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83화 (83/1,277)

##  83화

막심과 니콜라이, 두 선배와의 대화는 생각보다 즐거웠다.

특히 나긋나긋한 니콜라이 선배보다는 약간 말이 많은 막심 선배가 대화를 주도해 나가고 있었다.

막심 선배가 킬킬거리며 말했다.

“아까 그 밴드? 잘 알지.”

“와, 정말요?”

“그래, 한 가지 비밀을 가르쳐 줄까?”

“뭔가요?”

“기타랑 베이스 두 녀석 다 바이올린과 후배야.”

바이올린과였나…… 어쩐지 현을 다루는 솜씨가 상상을 초월할 경지로 보인다 싶었다.

나 역시 바이올린을 배운 적 있지만, 그 이유는 단순히 소리에 집중하기 위한 훈련도구로 이용한 것에 불과했다.

현란한 바이올린 테크닉은 내 관심사가 아니었다.

하지만 제대로 바이올린을 전공해서 현을 다루는 기교를 높이면 기타를 다루는 데에도 도움이 되는지도 모르겠다. 조금 더 깊이 있게 배워 볼 걸 그랬나.

아직도 그 쟁쟁거리던 기타 소리가 귓가에 남아 있었다.

난 유로비트라고 하는 장르를 강렬하게 내 뇌리에 각인시켰던 그 밴드를 떠올리며 작게 웃었다.

“정말 굉장했어요. 전 살면서 그런 무대는 처음 봤거든요.”

“그래? 하하하, 좋아해 주는 것 같아 다행이네. 고마워. 녀석들에게 전해 줄게.”

“친한 후배이신가 봐요?”

“그렇지……. 아, 이름은 말해 줄 수 없어. 너희를 믿지 못하는 게 아니라 우리는 하나의 약속으로 맺어져 있거든.”

“……예?”

“그, 선생님에게 정체가 드러나면 큰일 난단 말이야.”

가면에 가발까지 쓰고 무대에 올라갔으니 정체를 들키기 싫다는 건 알겠지만, 조금 조심성이 없으신 것 아닌가요? 무슨 약속으로 맺어져 있다는 말 같은 걸 하시면 어떻게 해요? 같은 과의 친한 후배라고도 했고…….

굳이 추리하지 않으려고 해도 자연스럽게 한 가지 생각밖에 안 드는데…….

“아하하, 묻지 않을게요. 선배님.”

“이해해 줘서 고마워. 후배님.”

난 굳이 내가 생각해 낸 결론으로 선배를 몰아붙이는 것 대신 모른 척해 주기로 했다.

좋은 분위기이지 않은가? 괜한 재미없는 짓으로 선배를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막심 선배가 웃으며 말했다.

“그건 그렇고. 타티아나도 꽤 유명인사지?”

“제가요?”

“그래. 니콜라이는 아무것도 모르고 너희 둘을 데려온 것 같고 나도 솔직히 잘 모르지만, 누군지 얼굴은 몰랐어도 네 이름만큼은 자주 들었거든.”

“바이올린 과이신데도요?”

“그렇다니까.”

“부끄럽네요. 그렇게까지…….”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이야기를 들으니 그냥 부끄러운 정도가 아니었다.

한 학기 만에 다른 과에까지 이야기가 돌 정도라니 대체 얼마나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단 말인가?

막심 선배는 컵을 기울여 목을 축이며 걱정 말라는 듯 말했다.

“괜찮아. 실제로 널 보고 나도 처음엔 깜짝 놀랐지만, 이젠 바이올린과 애들 하나만큼은 내가 확실하게 잡아 놓을 테니까.”

……음.

난 조심스레 물었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은가 봐요?”

“어…….”

그제야 아차 싶었는지 막심 선배가 입을 다물었다.

이 선배, 사람은 나쁘지 않아 보이는데 신나게 말하다 보면 약간 뒷수습을 잘 못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 모습 자체는 순수해 보여서 그리 기분 나쁘거나 하진 않았다.

나도 모르게 선배의 말문을 막히게 만들었지만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었다.

아까의 밴드 이야기에 이어, 이번에도 이쯤에서 덮어 주기로 마음먹고 화제를 돌리려 했다.

“저도 들은 바가 없진 않아요. 타티아나.”

“예?”

옆에서 우리 이야기를 듣던 니콜라이 선배가 불쑥 말했다.

막심 선배가 미세하게 손을 떠는 게 보였다.

“처음엔 몰랐죠. 그저 두 후배님과 함께하면 괜찮겠다 싶어서 권유한 거고요. 그런데…… 타티아나 후배님은 베르체노프 가문에서 키운 비밀병기라는 게 사실인가요?”

“……뭐라고요?”

“푸흡.”

난 황망하게 되물었고 옆에 있던 아나스타샤는 뿜었다. 그녀가 뭔가 입에 물고 있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막심 선배는 문자 그대로 기절할 것 같은 표정으로 니콜라이 선배를 돌아보았으나, 니콜라이 선배는 평온한 얼굴로 말을 이어 나갔다.

“타티아나 후배님은 8학년에 편입하자마자 피아노과에 일대 파란을 몰고 왔다고 하더군요? 이런 일은 우리 학교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라…… 윽!”

“제발 닥쳐. 니콜라이.”

퍽 소리와 함께 니콜라이 선배가 신음성을 냈다. 눈으로 보지 못한 공격이 테이블 밑에서 행해진 것 같았다.

니콜라이 선배는 갑자기 왜 이러냐는 듯 옆을 돌아보았다. 막심 선배는 그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날 향해 웃으며 말했다.

“하, 하하하…… 신경 쓸 것 없어, 타티아나. 거의 다 좋은 이야기들뿐이니까.”

뭔가 수습을 하려는 것 같지만 수습이 될 리가 없었다.

“…….”

갑자기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선배 입장에서는 앞에 앉혀 둔 후배 앞에서 너 학교에서 소문이 이렇다는 둥 저렇다는 둥 말해 놓고는 제대로 수습도 못 한 것이니 끔찍한 기분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난 별생각 없었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라는 이름으로 학교에 다니게 된 이상 의도치 않은 시선을 사게 되는 것은 이미 각오한 일이었다.

물론 처음엔 그조차도 싫었고 되도록 조용히 지내고 싶어서 눈에 띄지 않도록 행동했었지만, 이젠 많이 늦었다.

에르네스트와 한 소문에 연류되고, 위클리 리사이틀에선 슈만을 쳐서 유행을 일으키고, 벌써 한 학기 만에 몇 번이나 눈에 띄는 일들을 많이 해 버렸는데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이겠는가?

“타티아나.”

내 소문에 대한 이야기는 신경 쓰지 않고 그저 이 분위기를 어떻게 되살릴까 눈치를 보고 있는데, 옆에 있던 아나스타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예.”

“네가 비밀병기니 어쩌니 하는 소리, 난 근거 없는 말은 아니라고 생각해.”

“……예?”

갑자기 무슨 소리야, 이건 또?

옆을 돌아보니 아나스타샤가 실없이 웃으며 포크로 사과를 쿡 찔렀다.

“그렇잖아? 맨날 피아노밖에 모르고…… 실력도 그만큼 되고. 아, 선배들. 그거 알아요? 타티아나 얘 있잖아요. 볼쇼이 발레단 공연도 한 번 본 적 없대요.”

“뭐?”

“정말인가요.”

“얼마나 피아노밖에 모르고 살았는지 아시겠죠?”

두 선배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날 바라보았고, 난 약간 원망스럽게 아나스타샤를 흘겼다.

물론 그게 사실이긴 하지만, 이렇게 놀림감처럼 이야기할 건 없지 않은가? 이 배신자.

“발레 공연도 나쁘지 않아. 특히 볼쇼이 극장에서의 발레 공연은 아무것도 모르고 봐도 정말 예술적이니까.”

“맞아요. 지금 수석무용수가 누구였죠?”

“시묜 츄진.”

“그 사람 정말 대단했어요. 꼭 보러 가길 권할게요, 타티아나.”

하지만 그 덕분에 분위기는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었다.

두 선배는 번갈아서 발레 공연과 그 뒤의 교향악단 등에 대한 이야기를 꽤나 흥미진진하게 이야기해 주었다.

“다음에 꼭 같이 가, 타티아나.”

아나스타샤 역시 내 팔을 잡으며 애교 있게 말했다.

약간 느꼈던 배신감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그녀는 단순히 날 농담거리로 만들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다시 시작된 대화에는 조금 더 다양한 주제가 펼쳐졌다.

막심 선배는 바이올린, 니콜라이 선배는 첼로, 나와 아나스타샤는 피아노로 각각 전공이 다르다 보니 나오는 이야기도 각양각색이었다.

이야기의 흐름은 교향악단에서 지휘자, 그리고 바이올린과 팀파니 이야기로 넘어갔다가 갑자기 방학 이야기로 이어졌다.

뭐가 어떻게 계속된 건진 잘 모르겠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일부터 2주간 이어질 방학에 무슨 일을 할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스노보드를 즐겨 타시는군요?”

“그래.”

막심 선배는 방학을 맞아 스노보드를 원 없이 타러 가겠다고 말했다.

눈빛이 반짝거리는 게, 몸은 여기 학교에 있지만 이미 정신은 눈밭에 가 있는 것 같았다.

“다치면 어떻게 하냐고 벌벌 떠는 녀석들도 많지만, 그건 인생을 손해 보고 있는 거지.”

“굉장히 재미있나 보네요?”

“물론이지. 그 속도감은 오토바이나 차로 느끼는 것과는 완전히 달라.”

난 스노보드도 타 본 적이 없어서 꽤 흥미진진하게 내가 모르는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주제가 나와서 기분이 좋아졌는지 이러저런 이야기를 하던 막심 선배가 잠시 말을 멈췄다.

말을 많이 해서 목이 타는 모양이었다. 선배는 무언가 마시기 위해 컵을 집었다. 하지만 그 컵은 비어 있었다.

막심 선배는 테이블 위에 있는 오렌지주스 병을 들고 자신의 컵에 따랐다.

선배와 이야기를 하며 맞장구를 쳐 주던 나 역시 조금 목이 말랐다.

테이블 위를 보았다. 케이크와 다과 등 먹을거리도 많고 커피와 홍차 등 마실 것도 많았다.

하지만 카페인과 탄산에 약한 내가 마실 수 있는 것은 물과 오렌지주스 정도였다.

오렌지주스는 아까부터 거의 오렌지 세 개분 정도는 마신 터라 그냥 물이나 한 컵 마시자 싶어서 저편에 열려 있는 물병을 가지고 와서 내 컵에 따랐다.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은 것은 손에 든 컵을 화끈하게 들이켠 후였다.

“윽……! 콜록, 콜록.”

그냥 물인 줄 알았던 것은 탄산음료였다. 목을 쏘는 탄산이 너무 아프다. 난 그 자리에서 기침을 쏟아 내며 목을 부여잡았다.

“타티아나!”

아나스타샤가 기겁해서 날 부축했다. 그녀는 내가 탄산음료에 취약하다는 것을 안다.

“괜찮아? 타티아나?”

“콜록.”

나는 눈물을 글썽이며 잔을 내려놓았다.

아나스타샤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날 바라보았고 막심 선배는 약간 당혹스럽다는 듯 말했다.

“왜 그래?”

“타티아나는 탄산을 못 마셔서요.”

“뭐? 아, 그런 건 미처 생각도 못 했네……. 여기 물 마셔.”

난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 내며 컵을 받아 들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한 번 데이고 나니 이것도 겁이 나서 살짝 마셔 보았다. 진짜 그냥 물이었다.

조심스럽게 물을 마시는 내 모습을 보던 막심 선배가 이마를 짚었다.

“미안해, 타티아나. 우리가 마시고 있던 건 치워 놨어야 했는데. 하지만 네가 이 많은 물병 중에 굳이 이걸 잡을 줄은 몰랐어.”

“그게…… 열려 있어서…….”

“열려 있기에 더더욱 손대지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얼마 전 아나스타샤가 해 주었던 말이 떠올랐다.

열려 있는 물병엔 무엇이 들어 있을지 모르니 절대 손대는 것이 아니라고 했던가……. 하지만 버릇이라는 것이 하루아침에 고쳐지는 것은 아니었다.

선배들은 고통스러워하는 날 보더니 약간 분위기가 어색해졌다는 것을 느꼈는지 조심스레 말했다.

“힘들면 이만 돌아가는 것이 좋아 보여.”

“돌아가라고요?”

아직도 목이 아프고 머리도 조금 아팠지만 고개를 들었다. 주변을 보니 아직도 파티는 한창이었다. 돌아가라니? 왜?

막심 선배가 말했다.

“집에서 걱정하시지 않겠어?”

“그래, 타티아나. 가자.”

아나스타샤까지 나서서 말했다.

하지만 난 살짝 심통이 났다.

다른 게 아니라 탄산 조금 마셨다고 돌아가라는 말에 나도 모르게 화가 났다.

막심 선배도 여태껏 베르체노프라는 이름은 떼 놓고 타티아나 한 명으로만 날 봐 주던 것 같더니, 사실은 한참이나 신경을 쓰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난 머리를 살짝 흔들었다. 콜라를 마시고 취한 적도 있었지만 아직은 괜찮다.

“싫어요.”

“하지만 타티아나 너…….”

“알아요. 제가 탄산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 정도는. 하지만 괜찮아요. 아직 돌아가진 않을 거예요.”

정말이다. 지금도 살짝 아프고 어질거릴 뿐이지 정신은 멀쩡했다.

“앉아 주세요, 모두들. 좋은 자리잖아요?”

엉거주춤 서 있던 막심 선배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다시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네가 괜찮다면 상관없지만…… 양호실에라도 잠깐 가 보는 게 어때?”

“자꾸 저 돌려보내려고 하시면 무대 위에 올라가서 노래할 거예요.”

“……뭐?”

“어떻게 파티에 와선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갈 수 있겠어요? 노래라도 한 곡 하고 가야…….”

“아냐, 됐어. 알았어. 우리 방금 무슨 이야기 하고 있었지? 내가 예전에 있던 청소년 관현악단이 퓰리처 상을 탔던 이야기 했던가?”

“아하하하. 그거 미국인한테밖에 안 주는 상이잖아요.”

“그랬던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선배를 보며 난 기분 좋게 웃었다.

정말 말이 잘 통하는 선배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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