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화
류비그에 입점해 있는 레스토랑들은 백화점 옆에 모여 있었다.
우리가 들어간 곳은 새우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레스토랑이었다.
바게트와 샐러드, 리조또. 그리고 새우와 마늘에 올리브유를 넣어 만든 감바스 알 아히요와 새우를 튀긴 프렌치 프라이드 쉬림프를 주문했는데 그 맛은 그 어느 파인 다이닝에 비견해도 모자람이 없을 정도로 괜찮았다.
이런 곳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그리 대단한 것을 바라진 않는다고 하던 아나스타샤마저 새우를 한 입 먹어 보고는 대번에 눈빛부터 달리했다.
말이 없어진 아나스타샤를 보며 발렌티나가 거보라며 까르르 웃었다.
식사를 마치고, 디저트와 차를 즐기며 우리는 다음으로 갈 장소에 대해 이야기했다.
“예약하신 곳이 있다고 하셨죠? 바로 가면 되나요?”
“어디냐고 묻지 않네?”
“비밀이라고 하셨잖아요?”
어디든 간에 내게 알리지 않아야 할 이유가 있다면, 그게 무엇이든 난 내 친구들을 믿었다.
우리는 레스토랑을 나와서 예약해 둔 곳으로 향했다.
어디로 가는지 정확힌 모르겠지만 놀이시설이 집중되어 있는 곳으로 향하는 것 같다.
당구장, 볼링장, 실내 암벽등반 등등 많은 놀거리들이 있었다. 암벽등반? 저건 아니길 바란다. 그중 뭘 하게 될까 궁금해하며 아나스타샤를 따라갔다.
하지만 우리는 그 모두를 지나쳐 마지막으로 커다란 집같이 생긴 곳 앞에 멈춰 섰다. Last Key라는 간판만 봐선 뭐 하는 곳인지 모르겠다.
“여긴…… 어디죠?”
“역시 한 번도 와 본 적 없구나?”
간판을 올려다보며 묻자 아나스타샤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설명했다.
“우리가 예약한 테마의 방에 들어가서 제한시간 내에 잠긴 방에서 탈출하면 되는 게임이야. 재미있을걸.”
“아…….”
들어 본 적 있는 것 같다. 한 번도 가 본 적은 없지만 2015년 정도부터 방탈출 카페라는 이름으로 급속도로 유행했던 기억이 난다.
그게 이렇게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것인지는 전혀 몰랐다.
해 보지 않은 것에 대해선 흥미가 생겼지만, 굳이 예약까지 하면서 즐길 곳인가 싶기도 했다.
난 방탈출 카페가 정확히 뭐 하는 곳인지도 전혀 모른다.
“그런데 여긴 약간 저연령층을 위한 곳 아닌가요?”
“응?”
열다섯 살보다 더 어린 아이들이나 즐길 만한 곳이 아닌가 싶어서 물어봤더니 아나스타샤는 크게 웃었다.
“아하하하, 아니야 타티아나. 애들보다 어른이 더 많이 가기도 해. 안에서 퀴즈를 풀어야 하거든. 분위기가 무서운 곳도 있고. 그래서 연령제한이 있는 곳도 있어.”
“연령제한요?”
“우리가 예약한 곳도 연령제한이 걸려 있어. 최소 12세 이상.”
난 그녀가 말해 주는 방탈출 게임에 대한 정보들을 정리하다가 문득 신경 쓰이는 점을 발견했다.
“잠깐만요…….”
“왜?”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설마 무서운 건 아니죠? 라고 묻기엔, 자존심이 내 입을 틀어막았다.
난 무서운 영화도 제대로 못 볼 정도로 그런 것엔 면역이 거의 없었다. 자물쇠가 잠긴 방에서 유령이라도 튀어나온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하지만 이미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는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쫓아갔다.
미리 예약을 한 아나스타샤가 카운터에 이야기를 하고, 안쪽에서 직원이 나와서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잠수함 탈출을 안내해 드릴 라이사입니다. 이쪽으로 따라와 주세요.”
“잠수함?”
나쁜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 난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아나스타샤가 돌아본다. 난 그녀를 믿고 싶었다.
“아, 아나스타샤? 왜 잠수함이에요?”
“다른 것도 있어. 저기 봐. 테마 메뉴야.”
아나스타샤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엔 메뉴판이 있었다.
폐교(8), 정육점(6), 감옥(5), 정신병원(9), 잠수함(7).
각 테마에 붙은 숫자는 공포도를 나타낸다는 친절한 설명이 붙어 있었다.
잠깐만, 이거 그냥 공포체험이잖아? 그것도 7? 정육점은 도대체 뭐야? 무섭잖아!?
도망치고 싶어졌다.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가 없었다면 곧바로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저 애들도 하는데, 내가 못 하겠다고 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난 떨어지지 않는 발을 간신히 떼며 움직였다.
“탈의실입니다. 입고 오신 옷들은 모두 캐비닛에 넣어 주시고 주어진 유니폼으로 환복해 주세요. 그리고 스마트폰 등 모든 전자기기는 모두 반입 불가이니 양해해 주시고 캐비닛에 넣어 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미션이 시작된 후에도 스마트폰을 사용하시면 탈출에 성공하시더라도 규칙 위반으로 실패가 됩니다.”
“…….”
1인용으로 분리되어 있는 탈의실에 들어갔다. 유니폼이라고 주어진 옷은 해군이 입는 군복이었다.
이걸 입으면 정말 돌이킬 수 없게 된다는 확신이 들었다.
“으으…….”
조금 고민하다가, 옷을 벗고 환복했다. 직원이 시키는 대로 스마트폰 등도 캐비닛에 넣었다. 모르겠다. 일단 부딪쳐 보면 되겠지. 설마 죽기야 하겠는가?
탈의실 밖으로 나오니 나와 같은 해군복을 입고 있는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가 이미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내가 밀어 줄게.”
발렌티나가 소곤거리며 이야기하더니 막 탈의실에서 나온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 눈이 순간 긴장하더니, 돌변한다. 발렌티나가 크게 외쳤다.
“이렇게 절벽에서 말이지!”
“아, 야!”
발렌티나가 막 밀치자 아나스타샤가 휘청거렸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잠수함이라면서 웬 절벽?
준비된 우리 세 명을 보고 직원이 다시 한 번 스마트폰을 반입하지 않는지 확인했다. 몸수색을 하거나 하진 않는다. 그냥 물어만 볼 뿐.
“자, 따라오시죠. 발밑의 불빛을 따라오시면 됩니다.”
그리고 직원이 문을 열었다. 그 앞은 캄캄한 어둠이었다. 직원이 안으로 들어가자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도 따라 들어갔다.
“으…….”
미치겠다. 벌써 무섭다.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어둠 속에서 발밑의 희미한 등만이 길을 가리키고 있었다.
앞서 가는 발렌티나의 실루엣이 더 희미해지기 전에 난 뒤따라 붙었다.
양손을 모아 쥔 채 하염없이 얼마나 걸었을까? 사실 그리 많이 걷지 않은 것 같다.
“마지막 화살표가 가리키는 곳에 침대가 있습니다. 앉아 주세요.”
어둠속에서 목소리가 시키는 대로 갔다. 희미하게 뭔가 보여서 주춤거리며 앉았더니 폭신했다. 침대인 것 같다.
“즐거운 시간 되시길. 제한 시간은 1시간입니다.”
그리고 직원은 도로 나가 버렸다. 문이 닫히고 잠시 후,
“……!”
불이 확 켜졌다.
한순간 밝은 빛에 눈이 따갑다가, 곧 적응되었다. 그제야 난 우리가 앉아 있는 곳을 살필 수 있었다.
“아…….”
한 마디로 살벌했다.
정말 잠수함 안을 표현하고 싶었는지 온 방이 철통으로 되어 있는 것 같았다. 철제 특유의 싸늘함이 여기까지 전해진다.
긴 책상 하나와 금고, 캐비닛, 무전기, 등 여러 가지 소품들이 있었는데 하나같이 다 진짜 19세기쯤에서 가지고 온 것처럼 보였다. 해군복까지 입고 있다 보니 현실감이 확 살아났다.
벽마다 깔려 있는 파이프에선 물소리도 들린다.
“와. 와…….”
발렌티나가 신기한지 침대에서 일어나서 돌아다녔다.
내 옆에 앉아 있던 아나스타샤가 말했다.
“이제 단서를 찾아보자, 타티아나. 우리가 여기서 탈출할 수 있는 단서가 있을 거야.”
싱긋 웃는 아나스타샤를 보니 마음이 놓인다. 아무리 현실감이 뛰어나다고 해도 결국 놀이시설. 즐기면 되는 것이다. 즐기면.
난 용기를 얻어 일어나 일단 책상을 살폈다. 종이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고, 도장도 몇 개나 있다. 모두 무언가 단서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머리가 돌기 시작하니까 뭔가 추리소설 안에 던져진 듯한 기분도 들고,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난 더 단서를 찾기 위해 서랍을 열었다.
“……!”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잘린 손을 보고는 언어도 비명도 아닌 이상한 신음 같은 것을 내뱉었다.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가 깜짝 놀라 내 쪽을 봤다. 등줄기에 소름이 달린다. 사람이 너무 놀라면 비명조차 제대로 안 나온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뭐야? 뭔데?”
내 쪽으로 온 두 사람도 손을 보더니 기겁했다. 난 어이가 없었다. 12세 연령제한? 장난하는 거야? 경기라도 일으키면 어떻게 하려고!
아나스타샤가 내 어깨를 감쌌다.
“타티아나, 괜찮아?”
“으…….”
창피해서라도 벗어나야 하는데, 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아나스타샤가 조금 더 세게 내 어깨를 끌어안았다가 놓아주었다.
“이다음은 내가 찾아볼게.”
“…….”
그러더니 아나스타샤는 철제 캐비닛으로 가서 손잡이를 쥐었다. 손잡이를 당겼으나 한 번에 열리지 않고 덜컹 하는 소리만 차갑게 들렸다.
“아나스타샤.”
“응?”
“안 열면 안 돼요?”
“안 열면 어떻게 단서를 모아?”
“…….”
바보 같은 소리가 절로 나온다.
결국 난 캐비닛을 열어젖히고 뒤적이는 아나스타샤나 파이프에 달린 밸브까지 풀어 보려는 발렌티나처럼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못했고, 책상 위에 있는 종이들만 정리하며 무언가 있지 않을까 읽어 보았다.
종이들은 대부분 이곳의 테마에 걸맞게 잠수함 작전과 전쟁에 대한 이러저러한 배경 이야기들이었는데, 딱 한 장 특이한 것이 있었다.
“음……. 아나스타샤, 잠시만요. 단서처럼 보이는 걸 찾아냈어요.”
“뭔가 찾았어?”
“예. 보시겠어요?”
난 찾아낸 종이를 보여 주었다.
71A2
B283
54C4
9D66
“이거야. 이게 하나의 암호를 나타내는 문제일거야. ABCD에 들어갈 숫자를 찾아내면 되는 것 같은데?”
종이를 보자마자 아나스타샤가 곧장 말했다.
난 이것 전체가 하나의 암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아나스타샤는 빠르게 머리를 굴려 우리가 무엇을 찾아내야 할지 알아냈다.
발렌티나도 다가왔다.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암호 풀이에 나섰다.
“우리 중에 수학 점수 제일 높은 게 누구지?”
“타티아나.”
“타티아나. 뭐일 것 같아?”
“…….”
뭔가 순서대로 사칙연산을 써서 규칙을 찾아내야 하는 문제인 것 같은데, 아까부터 봐도 잘 모르겠다.
넌센스인가 싶어서 종이 뒷면도 보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이 숫자만으로 풀어야 하는 것 같다.
“뭘까? 이걸 풀어야 저기 있는 금고를 풀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렇지?”
“열두 살들도 이걸 풀 텐데 우리가 못 풀면 안 돼.”
“그것도 그렇네?”
우린 열다섯 살의 자존심을 안고 문제풀이에 임했다. 친절하게도 연필도 준비되어 있어서 모든 수학적인 역량을 총동원할 수 있었다.
나와 아나스타샤, 발렌티나의 아이큐를 모두 더하면 못해도 300은 넘을 테니 이런 숫자 4개 산출해 내는 것쯤이야 별일도 아닐 터.
우리는 그렇게 학교 공부를 할 때보다 더 집중해서 숫자들을 해독하려 했다.
“…….”
5분 후.
“전혀 모르겠는데.”
아나스타샤가 항복 선언을 했다.
조금 이른 게 아닐까 싶지만, 문제는 이 방탈출엔 시간제한이 있다는 점이었다. 1시간이 지나도록 못 빠져나오면 실패가 된다.
열두 살들도 1시간 내로 빠져나갈 수 있게 만들어진 곳이란 뜻이다.
“자존심이란 뭘까? 타티아나. 발렌티나.”
“……글쎄요.”
“지금 우리에겐 없는 거?”
아무리 뚫어지게 보아도 답을 모르겠다. 난 조금 더 책임감을 가지고 풀이에 임했지만 그렇다고 도움이 되진 않았다. 암울해진다.
“시간 보내지 말고 그냥 힌트 찬스를 쓰자.”
“그런 것도 있나요?”
“응. 아까 직원분이 설명했었잖아. 못 들었어?”
뭔가 들었던 것 같기도 한데 잘 모르겠다.
이윽고 결심했는지 아나스타샤가 옆에 있는 무전기처럼 생긴 수화기를 들었다. 전화를 걸거나 할 필요 없이 곧바로 연결되었다.
- 힌트를 원하십니까?
스피커폰이 상시 켜져 있는 것 같다. 음침한 목소리가 중얼거렸다.
첫 문제부터 힌트를 달라고 하는 게 부끄럽게 느껴졌지만 아나스타샤는 아랑곳하지 않고 필요하다고 대답했다.
- 힌트를 원하신다면 춤을 추거나 노래를 해서 이 잠수함을 감싸고 있는 저주받은 원혼들을 잠시 몰아내야 합니다…….
“그런 게 어딨어요.”
- 규칙입니다…….
음울한 연기 톤의 목소리이지만 역시 직원이었다. 괜한 직원을 괴롭힐 생각은 없었기에 우린 서로 시선을 교차했다.
춤은 논외였다. 나도 아나스타샤도 발렌티나도 왈츠처럼 사교에 필요한 춤 말고는 출 줄 아는 것이 없다.
그때 발렌티나가 말했다.
“아, 타티아나. 성악했었잖아?”
성악을 배우면 노래를 해야 한다는 규칙 같은 건 없지만 난 기대의 시선을 받으며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
“제가 부를게요.”
“같이 할까? 부끄럽잖아.”
“괜찮아요.”
좋은 기회였다. 방에 들어와선 벌벌 떨기나 하고 문제풀이에도 도움이 안 된다면 힌트를 얻는 데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다.
“…….”
난 아나스타샤로부터 수화기를 넘겨받고는 일전에 배운 차이코프스키의 가곡을 하나 불렀다.
난 아직도 성악을 연습하고 있었고, 이 정도 가곡은 반주 없이도 간단히 음을 찾아 부를 수 있었다.
철통이 내 목소리를 반사해서 묘한 음을 냈다.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는 할 말을 잃었는지 멍하니 날 바라보았다. 왜 이렇게 보는지 모르겠다.
중앙음악학교에 다니는 우리가 가곡을 부르는 게 뭐가 이상한가? 그리고 잘하지도 못하는 가요보단 이쪽이 저주받은 원혼들을 몰아내는 데엔 좋을 것 같은데?
- …….
수화기 너머도 말이 없더니, 갑자기 짝짝 박수소리가 들렸다.
- 가스펠의 한 종류인가요? 깜짝 놀랄 정도로군요. 성스러운 노래에 원혼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힌트를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어쨌든 해낸 것 같다. 다행이다.
수화기가 말했다.
- 학교에서 배운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모두 아시는 겁니다.
“……예?”
- 그럼 이만.
아니, 뭐야? 그게 힌트야?
어이가 없어서 다시 수화기를 들었지만 아무 말이 없었다. 끊어버린 것 같다.
아나스타샤가 인상을 썼다.
“노래값 제대로 내놓으라고 해야겠는데.”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한 것 아닐까요?”
“그럴 리가 없잖아.”
아나스타샤는 투덜거리지만 다시 종이를 봤다. 일단 힌트를 들었으니 제대로 적용시켜 봐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학교에서 배웠다고? 우리가 뭘 배웠더라.
“아! 알았어!”
갑자기 발렌티나가 기성을 질렀다. 우린 깜짝 놀라 그녀를 보았다. 이걸 알았다고? 어떻게?
놀란 눈으로 쳐다보는데 발렌티나는 숫자를 세어서 어디에 적지도 않고 그대로 외우더니 중얼거리며 금고로 갔다. 그리고 숫자 4개를 넣었다.
금고는 바로 열렸다.
세상에, 발렌티나. 천재였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