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93화 (193/1,277)

##  193화

발렌티나는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금고에서 무언가 다른 단서들을 꺼냈다.

우리는 한참이나 발렌티나를 닦달했다. 봐도 봐도 이해가 안 가는 문제를 어떻게 한 번에 맞혔는지 궁금했다.

발렌티나는 우리들을 위해서 가르쳐 줄 수 없다는 이상한 소리를 하다가 결국 가르쳐주었다.

“위에서부터 구구단을 외우면 돼. 7단.”

“……예?”

나와 아나스타샤는 다시 문제를 보았다. 그리고 각자의 방법으로 절망을 표출했다. 난 책상에 엎드렸고 아나스타샤는 의자 뒤로 머리를 젖혔다.

“뭐 이런…….”

아나스타샤가 중얼거리는 모습이 조금 무섭다. 나 역시 허망한 기분이었지만 이만 다음 문제들을 풀어 나가자고 그녀를 달랬다.

그 뒤로 이어지는 단서들도 재미있는 것들이 많았다.

어떠한 퀴즈를 푸는 것도 있었지만, 단순히 계산만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특수한 장치들을 이용해서 풀어 나가게 하는 것도 있어서 신선했다.

아나스타샤는 눈썰미와 직관이 좋아서 단서를 잠깐 스쳐 지나가며 보는 것만으로도 어떻게 짜 맞춰야 하는지 바로바로 길을 찾아냈다.

그리고 발렌티나는 별생각 없이 툭툭 두드려보는 듯한 것들에서 해답을 찾아내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운이라기엔 너무 자주 있는 일이라 하나의 실력이라 봐야 할 것 같았다.

우리들은 머리를 맞대고 협동해서 문제들을 해결해 나갔다. 함께 연습을 하거나 공부를 하는 것과는 또 다른 기분이었다.

가장 신기했던 건 불을 끄고 금고에서 찾은 특수 랜턴을 비추니 벽에 선명한 그림과 글자가 떠올랐을 때였다.

“…….”

어두컴컴한 방에서 오로지 랜턴 빛에만 의존하여 드러나는 그림은 마치 핏자국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것은 신기하기도 했지만 섬뜩하니 무섭기도 했다.

이렇게 실감 넘치는 디테일들은 정말 어린애들이 보면 울어버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될 정도로 공포스러웠다.

무서운 분위기에 긴장하고 있는데,

“와아!”

갑자기 발렌티나가 랜턴을 자기 턱 밑에 비추며 소리를 질렀다.

난 그야말로 기겁해서 옆에 있는 아나스타샤를 붙잡았다가, 마주 소리를 쳤다.

“발렌티나!”

“아하하하하! 놀랐어?”

“심장 멎는 줄 알았어요!”

발렌티나가 미안하다며 깔깔 웃었다. 하나도 안 미안해하는 것 같아서 얄밉다.

팔에 소름이 다 돋았다. 난 무서운 것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데다가 이렇게 갑자기 확 튀어나오는 종류엔 더더욱 약했다. 난 기본적으로 담이 약한 편이었다.

“…….”

간신히 날 지탱해 준 것은 옆에 있던 아나스타샤였다. 그녀가 어둠 속에서 눈을 부라렸다. 랜턴 빛을 반사하는 눈빛이 날카롭기 그지없다.

“하지 말랬지, 발렌티나.”

“지금 안 하면 언제 해 보겠어? 안 그래?”

발렌티나는 대놓고 날 놀려 먹겠다고 선언하고 있었다.

화가 나진 않았다. 심지어 내가 싫어하는 무서운 장난임에도 불구하고 난 발렌티나가 그런 말을 해 주는 것이 좋았다.

내심 허락했다. 발렌티나가 날 굽든 삶든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 두도록. 그녀가 어떤 일을 해도 화내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리고 5분 만에 철회하고 싶어졌다.

“발렌티나……. 제발……. 살려 주세요…….”

“어……. 미안?”

발렌티나는 파이프를 두드리면 그에 응답하듯 유령의 소리가 난다는 것을 발견해 냈다.

그리고 그 유령들의 말에 힌트가 있을지도 모른다며 열심히 파이프들을 두드려보고 있는 중이었다.

깡깡거리는 쇳소리와 낮게 중얼거리는 음산한 유령의 목소리가 조화되자 극도의 공포감을 불러일으켰다.

소리에 예민한 편인 나는 가짜라는 걸 안다고 해서, 들리는 소리가 이미지화되는 걸 피할 순 없었다.

내가 살려 달라고 빌자 그녀는 날 보더니 사과했다. 이번엔 진짜 미안해하는 것 같다.

아나스타샤는 막 찾아낸 장치를 보며 이리저리 돌려보고 있었다. 난 내가 보고 있던 것을 내려놓고 아나스타샤에게 다가갔다.

“아나스타샤…….”

“응? 타티아나.”

“무언가 찾아내셨나요?”

“글쎄.”

아나스타샤는 곰곰이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상한 시계처럼 생긴 장치를 내려놓곤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날 돌아봤다. 미안하다는 듯한 시선. 내가 무서운 것에 약하다는 것을 그녀는 잘 안다.

“타티아나, 여기 분위기가 좀 그렇지? 그래도 괜찮을 것 같았는데. 넌 안 괜찮나 봐.”

“예? 아뇨, 그렇지 않아요.”

난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아나스타샤가 무엇을 미안해하는진 알겠지만 이렇게까지 미안해하진 않아도 괜찮다.

“공포를 즐긴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확실히 느끼고 있어요…….”

“괜찮은 거야?”

“살아 있다는 실감이 나네요…….”

살려 달라는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로 실감나게 느끼고 있다. 나처럼 이 시설을 확실하게 이용할 수 있는 사람도 드물 것 같다.

그런 내 표정을 보더니 아나스타샤가 말했다.

“꼭 피아노를 통하지 않아도 실감할 수 있는 게 있긴 하지?”

“…….”

갑자기 그녀가 하는 말이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이해할 순 없었지만, 평소 당찬 그녀의 눈매가 축 처져 있는 것을 보며 마음 한구석이 쿡쿡 찔리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난 요 며칠간 아나스타샤를 내 피아노에 연관시키지 않으려 했었다.

“아나스타샤.”

“응.”

“…….”

어떤 말이라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거짓말은 안 된다.

난 무언가 조심스레 살피는 듯한 그녀를 보며 기운 좋게 활짝 웃었다.

“우리 오늘은 신나게 놀고. 내일은 다시 열심히 연습하도록 해요. 같이 봐주셔야 할 것도 있어요.”

“……응?”

아나스타샤는 순간 어리둥절해하더니, 곧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하, 그래. 피아노가 중요하지. 우리가 지금 이렇게 노는 것도 결국 스트레스를 풀고 피아노에 더더욱 집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니까. 안 그래?”

“그건 아니라 생각해요.”

“?”

“피아노는 피아노고 오늘은 오늘이죠.”

난 아나스타샤의 오해를 단번에 부정했다.

그녀는 멀거니 날 올려다보더니 작게 말했다.

“응. 네가 아까 그랬지. 지금 우리랑 같이 있는 게 소중하고 행복하다고.”

“예.”

“……진짜 가끔 그런 소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해.”

그녀는 다시 책상으로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날 부끄럽게 만들어…….”

“미안해요.”

“아니 미안할 건 없어. 어차피 내 문제니까. 그보다 이 문제나 풀자. 빠져나가야지.”

내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그녀는 고개를 들고는, 희미하게 웃으며 다시 문제 풀이에 들어갔다.

아나스타샤가 자신의 문제라 했던 것들은 사실 그녀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난 그것을 어렴풋하게 느꼈다.

난 다시 찾아낸 단서를 만지작거리는 아나스타샤를 내려다봤다.

칙칙한 조명 아래에서도 전혀 희석되지 않는 아름다움이 내면의 고민으로 인해 처연한 빛을 띠었다.

고민이 많은 건 나도 마찬가지다.

에르네스트로부터 내 친구들을 믿고,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는 확신을 다시 한 번 얻었고, 또한 용기도 받았지만.

그래도 난 여전히 겁이 많다. 특히 아나스타샤에 대해선 난 어떤 일이든 섣부르고 충동적으로 할 수 없었다. 난 나를 믿지 않는다.

이윽고 우린 거의 마지막 문제를 앞두고 있었다.

어지간한 단서들은 거의 다 열어보았고, 더 이상은 방 안에서 무언가 찾아낼 것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손에 들린 이 숫자 조합을 자물쇠에 대입해 보면 될 것 같다.

그런데 자물쇠가 안 보인다.

“마지막 문제를 어디에 넣어야 하는 거지?”

“이제 문을 열어야 할 것 같긴 한데. 문 옆에 있는 저건가?”

아나스타샤가 닫힌 문으로 다가갔다. 그 옆엔 척 봐도 문을 여는 데에 쓸 것 같은 단말이 설치되어 있었다.

문제는 버튼이 2개 있는 게 전부란 점이었다.

“뭐지 이거……? 숫자를 넣을 수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글쎄요……. 그냥 누르면 폭발한다거나 하지 않을까요.”

“타티아나 너 너무 몰입하고 있는 것 같은데? 폭발해서 우리 셋이 손잡고 먼 길 떠나게 되면 그것도 웃기겠네.”

내가 무슨 말을 한 거지. 진짜 너무 몰입해 있었던 것 같다.

발렌티나가 웃으며 말했다.

“타티아나, 엄청 즐기고 있는 것 같네!”

난 미소로 답했다.

아나스타샤는 안 눌러 볼 이유도 없다는 듯 곧바로 버튼을 눌렀다. 하지만 응답이 없다.

“고장인가.”

그렇게 말하면서 그녀는 떨어져 있는 2개의 버튼을 양손으로 눌렀다.

그러자 갑자기 벽이 뒤집히면서 숨겨져 있던 숫자 다이얼이 드러났다.

아나스타샤가 버튼에서 다시 손을 떼자 다이얼이 벽 뒤로 숨어버렸다.

아무래도 양손으로 누군가 버튼을 누르고 있어야 다이얼이 드러나서 암호를 입력할 수 있는 시스템인 것 같다.

아나스타샤가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생긴 건 옛날 잠수함인데 잠금 장치는 그렇지 않네…….”

“왜 이런 걸 만들어 놨는진 잘 알겠네. 이 테마 최소 2인부터였지?”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가 서로 말을 주고받았지만, 우리가 할 일은 분명했다.

아나스타샤가 다시 양손으로 버튼을 눌렀다. 다이얼이 드러났다. 양손이 묶인 아나스타샤가 우릴 불렀다.

“발렌티나. 와서 다이얼 좀 돌려 줘.”

“입으로 물고 돌리면 되잖아.”

“괜찮겠어, 발렌티나? 여기 도망칠 곳도 없는 닫힌 방인데?”

“타티아나! 아나스타샤가 협박해!”

발렌티나는 내 팔을 잡고 칭얼거렸지만 어디까지나 장난이었다. 발렌티나는 싱글벙글 웃더니 날 살짝 밀었다.

“네가 가서 해 줘, 타티아나.”

“제가요?”

“응. 내가 불러 줄게.”

이 문제에 대한 단서를 찾아내고 정답 후보들을 유추해 낸 것도 발렌티나였으니 난 다이얼이나 돌리는 역할을 맡는 게 좋을 것 같다.

난 알겠다고 하고는 아나스타샤에게 다가갔다.

“…….”

그런데 막상 등을 돌리고 서 있는 아나스타샤를 보고, 그녀의 팔 안쪽으로 파고들려니, 선뜻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당연히 그녀가 너무 싫어서는 아니었다.

정확히 그 반대다.

“…….”

멍하니 있을 수도 없었다. 난 천천히 그 옆으로 다가갔다. 고개를 돌리고 있는 아나스타샤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물었다.

“타티아나, 네가 돌리려고?”

“예.”

“……그래.”

“저기, 실례할게요…….”

갑자기 아나스타샤가 빵 터졌다.

“아하하, 무슨 소리야 정말!”

“……?”

무엇이 그리 웃긴지 아나스타샤가 한참을 깔깔거리며 웃었다. 뭔지 모르겠지만 그녀가 웃길래 따라 웃었다.

난 아나스타샤가 시원스레 웃는 걸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이리 와.”

아나스타샤가 날 불렀다. 난 그녀의 팔 밑으로 몸을 숙이고 들어갔다. 애초에 키 차이가 있어서 그리 어렵지 않았다.

허리를 펴고 서니 난 거의 아나스타샤에게 안겨 있는 상태였다. 그녀의 숨결이 목 뒤에 와닿는다. 난 작게 움츠렸다.

눈앞엔 이제 마지막 문제로 보이는 다이얼이 놓여 있다.

“발……렌티나. 숫자를 불러 주세요.”

“음……. 1, 6, 2.”

난 실수로라도 손을 떨거나 잘못 다이얼을 돌리지 않도록 다시 집중을 끌어모으며 1, 6, 2 순서대로 다이얼을 돌렸다.

이제 끝이구나.

“……?”

아무 반응도 없었다.

제대로 했는데?

잠시 다이얼을 바라보다가, 우리가 확실한 답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후보를 놓고 하나씩 대입 중이었다는 걸 떠올렸다.

등 뒤에서 아나스타샤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게 아닌가 보네. 발렌티나, 다음 거.”

“응. 1, 9, 2.”

아나스타샤에게 안겨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이 시간이 더 길어진다는 데에 기쁨과 절망을 동시에 느낀다.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간사할 수 있을까 어이가 없을 정도로, 난 기묘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기계적으로 손을 뻗어 다이얼을 돌렸다. 1, 9, 2. 이번에도 반응이 없다.

“이것도 아닌가 보네.”

“……예.”

아나스타샤의 물음에 대답했다. 그녀는 내 어깨 위까지 머리를 숙였다. 바로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어차피 몇 개 안되니까 다 넣어 보면 알겠지.”

왜 그런 생각이 드는지 모르겠지만 바로 옆에서 속삭이는 사람을 느끼다보니 목께가 으스스해진다.

“6, 2, 3.”

“안 되네요.”

곧바로 열리는 일은 없었다. 아예 접근 방법이 틀린 게 아닐까 생각이 들었지만 잠자코 발렌티나가 불러주는 대로 다이얼을 돌렸다.

열 번쯤 되었을까.

“……!”

끼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난 어안이 벙벙해져서 발렌티나를 돌아보았다. 발렌티나가 환하게 웃었다.

“마지막 게 답이었나 봐!”

“운이 그렇게 없어? 한 번에 답을 불러줬어야 할 것 아냐?”

“운 문제는 아니지.”

발렌티나가 열 개도 넘는 숫자 조합을 불러주는데 마지막에서야 정답이 나올 확률이 얼마나 될까 생각하는데, 아나스타샤를 보니 그녀도 기분 좋게 웃고 있었다.

아무래도 상관없어졌다.

성공적인 방 탈출을 자축하며 밖으로 나오자 직원이 반겨 주었다.

“51분 44초입니다. 축하합니다. 여기, 기념사진 찍으실 수 있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와아, 부탁드려요.”

우리 세 명은 복도 옆에 나란히 섰고, 해군복을 입은 채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51분 44초라는 기록이 적힌 보드는 발렌티나가 들었다.

모든 게임이 끝나고, 탈의실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왔다.

의자에 앉아서 그사이 스마트폰으로 뭐가 왔나 살피는 듯하던 발렌티나가 날 보더니 스마트폰을 집어넣었다.

“재미있었지? 타티아나.”

“예. 정말요.”

주어진 문제를 해결해서 방에서 탈출한다는 것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한다는 것이 즐거웠다.

발렌티나는 잘되었다는 듯 말했다.

“다음엔 더 무서운 데로 가 보자.”

“잠깐만요, 발렌티나……. 일부러 그러시는 거예요?”

발렌티나가 빙그레 웃었다.

“그걸 이제 알았어?”

“…….”

공포영화라도 봐서 적응을 하든지 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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