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화
루슬란 유리예비치 베르체노프는 텔레비전을 보며 소파에 몸을 누였다.
최고급 가죽이 편안하게 느껴졌다. 과연 프레지덴셜 스위트룸에나 있을 소파다웠다.
이런 여행은 그로서도 자주 누리지 못하는 호사였다.
그의 아버지인 유리는 루슬란이 향락과 사치에 빠지게 되는 것을 경계했다.
때문에 러시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재벌 2세임에도 불구하고 루슬란은 꽤 검소하게 자랐다.
하지만 그렇게 깐깐한 유리도 유독 딸인 타티아나에게만큼은 굉장히 약한 모습을 보이곤 했다.
당장 이 여행만 하더라도 평소와는 그 규모 자체가 달랐다.
루슬란과 타티아나 두 사람은 거리를 거닐다 1000루블짜리 모자를 사며 즐거워했지만, 그 뒤의 안 보이는 곳에선 어마어마한 돈이 들어가고 있었다.
타티아나는 아직 그렇게까진 생각이 닿지 않는 듯했지만 루슬란은 어느 정도 그 구조를 알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이 호텔.
1박에 40만 루블이 넘는 요금의 초호화 스위트룸. 그리고 보안을 위해 그 옆에 있는 다른 스위트룸들에도 경호원들이 팀을 이루어 들어서 있었다.
혼수상태에 빠졌었던 타티아나가 기억상실로 일어난 이후로 유리는 타티아나에게만큼은 그 어떤 것도 아끼지 않으려는 듯 보였다.
루슬란은 아버지의 그런 마음을 잘 알았고, 또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음을 이해했지만 가끔은 복잡한 심경이 들기도 했다.
차별을 느끼거나 질투를 하는 것은 아니었다.
루슬란은 단지, 아버지가 타티아나에게 보이는 그런 태도가 조금 두려웠다.
“…….”
유리는 지독하리만치 타티아나의 기존 행적들을 집 안에서, 바깥에서 지워 버리려 애썼다.
모든 고용인들의 입을 막고, 타티아나의 소문이 돌 만한 지역으론 타티아나가 아예 접근조차 못 하게 했다.
기억상실이란 항상 불완전한 것이니,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면 불현듯 기억을 되찾을지도 모르고 거기에 혼란을 느낄 수도 있다는, 얼핏 듣기엔 배려와 애정에 가득 찬 이유였으나 필경 그 뒤에 두려움과 이기심이 도사리고 있음을 루슬란은 눈치챘다.
유리는 마치 그 끔찍했던 모든 나날들을 깨끗하게 지울 기회를 하늘에서 내려 준 것처럼 여기며 모든 것을 빼앗고, 모든 것을 주면서, 섬뜩하도록 철저하게, 타티아나를 새로운 인생을 사는 새로운 딸로 만들려 했다.
그 의도대로 된 것인지 타티아나는 정말 불과 재작년 일이 기억나지 않을 만큼 천사 같은 모습으로 자라고 있었지만, 루슬란은 때때로 불안해했다.
지금 이 상태가 정상적인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루슬란에게도 자격은 없었다.
타티아나가 기억을 모두 잃어버렸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자기도 모르게 기대를 품었던 것은 루슬란 역시 마찬가지였으므로.
텔레비전에 시선을 고정하고 이러저런 생각을 하던 루슬란은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았다.
“…….”
같이 텔레비전을 보겠다며 옆에 와서 앉은 타티아나는 어느샌가 색색거리며 잠들어 있었다.
올해로 열다섯 살. 키는 꽤 컸지만 여전히 어린애로밖에 보이지 않는 얼굴이었다.
눈을 감고 잠들어 있는 타티아나는 세상물정 모르는 소녀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루슬란은 그런 동생의 옆얼굴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타티아나.”
“…….”
“들어가서 자.”
루슬란은 조용히 동생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일어나지 않았다. 오전 내내 돌아다닌 피로가 상당했던 모양이다.
피로한 만큼 침대에 누워 편하게 휴식을 취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흔들어서 깨워야 할까 고민한 루슬란이 다시 조심스레 타티아나를 부르려는 찰나.
“……!”
타티아나가 루슬란의 목소리에 화답하듯 스르르 옆으로 무너지더니, 루슬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전혀 무겁지 않았다. 마치 솜뭉치처럼 가벼운 그 무게감에 루슬란은 숨도 크게 못 쉬고 굳었다.
어깨를 튕기거나 하는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 짓을 하는 것만으로도 타티아나는 크게 다치고 말 것 같았다.
“……하.”
그런 생각들을 하던 루슬란은 자기도 모르게 웃었다.
2년 전, 루슬란이 참지 못하고 결국 타티아나에게 손찌검을 했을 때만 하더라도 타티아나가 혹여나 다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었다.
“…….”
루슬란은 간신히 잊어버릴 수 있었던 일들을 다시금 떠올려 냈다.
그때, 루슬란과 타티아나의 관계는 그야말로 최악에 가까웠다.
루슬란은 머리에 피가 쏠려 인정사정없이 손을 휘둘렀다.
루슬란은 살면서 처음 폭력을 휘둘러 본 것이 여자, 그것도 열세 살밖에 안 된 어린 여동생이라는 것이 아직까지도 가슴에 큰 트라우마로 박혀 있었다.
거기에 더불어, 타티아나의 그 소름 끼치는 눈동자가 아직도 밤이면 가끔 목을 조여오는 것처럼 기억 저편에 각인되어 있었다.
아직도 생생하게 떠올랐다.
코피가 터질 정도로 강하게 후려쳤음에도 불구하고, 바닥에 쓰러진 타티아나는 증오와 분노가 생생한 눈을 치켜뜨고 끔찍한 욕설과 저주를 루슬란과 그의 어머니인 빅토리아에게 퍼부었었다.
루슬란은 분노로 신경이 타들어 가고, 눈앞이 하얗게 변한다는 것이 어떤 일인지 체감하며 재차 손을 들어 올렸고, 그때 고용인들이 끼어들어 말리지 않았다면 타티아나는 정말 크게 다쳤을지도 몰랐다.
“…….”
그런데 불과 2년 만에 이렇게 타티아나가 머리를 기대 올 줄이야 세상 누가 알았겠는가.
루슬란은 손을 들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열차에서도 이렇게 타티아나를 쓰다듬어 보려고 했다가, 자기도 모르게 그만두고 말았다.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루슬란은 타티아나에게 접촉하는 것 자체를 두려워했다.
타티아나와 루슬란은 서로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짓들을 저질렀다.
타티아나는 단순히 입에 담아 세상에 내어놓는 것만으로도 지옥에 떨어지리라 생각되는 끔찍한 말들을, 루슬란은 분노에 눈이 돌아가서 어린 동생에게 폭력을.
시간이 지나고, 루슬란은 이 모든 일들을 후회하면서, 조금 더 머리를 차갑게 했으면 타티아나에게 그렇게까지 하지 않았어도 되지 않을까 수없이 후회하고 고민했다.
하지만 이미 일어난 일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사라지진 않는다.
“…….”
하지만 열차에서 내내 타티아나가 보였던 행동들, 기억도 없는 주제에 오빠와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을 어떻게 해서든지 쇄신하겠다는 그 일념에 가득 차 있던 눈동자.
루슬란은 항상 타티아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트라우마로 남아 있는 일 때문이었다.
하지만 제대로 바라본 타티아나는 그 어떤 과거와 문제라도 눈 돌리지 않고 정면으로 해결해 나갈 수 있으리란 희망을 품고, 올곧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두려워할지언정, 외면하지 않았다.
차라리 그냥 과거의 일은 모른다고 뻔뻔하게 나왔더라면 일방적으로 미워하기라도 할 수 있었을 것을.
“……타티아나.”
루슬란은 동생을 부르며, 어깨에 닿아 있는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병상에서 색이 바래 버린 머리칼이 부드럽게 손길에 따라 움직였다.
“미안했다. 그때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루슬란이 손바닥 뒤집듯 타티아나와 사이좋은 남매로 돌아갈 순 없을 것이다.
그에겐 아직 타티아나에게 말하지 못한, 말하지 못할 일들이 많이 있었고 그것은 타티아나의 과거를 지우고자 하는 유리의 뜻이 아니더라도 차마 다시 말로 꺼내기 힘들었다.
다시 꺼내는 것만으로도 타티아나에게, 그리고 유리와 루슬란 자신에게도 폭력이 되는 것들이었다.
그리고 그것들을 루슬란이 품고 있는 한 그 어떠한 애정과 우정도 거짓이 될 수밖에 없었다. 루슬란은 그것을 알았다.
“…….”
하지만 잠들어 있는 타티아나를 보니 그런 어둡고, 음습한 것들이 다 무슨 소용인가 싶은, 눈을 감고 안 보이는 곳으로 모조리 치워 버리고 싶은 단순한 바람이 가슴 한편에 밀고 들어왔다.
지금 이 아이를 안심시킬 수 있다면 거짓이든 무엇이든 조금쯤은 내어 주어도 상관없을 것 같다.
루슬란은 아버지가 무슨 마음으로 타티아나를 대하는지 알 것 같기도 했다.
그는 혹여나 타티아나가 깨어나지 않도록 신중하게 머리를 쓰다듬었다.
* * *
얼마나 잔 거지. 잘 모르겠다.
부스스하게 눈을 뜬 나는 의외로 편안하게 잤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렇게 편하게 잘 줄은 몰랐는데, 역시 40만 루블짜리 스위트룸은…….
“……응.”
꿈지럭거리며 일어나기 위해 베개를 짚은 나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최고급 스위트룸에 있을 베개 치고는 이상하게 탄탄했던 탓이었다.
이상한 위화감을 느끼며 고개를 드니, 속삭이듯 조용한 인사말이 귓가에 흘러들었다.
“잘 잤냐?”
“……?”
루슬란 오빠가 오만상을 쓰고 있었다.
“……?”
“다리 저려 죽겠네. 야. 비켜.”
“아, 예…….”
난 기겁을 해서 후다닥 물러났고 루슬란 오빠는 허벅지를 주물렀다.
“너 머리가 왜 그렇게 무거운 거야? 든 거 많아?”
“그…….”
뭐라고 대답도 못 하고 더듬었다. 도대체 내가 얼마나 잠들어 있었던 거지? 힐긋 창밖을 보니 어둑어둑하다 못해 깜깜했다. 맙소사.
대역죄인이라도 된 듯한 표정을 하고 있자니, 루슬란 오빠가 피식 웃었다.
“농담이야.”
“……예?”
“농담이라고. 되레 머리가 가벼워서 걱정되더라, 야. 든 거 없는 것 아냐?”
“……예!?”
기성을 지르자 루슬란 오빠는 낄낄거렸다.
갑자기 이 인간이 미쳤나 싶었다. 무릎베개를 해 주곤 농담까지 해?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
어쨌거나, 루슬란 오빠가 갑자기 이러한 태도 변화를 보여 주니 난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했다. 드디어 내 진심이 조금이라도 닿은 듯했다.
“저기…….”
“뭐.”
“다리 많이 저리시면 제가 마사지라도 해 드릴까요?”
그래도 정말 용기를 쥐어짜서 말한 건데 루슬란 오빠는 소리를 쳤다.
“얘가 막 나가네. 어딜 남자 몸을 마음대로 주무르려고 그래?”
“…….”
내가 이런 말까지 들어야 하나?
짜게 식은 표정으로 축 늘어지자 루슬란 오빠가 그간 인상을 썼던 게 마치 거짓말이었다는 듯, 소파에서 벌떡 일어섰다. 평소보다 훨씬 경쾌하고 활기차 보였다.
“어쨌건, 타티아나. 조금 쉬었으면 저녁 먹으러 가자.”
“저녁요?”
“그래. 예약한 레스토랑이 있긴 한데 네가 귀찮으면 그냥 룸서비스 시키고.”
“예!? 아뇨, 갈게요. 가야죠.”
이미 피로는 꽤 상쾌하게 풀려 있었다. 예약한 레스토랑을 마다할 순 없었다.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루슬란 오빠가 손으로 눈가를 눌렀다.
“나가기 전에 가서 눈곱도 좀 떼고, 머리도 빗고. 그나저나, 너 정말 아무도 안 데려왔네?”
“그…… 나제즈다에게 말했는데 거절당해서…….”
“그 사람이? 와, 너 정말 무슨 짓 한 건 아니겠지? 그러면 안 돼. 나제즈다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데.”
상상만 해도 소름이 끼친다는 듯 오빠가 중얼거렸다. 난 다른 놀림은 다 참고 넘어가 줄 수 있어도 이것만큼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소리를 쳤다.
“아녜요!”
“알았어, 알았어.”
“그렇게 넘어가실 일이 아니라, 저는 정말……!”
“알았다니까. 농담이었어. 나제즈다도 아마 이런 일이 생길 줄 알았겠지.”
“……예?”
대체 몇 번을 날 가지고 노는 건지 모르겠다. 이상한 쪽으로 눈을 뜬 것 같은 루슬란 오빠가 픽 웃더니 손을 내밀었다.
“빗 가지고 와 봐. 머리 빗어 줄 테니까.”
“……?”
난 내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한없이 상냥한 얼굴로 손을 내밀고 있는 오빠는 어디까지나 장난이 아니라는 것처럼 보였다.
“잠깐만요, 잠깐…… 정말요?”
“그래.”
뭐야 이 거리감.
조금 이상한데?
엄청난 위화감을 느끼며 난 고개를 저었다.
“그…… 괜찮아요. 제가 할게요.”
“너 할 줄 모르는 것 아니야?”
“자기 머리 정도는 빗을 줄 알아요. 괜찮아요. 그…… 전 잠시.”
두서없이 중얼거리며 샤워룸으로 도망치듯 향했다.
“…….”
커다란 대형 거울에 상기된 얼굴이 비쳤다. 머리칼은 볼륨이 조금 죽긴 했지만 딱히 빗어 내리지 않아도 될 정도로 가지런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내가 아무렇게나 드러누운 것이 아니라는 증거였다.
“갑자기 뭐지…….”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물론 상트페테르부르크 여행의 첫날인 오늘은 즐거웠고, 루슬란 오빠와의 사이 역시 꽤나 나아진 기분이 들긴 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있었던 관성이라는 것이 존재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대체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내가 기차 따위를 타고 왜 가야 하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며 역정을 내던 루슬란 오빠였다.
그럼 최소 하루 이틀은 그 투덜이 모드를 유지해 줘야 하는 것 아닌가?
그 철벽같던 태도가 하루 만에 이렇게까지 무너져 버릴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좋은 일이지. 좋은 일이긴 한데…….
“…….”
어떠한 뚜렷한 연유도 없이 갑자기 이렇게 태도가 돌변한다면 그 이면에 내가 모르는 이유가 있기 마련인데, 무턱대고 친절하게 해 주려는 모습이 굉장히 석연찮았다.
그냥 모르는 척하고 호의를 받는 것도 또한 방법이겠지만…….
“시간은 많아.”
난 거울을 보며 중얼거렸다.
루슬란 오빠에게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모르겠지만, 앞으로도 일주일은 꼼짝없이 나와 붙어 있어야 하는 오빠였다.
그사이 몇 번이고 대화를 나누고, 진지하게 교류할 시간은 많을 것이다.
당장 지금, 저녁 식사 자리만 하더라도 기회는 많을 것이다. 레스토랑 테라스에 앉아 일단 분위기 좋게 와인을 오빠에게 먹인 다음에…….
어쩐지 문제 해결 방법이 점점 막장으로 치닫는 것 같아 걱정이다. 난 고개를 흔들어 모든 생각을 다시 날려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