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79화 (79/1,277)

##  79화

영원토록 음악만 배우고 살 수 있는 낙원은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내가 다니고 있는 중앙음악학교는 세계 유수의 교사들과 최소 영재 이상의 학생들로 이루어진 엘리트 음악학교였지만, 공식적으로 졸업장은 일반 학교 졸업장이 나오는 학교였다.

공부해서 일정 이상의 점수를 받아야 할 교과목들이 있었고 그건 시험으로 평가된다.

따라서 시험 기간이 되면 도서관엔 학생들이 시험공부를 위해 책들을 쌓아 놓고 머리를 싸매고 있고, 스터디실에도 특정 과목이나 시험을 위한 공부를 함께하려는 학생들이 모여 앉아 공부를 하곤 했다.

일반 고등학교와 비슷한 풍경이다.

나 역시 오늘은 연습을 마치고 스터디실에 남았다.

“누나. 다 풀었어요. 봐 주세요.”

내 옆 책상에 앉아 있던 아나톨리가 노트를 내밀었다.

바이올린과 2학년의 아나톨리는 몇 달 전에 교내를 헤매다 우연히 내 연습실에 들어와서 나와 만난 후로 꽤 친하게 지내는 후배 중 하나였다.

귀여운 후배의 공부를 봐 주는 것만큼 보람찬 일도 없다. 난 아나톨리의 노트를 받아 들고 하나하나 점수를 매겼다.

“두 문제 틀렸어요, 아나톨리.”

“윽…… 어디요?”

“이리 와 보세요.”

아나톨리가 내 옆으로 왔다. 난 노트를 앞에 두고 같이 볼 수 있도록 아나톨리와 바짝 붙어 앉은 채 문제를 짚었다.

“이 곱셈 문제는 식은 잘 쓰셨는데 아마 계산 실수를…….”

“타티아나 언니! 저도 다 그렸어요!”

옆에서 활기찬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옆을 돌아보니 류보비가 손으로 사보한 악보를 자랑하듯 펼쳐 보이고 있었다. 저게 이번 학기말 과제라 했던가?

“어때요?”

“예. 예쁘게 잘 그렸네요.”

“정말요?”

류보비는 저번 달에 내가 잠깐 성악을 배웠을 때 친해지곤 그 후로도 꽤나 날 잘 따르는 편이었다.

가끔 연습을 도와주거나 하는데 실력이 나날이 늘어 가는 게 귀에 들릴 정도였다.

이젠 자신이 속한 합창단에서도 꽤 무게 있는 파트를 맡고 있다고 한다. 불과 몇 주 만에 대단한 성장이었다.

내가 기특하게 그녀를 보며 머리를 쓰다듬자 옆에서 볼멘소리가 들렸다.

“야, 사보한 것도 검사받아야 하냐? 웃기네.”

아나톨리가 조금 불쾌하다는 듯 류보비에게 말했다. 류보비는 지지 않고 되쏘았다.

“그깟 산수에 쩔쩔매는 게 더 웃긴 것 같은데?”

“자기는 잘하는 척하고 있네. 저번에 보니까 너도 나랑 비슷하던데.”

류보비와 아나톨리가 서로 투닥거리기 시작했다.

이 둘이 만난 것은 약 일주일쯤 전이었다.

비록 과도 다르고 접점이라곤 중간에 있는 나뿐이었지만 같은 학년인지라 금방 친해질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예상외로 류보비와 아나톨리는 서로를 친구보다는 경쟁 상대로 생각하는 듯했다.

내 입장에선 류보비와 아나톨리가 가급적 친하게 지내 주었으면 좋겠지만, 선의의 경쟁자 또한 필수불가결적인 것이니 괜찮을 것 같기도 하다.

갑자기 산수 풀기 시합으로 넘어간 둘을 두고 잠시 숨을 고르고 있었다.

“타티아나.”

“예?”

“나도 이것 좀 가르쳐 줄래?”

그때 발렌티나가 책을 가지고 내 옆으로 왔다. 난 쉴 틈도 없었지만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무슨 문제인데요?”

“문제가 아니라…… 음, 염기가 전리된다는 게 무슨 소리야, 대체?”

발렌티나가 보인 것은 어떤 문제가 아니라 과학 교과서였다. 그녀가 약간 머쓱하게 말했다.

“아나스타샤한테 물어봤는데 잘 모르는 것 같더라고.”

“…….”

아나스타샤 역시 시험 기간이 닥치면 벼락치기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스타일이라 같이 공부를 하면서 무언가 물어볼 상대는 아니었다.

힐끔 보니 아나스타샤는 머리가 과부하로 멎어 버렸는지 멍하니 앉아 있었다.

이 둘 다 아예 그냥 과학 수업을 제쳐 버린 모양이다.

난 쓰게 웃으며 아나스타샤에게 말했다.

“아나스타샤도 이리 오세요. 같이 설명해 드릴게요.”

“됐어. 난 일단 혼자 교과서 읽어 볼…….”

“제가 알기 쉽게 가르쳐 드릴게요.”

그제야 아나스타샤가 내 옆으로 왔다.

그리고 난 짧게 과학 시험 범위인 산과 염기에 대해 기초적인 것부터 차차 설명을 해 나갔다.

사실 이전에 내가 알고 있는 산과 염기는 염산과 비누 정도였다.

분명 이전에도 배웠지만 그땐 공부 같은 건 완전히 담쌓고 살았던 시기라 나도 이제야 처음 배우고 알게 된 것들이었다.

난 그것들을 발렌티나와 아나스타샤에게 설명하면서 다시 차근차근 정리할 수 있었다.

내 설명을 듣고 발렌티나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말했다.

“그냥 물에 섞는 걸 왜 그렇게 이야기하는 거야?”

“공통적으로 수용액에서 수산화이온을 내놓기 때문이죠.”

내 말에 똘망똘망했던 발렌티나와 아나스타샤의 눈이 급격히 빛을 잃고 흐려졌다.

난 다시 알기 쉽게 그림까지 그려 가며 교과서 내용을 설명해 나갔다.

“암모니아 기체는 약간 특수한 형태로 화학식만 봐선 수산화이온이 없지만 물과 만나면 반응해서 이온화되죠.”

“반대로 메탄올 같은 건 수산화이온이 있는 것같이 보이지만 물에 넣으면 반응하지 않고?”

“예. 그래서 그건 염기라고 하지 않죠.”

역시 아나스타샤는 이해력이 좋았다.

항상 그렇지만 어떤 이론 같은 것에 대한 설명을 해 주면 아나스타샤가 그나마 조금 빠르게 이해하고 알아들었다.

그러고 나서 알아들은 것을 바탕으로 발렌티나에게 더 쉬운 예시를 들어 설명했다. 그게 우리 세 명의 방식이었다.

그렇게 얼마간 교과서를 다시 훑자, 아나스타샤가 선언했다.

“난 이 파트 완전히 마스터했어.”

과연 그럴까요, 아나스타샤.

교과서에 나온 것은 아주 단순한, 일반적인 중학생 수준에서 배우는 아레니우스의 정의뿐이었다.

조금 더 깊게 파고들면 이 염기에 대한 정의가 세 가지 정도로 나누어진다.

물론, 그 이상은 내가 화학자를 할 것이 아닌 이상 알 바 아니었고.

“대단해요, 아나스타샤.”

난 활짝 웃으며 그녀를 칭찬했다.

그래, 우리는 음악가지 그 외의 그 무엇도 아니잖아?

그렇게 나와 아나스타샤, 발렌티나, 아나톨리, 류보비로 이루어진 스터디그룹은 계속 공부를 이어 나갔다.

8학년 세 명과 2학년 두 명으로 학년도 다르고, 무슨 과목을 중심적으로 공부할지에 대한 기준도 없는, 정말 친목회나 다름없어 보이는 모임이었지만 그 중간에 위치한 내가 모두를 조율해 주며 공부를 도와주었다.

수학 문제를 내 주었다가, 과학 이론을 가르쳐 주고, 시 해석을 찾아봐 주기도 했다.

내가 신경 써 주어야 하는 부분이 많았지만, 다행히 난 여태껏 공부를 꽤 열심히 해 오면서 성적도 그리 나쁘지 않았으므로 막히지 않고 모두에게 공부를 가르쳐 줄 수 있었다.

잠깐 쉬는 사이, 아나스타샤가 말했다.

“타티아나, 넌 오늘 별로 못 한 것 같은데 괜찮아?”

“괜찮아요.”

“거의 못 한 것 같은데…….”

아나스타샤의 말대로였다. 오늘 난 이 애들을 가르쳐 주느라 내 공부를 거의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게 가르쳐 주면서도 다시금 찾아보고 배우는 것들이 있어서 정말 괜찮았다.

그런데 옆에 있던 발렌티나가 노트에 무언가를 막 풀면서 지나가는 투로 툭 던졌다.

“그래도 대신 이번 실기가 죄다 슈만이잖아? 타티아나 너한테 유리한 것 아냐?”

“그런가요?”

“뭘 시치미야? 애들은 난리인데.”

정말 내 탓인가?

난 그닥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아주 상관관계가 없다고 할 수도 없었다.

내가 위클리 리사이틀에 슈만 소나타를 들고 올라간 이후로 교내에 갑자기 슈만 붐이 일었다.

이 유행은 한편에선 무슨 슈만 연구 모임이 새로 발족할 정도로 굉장한 인기였는데,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어쨌든 그렇게 학생들 사이에서 슈만의 명성이 날로 높아져 가자 선생님들이 아예 이번 기말고사 실기곡에 대대로 슈만의 곡들을 넣어 버렸다.

그리고 그 여파는 엄청났다.

“죄다 슈만 받았지, 아마? 발렌티나 너도?”

“응. 난 근데 내가 달라고 했어.”

“제정신 아니구나.”

“뭐가 제정신 아니야? 난 슈만 할 거야!”

“해라, 해.”

혀를 차던 아나스타샤가 중얼거렸다.

“발렌티나같이 이상한 애 말고 다른 애들은 진짜 다 죽겠다던데.”

“……그렇겠죠.”

슈만은 그리 쉬운 곡을 쓰는 작곡가가 아니었다.

들을 땐 마냥 쉽게 들리는 면이 있지만, 연주자의 입장에서 직접 쳐 본다면 이렇게 악마 같은 작곡가도 없었다.

테크닉적인 면만 보더라도 상당히 어려운, 나쁜 말로는 악질적인 곡을 썼고, 인간의 내면을 밝히려는 듯한 그 거대한 주제를 심도 있게 연구하자면 정말 끝이 없었다.

차라리 브람스처럼 기교적으론 비인체공학적이더라도 대자연을 노래하는 것이 표현하기에 쉬웠다.

아나스타샤가 펜을 빙글빙글 돌리며 웃었다.

“이번 학기 끝나면 슈만 이야기는 쏙 들어갈 것 같지? 안 그래?”

“그 정도면 다행이지. 아마 모두 망치고 슈만 욕하느라 바쁠 것 같은데.”

“…….”

발렌티나의 대답을 들으며 난 침묵했다.

슈만 열풍이 몰아치면서 슈만의 곡을 치겠다는 학생들은 많이 생겨났지만, 직접적인 성적으로 연결되는 기말 실기곡으로 슈만을 하면서 겪는 부담감은 어마어마하다.

이번 일로 슈만 공포증 같은 게 학교에 돌면 어떻게 하지?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렇게 모두 다 같이 슈만에 데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단 생각이 들었다.

조금 과열된 것 같은 분위기를 살짝 식혀 주는 것도 필요했다.

아마 선생님들이 조금 무리해서 슈만을 아예 기말에 내놓아 버린 것 역시 그런 비슷한 생각이지 않을까 싶다.

앞으론 조금 조용해지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는데 아나스타샤가 내게 물었다.

“그런데 타티아나.”

“예?”

“넌 실기곡 뭐 받았어?”

“토카타요.”

나 역시 미하일 선생님이 실기곡을 내 준 바 있었다.

슈만의 토카타.

즉흥곡의 형식을 하고 있지만, 쉬지 않고 2도 화음을 끊임없이 연주해야 하므로 연습곡에 가까운 곡이기도 하다.

물론 난이도는 결코 쉽지 않다.

아나스타샤가 혹시나 싶었는지 말했다.

“너 혹시 그것도 쳐 봤던 건 아니겠지? 슈만 소나타도 쳤으니까…….”

“…….”

“쳐 봤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살짝 고민하는 사이 아나스타샤가 내 기색을 읽고 혀를 내둘렀다.

“너 도대체 레퍼토리가 얼마나 넓은 거야? 이미 말도 안 되는 수준이라는 건 알긴 하지만…… 과제곡 막히는 걸 한 번도 못 본 것 같네. 대체 여기 오기 전에 무슨 학교를 다닌 거야?”

“운이 좋았죠.”

시험문제가 우연히 내가 알고 있는 문제인 것과 비슷한 것이었다.

세상에 피아노곡은 어마어마하게 많지만 그중에서 자주 연주되는 곡들은 따로 있었다.

그리고 난 기본적으로 레퍼토리가 굉장히 넓었고 이러한 과정을 한차례 겪어 봤기 때문에 적어도 과제곡을 잘 소화해 내지 못해서 문제가 생기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내 입장만 보자면 다행이지만 결국 이것도 다 반칙이었다.

“…….”

그 누구도 모르겠지만 난 반칙을 저지르고 있었고 그것으로 이득을 보고 있었다. 좋은 성적과 평판 등등.

내가 이 애들에게 시간을 쏟고 무언가 하나라도 더 내가 아는 것을 가르쳐 주려는 것은 거기에 대한 사죄의 의미도 조금은 담겨 있었다.

난 친구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아나스타샤. 발렌티나.”

“응?”

“왜?”

순진하게 대답하는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를 보니 내가 괜한 생각을 하는 것 같단 느낌이 들었다.

이 애들은 나와 달리 정말 천재들이었다.

그런데 지금 조금 앞서 있다고 해서 무슨 동정심을 가지고 베풀려는 듯한, 건방진 태도를 하고 있단 말인가? 그 시간에 내 할 일이나 잘할 것이지.

하지만 난 단순히 내 마음이 편하기 위해서라도 이 애들에게 아무것도 안 할 수가 없었다.

“오늘 공부는 조금만 더 보고…… 같이 연습실 안 가실래요?”

“너 저녁 연습은 집에 가서 하잖아 보통?”

“오늘은 같이 하고 싶어졌어요. 돌아가면서 슈만 실기곡도 들어 보고 같이 의견을 나누면 더 좋아지지 않을까 싶어서…….”

약간 횡설수설하자 묘한 눈으로 날 보던 아나스타샤가 옅게 웃었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는데, 타티아나.”

완곡한 거절이었다.

그녀는 이미 내 마음을 다 들여다보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웃었다.

하지만 옆에 있던 발렌티나는 달랐다.

“정말? 정말이야, 타티아나? 나 저번에 네가 슈만 소나타 치는 거 듣고 나도 소나타 받아 봤거든. 2번 말이야. 이제 대충 인템포로 쳐지는데 이거 레슨받기 전에 네가 좀 봐 주면 안 돼?”

아나스타샤가 인상을 쓰며 발렌티나를 쿡 찔렀다.

“야, 발렌티나. 타티아나는 오늘도 죄다 우리한테 시간 뺏긴 거 몰라?”

“다 아는 것 같던데 뭐 어때?”

“다 안다고 해서 너랑 나한테 시간 써야 하는 건 아니거든?”

둘의 태도는 확실히 달랐지만, 난 두 사람에게 도움이 되도록 하나라도 더 가르쳐 주거나 도와줄 수 있다면 시간이 얼마나 들든 상관없었다.

지금 난 발렌티나가 조금 고맙기까지 했다.

“아뇨, 전 정말 괜찮아요.”

“타티아나…….”

“발렌티나. 저라도 괜찮다면 발렌티나의 연주를 들어 드릴게요.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좋겠어요.”

“것 봐. 타티아나도 괜찮다고 하잖아.”

거 보라는 발렌티나의 말에 아나스타샤가 신음성을 내며 머리를 짚었다.

“발렌티나 넌 정말…… 단순하게…….”

“단순? 내가 단순하면 넌 무식하지.”

“뭐?”

“맞잖아?”

갑자기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갔다. 발렌티나와 아나스타샤가 쌍심지를 세우고 으르렁거렸다.

난 급히 사이에 끼어들었다.

“저기, 우리 연습실 갈까요?”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는 말없이 서로를 노려보다가, 내 얼굴을 봐서 이번엔 봐주겠다는 듯 긴장되어 있던 분위기를 누그러뜨렸다.

난 간신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둘이 이렇게 대립하고 있는 것을 중재하는 것에 비하자면 그냥 공부를 가르쳐 주거나 연습을 조금 도와주는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정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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