 이렇게 공부했니?”

“재미로만 한 번 읽어 봤어요.”

피아노 역시 손의 매커니즘을 다룬 서적들은 많았지만 그때 이미 난 상당한 테크닉을 스스로 쌓아 올린 후였다.

이미 체득하고 있는 것을 책으로 다시 보는 것도 꽤 재미있었지만, 정독을 할 시간이 있다면 바흐의 평균율을 한 번 더 치는 게 나았다.

하지만 이번엔 상황이 조금 달랐다.

완전히 바닥인 상태에서 짧은 시간 안에 어떻게든 얻어 낼 수 있는 것들을 최선을 다해 얻어 내야 했다.

물론 난 독학하는 것도 아니고 훌륭한 성악 선생님이 있었지만, 시간이 없다면 나 역시 할 수 있는 것은 무식하게 해야 했다.

기악이든 성악이든 다 몸으로 배우는 것이고 재능이 대부분을 결정하지만, 노력으로 할 수 있는 것 또한 분명히 있다.

나라고 이런 어려운 책이 떠드는 말을 다 이해할 수 있겠는가? 잘 모른다.

사전을 검색해 가면서 천천히 읽어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무작정 머리에 때려 넣고 책에 첨부된 삽화들도 대충 보이는 대로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그래야 폴리나 선생님과의 1시간 남짓한 짧은 레슨 시간 동안 머리에 들어 있던 것들을 몸으로 배우고 익히면서 하나라도 더 내 것으로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아나스타샤가 말했다.

“너처럼 진지하게 공부하는 애는 처음 봐. 시험 치는 것도 아닌데.”

학교 시험에 나오는 것에만 진지한 아나스타샤로선 내가 이렇게까지 하는 게 도저히 이해가 안 갈 것이다.

난 싱긋 웃으며 답했다.

“시험도 쳐요.”

“뭐?”

“제가 제 자신에게.”

스스로 치는 시험은 출제자도 나 수험생도 나 감독관도 나였다.

따라서 이 세상에 이만큼 엄격하고 날카로운 시험은 없었다. 내가 열심히 안 하게 생겼는가?

내 대답에 아나스타샤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었다.

“난 있는 시험도 치기 싫어 죽겠는데 얘는 없는 시험을 만들어서 치네…….”

“저도 있는 시험은 치기 싫어요. 푸쉬킨이라든지, 외우느라 지겨워 죽겠어요.”

“아하하, 네 입에서 지겹다는 소리가 다 나오다니. 정말 위대한 시인은 뭐가 달라도 다르네.”

“그렇잖아요. 30분짜리 소나타는 수십 곡씩 암보할 수 있어도 3분 낭독하는 시는 외우는 데에 너무 힘들어요.”

괜히 투덜거렸더니 아나스타샤는 킥킥 웃으며 내 투덜거림에 맞장구를 쳐 주었다.

음악가인 그녀 역시 활자보다는 음표를 훨씬 잘 외우는 사람이었다.

우린 그런 공통점으로 한참 동안 실없는 이야기를 했다.

학생들끼리 흔하게 할 수 있는 불평과 우스갯소리 정도였지만 난 그녀와 이런 이야기들을 나누는 것이 즐거웠다.

그러던 도중, 아나스타샤가 문득 물었다.

“타티아나.”

“예.”

“하나만 대답해 줘. 성악 전공한다거나…… 그러려는 건 아니지?”

“…….”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불안이 서려 있었다.

결국 아나스타샤가 걱정하고 있었던 것은 이것이었던 것 같다. 혹여나 내가 피아노를 버리고 성악을 전공하게 될까 봐.

난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걱정 마세요, 아나스타샤. 제가 하는 모든 일은 결국 피아노로 보여 드리게 될 테니까.”

***

개인 연습을 마치고 성악 레슨을 받기 위해 연습실에서 나왔다.

복도로 나와 벽을 돌자마자, 난 소스라치게 놀랐다.

“리처드?”

“그래, 타티아나.”

리처드와 학교에서 친하게 사담을 주고받은 기억은 거의 없었다.

2주일 전 신아르바트 거리에서 함께 논 이후로도 리처드는 평소와 다름없는 태도로 날 대했다.

이것 역시 모종의 배려인지 잘 모르겠지만 사실 난 그게 조금 섭섭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 리처드가 갑자기 날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정확하게 내가 연습실에서 1층의 성악 레슨실로 가는 길에 있었다.

난 설마 하면서도 물었다.

“절 기다렸던 건가요?”

“그래.”

“…….”

여지껏 모른 척하고 있더니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갑자기 왜요?”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서.”

“……말씀하세요.”

“잠깐 사람 없는 곳으로 갈까?”

“그냥 여기서 하세요.”

평소 같았으면 그가 말하는 대로 따라갔을 텐데, 오늘은 어쩐지 그러기 싫어서 일부러 살짝 못마땅하게 말했다.

사실 나는 리처드에게 이렇게 차갑게 말해선 안 된다.

리처드가 내 상태를 보고 직접 나서 준 덕분에 난 아나스타샤와 함께 구아르바트 거리로 나가서 그분을 만날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난 리처드에게 엄청난 빚을 지고 있다고 봐야 했다.

하지만 리처드는 내게 가짜 진단서까지 모든 준비를 해 주고는 마치 자기 임무는 모두 끝났다는 듯한 태도로, 그다음은 내가 알아서 할 일이라고 말하며 매정하게 굴었다. 오늘까지 거진 2주일 내내.

그러더니 갑자기 묻고 싶다는 게 있다고 길을 가로막으니 좋은 소리가 안 나올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내가 리처드에게 진 빚이 많다 한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다.

리처드는 날 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하아……. 좋아, 복잡한 이야기는 아니니 짧게 묻지. 너 성악 배우고 있지?”

“……그건 또 어떻게 알았어요?”

“어떻게야 어쨌든, 그거 설마 구세프가 시킨 거야?”

“……예?”

리처드가 엉뚱한 소리를 했다.

구세프 선생님이 내게 성악을 시켰다고? 어이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반대하고 급기야 내가 해낼 수 없다는 데에 내기까지 건 게 구세프 선생님인데?

“아뇨. 전혀 아니에요.”

“그래……? 그럼 왜 갑자기 성악을 하겠다고 하는 거야?”

나야말로 묻고 싶었다. 리처드는 왜 저한테 그렇게 신경을 쓰는 건가요? 제가 성악을 배우든 미식축구를 하든 상관없지 않나요?

물론 그렇게까지 심하게 말할 생각은 없었다. 단지 생각을 좀 했을 뿐이다.

이 생각을 입 밖으로 낸다면 리처드와의 이 관계마저 파탄 내겠다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리처드는 알았다며 내게서 완전히 신경을 꺼 버릴 테니까. 그는 딱히 내게 얽매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건 싫었다.

난 조용히 대답했다.

“별…… 이유는 없어요. 제가 성악을 배우고 싶어서요.”

“누가 말한 게 아니라, 네 스스로 생각한 거야?”

“예. 그래요.”

“그래.”

리처드는 깔끔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반 발자국 스르르 비켜났다.

“네가 선택한 일이라면 됐어.”

“…….”

도저히 리처드의 의중을 알 수가 없다.

난데없이 밖으로 끌고 나가서 데리고 다니다가 가짜 진단서를 꾸밀 정도로 관심을 쏟는 것 같다가도, 반에서 보면 평소처럼 권태에 찌든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러다가도 성악을 시작하니까 대뜸 찾아와선 혹시 누가 시킨 건 아니냐고 묻고 있었다. 대체 날 어떻게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리처드.”

난 가만히 입을 열었다. 리처드가 대답했다.

“응.”

“리처드는…….”

대체 뭘 어떻게 물어야 할까?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잠시 고민하다가 그만두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

잠시 침묵하던 리처드가 불쑥 말했다.

“너도 나한테 묻고 싶은 게 많았었지.”

2주일 전에 리처드와 대결했을 때 내가 그에게 바란 것은 몇 가지 질문을 할 수 있는 권리뿐이었다.

그만큼 내게 있어 리처드는 미스테리였고 난 그에게 물어볼 것이 많았다.

내 얼굴을 들여다보던 리처드가 희미하게 웃었다.

“궁금하면…… 알지?”

“……뭐를요?”

“내게 대답을 강요해 봐.”

……얘 일부러 이러는 거지?

리처드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날 내려다보았다. 거기엔 비아냥거리거나 비웃는 기색 따위가 있진 않았다.

리처드는 순수하게 내가 다시 똑같은 조건을 걸고 리벤지 매치를 걸어 오길 바라고 있었다.

리처드에게서 대답을 얻어 낼 수 있는 것은 그를 이기고 나서였다.

난 조금 웃었다.

“다음엔 그렇게 사소하게 몇 가지 묻고 말 생각은 없어요. 리처드가 저번 내기에서 얼마나 막무가내였는지 잘 봤으니까요.”

“기대되는데.”

“그리고 내기 이행 후에 상대를 얼마나 방치해 두는지도 잘 봤죠. 정말 기대하셔도 좋아요.”

“하지만 지금 넌 꽤 즐기고 있는 것 같아 보여.”

“저번 주까지만 해도 피아노 없는 제가 얼마나 쓸모없는지 절실히 깨닫고 있었는데요.”

정색하며 말하자 리처드가 웃었다.

“피아노에게 사과는 했어?”

“……예?”

그렇게 이상한 말을 남긴 채, 리처드는 손을 흔들며 계단을 올라갔다.

난 계단 너머로 사라지는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나도 레슨실로 가야 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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