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화
난 리처드를 따라가겠다고 했다. 여덟 명이 먹을 간식을 리처드가 매점까지 내려가서 혼자 사서 들고 오게 두자니 마음이 아팠기 때문이다.
한승우는 자신이 가겠다고 했지만 난 고개를 저었다.
“두 분이서 도망가 버리시면 어떻게 해요?”
“……!?”
“뭐?”
리처드와 한승우가 경악을 금치 못하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도망치는 건 상상도 못 했다는 듯이. 난 웃으며 말했다.
“농담이에요.”
“좋은 방법 알려 줘서 고마워 타티아나. 도망가야겠어.”
“그러니 제가 따라가야죠.”
“짐 나눠 들어 주는 게 아니라 애초에 그게 목적이었던 거지?”
툴툴거리면서 리처드가 일어섰다. 그리고 내게 눈짓했다. 따라올 테면 따라오라는 것 같다.
스터디룸을 나와 리처드와 함께 복도를 걸었다.
“…….”
우리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지 않고 나란히 걸었다.
한창 레슨과 연습, 공부로 바쁜 학교의 복도엔 온갖 소음이 혼재되어 울렸다.
악기 소리, 사람의 목소리, 그리고 복도를 걷는 우리의 발소리까지.
“저기, 리처드.”
난 넌지시 리처드를 불렀다. 그가 대답했다.
“왜?”
“리처드는 졸업하실 때까지 그 성적을 유지하실 생각이신가요?”
“…….”
리처드는 훨씬 더 좋은 성적과 평가를 받을 수 있으면서도 일부러 그렇게 하지 않고 있었다.
난 그를 존중했지만, 사샤에게 리처드가 얼마나 대단한 연주자인지 말하지 못하고 그저 얼버무렸던 것이 아직도 마음에 남아 있었다.
앞으로도 사샤는 리처드의 실력을 알 수 없지 않겠는가? 그리고 비단 사샤뿐이 아닌 다른 모두도.
리처드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투로 대꾸했다.
“그래. 그럴 거야.”
“졸업하고 나면요?”
한 걸음 더, 다가섰다.
선을 넘은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리처드가 내게 이 정도 거리는 내어 줬다고 생각했다.
작년에 이미 가감 없이 내게 본 실력을 보여 준 적도 있었고. 그는 에르네스트도, 아나스타샤도 모르는 모습을 내게만 보여 줬었다.
걸음을 늦추지 않고 리처드를 올려다봤다. 그 역시 내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려 날 바라보았다. 그는 무표정하게 말했다.
“생각해 본 적 없는데.”
“그래도 이유가…….”
“타티아나.”
리처드가 짐짓 엄하게 날 불렀다.
“저번에도 말했을 텐데. 날 이기고 대답을 강요하는 게 가장 빠르다고.”
“……그랬었죠.”
리처드는 생각보다 승부사 기질이 강한 사람이었다. 난 지금이야말로 그에게 대결을 하자고 하면 어떨까 생각했다.
하지만 내 기색을 눈치챘는지, 리처드가 픽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보지 마. 지금은 할 마음 없으니까. 난 딱히 지금 너한테 바라는 것이 없거든.”
“바라는 게 없어요?”
“그래. 쉬지 않으면 큰일 나겠다 싶지도 않고.”
대화를 나누면서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던 리처드가 갑자기 멈춰 섰다. 그리고 허리를 살짝 숙여 내 얼굴을 살폈다.
“괜찮아 보이는걸.”
“…….”
작년에 그가 내게 대결을 요구하고, 항상 숨기고 있던 실력까지 드러내 보였던 것은 날 억지로라도 쉬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리 친하지도 않았던 반 친구를 위해 그렇게까지 할 수 있었다는 것이 아직도 믿어지지 않지만, 리처드는 세심함과 과감함을 동시에 갖춘 사람이었다. 상냥하기도 했고.
아무 말도 못 하고 입을 다물자 리처드는 내가 적당히 알아들었다고 생각했는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무튼, 난 내기거리가 없으면 할 맘이 안 나. 고로 나중에 하자고. 됐지?”
“왜요? 그냥 할 수도 있잖아요.”
“싫어.”
난 약간 오기가 생겨서 그를 도발했다.
“그, 그렇다면 할 마음이 드시도록 내기거리를 만들면 되는 거죠? 제가 지면 오늘 간식 제가 사는 걸로 할게요. 어떠신가요?”
“겨우 그걸로 저울 눈금이 맞다고 생각해? 됐어.”
“한 달 치 점심까지 사 드리는 것으로 하면요?”
“……타티아나. 머리 좀 식혀. 평소엔 안 그러면서 밥 사 준다는 말이 쉽게 나온다? 그래도 내가 그런 것에 넘어갈 것 같…….”
“두 달 치 살게요.”
“…….”
강인한 리처드의 눈동자가 일순 흔들린다. 역시 그라도 사람인지라 흔들릴 수밖에 없…….
“싫어.”
“너무하세요.”
“너무한 건 네가 너무하지. 내가 8년 동안 이 학교 다니면서 제대로 대결에 임해 본 건 네가 처음인데.”
“어, 어……. 예?”
그의 말에 순간 머리를 무언가로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리처드는 단 한 번도 사욕으로 날 대한 적이 없었는데, 내가 무슨 말을 한 거지?
리처드는 영국의 본가에서 넉넉하게 지원을 받지 못하는 상태로 이곳에서의 유학생활을 유지해 나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걸 알고 미끼를 드리운 것은 리처드의 입장에선 정말 기분 나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진심을 내는 리처드와 다시 피아노를 쳐 볼 수 있을까 싶어서 그의 저울에 무언가 올려놓는 데에 제약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정도껏 해야 했다.
난 더듬거리며 사과했다.
“미, 미안해요. 리처드. 실언이었어요.”
“타티아나. 농담이니까 제발 그런 얼굴 하지 마. 나야말로 엄청 잘못한 것 같잖아.”
“그래도…….”
“아, 진짜. 괜찮다니까.”
리처드가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손사래를 쳤지만 난 정말 미안했다.
그는 날 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내 말은 딱히 돈이 순수하지 못하다는 말이 아니라……. 아니, 뭐라 설명이 안 되네.”
“…….”
“아, 모르겠다. 그냥 점심 두 달 치 걸고 해? 난 사실 그것도 상관없는데?”
난 격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없던 일로 해 주세요.”
“그래. 됐잖아? 과자나 사러 가자고.”
리처드는 쿨하게 앞장서서 걸어 나갔다. 난 잠시 동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모종의 이유로 영국에서 제대로 지원을 받지 못해 검소하게 살고 있을 뿐이지 그는 공작가문의 진짜 귀족이었다.
난 혹여나 그의 자존심을 건드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뭐 해? 안 오고.”
“갈게요.”
리처드는 정말 신기한 사람이었다.
영국에서 먼 러시아까지 유학을 올 정도로 필사적이면서 정작 학교생활은 중간으로 유지하는 것도 그렇고.
다른 누군가와 내기를 하고 대결하는 것을 그토록 바라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하지 않는 것도 그렇고. 알면 알수록 미스터리다.
난 리처드와 나란히 걸으며 다시 살짝 물어보았다.
“리처드, 본 실력을 보여 주신 게 제가 처음이라는 건 사실인가요?”
“무슨 실력? 그냥 그때 네가 컨디션이 너무 엉망이었던 게 아닐까?”
“아하하.”
역시나 한결같은 대답이었다. 난 애먼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
다른 사람과 경쟁해서 이기고 싶어 하는 욕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조금씩 가지고 있는 욕구일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다른 사람을 밟고 서서 우월감을 느끼려는 욕구와 보다 정정당당한 승부욕은 구분되어야 했다.
그런 의미에서 에르네스트는 정말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승부욕의 화신 그 자체였다.
“타티아나, 연습실 가자.”
오늘도 에르네스트는 음료수 내기를 하자고 하고 있었다. 그간 내 패턴을 완벽히 알아냈으니 비장의 곡을 보여 주겠다나 뭐라나.
그와의 전적은 지금 내가 1점 앞서 있긴 했다. 오늘 만약 내가 지게 된다면 또 무승부가 될 것이다. 몇 번째 무승부인지 잘 기억도 안 난다.
귀찮거나 손해 볼 일은 아니었다. 그는 매번 날 놀라게 했다. 곡을 한 번 보고 외워버리기도 하는 천재와의 대결은 지루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안 된다.
“저 오늘은 레슨이 있어서 안 돼요.”
“하고 가면 되잖아.”
“…….”
에르네스트는 날 놓아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음료수 내기 정도는 빠른 연습곡의 속주 대결 정도로 충분했고, 그럼 정말 5분도 안 걸려 승패를 가릴 수 있었다.
난 속주 대결을 그리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지만, 에르네스트와 자주 피아노를 겨루면서 속주도 많이 하게 되었다.
그래도 말이지, 속주 대결 같은 것만 자꾸 해서 어쩌잔 말인가?
난 에르네스트와 조금 더 심도 깊은 대결을, 대화를 하고 싶었다. 이렇게 자주 할 것이 아니라, 시간을 두고 천천히.
리스트를 그렇게나 감미롭게 연주할 줄 알면서 왜 맨날 연습곡만 빠르게 연주한단 말인가? 아깝게.
“…….”
하지만 난 에르네스트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말 것이다.
난 당장 어젯밤에도 녹음해 둔 그의 연주를 들으며 잠들었다.
이제는 피아노 연주를 들으며 따뜻한 우유를 마시는 것이 약간 버릇처럼 되어 버렸다.
물론 그래도 새벽에 일어나곤 했지만, 적어도 자면서 추위를 느끼거나 깊게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는 일은 없었다.
지금 내가 멀쩡히 학교에 다닐 수 있는 데엔 에르네스트의 연주가 중대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번에도 난 거부하지 못했다.
“알았어요. 대신 레슨 시간에 늦으면 안 돼요.”
“언제 늦은 적 있어?”
난 일어나서 에르네스트와 함께 반에서 나왔다.
에르네스트는 어깨에 가방을 걸쳐 멘 채로 걸으며 말했다.
“이번엔 만만찮을 거야, 타티아나. 내가 어제 밤새 고심해서 골랐거든.”
“밤새요?”
“그래. 음반만 한 서른 장은 들은 것 같아.”
도대체 무슨 곡을 골랐기에?
난 그와 함께 걸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기대감을 느꼈다.
이번엔 무슨 곡인지 모르겠지만 에르네스트는 날 놀라게 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그렇게 복도를 돌아서 가려는데 바로 옆에서 낯익은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날씬한 체구에 안경을 쓴, 니콜라이 선배였다. 막 연습을 하러 가려는지 첼로를 메고 있었다. 난 먼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잘 지내요? 타티아나 후배님.”
첼로를 내려놓은 니콜라이 선배는 사근사근하게 답했다. 선하게 생긴 눈매가 살풋 웃는다.
“연습 가시는 건가요?”
“예, 레슨 전에 잠깐 하려고 해요.”
“그것도 좋죠.”
“선배님은요?”
“저도 연습을 하는 날이로군요. 오늘은 합주 연습이 있어서요. 다른 친구들을 기다리고 있죠.”
그렇게 평범하게 안부를 묻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가 이어져서 뭔가 빠진 게 있지 않나 싶을 무렵, 니콜라이 선배가 문득 그 빠진 부분을 꺼냈다.
“타티아나 후배님?”
“예.”
“저번엔…… 막심과 저 때문에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죠? 미안했어요. 사과를 받아 주시겠어요?”
“예?”
난 깜짝 놀랐다.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사과드려야 하는걸요.”
“아뇨, 그땐 솔직히 막심이 심했죠.”
차이코프스키의 트리오를 연주하고 나서 막심 선배가 아쉽다는 투로 이러저런 이야기를 하긴 했지만 난 거기에 마음이 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니콜라이 선배는 그렇게 보지 않은 듯했다.
“제가 대신 혼내 주었으니까 마음 푸세요.”
“풀 것도 없어요, 선배님. 그날은 정말 제가 모두 잘못했던 거예요.”
“그렇게 말씀해 주신다면 고맙군요.”
니콜라이 선배는 특유의 미소를 지어 보이다가 갑자기 물었다.
“지금은 어떤가요?”
“지금……요?”
“예. 최근에 합주를 해 보신 적 있으신가요? 저희와 한 다음에.”
“…….”
에르네스트와 듀엣을 한 적은 있지만, 현악기와 합주를 한 적은 없었다.
“없어요.”
“음.”
내 대답에 니콜라이 선배는 무언가 생각하는 듯 날 바라보다가, 눈을 돌려 옆에 가만히 서 있는 에르네스트를 보았다.
“옆에 계신 후배님도 얼굴이 익네요.”
“에르네스트입니다.”
“혹시 두 분이 사귀는 건가요?”
“……!?”
에르네스트가 옆에서 봐도 다 보일 정도로 깜짝 놀라며 어깨를 움찔거렸고 난 급하게 대답했다.
“그, 그냥 친구일 뿐이에요.”
니콜라이 선배는 훗 하고 웃더니 말한다.
“그럼 친구로서, 에르네스트 후배님은 타티아나 후배님과 연탄이나 피아노 듀엣을 해 본 적이 있으신가요? 최근에요.”
“……있죠.”
“어떤가요?”
“뭘 묻는지 모르겠는데요.”
에르네스트는 살짝 삐딱하게 대꾸했다. 기본적으로 그는 그리 친절한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니콜라이 선배는 삐딱한 후배를 보고도 대수롭지 않은 듯 계속해서 이어 물었다.
“아무렇지도 않았어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요.”
“음…….”
그냥 괜찮았다고 해도 별로였다고 해도 상관없을 텐데, 에르네스트는 대답을 회피했다.
왜 그가 이렇게까지 비협조적으로 나오는진 모르겠다.
니콜라이 선배가 말했다.
“어쨌든 좋아요, 타티아나 후배님. 저와 막심에게 악감정이 없다면 다시 한 번 합을 맞춰 보고 싶어요. 그래서 물어본 거예요.”
“다시 한 번요?”
“예. 전 사실 그날 했던 합주가 정말 마음에 들었거든요.”
그날도 니콜라이 선배는 합주가 좋았다고 칭찬했었다.
뒤이어 내 폐부를 찌르는 듯한 질문을 날카롭게 하긴 했지만……. 전반적으로 좋은 인상은 지금까지 계속 가지고 있는 듯하다.
선배는 편하게 생각하라는 듯 말했다.
“다시 합쳐 보는 것도 좋고……. 피아노과라면 아마 합주 과제도 곧 있을 텐데, 그럴 때 저희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불러도 좋아요. 부담 없이요.”
“아……. 감사합니다.”
언젠가 막심 선배와 다시 만나 일단락을 짓기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피아노과 커리큘럼에 합주 과제가 있다면 난 다시 이 선배들과 해 보고 싶었다.
다른 연주자를 구할 수도 있겠지만, 난 막심 선배 같은 바이올리니스트가 그리 흔할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에르네스트가 의아함을 표했다.
“선배, 그 합주 과제는 우리가 임의로 정할 수 있는 게 아닌 걸로 아는데요. 같은 학년에서 임의로 엮지 않아요?”
“예. 그렇죠.”
“그런데 뭘 도와주시겠다는 건데요?”
“그 전에 합주에 대한 연습을 하는 건 도울 수 있겠죠?”
합주 과제라는 게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라서 그냥 선배들과 해도 되는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은 듯했다.
에르네스트의 말대로라면 난 8학년 현악기 연주자들과 함께 합을 맞춰야 했다.
선배들은 그 전에 내 연습을 도와주겠단 것이고. 왜?
니콜라이 선배가 설명했다.
“타티아나는 합주가 서툰 것 같으니까요.”
“……마음에 든다고 하지 않았어요?”
“마음에 들고 잘하지만, 서툴죠.”
에르네스트가 다시 꼬집었지만, 니콜라이 선배는 유연하게 피해 나가서는 날 찔렀다.
“그렇지 않나요? 타티아나.”
“…….”
정확했다. 난 말없이 긍정했고, 니콜라이 선배는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다 안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르네스트만이 약간 불퉁하게 말했다.
“전 선배가 아까부터 무슨 말을 하는지 조금 이해가 안 가네요. 뭐 어차피 타티아나가 결정할 일이겠지만.”
“그렇죠. 에르네스트 후배님에겐 결정권이 없어요. 연인관계도 아니시잖아요?”
“……나 참.”
에르네스트가 어이가 없다는 듯 혀를 찼다. 나 역시 그건 조금 당황스럽다.
다른 말이 나오기 전에 내가 먼저 말했다.
“연습을 같이 도와주시겠단 건 생각해 볼게요.”
“생각해 주는 걸로 충분해요. 번호 교환하시겠어요? 연락은 되어야 할 테니.”
“예…….”
아직 난 선배들과 개인 번호를 교환하지 않은 상태였다. 이제야 니콜라이 선배와 막 번호를 교환하려는데,
“……?”
“받아요. 타이밍 좋네.”
막 스마트폰을 꺼내들기가 무섭게 벨이 울렸다. 빅토르였다. 난 두 사람에게 양해를 구하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빅토르?”
- 아가씨, 점심시간이신 것 같아 전화드렸습니다. 통화 되십니까?
“예. 괜찮아요. 무슨 일이에요?”
빅토르는 사무적인 어투로 말을 이었다.
- 제 공용 번호로 전화가 왔습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챔버 오케스트라의 콘서트 에이전시인데, 특별상 수상자인 아가씨에게 협연 권리를 언제 행사하겠느냐는 문의전화였습니다. 아가씨의 의사가 확정되어야 기획을 할 수 있다고 하더군요.
“상트페테르부르크 챔버 오케스트라요?”
- 예.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얻어 냈던 권리였다. 열다섯 살 피아노 연주자에겐 귀한 기회다.
특히 내겐 더더욱 그렇다.
“전화…… 나중에 제가 직접 드려도 되겠죠?”
- 예. 전화번호는 제가 가지고 있으니 결정하고 말씀해 주십시오.
“알겠어요. 고마워요, 빅토르.”
- 방과 후에 뵙겠습니다.
빅토르가 깍듯이 인사하며 전화를 끊었고, 스마트폰을 내리자 니콜라이 선배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타이밍이 좋네요, 정말로.”
“……그럴 수도 있겠어요.”
그 대답으로 충분했다. 니콜라이 선배는 내 번호를 받아 입력하고는 첼로를 다시 메었다.
“메시지 보내 놓을 테니 필요하면 언제라도 연락하세요, 타티아나 후배님. 기다릴게요.”
“예.”
니콜라이 선배가 복도 저편으로 사라지고,
“뭐가 서툴다는 거야? 네가.”
에르네스트는 어쩐지 약간 짜증이 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