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90화 (90/1,277)

##  90화

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도시를 고전과 퇴폐, 찬란한 아름다움과 우울함이 동시에 피고 지는 세속적인 도시라고 칭하기도 했다.

이제 막 이 도시에 내려서 첫 발걸음을 옮기게 된 나는 그 문장 전부에 공감할 수는 없었지만, 한 가지만큼은 동의했다.

찬란한 아름다움.

18세기부터 200년 동안 로마노프 왕조의 수도였던 상트페테르부르크는 근대 러시아의 역사와 예술을 한 몸에 지니고 있는 도시라 할 만했다.

전망대에 올라 도시 전경을 내려다보니, 높지 않은 18세기 유럽 양식의 건물들이 빼곡히 들어서 한 덩어리를 이루는 것처럼 보인다.

이 자체가 하나의 예술품처럼 보였다.

유네스코에서 이 도시를 통째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할 때, 아무 생각 없이 그리하진 않았던 모양이다.

“……아름답네요.”

“아름답지. 푸쉬킨도 도스토예프스키도 이 도시에서 그 많은 명작을 써 냈던 것은 단지 그들이 천재였기 때문만은 아닐 거야.”

“상트페테르부르크였기에 가능했을까요.”

“난 그렇게 생각해. 아무것도 없는 불모지에서 빼어난 문학작품이 태어나진 않는 법이거든.”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예술과 문화의 기반을 새로 닦은 제정 러시아의 계획도시이자 수도였지만 그와 동시에 극도로 크게 벌어진 계층갈등의 온상지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러한 혼란과 갈등 속에서 태어난 예술작품이야말로 시대의 정수를 담고 있기도 했다.

난 갑자기 궁금해진 것에 대해 물었다.

“혹시 문학에 관심이 있으신가요?”

“뭐…… 다른 사람들만큼은.”

“다른 사람들?”

“그래.”

그리곤 오빠는 아무렇지 않게 푸쉬킨의 시 한 구절을 읊조렸다.

“……신이, 영감이, 삶이, 눈물이, 사랑이.”

“…….”

루슬란 오빠는 그렇게 전망대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내려다보며, 스쳐 지나가는 바람에 흘려보내듯 푸쉬킨의 시를 읊더니 문득 날 돌아보았다.

“타티아나.”

“예.”

오빠의 눈빛은 많은 것들을 품고 있었다.

이제는 같은 과거를 공유하지 못하고, 한때 반목했지만 일방적으로 과거의 일을 투사하는 것 또한 금지당해서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아직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눈빛에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여 위태롭게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복잡하게 묶인 매듭 중 하나를 골라, 한쪽 끝을 잡고 조금 갈등하던 오빠는 결국 그것을 놓고 옆으로 치워 놓았다.

“넌 음악을…… 하는 아이였지. 네 안에 있는 예술가로서의 혼이…… 이 도시로 널 끌어당겼는진 모르겠지만.”

“…….”

“좋은 여행이 되었으면 좋겠어.”

모든 걸 차치하고 지금 이 순간만큼은 현재 내게 충실하려는 듯한 그 말에, 난 그만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말았다.

* * *

전망대에서 내려와 상트페테르부르크 도심의 넵스키 대로를 따라 걷다가 궁전 광장에 멈춰 섰다.

“…….”

계속 어딘가 갈 때마다 촌스럽게 감탄사를 내지 않기 위해 난 입을 앙다물고 참았다.

그렇게 의식적으로 참지 않으면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고 말 정도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남아 있는 문화유산들은 웅장하고, 훌륭했다.

“저쪽, 네바 강변에 있는 게 겨울궁전. 그리고 반대편이 신에르미타주야. 이 모두가 에르미타주 박물관이지.”

250년도 넘은 역사를 지닌 에르미타주 박물관은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과 런던의 대영 박물관과 함께 세계 3대 박물관이라 일컬어지는 곳이었다.

총 여섯 개의 건물을 통틀어 에르미타주 박물관이라 칭하고 있었는데, 그중 박물관 본관인 겨울궁전은 로마노프 왕조가 실제로 거주했던 궁전이었다.

“…….”

민트색의 겨울궁전을 올려다보고 있자니, 옆에서 오빠가 내 팔을 툭 쳤다.

“뭐 해. 들어가지 않고.”

“음…….”

뭐라고 설명하기 어려운 마음이 들었다.

오늘 막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해서 아직 어리둥절해 있는 상태인데 도시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알기 전에 이런 어마어마한 박물관부터 먼저 관람하는 게 과연 옳은 순서인가?

난 스스로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중얼거렸다.

“오빠.”

“왜.”

“에르미타주 박물관은 오늘 말고…… 다음에 와 보고 싶어요.”

“또 그게 무슨 엉뚱한 소리야. 눈앞에 두고.”

조금 상냥했었던 오빠가 짜증이 나는지 인상을 썼다.

난 고개를 저었다.

“아껴 뒀다가 나중에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루슬란 오빠가 내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아껴 두다니 정말 희한한 소릴 다 듣겠네.”

“이 박물관이 어디로 가는 건 아니잖아요?”

“대신 우리의 시간은 계속 흘러가지. 타티아나, 저 박물관을 다 둘러보려면 얼마나 걸리는지 알기는 해?”

인터넷에서 알아본 바 있다.

볼셰비키의 10월 혁명 이후 러시아의 귀족들이 가지고 있던 컬렉션들을 압수하면서 이 에르미타주 박물관의 소장품은 어마어마하게 늘어났다.

그 소장품들이 현재에 이르러선 300만 점에 가까웠다. 한 점당 1분씩만 소요해도 5년이 넘게 걸리는 양이라 한다.

하지만 지금부터 일주일 내내 이 에르미타주 박물관에 투자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다 보자면 끝도 없겠죠. 이 박물관도 물론 흥미 있지만…… 전 당장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전체를 느껴 보고 싶어요.”

루슬란 오빠는 잠시 생각하더니 혀를 차며 말했다.

“네가 그런 생각이라면 시기를 잘못 맞췄어.”

“시기를요?”

“그래.”

오빠가 보란 듯이 허공을 가리켰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진가는 6월에서 7월 정도에 와야 볼 수 있어. 지금은 2월이잖아.”

“왜죠?”

“이 도시가 왜 백야의 도시라 불리는지 직접 백야를 봐야 알 것 아냐. 분수 궁전의 분수와 정원도 지금은 얼어붙었을 테고. 네바 강 투어도 못하지. 네가 원하는 건 여름에 와야 제대로 볼 수 있을 거야.”

듣고 보니 루슬란 오빠가 옳았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밤이 되어도 해가 지지 않는 백야 현상으로 유명하기도 하지만 그 현상은 지금 같은 겨울이 아니라 여름에 볼 수 있는 현상이었다.

루슬란 오빠가 말했다.

“그래서 어떻게 할래? 난 에르미타주 박물관이나 보는 게 나을 것 같은데.”

“…….”

난 잠시 고민하다가 결정했다.

“오늘은 조금 돌아보는 게 나을 것 같아요.”

“그러든지.”

루슬란 오빠는 가타부타 하지 않고 내 고집에 따라 주었다.

어디까지나 이 여행에서 주가 되는 것은 바로 너니까 네가 알아서 하라는 듯했다.

나와 루슬란 오빠는 그렇게 궁전광장에서 나와서 바로 옆에 있는 성 이삭 대성당에 들렀다.

성 이삭 대성당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가장 큰 성당답게 엄청나게 컸다.

꼭대기에는 전망대도 있었는데, 이 성당의 전망대로 올라가려면 계단을 수백 개나 올라야 한다고 해서 엄두가 나지 않아 그만뒀다.

내 체력은 그런 계단을 감당하기에 너무 약했다.

물론 나만 그런 건 아니었다. 힐긋 보니 루슬란 오빠 역시 저 계단을 오를 생각은 전혀 없는 듯했다.

성 이삭 대성당에서 나와선 넵스키 대로를 따라 움직였다.

바티칸의 산 피에트로 대성당을 본따 만들어서 어마어마한 위용을 자랑하는 카잔 성당, 암살당한 알렉산드르 2세를 기려 피의 사원이라고도 불리는 그리스도 부활 성당 등등.

특히 지붕이 알록달록하고 둥그스름한 그리스도 부활 성당은 러시아에 있는 정교회 성당이라고 하면 거의 대표적으로 꼽히는 상징적인 성당이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그저 거리를 거닐며 건물들만 보아도 멋지긴 했지만 성당 건물들은 특출 나게 화려하고 볼거리가 많았다.

“이건 뭐지? 저번엔 없었는데. 새로 생긴 건가?”

“그럴 리가 없잖아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몇 번이고 와 본 적이 있는 루슬란 오빠도 기억이 가물가물한지 이상한 소리를 했다.

혹여나 지루해할까 걱정이었는데 그렇게 보이진 않아서 다행이었다.

문제는 내 체력이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현지에도 베르체노프에서 운용하는 인력과 차량이 준비되어 있었지만, 이 멋진 도시에서 차를 타고 중요한 건물이나 문화재가 있는 곳만 찾아다니는 건 너무 멋없는 짓이라고 생각하여 도보로 돌아다녔더니 2시간 만에 내 저질스러운 체력은 바닥을 드러내고 말았다.

루슬란 오빠가 물었다.

“힘들어?”

“…….”

죽겠는데요.

지쳐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일단 뭐가 어떻게 되든 간에 쉬고 싶었다.

루슬란 오빠는 날 보더니 미안하다는 듯 말했다.

“일단 호텔로 돌아갈까.”

“……그래요.”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네요.

* * *

다행히 걸어서 호텔로 가는 일은 없었다.

오빠가 전화를 하자 잠시 후 우릴 태우고 갈 차량이 도착했고, 난 차에 오르자마자 정말 간만에 좌석에 붙어 있는 안마 기능을 만끽했다.

내가 안마 기능을 켜고 늘어지자 옆에 있던 루슬란 오빠가 말 그대로 식겁했다.

물론 나도 이런 모습 아무에게나 보여 주고 싶진 않았지만 지금은 말도 못 하게 피곤한 상태라 어쩔 수 없었다.

미리 예약한 호텔에 도착하니 그 화려함에 이것도 무슨 문화유산 같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6층입니다, 아가씨.”

앞장서는 빅토르를 따라 호텔로 들어섰다.

도시 전체와 비슷한 느낌을 내기 위해 약간 19세기풍으로 디자인된 외관과 같이, 내부 역시 오래된 양식을 재현해 놓았다.

하지만 만들어진 것 자체는 얼마 되지 않았는지 모두 새것의 느낌이 났다.

아까 하던 관광을 이어서 하는 느낌으로 신기하게 호텔을 구경하며 빅토르를 따라갔다.

“이 방입니다.”

“…….”

“편히 쉬십시오.”

방을 보고는 거의 기절할 뻔했다.

“생각보다 괜찮은데?”

루슬란 오빠도 만족했는지 기분 좋게 웃으며 말했다.

베르체노프가에서 자란 루슬란 오빠가 괜찮다고 말할 정도라는 것은, 이 방이 정말 초호화 중에서도 초호화라는 증거이기도 했다.

나도 그간 꽤나 눈이 높아지긴 했지만 지금 이 방은 정말 상상을 초월했다.

“…….”

상아색의 벽면과 고풍스러운 장식들.

조명으로는 당연하다는 듯 샹들리에와 촛대에 올라간 램프가 설치되어 있었다. 당장 눈에 보이는 샹들리에만 네 개였다.

넓은 거실과 부엌까지 총 몇 평인지 짐작도 안 간다.

거실에 있는 둥근 소파는 농담 안 하고 그 위에 스무 명도 앉을 수 있을 것 같다.

난 진지하게 지금 이 호텔이 옛 제정 러시아 시절 궁전을 개조해서 박물관 대신 호텔로 쓰기로 한 것이 아닌가 고민되기 시작했다.

뭐 잘못 손대서 부러뜨리거나 하면 국가에 배상해야 하는 것 아냐?

모스크바에 있는 베르체노프 저택도 엄청나게 화려하긴 했지만 이렇게 근대적 양식으로 화려하진 않았다.

“여기…… 스위트룸이죠?”

“당연하지. 그런데 내가 예약하진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그냥 스위트룸은 아닌 것 같은데. 아마 프레지덴셜 스위트룸일걸.”

“……?”

대통령이요?

황당하게 쳐다보자 오빠가 피식 웃었다.

“말이 그렇단 거지, 그냥 vip 스위트룸이야.”

“…….”

1박에 얼마인지 묻고 싶었지만 들었다간 정말 기절할 것 같아서 그냥 모르고 있기로 했다.

때론 모르는 게 약일 때도 있는 법이었다.

어쨌든, 일주일간 머물러야 할 숙소니 이곳저곳 둘러보았다.

뭔가 부족한 것 하나 없이 완벽하게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었다. 킹 사이즈 침대 두 개와 각종 어메니티들, 수건 한 장까지 최고급품이었다.

심지어 욕실엔 무슨 스파 기능까지 갖춰져 있는 것 같았다.

우아한 내부에서 가장 이질적인 건 70인치도 넘어 보이는 텔레비전 하나뿐이었다.

오빠는 벌써부터 소파에 편하게 앉아 리모컨을 잡고 이곳저곳 채널을 돌려 보고 있었다.

난 그 옆에 가서 앉았다.

“정말 화려하고 크네요. 깜짝 놀랐어요.”

“그렇겠지. 일박에 최소 40만 루블은 할 텐데, 이 정돈 해 줘야지.”

“……예?”

듣고 싶지 않았던 사실을 하나 들어 버렸다. 난 그 구체적인 숫자를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려버렸다.

금전적인 건 생각하지 않기 위해 얼른 화제를 텔레비전으로 돌렸다.

“재미있는 것 하나요?”

“글쎄…… 어, 이건 어때.”

“어떤 채널인가요?”

“……그러고 보니 타티아나 너 텔레비전 안 보지?”

“예.”

잘 안 보는 것이 아니라 아예 안 보는 편이었다. 그것은 러시아어에 익숙해진 지금에 와서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가족은 아버지도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는 일이 없었고, 나도 안 보고, 오빠만이 유일하게 가끔 나와서 텔레비전을 보곤 했다.

“같이 볼래?”

1년 만에 처음으로 같이 텔레비전을 보자는 제안을 받고, 난 흥분한 나머지 피곤해서 조금 자려 했던 생각도 접어놓고 루슬란 오빠의 옆에 가까이 앉았다.

이전 같았으면 내가 주변에 접근만 해도 거의 반사적으로 몸을 뒤틀었을 루슬란 오빠는, 이젠 내가 가까이 가도 아무렇지도 않게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이렇게 가까워진 거리감은 루슬란 오빠를 여행에 동참시키고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 이룬 쾌거라고 볼 수 있었다.

이것만으로도 난 상트페테르부르크 여행에 대만족이었다.

1년 동안이나 데면데면하게 굴었던 오빠와도 이렇게 순식간에 친해지지 않았는가? 역시 같이 여행을 하고 대화도 하고…… 루슬란 오빠와 나 사이엔 그런 것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오빠도 나도 아직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이 정도로도 충분했다.

앞으로도 더 좋아질 일밖에…… 없을…….

“…….”

눈꺼풀에 무거운 걸 달아 놓은 듯 절로 눈이 감겼다.

그와 동시에, 돌아다니면서 쌓아 두었던 피로가 순식간에 뒷덜미로부터 올라와 내 정신을 집어삼키려 했다.

거기에 저항하려다가, 그냥 포기하기로 했다.

침대에 가서 자는 게 낫겠지만 이 소파도 충분히 안락했고, 옆엔 루슬란 오빠도 있었다. 어차피 자기로 했던 것…… 조금 자도 괜찮겠지.

난 정말 간만에 기절하듯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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