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37화 (137/1,277)

##  137화

버릇처럼 눈을 뜨니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새벽이었다.

“…….”

침대에 누워 멀뚱거리고 있다가 문득 옆을 돌아보았다. 을씨년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넓은 방이 보인다.

어제 돌아왔었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고는, 약간 몽롱한 머리로 어제 있었던 일들을 떠올렸다.

벨카와 조금 놀아주다가 저녁 식사를 하기 전에 먼저 저택의 고용인분들에게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사 온 선물을 돌렸다.

소소한 선물들이었지만 내가 직접 상금으로 벌어들인 돈으로 샀다는 데에서 의의가 있었다.

고급 과자에서부터 지포 라이터까지 선물의 종류는 다양했다.

무작정 백화점 직원의 추천에 따라 무작위로 주워 담은 것은 아니었다.

난 아나스타샤의 도움을 받으면서 꽤나 신중하고 주의 깊게 선물들을 골랐다.

그 덕분에 비흡연자에게 라이터를 선물하는 바보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준비해 온 선물들을 모두 돌리고, 예고르를 위시로 한 고용인분들과 식당에서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쉐프인 드미트리는 정말 굉장한 실력으로 장르를 불문하고 다채로운 요리들을 선보였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꽤 오랜 시간 동안 식사를 했던 것 같다.

“…….”

정말 집에 왔으니 일과를 시작해야지.

침대 위에서 바로 내려오지 않고 기지개를 켜며 짧게 스트레칭을 했다. 조금 남아 있던 잠기운이 확 달아난다.

욕실로 가서 간단히 씻고는, 다시 방으로 돌아와 따뜻하게 옷을 갖춰 입고 밖으로 나왔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을 땐 이렇게 새벽에 밖에 나와 봐야 할 것도 없었기 때문에 해가 뜰 때까지 거실에서 음악을 들으며 시간을 때우곤 했다.

하지만 이 모스크바에는 나에게 24시간 개방되어 있는 연습실이 있으니 그럴 이유가 없었다.

별관에 들어서서 자연스럽게 복도를 지나 방을 찾아들어갔다.

불을 켰다.

벽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홈시어터 시스템과, 내 키만 한 책장으로 여섯 칸이나 빼곡히 채워져 있는 악보와 음반.

그리고 피아노 한 대가 날 기다리고 있다.

“…….”

갑자기 온몸에 전기가 오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근질거리는 양손이 주체할 수 없이 꿈틀거렸다.

천천히 피아노에 다가갔다. 건반 덮개엔 먼지 하나 없었다. 내가 없는 사이에도 꾸준히 관리를 해 준 모양이다.

주저하지 않고 피아노 앞에 앉아서, 건반 덮개를 열었다.

하얗고 검은 건반들을 내려다보니 머릿속으로 순간 수많은 곡들이 스쳐 지나간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그 모든 곡들이 소리 치고 있었다.

당장 날 치라고, 그 손을 들어서 피아노 건반을 눌러서, 이 세상에 구현해 달라고 아우성을 친다. 음과 선율들이 얽혀 머리가 어질거렸다.

특히 그중에서 가장 목소리가 큰 곡들은 내가 콩쿠르에서 연주한 곡들이었다.

“…….”

쇼팽의 겨울바람 연습곡, 라흐마니노프의 소나타 2번, 쇼팽의 뱃노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내게 큰 상을 안겨 준 정말 고마운 곡들이었다.

하지만 절대적으로 완벽하다고 말할 순 없었다.

앞으로도 미처 챙기지 못한 부분들을 챙기고, 조금 더 잘 가다듬기 위해선 앞으로도 이 곡들에 집중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건반 위로 손을 올리다가, 지금은 조금 차분해질 때라는 것을 깨달았다.

“…….”

손이 기억하고 있는 대로 하농 연습곡부터 쳐 나가기 시작했다.

머릿속에서 시끄럽던 다른 모든 곡들이 순식간에 잠잠해졌다.

끝없이 이어지는 하농 스케일 연습으로 현실 세계에선 피아노 소리가 계속해서 이어졌지만, 난 이 순간이 정말 고요하다고 느꼈다.

머릿속은 조용하고, 오로지 피아노 음색만이 계속해서, 계속해서 내 손을 이끌었다.

충분히 스케일 연습을 한 뒤에 바흐의 평균율로 옮겨 갔다.

오른손과 왼손을 균등한 비율로 동시에 4성부를 연주해 나간다. 건반의 깊이, 음 하나하나를 읽으면서 내 소리를 가다듬는다.

내가 연주자로서 제대로 기능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데엔 이만한 곡도 드물다.

평균율을 평소처럼 연주하다가, 돌연 주법을 조금 투박하게 바꾸어 보았다.

본래 바흐가 살던 시대는 막 피아노라는 악기가 태동하기 시작한 시대였다.

바흐는 피아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그가 애용했던 건반악기는 바로 하프시코드였다.

현을 때려서 소리를 내는 것이 아닌, 기타처럼 뜯어서 소리를 내는 하프시코드는 건반의 강약 조절이 까다롭고 페달이 없으며 찰랑거리는 쇳소리를 음색으로 한다.

구조 자체가 다른 악기인 피아노로 하프시코드의 음색을 흉내 낸다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난 시도해 보았다.

강약을 단계별로 구사하며 손끝을 튕기듯, 그렇게 소리를 냈다.

이렇게 바흐의 평균율을 연주하다 보니 문득 바흐 스페셜리스트로 유명한 구세프 선생님이 이걸 듣는다면 뭐라고 평가하실지 궁금해졌다.

제발 부탁이니 헛짓거리 하지 말고 정 원전연주를 하고 싶다면 하프시코드를 한 대 사라고 하시겠지?

“후후…….”

실실 웃음이 나왔다.

빨리 학교에 가고 싶다.

***

“방학이 빨리 끝나서 섭섭하시겠습니다? 아가씨.”

학교에 가는 차 안에서 빅토르는 문득 그런 말을 꺼냈다.

무슨 소릴 하는지 모르겠다. 내가 많은 취미를 가지고 있어서 방학을 알차게 보낼 줄 아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나처럼 재미없는 사람은 그냥 학교에나 가는 게 낫다.

“전 하루라도 빨리 학교에 가고 싶었는데요.”

“뭐라고요?”

빅토르가 살다 살다 정말 이상한 사람 보겠다는 듯 굉장히 실례되는 눈빛을 보냈다.

난 샐쭉하게 입을 내밀며 말했다.

“2주일이면 충분했어요. 상트페테르부르크에도 갔다 왔고.”

“말이 방학이고 관광이지 사실 콩쿠르 준비를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빅토르는 도저히 내가 이해되지 않는 모양이다.

“제가 학교 다닐 땐 자체적으로 방학을 만들어서 쉬어도 모자랐는데 말입니다.”

“빅토르…….”

“성실하신 것도 이 정도면 병이신데…….”

“저 아픈 곳 없거든요?”

음악원에 다니게 된다면 방학에도 학교에 갈 거라고 말하면 빅토르가 무슨 얼굴을 하게 될지 궁금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로킨이 운전하는 차량은 중앙음악학교 부지 내로 들어섰고, 난 소로킨, 자하르, 빅토르 이렇게 날 경호해 주는 사람들의 배웅을 받으며 학교 내로 들어섰다.

그리고 입구를 지나치자마자 반가운 얼굴을 발견했다.

“아나톨리, 안녕하세요?”

“타티아나 누나.”

2학년 바이올린과의 후배 아나톨리였다.

아나톨리는 바이올린을 옆으로 휙 돌리며 내 쪽으로 돌아서더니 큰 소리로 말했다.

“콩쿠르 우승하신 것 축하드려요!”

“아?”

눈을 깜빡이고 있자 아나톨리가 재차 말했다.

“메시지로만 축하드렸는데, 그…… 한창 바쁘신데 전화로 하기엔 너무 귀찮아하실까 봐…… 일부러 안 하, 아니, 안 한 건 아니에요! 이렇게 직접 말씀드리려고……!”

아나톨리는 내 번호를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기도 했다. 분명 시상 직후 메시지를 보내오기도 했었고.

난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축하해 주셔서 고마워요, 아나톨리.”

내 말에 비로소 아나톨리는 조금 진정했다. 그런데 할 말이 남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우물쭈물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저…… 타티아나 누나.”

“예?”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부탁 하나 드려도 될까요?”

“부탁이요?”

개학하자마자 바이올린과 후배에게서 부탁을 받을 줄은 몰랐는데?

“무슨 부탁인데요?”

“그게…… 너무 바빠지시기 전에 혹시 가능하다면 제 반…… 아니, 저와 실내악을 해 주실 수 있을까요?”

“……?”

그 자체는 별로 어려운 부탁이 아니었지만, 학교에 반주자가 얼마나 많은데 이렇게 어려워하면서까지 나에게 부탁하는 이유를 잘 모르겠다.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아나톨리가 허둥거리며 설명을 이었다.

“아, 저도 청소년 바이올린 콩쿠르에 나갈 예정이거든요. 그래서 콩쿠르용 DVD를 녹화해야 하는데…… 학교에 계신 반주자분에게 부탁을 드려도 되지만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타티아나 누나밖에 생각나지 않아서…….”

“좋아요.”

“지금까지 미루…… 예?”

“도와 드릴게요.”

이런 부탁이라면 언제든지 상관없었다.

이전에도 몇 번이고 공부를 도와주거나 바이올린 연주를 도와주곤 했는데 이제 와서 콩쿠르 DVD 제작을 도와주지 못할 이유도 없었다.

난 음악가로서 내가 살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아 왔는지 새삼 느끼고 있었다.

그렇다면 받은 대로 돌려주는 것 또한 도리였다.

내가 승락하자 불안해하던 아나톨리의 얼굴이 환히 펴졌다.

그러곤 가급적 내 시간을 빼앗지 않도록 최대한 한 번, 아니면 두 번 안에 녹화할 수 있도록 충분히 준비해서 다시 말하겠다고 했다.

그 와중에 나는 내 시간보다는 다른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나톨리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조숙하게도 소꿉친구인 마르파라는 아이와 사귀고 있는 중이었는데, 그 아이는 날 별로 안 좋아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나중에 전화 드릴게요!”

“기다릴게요.”

아나톨리를 보내고, 난 헛웃음을 지었다. 이제 아홉 살밖에 안 된 아이들인데 무슨 걱정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내가 지금 걱정해야 할 부분은 반에 들어가고 나서다.

이미 뉴스와 신문으로 내 콩쿠르 소식은 학교에 다 퍼졌을 것이다.

평범하게 생각하면 축하 인사만 조금 오가겠지만…… 정말 어떤 반응이 있을진 아무도 모른다.

쓸데없는 생각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에나 신경을 쓰면 된다고 다시금 생각하며 8학년 피아노과, 우리 반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

반에 이미 와 있던 아이들이 동시에 날 돌아보았다.

수많은 시선들이 날아든다.

난 기본적으로 낯가림이 있는 편이었고, 1학년부터 쭉 같은 반을 유지하며 올라온 이 아이들 틈에 한 학기 만에 끼어들어서 두루두루 친해질 정도로 친화력이 좋지도 못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난데없이 환호가 터졌다.

“앙팡 테리블!”

“타티아나. 상트페테르부르크 청소년 콩쿠르 우승 축하해.”

“대단하더라, 타티아나!”

“나 피아노 좀 가르쳐 줘!”

마지막은 대체 무슨 소린지 모르겠지만 약간 걱정했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반 친구들은 열렬하게 내 콩쿠르 우승을 축하해 주었다.

“축하해.”

“모두들 감사합니다.”

“그 말투는 정말로 어디 안 가네.”

한바탕 웃음이 터졌고, 이어서 왁자지껄하게 이야기가 오갔다. 친구들이 가장 놀라워하는 것은 내 콩쿠르 프로그램이었다.

“나 진짜 기절했잖아. 라흐마니노프 소나타 2번? 대체 그걸 어떻게 쳐?”

“진짜 장난 아니었잖아. 뱃노래도 그렇고.”

“우승까지 했을 정도니까.”

그렇게 내 프로그램에 대해서 이야기하던 친구들이 문득 슬금슬금 화두를 돌렸다.

“우린 중계로만 봤지만 말이지……?”

특히 그중 여자아이들이 기다렸다는 듯 눈을 빛냈다.

“타티아나.”

언뜻 음흉하게까지 들리는 목소리가 이어진다.

“에르네스트 봤니?”

“…….”

내가 생각지도 못하는 사이에 에르네스트의 소문이 퍼져 있는 것 같았다.

도대체 어디에서 이야기가 새어 나갔는지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전에 연구회 사건 때에도 한바탕 소문이 돈 적이 있었고, 이제 와 기분이 나쁜 것도 아니었다. 아무렴 어떤가?

“예. 봤어요.”

정직하게 대답하자 눈빛이 한결 강렬해진다.

“어땠니?”

“……?”

뭘 묻는 건지 모르겠다. 좋고 나쁘고 할 게 있나?

좋았어요, 라고 대답하자니 뭔가 싫었고, 나빴다고 대답하자니 사실 나쁠 건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거짓말이었다.

어떤 대답도 할 수가 없어서 달리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조금 생각하고 있는데, 내 어깨 너머에서 퉁명스런 목소리가 툭 튀어나왔다.

“야, 쓸데없는 소리들 하지 마.”

깜짝 놀라 뒤돌아보자 에르네스트가 인상을 쓰며 서 있었다.

그가 좌중을 죽 훑더니 말했다.

“난 타티아나의 코치로 따라갔던 거니까.”

“코치?”

“무슨 코치야?”

나야말로 묻고 싶었다. 그런 말은 들어 본 적이 없는데?

“에르네스트…… 재작년 우승자였지?”

“차라리 지도 선생님이 같이 가 주는 게 낫지 않아?”

“못 가셨나 보지.”

“코치 같은 게 필요가 있나?”

웅성거리는 사이에서 에르네스트가 내 쪽으로 눈짓했다.

난 그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괜한 이야기가 불거지기 전에 이런 식으로 수습하기로 한 모양이다.

사전에 협의된 바는 없었지만 난 그 장단에 맞춰 주기로 했다.

실제로 에르네스트가 내게 도움을 주었던 부분은 단순한 코칭 이상이었으니까 거짓말인 것도 아니었다.

“맞아요. 에르네스트가 정말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묘한 시선들이 오간다. 그 틈을 향해 에르네스트가 코웃음 치며 말했다.

“너희들도 필요하면 말만 해.”

일순 사악한 미소가 입가에 걸린다.

“감당할 자신 있으면.”

“…….”

순식간에 모두가 조용해졌다.

왜 겁을 주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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