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82화 (82/1,277)

##  82화

내심 갑자기 또 무슨 EDM 같은 게 나오면서 댄스 팀이라도 무대 위로 올라가는 게 아닌가 조금 기대 아닌 기대를 하고 있었지만, 그런 건 없었다.

진중한 교풍답게 파티 역시 그러리라 생각했던 것은 파티가 시작되자마자 싹 사라졌지만, 그 이후엔 나름대로 일관성 있게 진행되었다.

공연을 준비한 학생들이 차례로 무대 위로 올라와 솔로, 혹은 앙상블 무대를 보여 주었다.

기말 시험과 동시에 준비했다기엔 상당히 높은 수준이라 약간 놀랐다.

난 소곤거리며 말했다.

“굉장히 잘 하네요.”

“애초에 자신이 없으면 나오지도 못할 테니까.”

사교파티 무대에 오르는데에 무슨 제한 같은 게 있는 건 아니지만, 아나스타샤의 말처럼 자신이 없으면 공연 신청서에 이름을 쓰지도 못한다.

이 파티에서 주목받기 위해 무대를 이용할 줄 아는 실력자들만이 오르는 것이다.

“흐응…….”

잠시 지켜보고 있는데, 왈츠 타임을 알리는 곡이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약속이라도 한 듯 양 벽으로 갈라서 있던 남녀 학생들이 가운데로 몰려나왔다.

순식간에 자기 짝을 찾아가는 걸 보니 그전부터 서로를 찾고 있었던 것 같다.

나나 아나스타샤처럼 딱히 약속이 없는 사람들은 그대로 지켜보고 있어야 했다.

대충 헤아려 보니 커플과 솔로 비중은 반반 정도였다.

“…….”

난 사교댄스라는 것에 대해 전혀 모르지만 가운데로 향한 학생들 대부분은 익숙해 보였다.

남학생은 한 팔을 올려 자세를 잡았고, 그 올린 팔을 여학생이 붙잡고 안기듯 허리춤에 손을 둘렀다.

그러곤 모두가 4분의 3박자 왈츠 리듬에 맞추어 빙글빙글 돌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아…….”

처음에 기대하고 왔던 그 광경이 눈앞에 펼쳐지자 조금 감격스럽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물론, 이 학생들이 프로 사교댄스 선수들은 아니었으므로 동작은 어설프고 흐름도 매끄럽진 않았다.

하지만 때론 자연스럽게, 때론 엉망으로. 기분 좋게 웃으며 왈츠를 추는 학생들을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내가 이런 기분이 들 줄은 몰랐는데, 저 안에 끼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런데 뭘 알아야 끼어들지.

최소한의 스텝 같은 것은 알아야 엉키지 않고 춤을 출 수 있지 않겠는가. 난 평생 단 한 번도 춤이라는 걸 춰 본 적이 없었다.

리듬에 맞춰 움직이는 것은 손가락이면 항상 충분했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왈츠 정도는 조금 배워 볼까 생각하며 곡에 귀를 기울였다.

지금 당장은 댄스로서의 왈츠에 대해 전혀 모르지만, 그렇다면 전공인 음악으로서의 왈츠라도 알아들을 수 있어야 했다.

“……무슨 곡이지.”

왈츠인 건 맞는데 무슨 곡인진 잘 모르겠다.

프랑스의 것도, 오스트리아의 것도 아닌 전형적인 러시아 왈츠의 뉘앙스가 물씬 풍기지만 처음 듣는 곡이라 아나스타샤에게 물어 보았더니 그녀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말했다.

“스비리도프의 눈보라잖아. 몰라? 로망스는 볼쇼이 발레단의 주 레퍼토리이기도 한데.”

“음……. 볼쇼이 발레단의 공연을 본 적이 없어요.”

“뭐?”

아나스타샤가 정말 당황해했다.

이 러시아 모스크바에 살면서, 그것도 음악학교에 다니는 학생이 볼쇼이 발레단의 공연을 보지 않았다는 것은 조금 충격적으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

난 피아노 외엔 관심이 별로 없어서 발레는 잘 모르지만 앞으로도 그녀를 당황시키지 않기 위해선 교양으로라도 꼭 봐 두어야 할 것 같다.

난 말없이 주스를 홀짝이며 파티장을 바라보았다.

왈츠는 영원히 계속될 것처럼 흘렀다. 춤을 추는 학생들 역시 영원히 그러고 있을 것처럼 빙글빙글 돌았다.

하지만 사람인 이상 계속 그럴 순 없었다. 개중에 지친 것 처럼 보이는 학생들은 춤추는 무리 밖으로 나와서 휴식을 취하기도 했다.

전체적인 광경을 지켜보다가, 조금 이상함을 느꼈다.

파티장은 크게 두 분위기가 공존하고 있었다.

하나는 왈츠에 맞춰 중앙에서 춤을 추는 학생들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 바깥쪽을 돌면서 만나는 학생들에게 인사도 건네고 서로를 알아 가려고 하는 쪽이었다.

학기말 파티란 곧 사교파티라고도 했는데 그 목적에 충실한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그 자리에 서서 담소를 즐기는 학생들도 많았고, 즉석에서 권유받아 한 테이블에 모여 앉은 학생들도 많았다.

가만히 보고 있자니 그렇게 처음 만나는 것으로 보이는 남녀가 같이 춤을 추러 가기도 하는 것으로 보였다.

짝이 없는 사람들끼리 왈츠 한 곡 정도를 함께 추는 건 가볍게 할 수 있는 일인 모양이었다.

볼수록 기분이 이상해졌다.

이렇게 편하고 부담 없이, 모르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자리였는데, 왜 우리 테이블로는 아무도 안 오는 거지.

“……?”

유심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분명 우리처럼 테이블에 앉아 있는 학생들은 많았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를 돌아다니며 인사를 하고, 합석을 하곤 했다.

하지만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나와 아나스타샤가 앉아 있는 4인용 테이블엔 그 누구도 오지 않았다.

넌지시 아나스타샤에게 물었다.

“아나스타샤.”

“응?”

“왜 우리 테이블엔 아무도 안 오는 걸까요?”

아나스타샤가 이상한 소릴 한다는 듯한 눈초리를 했다.

“타티아나, 너 묘하게 적극적인 것 같다?”

“제가요?”

“그래. 여기 오겠다고 한 것도 그렇고.”

내가 생각해도 스스로가 조금 이상하게 느껴지긴 했다.

자진해서 파티에 참가한 것부터, 누군가 모르는 사람과 이야기를 해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든 것까지. 왜 그런 생각이 자꾸 드는진 잘 모르겠다.

“글쎄요…….”

나 원래 낯가림 엄청 심한데.

“저도 잘 모르겠어요.”

아나스타샤는 날 모로 쳐다보면서 정말 의외라는 듯이 말했다.

“너라면 가만히 앉아서 족히 2시간은 멍 때리고 있을 줄 알았더니…… 15분 만에 보채다니. 희한하네.”

“시간이 아깝잖아요?”

“너 내가 연습하는 것도 몇 시간씩 쳐다보고 있었던 것 기억 안 나?”

그랬긴 했지만 지금은 파티 중이지 않은가?

“이건 파티니까요.”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야…… 그런데 어쨌든, 네 문제는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예?”

난 영문을 모르겠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말이지. 내 문제가 아니라면 아나스타샤 때문에 우리 옆에 아무도 오지 않는다는 건가?

이해가 안 갔다.

보랏빛 드레스를 입은 아나스타샤는 이 파티장에 있는 여학생들 중에서도 가히 독보적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빛나고 있었다. 그런데 대체 왜?

아나스타샤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마 너랑 이야기하고 싶은 애들은 많을 거야. 지금도 몇 명이나 보여. 어슬렁거리는 남자들이.”

“……그런데요?”

“네 옆에 내가 앉아 있는 걸 보고는 못 오는 거지.”

“……왜요?”

“나도 이유는 모르지. 그런데 저번에도 이야기했던가. 이상하게 우리 학교 애들은 날 피하더라고.”

몇 명이나 어슬렁거린다는 걸 알아차렸다는 건 반대로 말하자면 그쪽으로 시선을 주었단 말이지 않은가?

기회를 엿보고 있던 입장에서는 아마 아나스타샤가 먼저 발견하고 노려보는 것처럼 느꼈을 수도 있다.

아무리 좋게 말한다 해도 아나스타샤의 인상은 결코 만만하게 보이지 않으니까.

발렌티나도 늘 걱정하듯 아나스타샤의 소문은 그리 좋지 않았다.

정학만 해도 두 번째에다가 툭하면 수업에 나오지 않는 8학년.

물론 그 소문을 먼저 듣지 않고 아나스타샤를 잠시만 만나 본다면 그녀가 굉장히 사려 깊고 착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겠지만, 이미지라는 것은 쉽게 벗어던질 수 없는 것인 것 같았다.

이전에도 몇 번이나 겪은 일이지만 복도에 혼자 걸어 다니면 몇 명이고 말을 걸어오는 데에 반해 아나스타샤와 함께 있으면 그 누구도 알은척을 하지 않곤 했다.

심지어 안면이 있는 학생조차도.

그만큼 아나스타샤를 피하는 학생이 많은 것이었다.

막상 그녀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으나 난 조금 슬펐다. 발렌티나가 방방 뛰는 게 이해가 갈 지경이었다.

“비밀이 풀렸네요.”

테이블에 턱을 괴며 중얼거리자 아나스타샤가 태연하게 말했다.

“애초에 같이 오겠다고 한 것도 이것 때문이었는데? 내가 없었으면 다 널 귀찮게 했을 거야.”

“……그게 이 파티의 목적 아니었나요?”

“난 네가 그걸 싫어하리라 생각했지. 왜, 지금이라도 나가 줄까?”

“아뇨…… 무슨 말이에요. 여기 있어요.”

아나스타샤의 잔에 괜히 더 주스를 가득 채워 주자 그녀가 까르르 웃었다.

난 실없이 웃으며 아나스타샤와 이러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금 학생들이 추고 있는 왈츠에 대해, 방금 지나간 여학생이 신고 있던 구두에 대해, 저편에서 떠들고 있는 남학생들에 대해.

파티를 즐기고 있는 학생과는 조금 동떨어진 느낌이 들었지만, 난 이걸로도 충분히 즐거웠다.

“그래도 그렇지, 어쩜 이렇게 한 명도 안 올까? 타티아나.”

“아나스타샤. 눈빛이 무서운데요.”

“내가 조금 벼르고 있었거든. 꼭 간이 부어서 이상한 소릴 하는 놈들이 하나씩 있곤 했는데, 이젠 정말 없네.”

이전엔 아나스타샤에게 말을 걸어오는 남자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소문이 어쨌건 아나스타샤는 주변의 이목을 확 끌어당기는 외모를 가지고 있었으니 용기 있게 대시하는 학생이 있다 한들 이상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나스타샤는 그 모두를…… 말 그대로 잘근잘근 씹어 버리지 않았을까.

장렬히 전사했을 영혼들에게 애도를 표하고 있자 아나스타샤가 태평하게 중얼거렸다.

“오늘은 이대로 조용히 보낼 수 있겠…….”

“저기요.”

“……?”

갑자기 낯선 남자가 테이블 옆으로 휙 다가왔고 난 깜짝 놀라 아나스타샤 쪽으로 붙었다.

아나스타샤 역시 조금 놀란 것 같았다.

“그…… 뭐죠?”

큰 키에 안경을 쓴 남학생이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는 듯 조금 물러나며 웃었다.

“혹시 두 분, 앞으로 알고 지낼 수 있을까요. 저희도 두 명인데.”

“…….”

두 명이라고 말은 하는데 정작 본인 혼자 온 걸 보니 자신들이 있는 테이블로 가서 합석하자는 것 같았다.

아나스타샤의 악명을 뚫고 이렇게 제안해 주다니 용기가 대단했다.

아나스타샤는 살짝 삐딱하게 고개를 틀었지만 기분 나쁜 표정은 아니었다.

어쨌건, 난 찬성이었다. 아나스타샤와 둘이서 노는 것도 재미있긴 했지만 이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나 혼자인 것도 아니었고.

슬쩍 돌아보니 아나스타샤가 내 눈치를 살피는 것이 느껴졌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용기가 가상하지 않아요?

결국 아나스타샤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좋아요. 같이 가죠.”

“이쪽이에요.”

안경을 쓴 남학생은 반대편 벽 쪽에 있는 테이블로 우리를 안내했다.

모르는 사람을 뒤따르는 건 조금 불안했지만 남학생은 급하지 않은 걸음으로 앞장서고 있었다.

어쩐지 그 태도가 굉장히 느긋해 보여서 난 약간 안심했다.

“막심!”

테이블은 그리 멀지 않았다. 그곳엔 마치 무슨 조각상처럼 훤칠하게 생긴 남학생이 의자에 세상 편하게 앉아서 한 손으로 주스를 들고 있었다.

막심이라고 불린 그 학생은 가볍게 주스를 들며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래, 니콜라이. 왔…….”

그리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크게 뜬 눈이 사방으로 흔들렸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이 어디 아픈 게 아닌가 싶기까지 하다.

막심이 대놓고 동요하고 있는데 우릴 데려온 니콜라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

“여기에 앉아요.”

“예.”

그렇게 4인용 테이블에 나와 아나스타샤 그리고 막심과 니콜라이가 앉았다.

난 처음 보는 사람들을 주의 깊게 살폈다.

그들 역시 중앙음악학교의 학생일 테니 위험한 사람은 아니겠지만 마냥 경계를 늦추는 것도 안 될 일이었다.

다행히 두 사람 다 괜찮은 사람인 것처럼 보였다.

막심은 허둥거리긴 했지만 그 모습이 조금 인간적으로 보였고 니콜라이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일관적으로 느긋한 분위기가 있어서 신뢰가 갔다.

“야……! □□□ □□□ □□□□□. □ □□□□□?”

자리에 앉자마자 막심이 니콜라이에게 빠르게 속삭였다.

내 러시아어 실력은 이제 막힘이 없었지만 잘 들리지도 않는 것을 도청하는 초능력을 갖추진 못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속사포처럼 쏟아 내는 막심을 보며 니콜라이가 한마디 했다.

“네가 그랬잖아. 이 파티장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학생 두 명만 골라서 데리고 오라고.”

“이런 미치……! 아니, 아닙니다.”

막심이 그야말로 새파랗게 질려선 격렬하게 손사래 쳤다. 그 모습을 보며 난 작게 웃음을 머금었다. 뭘 그렇게 당황한담.

이 또한 사교파티의 목적에 부합하는 일 아니겠는가?

“반갑습니다. 피아노과 8학년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예요. 잘 부탁드려요.”

네 명 중 내가 가장 먼저 자기소개를 하자 옆에 있던 아나스타샤도 이어 말했다.

“피아노과 8학년 아나스타샤 세르게예브나 이즈마일로바. 그쪽은요?”

“8학년……?”

중얼거리던 막심이 흠흠 하고 헛기침을 하더니 소개했다.

“난 막심 드미트리예비치 체르체소프. 바이올린과 10학년이야.”

“전 10학년 첼로과 니콜라이 콘스탄티네비치 자이체프예요. 반가워요, 후배님들.”

“저희야말로요.”

꽤 기분 좋게 인사가 오갔음에도 불구하고 막심 선배는 묘한 표정이었다. 아직도 현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반 농담 삼아 친구인 니콜라이에게 여학생을 데리고 오라고 말한 모양인데, 이렇게 진짜로 데리고 올 줄은 상상조차 못 했다는 얼굴이다.

아나스타샤가 장난스레 쿡쿡 웃더니 니콜라이 선배에게 물었다.

“그런데, 정말인가요?”

“무슨 말을 말하는 거죠? 아나스타샤.”

“저와 타티아나가 이 파티장에서 제일 돋보였다는 거요.”

그걸 또 굳이 재확인하는 건 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그럼요. 한참 돌아다녔는데 두 분만 보이더군요.”

그리고 당연한 것을 왜 묻느냐는 듯 답해 주는 선배까지…….

난 약간 낯이 뜨거워서 웃기만 했고 막심 선배는 멍한 표정으로 둘을 바라보았다.

조금 걱정했던 것 보다 훨씬 온화한 분위기에서 니콜라이 선배와 이러저런 대화를 주고받던 아나스타샤가 슬쩍 내 팔을 쿡쿡 찔렀다.

“타티아나. 너랑 같은 과 있네.”

“예?”

“존대가 입에 붙었잖아. 저 선배.”

그러고 보니 두 살 많다는 것이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니콜라이 선배는 꽤 자연스럽게 존대를 계속 하고 있었다.

같은 학생들끼린 기본적으로 반말을 편하게 하게 되어 있는데, 꽤나 특이한 사람이었다.

“…….”

물론 그렇게 따지면 당장 나도 특이한 사람에 속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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