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8화
개학 첫날인 덕분에 난 여유롭게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특히 발렌티나는 방학 내내 한 번도 못 봤었기 때문에 반가웠다.
날 축하해 주는 발렌티나는 머리가 조금 더 길었고, 약간 더 살가워졌다.
난 그녀가 에르네스트에 대해 물어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조금 긴장했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말하지 않았다고 해서 다행인걸까? 잘 모르겠다.
“…….”
어쨌든, 몇 안 되는 친구들은 날 학교에 등교하게 만드는 이유 중 하나였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는 오후 수업에 있었다.
미하일 선생님을 레슨실에서 다시 볼 생각을 하니 조금 들뜨기까지 했다.
오늘은 콩쿠르에 대한 이야기를 드리고, 음반을 준비하게 된 것에 대해서도 상담을 받아 볼 생각이다.
미하일 선생님은 음반도 열네 장이나 내신 피아니스트이시니 조언해 주실 것이 많을 것이다.
“…….”
미하일 선생님의 레슨실 앞에 서서 잠시 숨을 고르고, 문을 노크했다.
“타티아나입니다, 선생님.”
“들어오렴.”
“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고, 난 주저 없이 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두 명의 시선을 받고 굳어 버렸다.
“……?”
“고대하던 미하일과의 레슨 시간에 당신이 왜 여기에 있냐는 듯한 눈빛인데, 타티아나.”
미하일 선생님과 마주 앉아 있던 구세프 선생님이 내 쪽을 돌아보곤 심술궂게 말했다.
난 뒷걸음질 치며 손잡이를 잡았다.
“말씀 나누세요. 전 이따가…….”
“들어와라! 들어와! 원 참, 농담도 못 하겠군.”
“저도 농담이었어요.”
“……허.”
구세프 선생님이 헛웃음을 터뜨리더니, 이 녀석 좀 보게? 하며 한쪽 눈썹을 꿈틀거렸다.
나도 내가 구세프 선생님과 이렇게 농담을 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처음엔 조건을 걸고 날 강압하려고만 드는 독선적이고 무서운 선생님이라고 생각했고, 거의 오기와 악으로 매번 마주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난 도저히 선생님을 미워할 수 없게 되었다.
난 레슨실 문을 곱게 닫고,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렇지 않아도 레슨이 끝나고 나면 구세프 선생님을 찾아가려고 했어요.”
“왜지?”
콩쿠르 시상이 끝나고도 구세프 선생님은 내게 축하한다며 전화 같은 것을 하진 않으셨다.
그리고 지금도 내가 사흘 전에 콩쿠르에서 상을 받았건, 노벨 피아노상을 받았건 신경 쓰지 않는 듯한 태도였다.
섭섭하진 않았다. 정말 내게 관심이 없으신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이제 알기 때문이다. 구세프 선생님의 방식은 익숙했다.
하지만 그래도 선생님에게 칭찬받고 싶어서요, 라고 한다면 무슨 반응을 보이실까 순간적으로 궁금해졌다.
그 충동은 내 입을 거의 말을 뱉기 직전까지 이끌었다.
입 밖으로 말이 나오기 직전에 간신히 멈출 수 있었던 것은 그래도 내 마음속에 선생님을 존경하는 마음이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선생님을 너무 자주 놀리려 드는 것도 좋지 않았다.
뚱한 표정을 짓고 있는 구세프 선생님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드릴 게 있어서요.”
그리고 집에서 준비해 둔 물건을 가방에서 꺼내 내밀었다.
“받아 주세요.”
“……뭐냐 이게.”
“선생님에게 필요한 물건이에요.”
정말 한순간이지만 표정이 스르르 풀리는 것이 보였다. 그것을 본 난 나도 모르게 미소를 머금었고, 구세프 선생님은 다시 경계 태세에 들어갔다.
이런 선물 공세로 자신을 쓰러뜨릴 수 있으리라곤 상상도 하지 말라는 듯한 태도였다.
하지만 기분이 좋아 보이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구세프 선생님은 날 힐긋 올려다보더니, 무심한 척 선물 포장을 풀었다.
그 안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구매한 고급 지포 라이터가 들어 있었다.
라이터를 들어 올리는 구세프 선생님의 표정은 기쁨과 의아함으로 복잡해 보였다. 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상금으로 샀어요. 지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네 지도 선생이 빤히 보고 있다만? 타티아나. 이런 걸 주고 싶다면 좀 아무도 없는 곳에서 몰래 주지 그러느냐?”
“그건 제가 싫어요.”
“대체 무슨 소린지……. 어쨌든, 미하일이 질투심에 미쳐서 날 죽이고 이걸 뺏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미하일 선생님은 담배 안 피우시잖아요.”
“배우겠지.”
구세프 선생님이 라이터를 켜 보더니 미하일 선생님을 돌아보며 물었다.
“배울 텐가?”
“아니, 구세프.”
미하일 선생님은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혹시 날 보면 뭔가 바뀌었다는 걸 모르겠나?”
“……? 사제가 쌍으로 영문 모를 소리를 하는 건 새 학기가 시작되어도 똑같군. 미치겠어.”
“하하하하. 정말 모르는 모양이군.”
껄껄 웃으며 미하일 선생님이 검지를 들어 쓰고 있는 안경다리를 톡톡 쳤다.
“안경 바뀌지 않았나, 안경. 음악에 대해선 누구보다 날카로운 사람이, 생각보다 이런 쪽 눈썰미엔 약하군?”
“……빌어먹을, 돌아 버리겠군. 내가 자네 애인인가? 왜 그런 걸 알아봐 줘야 해?”
“안경 정도면 알아챌 만도 하지 않은가?”
“헛소리 제발 좀 작작하게.”
기가 막히다는 듯 구세프 선생님이 투덜거렸다.
안타깝게도 선생님은 사랑받는 남자가 되긴 글러 버린 것 같다. 이미 결혼하신 분이긴 하지만.
미하일 선생님이 웃었다.
“어쨌든, 난 자네가 라이터를 선물 받았다고 해서 질투 같은 건 하지 않네. 그리고 라이터보단 안경이 사용 빈도가 높지 않은가?”
“이상한 기준이군.”
“이상하지 않네. 나에겐 아주 중요한 기준이지.”
“……그걸 알아봐 달라고 날 불러서 여태 애먼 소리들을 해댄 건가?”
“꼭 그런 건 아니고.”
무슨 소릴 해도 듣지 않는 미하일 선생님에게 더 이상 무슨 말을 해 봐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듯, 구세프 선생님은 다시 날 돌아보았다.
그러곤 라이터를 내려다보고, 괜히 한 번 뚜껑을 열어 봤다가 도로 덮고, 다시 날 올려다보았다.
무언가 하고 싶으신 말이 있으신 것 같은데, 조금 두근거리는 걸 느끼며 있자 구세프 선생님은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셨다.
“그래서 이건 한 개비라도 더 피우란 뜻인가? 날 빨리 보내 버리고 싶나 보…….”
“…….”
노골적으로 상처받은 표정을 짓자 구세프 선생님이 뜨끔해했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했다.
미하일 선생님은 무엇이 그리 재미있는지 연신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멋쩍어하지 말고 고맙다고 하지 그러나.”
“……고맙다, 타티아나. 잘 쓰마.”
“별말씀을요, 구세프 선생님.”
웃으며 답하자 구세프 선생님이 작게 투덜거렸다. 뭔진 몰라도 기분 나쁘신 투는 아니었다.
라이터를 만지작거리시는 모습이, 이대로 당장 한 대 피우시려나 싶었는데 그렇게 하진 않으셨다.
구세프 선생님이 날 보며 말했다.
“……콩쿠르에 대한 총평을 안 할 수가 없게 되었군.”
갑자기 무서워졌다.
“지금요……?”
“그래. 원래 안 하려고 했다만, 선생 된 도리로서 해야겠군.”
“…….”
난 기대하는 것이 없었다. 그저 이제껏 받았던 만큼 최소한의 예의를 갖춘 것에 불과했으니 조금이나마 기뻐해 주셨으면 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구세프 선생님은 하지 않기로 했던 선생님으로서의 의무에 충실하기로 하신 모양이었다.
그건 상당히 불안했다. 뭐가 어디서 잘못된 걸까?
무슨 불호령이 떨어질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난 콩쿠르에서 우승했지만 그건 구세프 선생님의 평가에 있어 상관없는 결과에 불과했다.
쇼팽 영웅 폴로네이즈는 그야말로 혹평당할 각오를 해야 했다. 할 말도 없다.
그리고 다른 곡들도 절대 안심할 수 없었다. 구세프 선생님의 평가는 늘 날카롭고 무자비했다.
반쯤 포기하고 마음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구세프 선생님이 입을 열었다.
“상당히 괜찮더군. 잘했다.”
“……예?”
난 나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했다가, 귀가 이상해진 것은 아닌가 싶어 되물었다.
구세프 선생님은 내 얼굴을 보더니 이어 말했다.
“중계로 들었으니 제대로 들었다 할 순 없겠지만, 그래도 네가 잘 한다는 것 정도는 알겠더군.”
“……진담이신가요?”
“도대체 날 어떻게 보고 있는 게냐?”
퉁명스럽게 말씀하시더니 혀를 차신다.
“이래서 이야기를 안 하려고 했던 건데…… 쯧.”
“…….”
“설마 내가 들었던 것과 상관없이 거짓말로 평가를 하리라 생각했던 거냐?”
“그렇진 않아요.”
구세프 선생님은 거짓 평가를 하느니 차라리 말을 안 하는 쪽을 선택하실 정도로 음악에 대해선 강직한 분이시다.
하지만 동시에, 콩쿠르 무대에서의 내 연주가 괜찮다는 말은 곧이곧대로 하기 싫어하시는 복잡한 분이시기도 했다.
그 의중을 짐작하기 어려워서 혼란스러워하자, 구세프 선생님은 그럴 필요 없다는 듯 말했다.
“그리고 거기 앉아 있는 심사위원들이 어떤 양반들인데…… 나 같은 선생 나부랭이보단 훨씬 공신력 있는 사람들이니 넌 네가 받은 평가에 안심해도 된다, 타티아나.”
“전…… 그런 건 상관없어요.”
왜 시상이 끝나자마자 내게 전화를 해서 잘했다고 해 주시지 않았는지, 오늘도 왜 이렇게 평을 해 주실 생각이 없다고 하셨는지 그 이유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난 솔직하게 지금 기분을 털어놓았다.
“선생님이 잘했다고 말씀해 주셔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중계로 들어서 정확하진 않다고 했잖나.”
“상관없어요.”
정말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구세프 선생님은 알 듯 모를 듯한 눈길로 날 바라보시더니 말했다.
“……어쨌든 잘했고, 나쁘지 않았다. 이제야 자신의 노래를 찾아가는 느낌이야.”
자신의 노래. 구세프 선생님은 그렇게 말했다.
그러곤 이어 물었다.
“하나 묻자, 타티아나.”
“말씀하세요.”
“저번에 한 약속, 아직도 생각이 변하지 않았느냐?”
“…….”
구세프 선생님과 내 사이에 있는 약속이라곤 하나뿐이었다.
내가 지금 하나도 꺼내 들지 않고 마음 한쪽에 묻어 두고 있는 수많은 음악들. 그중 한 곡을 3년 뒤엔 되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겠단 약속이었다.
솔직히 말해, 많은 기대를 가지고 있진 않다.
난 빠른 속도로 그 음악들을 잊어 가고 있었다.
쇼팽 소나타 1번의 한 패시지처럼 조금 되찾았었던 아주 작은 편린들조차 모두 할 수 없게 된 지 오래였고, 음반이 남아 있지도 않아서 되살릴 수도 없이 난 빠르게 현재에 매몰되어 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위에 새로이 쌓아 올린 탑은 꽤 견고해졌다.
비록 청소년 콩쿠르이지만 우승을 했고, 음반도 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녀와 내가 쌓아 올린, 화려한 탑이다.
3년이면 훨씬 더 높고 무거워질 이 탑 밑에 깔려 있을 음악들을 끄집어내는 것은 요원해 보였다.
어느 날은 문득 불안해지기도 하지만, 이젠 사실 스스로 뭘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적극적으로 무언가 하기가 두려웠다.
겉보기엔 필사적인 것 같지만 사실은 극도로 수동적인,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숨으로 실낱같은 희망에 기대고 있는 것. 이 형편없는 모습이 내 본질이다.
하지만 그래도 대답했다.
“예.”
“지금 넌 길을 잘 찾아가고 있어. 콩쿠르에서 우승까지 하면서 인정받았지. 그런데도, 그런데도 불구하고 명백한 탈선을 원하나?”
이것도 사실 다 구세프 선생님 덕분일 것이다.
선생님이 날 적절하게 제어해서 당장 할 수 있는 음악에 집중하도록 만들어 놓지 않았다면 난 아직까지도 헤매다가 미쳐 버리거나 포기해 버렸을 것이다.
이렇게 대단한 분이신데 내게 음악 한 곡 정도 찾아 주시는 것도 가능하시지 않겠는가.
“약속……하셨잖아요.”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가고, 날 증명할 수 있는 음악이 하나도 남지 않게 되면 어떻게 될까.
사실 별일 없을 것이다. 그냥 지금처럼, 이렇게 살겠지.
하지만 난 스스로에게 점잖게 굴진 못할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알겠다, 알겠어.”
순간 어떤 얼굴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보여선 안 될 눈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세프 선생님에게 너무 과한 책임을 떠넘기는 것은 내게 죄책감을 불러일으켰다.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구세프 선생님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네가 이렇게 앞으로도 잘 해 준다면…… 그 약속, 조금 앞당겨 줄 수도 있다.”
“정말이신가요?”
“그래. 실력이 된다면.”
구세프 선생님은 정말로, 내게 실력만 갖춰진다면 그 어떤 음악이든 실현해 보일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듯했다.
그건…… 정말 믿고 싶어졌다.
구세프 선생님은 한결 안정된 날 보며 빠르게 말씀하셨다.
“그래서 다음 콩쿠르는 어떻게 할 생각이냐? 가까운 건 바로 5월인데.”
콩쿠르뿐이랴, 연주회건 뭐건 날짜를 앞당겨 주실 생각만 있다면 뭐든 하겠다고 말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난 이번 상트페테르부르크 청소년 콩쿠르에 출전해 보고 느낀 점이 많았다.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적어도 이 부분은 흔들리면 안 된다.
“저, 성인 콩쿠르에 나갈 수 있게 될 때까진 아무 콩쿠르에도 나가지 않고 싶어요.”
“타티아나…… 대체 또 무슨 엉뚱한 소리냐?”
구세프 선생님은 골치가 아프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하지만 가만히 듣고 계시는 미하일 선생님은 그리 놀라신 것 같지 않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