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78화 (78/1,277)

##  78화

겉옷을 벗어 걸고 자리에 앉았다.

막연한 기대와 두려움을 동시에 느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

그 많던 경호원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바로 옆 테이블에 세 명만 남아 있었다.

약간 의아해져서 옆에 있는 루슬란 오빠에게 물었다.

“경호원분들은 다 어디 가신 건가요?”

“왜 그런 걸 물어?”

희한하다는 목소리. 오빠가 날 돌아보았다. 본래 성격대로라면 경호원 같은 걸 신경 쓸 애가 아닌데 이해가 안 간다는 눈초리였다.

조금 슬펐다. 루슬란 오빠는 아직도 날 신뢰하고 있지 않았다.

내가 기억을 하나도 못 한다는 것은 이제 인정하는 것 같았지만, 여전히 오빠는 내 본성이 어디로 사라지지 않고 잠시 어리둥절해하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점차 생활에 익숙해지고 상식이 쌓이고 나면 그 본성이 드러날 것이라고 여기는 것 같다.

내가 그녀 대신 사고치지 않고 얌전히 살려고 노력한 게 벌써 10개월도 넘었는데.

기간으로 보자면 충분히 길었지만 학교도 따로 다니고, 오빠는 저녁 식사 때가 아니면 날 거의 피해 다녔기 때문에 그간 마주칠 일이 많았던 것도 아니라서 이미지 쇄신을 하기엔 역부족이었던 것 같다.

결국 시간이 해결해 줄 일이지만…… 조금 가슴이 답답하다.

난 조심스레 물었다.

“제가 알면 안 되는 일인가요?”

“그런 건 아냐. 경호원들이야 뭐…… 각자 위치에 있겠지.”

오빠는 별걸 다 신경 쓴다는 듯 말했다.

“그게 그들의 일이니까.”

난 그제야 이 레스토랑 하나만을 전세 내지 않고 한 층을 전부 빌린 이유가 단순히 날 놀래켜 주기 위한, 그런 가벼운 이유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 가족의 경호에 대한 문제도 있는 것이었다.

그래도 약간 신경이 쓰여서 주변을 둘러보고 있자 루슬란 오빠가 말했다.

“타티아나. 너 일부러 그러는 거냐?”

“……예?”

“경호원들이 여기 앉아서 함께 식사를 하고 네게 꽃이라도 주리라 생각하는 거야?”

“그건 아니지만…….”

“그건 네 친구들이 할 일이잖아?”

“루슬란.”

약간 비아냥거리는 오빠의 어투에 아버지가 개입했다.

“오늘만큼은 조금 진심으로 네 동생의 생일을 축하해 줄 수 없겠느냐?”

“……축하할 일이긴 하죠.”

“또 건성이구나.”

“아버지. 전 언제나 타티아나에겐 진심입니다.”

오빠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조금 감동적으로 들렸지만 그렇게 생각하기엔 그 목소리가 너무나 차가웠다.

사실 그대로였다. 루슬란 오빠는 단 한 번도 날 장난으로 대한 적이 없었다. 언제나 긴장해서 어깨를 세우고 의심의 눈초리부터 시작하곤 했다.

이번 역시 마찬가지였다.

“별일 없이 생일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것엔 축하를 해야죠, 당연히.”

“루슬란.”

“진심이라니까요.”

그렇게 별 영양가 없는 이야기가 아버지와 오빠 사이에 오갔다.

“…….”

난 굳이 그 사이에 끼어들지 않고 테이블의 무늬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페더레이션 타워의 89층을 통째로 빌리면서 함께 빌린 레스토랑은 유달리 호화롭거나 눈에 띄는 건 아니었지만 은은한 고급스러움을 보이고 있었다.

그간 친구들과 가 본 레스토랑들 역시 고급스럽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곳들이었지만 이 정도 되는 곳은 처음이었다.

혹시라도 식사 예절에 어긋나는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기억을 더듬고 있자 곧 음식이 나오기 시작했다.

처음 나온 것은 캐비어처럼 보이는 음식 한 접시와 와인이었다.

아버지가 와인병을 들어 유심히 보시더니 말씀하셨다.

“타티아나. 네게 아페리티프로 와인을 따라 주고 싶긴 하지만, 아직은 어리니 참는 것이 좋겠구나.”

“아…… 괜찮아요.”

난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척 봐도 굉장한 고급주인 것으로 보이는 와인이 궁금하긴 했지만 알콜은커녕 커피와 콜라에 취해 버리는 내가 저걸 마시면 어떻게 될지 무서웠다.

때문에 아버지와 오빠 잔에 와인을 채웠다. 난 주스로 대신했다.

“건배하자꾸나.”

아버지가 잔을 들어 올렸고, 이어 오빠와 내가 잔을 올렸다. 나와 눈을 마주친 채, 아버지가 건배사를 읊었다.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와 준 타티아나가 지난 1년간 건강하게 잘 지내고, 생일을 맞이해 열다섯 살이 되어 준 것이 난 너무 기쁘구나.”

깊은 감사와 애정만이 넘치는 눈을 바라보며, 난 어쩐지 눈물이 흐를 것 같았다.

“이 뜻깊은 날을 축복하며, 그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 세 가족의 기억 속에 오늘이 영원히 남기를.”

마치 엄숙한 신자처럼 아버지는 그렇게 기도하듯 건배사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타티아나의 건강을 위해.”

세 잔이 가볍게 부딪혔다.

“건배.”

러시아에서도 원래 첫 잔은 원샷하는 것이 매너라지만, 이건 와인이 아니라 주스였다. 난 목을 조금 축일 정도만 잔을 기울였다가 내려놓았다.

“……감사합니다.”

되도록 웃어 보이고 싶었지만, 먹먹한 목소리밖에 나오지 않았다.

내가 이런 애정을, 축복을 받아도 되는 걸까?

아버지는 나 대신 웃어 주었다.

“감사가 무슨 말이냐 타티아나. 나야말로 고마운 마음뿐이다. 네 말대로 이렇게 다른 사람을 부르지 않고 가족들만 모여 축하하는 것도 좋구나.”

“……그런가요?”

“그래. 손님이 많으면 떠들썩하긴 하지만, 사실 파티가 끝나고 나면 잘 기억이 나지 않기 마련이지 않느냐? 지나친 사람도 많고, 정작 가족들과 보낼 시간도 줄어들고. 하지만 이런 자리는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을 것 같구나.”

그건…… 다행이었다.

사실 별생각 없이 아버지가 주도하시는 대로 하려다가 요번엔 소박하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단 생각이 들어서 제안했던 건데, 생각 이상으로 아버지는 이 자리를 굉장히 소중하게 생각하게 된 것 같았다.

큰 규모가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네 생일 파티를 네가 거절했다고?”

하지만 루슬란 오빠는 당혹스러워했다.

“예. 듣지 못하셨나요?”

“몰랐어. 여기 올 때까지만 해도 파티장이 준비되어 있을 줄 알았지.”

“……예?”

그때, 아버지가 약간 타이르는 조로 말했다.

“그래. 넌 상상도 못 했겠지, 루슬란. 하지만 네 동생이 이런 아이다. 타티아나가 앞으로는 성대하게 하더라도 첫 생일만큼은 가족들과 지내고 싶다고 내게 직접 그리 말했다.”

“…….”

루슬란 오빠는 침묵한 채 날 바라보았다.

오빠는 뭘 보고, 기억하고 있는 걸까.

그렇게 의심하는 눈초리를 보낼 것이라면 차라리 속 시원하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을 해 주었으면 좋겠다.

답답한 마음으로 마주 쳐다보자 오빠가 슥 시선을 피했다.

한숨이 절로 나오지만, 어쨌건 가족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어색하게 만들긴 싫었다.

난 일부러라도 웃으면서 분위기를 밝게 만들려 했다.

그런 날 가만 보시던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건배도 마쳤으니 준비한 선물을 줘야겠구나.”

아버지가 옆 테이블에 있던 경호원 한 분을 불렀고, 그분은 옆에 두고 있던 종이백을 가지고 왔다.

아버지는 그 백 안에서 새하얀 꽃 한 송이와 포장된 상자를 하나 꺼냈다.

“자, 타티아나. 생일 축하한다.”

“기뻐요, 아버지.”

난 꽃과 선물을 받아 들었다.

커다란 꽃다발이 아닌 것만 보더라도 아버지가 오늘만큼은 내 의도에 맞추어 소박하게 하시려고 무던히 신경 쓰셨다는 것이 보였다.

“열어 보렴.”

“예.”

조심스레 포장지를 벗겨 내자, 고급스러운 재질의 상자가 드러났다.

덮개를 열어 보니 가운데에 빨간 보석이 박힌 목걸이가 들어 있었다.

난 보석에 그리 큰 관심을 두지 않지만 이 목걸이가 아무 의미 없이 선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아버지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 뒤로 오셨다.

그리고 내 손에서 목걸이를 받아 가선 직접 내 목에 걸어 주며 작게 이야기했다.

“넌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네 엄마인 빅토리아가 좋아했던 목걸이다. 이젠 네게 줘도 되겠구나.”

“…….”

사진으로밖에 보지 못한 어머니에 대한 감정은 극히 희미했다.

하지만 이렇게 직접 그 유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을 목에 걸게 되자 약간 애틋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아버지가 날 완전히 믿기로 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전엔 내게 줄 생각이 없으셨을 것이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기에, 그냥 그대로 유품으로 간직하려고 하셨겠지.

하지만 내가 지난날들을 헛되이 보내지 않고 믿음을 주었기 때문에 아버지는 이제야 비로소 내게 이 목걸이를 물려주실 수 있게 된 것이다.

“…….”

난 그녀가 받지 못했던 어머니의 유품을 내가 받게 된 것에 대해 굉장히 복잡한 생각이 들었다.

어쩔 수 없이 떠올릴 수밖에 없는 괴리감, 부채감, 이 자리에 내가 있어도 되는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

하지만 목걸이는 목 부근에 약간 서늘하게 느껴졌다가, 곧 피부의 온도에 맞춰 동화되기라도 한 듯 자연스럽게 내려앉았다.

“그 붉은 보석은 가넷이다. 1월에 태어난 네 탄생석이기도 하고 동시에 노력하는 사람에게 결과를 가져다주고, 수호하는 보석이기도 하지. 네게 잘 어울린다고 생각된다.”

여태껏 목에 걸어 본 그 어떤 목걸이 보다 내 마음에 들었다.

“……항상 하고 다닐게요, 아버지.”

중앙음악학교는 교칙이 상당히 엄한 편에 속했지만 이렇게 특별히 화려하지 않은 목걸이 정도는 얼마든지 차고 다닐 수 있었다.

난 의자에서 일어나 아버지와 포옹했고, 아버지는 내 진심 어린 감사에 기뻐해 주셨다.

아마 내게 이 목걸이를 주는 순간까지 내가 좋아해 줄지 걱정하고 계셨던 것 같다.

그렇게 목걸이의 감촉을 느끼고 있을 때였다.

“……?”

아버지의 손길이 내 양 귀 끝에 와 닿았다.

다른 사람이 귀를 만지는 간질거리는 느낌에 깜짝 놀라 어깨를 떨자, 아버지는 가볍게 내 귀를 한 번 잡아당기고는 놓아주셨다.

“아, 아버지?”

놀라서 뒤돌아보니 아버지는 자상한 미소만 띠고 계셨다.

갑자기 장난이라도 치고 싶으셨던 걸까? 난 그 엄하디엄한 아버지가 내게 장난을 하신다는 게 상상도 안 갔지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아버지와 내가 각각 자리에 앉고, 다음은 루슬란 오빠의 차례였다.

“자, 받아.”

그리고 루슬란 오빠는 직사각형 모양의 상자를 내밀었다.

“고마워요.”

“뜯어 봐.”

포장을 풀자, 그 안엔 새 태블릿 컴퓨터가 들어 있었다.

난 감탄했다. 오빠가 무슨 선물을 해 줄지 정말 궁금해하고 있었는데, 생각 외로 멀쩡한 선물이지 않은가?

루슬란 오빠는 이 상황이 극도로 어색한지 옆머리를 긁적였다.

“그…… 예전부터 자주 들고 다니던 게 보여서.”

세상에, 날 그렇게 지켜보고 있었단 말인가?

감동으로 눈을 크게 뜨자 오빠가 머쓱하게 말했다.

“어차피 너도 용돈으로 사면 그만이겠지만…….”

“아니에요. 정말 기뻐요.”

이 태블릿 컴퓨터는 최신형이 몇 만 루블도 넘어가는 제품이기 때문에 결코 가벼운 선물이 아니었다.

그리고 루슬란 오빠가 날 위해 선물을 고민하고, 가지고 다니면서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을 골라 주었다는 것이 기분 좋았다.

“……잠깐, 타티아나. 앉아. 그냥 앉지?”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루슬란 오빠가 약간 공포가 어린 얼굴로 더듬거렸다. 하지만 난 봐 줄 생각이 없었다.

“정말 고마워요.”

“……!”

다짜고짜 옆에서 확 끌어안아 버리자 막 도망가려다 말고 붙잡힌 루슬란 오빠가 품 안에서 소스라치게 떨었다.

의자에 앉은 채 전기 고문이라도 당하는 듯한 모습이다. 정말…… 나보다 다섯 살이나 많다곤 믿기 힘들 정도로 미덥잖다.

하지만 난 루슬란 오빠가 그녀에게 있어선 정말 하나뿐인 오빠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에 감사했다.

절대 도망치게 두지 않겠다는 듯 끌어안은 나와, 이젠 거의 발버둥을 치는 오빠를 보며 아버지가 크게 웃으며 말했다.

“자, 자. 타티아나. 네 오라비를 놔주거라.”

“죄송해요. 한 번 물면 놓지 않는다는 것이 제 신조라서요.”

“네가 무슨 사냥개야? 너 똑바로 말해, 일부러 이러는 거지!”

빽 소리를 지르는 통에 귀가 아파서 놓아주고 말았다.

난 히죽이며 웃었고 루슬란 오빠는 소름이 끼친다는 듯 날 바라보았다. 앞으로도 친하게 지내기 위해 할 수 있는 것들이 잔뜩 떠올랐다.

학교 남자애들하곤 마음대로 친하게 지내기도 힘들지만, 남매지간이라면 아무래도 상관없지 않겠는가?

그런 우릴 보며 아버지가 말했다.

“이제 자쿠스카도 들도록 하자.”

“예.”

선물도 받았고, 지금부턴 제대로 요리를 맛볼 시간이었다.

난 처음 나온 캐비어처럼 생긴 것을 조금 떠서 먹어 보았다.

아버지는 이걸 자쿠스카라고 말했다.

프랑스식 코스요리라고 한다면 오브되브르에 속하는, 제대로 된 식사 전에 식욕을 돋우는 음식인 듯했다.

캐비어를 다 먹기가 무섭게 곧바로 다음 요리가 나왔다.

이번엔 삶은 달걀로 만든 자쿠스카였다. 그리고 수프도 같이 나왔다.

“정말 맛있네요.”

“다행이구나.”

우리가 온 레스토랑은 전형적인 코스요리를 선보이고 있었는데, 쉐프가 유명한 사람이라는 것이 정말인지 굉장히 뛰어난 맛을 보여 주고 있었다.

특히 자쿠스카 후에 나온 생선 요리와 그다음의 스테이크는 정말 거짓말 하나 없이 입에 넣자마자 녹아내리는 듯했다.

그 뒤로도 담소를 나누며 코스요리를 즐겼다.

보통 영어로 셔벗이라고 말하는 소르베, 로스트인 로티와, 샐러드 등이 이어 나왔다.

양이 조금씩 나와서 다행이지 사실 이것만으로도 배가 불렀다.

한창 식욕이 넘칠 나이인 오빠는 스테이크를 더 주문할 정도로 잘 먹었지만 난 원래 위가 작은 데다가 식탐이 많은 편도 아니었다.

더 먹어야 하는데.

“…….”

조금 힘겹게 디저트로 나온 케이크를 먹고 있자, 아버지가 말했다.

“무리해서 먹을 필요는 없단다.”

“……예.”

눈에 띌 정도였나.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차까지 마신 뒤, 우리 가족은 레스토랑을 나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나 확인했더니 2시간이나 흘러 있었다. 계속 나오는 코스요리를 먹으면서 아버지, 오빠와 이야기를 나누느라 정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었다.

“마음에 들었는지 모르겠구나.”

“마음에 들고말고요! 아버지.”

아버지는 오늘 이 식사가 훌륭했고 내가 만족한다는 것을 충분히 느끼고 계시지만, 아직도 내 생일에 파티를 열어 성대하게 하지 않은 것에 대해 아주 약간 마음이 쓰이시는 듯했다.

몇 번이고 같은 질문을 하시고 계시다는 것은 알고 계실까?

오늘 난 충분히 감동적인 축하를 받았다. 하지만 말로는 몇 번이고 만족한다고 말해도 제대로 전해지지 않는 듯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생각해 보았지만 어차피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몇 가지 되지 않았다.

“빅토르.”

“예, 아가씨.”

난 조용히 빅토르를 불렀다.

“식사는 하셨어요?”

“아직 못 했습니다.”

“……미안해요. 식사도 못 하게 하고.”

“……?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아가씨.”

빅토르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말했다.

“좋은 날이지 않습니까? 아가씨는 편히 즐기시면 되는 날입니다.”

“……고마워요.”

“명령하실 것이라도?”

“명령은 아니고…… 혹시 이 빌딩 안에 피아노가 있다면 찾아봐 주실 수 있겠어요? 없어도 괜찮고요.”

가타부타 부연 설명은 없었지만 피아노라는 단어에 빅토르는 내 생각을 전부 이해한 것처럼 보였다.

“당장 알아보겠습니다.”

그리고 그는 바람처럼 사라졌다.

“…….”

아무 생각 없이 부탁한 것은 아니었다. 있지도 않은 피아노를 만들어 올 수 있을 정도로 빅토르가 초능력자이길 기대한 것도 아니고.

이런 건물이라면 분명 무슨 용도로든 지간에 피아노가 한두 대쯤은 있을 것이라는 직감에 기반한 부탁이었다.

그리고 내 이런 예감은 어지간해선 잘 틀리지 않았다.

난 반경 500m 안에 피아노가 있다면 그 냄새를 맡고 찾아내는 기이한 직감을 가지고 있었다.

나야말로 초능력자 비슷한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아버지.”

“그래.”

“저도…… 오늘 근사한 자리를 만들어 준 아버지와 오빠에게 선물을 드리고 싶어요.”

내 말에 아버지는 환하게 웃었다.

“그래? 무엇이냐.”

과할 정도의 애정을 받고 있는 내가 돌려줄 수 있는 게 무엇일까.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금전적으로 완전히 아버지에게 기대고 있는 내가 용돈으로 무언가를 준비한다고 한들 그게 큰 의미를 가지리라 생각하기 힘들었다.

내가 온전히 가지고 있는 것은 이 앙상한 손을 가지고 지닌 몸뿐이었다.

이조차도 가지고 있다고 말하기 힘들지 모르겠지만…….

“기뻐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내 앞에 피아노만 주어진다면 난 아버지도 오빠도, 오늘의 그녀도 만족시킬 수 있으리란 자신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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