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1화
프로그램 1부가 끝나고 20분간의 인터미션이 주어졌다.
청중들은 자유롭게 화장실에 가거나 휴식을 취하고, 무대는 2부를 준비하며 다음 세팅을 갖추고, 연주자들은 한 숨 돌리고 다음으로 이어질 연주회를 준비할 시간이다.
열기가 가라앉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서 흥분된 웅성거림이 계속되고 있었다.
“이건 말도 안 돼. 미쳤어.”
“선물받아서 왔는데 정말 잘 왔군.”
“무슨 실력이…….”
“솔직히 저는 별 기대 안 하고 왔어요. 하지만 크게 개안하는군요. 중앙음악학교 학생들은 정말 대단하네요.”
젊은 청년들은 물론이고 노년의 부부들까지 모두들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소감들을 나누었다. 대부분이 굉장한 찬사들이다.
“…….”
일리야는 모르는 사람들이 저마다 빠져나가는 것을 조금 지켜보다가, 앉아 있는 가족들을 돌아보았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누구보다 1부의 연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것은 바로 가족들이었다.
“아나스타샤 말이에요, 이전보다 소리가 훨씬 더 아카데믹해진 것 같지 않나요? 그 아이, 요즘도 키 크나요?”
“조금 더 큰 것 같기도 하고, 글쎄요. 잘 모르겠네요……. 고맙습니다. 에르네스트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역시 중앙음악학교 피아노과의 수석이라 할 만하네요.”
“감사해요. 참……. 이런 날도 오네요. 듀엣을 이렇게나 멋지게 연주하다니요.”
“아나스타샤도 철이 조금 든 걸까요.”
“무슨 말씀을. 그 애가 얼마나 어른스럽던데요?”
에르네스트와 아나스타샤의 어머니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같은 악기를 다루는 같은 학교의 학생의 학부모로서 두 어머니는 굉장히 친밀한 관계를 이루고 있었다.
정말 화기애애한 분위기다. 일리야는 다른 쪽도 보았다.
거기엔 피아노 트리오를 구성하는 타티아나와 막심, 니콜라이의 세 부모님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주 만족스럽군요. 제가 막심의 리허설 무대를 한 번 찾아가려다가 그렇게 하지 않고 오늘 처음 듣게 된 보람이 있습니다.”
“저 역시 놀랍더군요. 그리고 유리 알렉세예비치, 따님의 피아노는 정말 강렬했습니다. 저렇게까지 트리오가 균형 잡힌 대비를 이루기가 쉽지가 않은데 어떻게 그리 잘할 수 있는지, 대단하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세 명 모두 최선을 다하는 것이 보여 마음이 놓였소.”
유리는 딸을 칭찬할 때도 근엄함을 잃지 않았다. 일리야는 그 무게감이 정말 남자답다고 생각했다.
일리야는 옆자리에 있는 루슬란을 돌아보았다.
타티아나의 오빠이고 비슷한 또래라서 만나자마자 인사를 하긴 했는데 아버지를 닮았는지 무뚝뚝한 태도라 쉽게 친해지기 힘들었다.
잠시 생각하던 일리야는 흠 하고 목소리를 고르고는 그를 불렀다.
“루슬란.”
“……?”
루슬란은 대답도 않고 고개만 돌려 일리야를 바라보았다. 찬바람이 이는 태도에도 불구하고 일리야는 희망을 놓지 않았다.
동생인 타티아나도 꼿꼿한 태도와 외모만 보면 상당히 차가워 보인다. 하지만 사실은 대책 없이 순진하고 살가운 성격이었다.
적어도 그런 애가 사는 집의 남자들이 무뚝뚝하기만 할 것 같진 않았다. 일리야는 웃으며 말을 걸었다.
같은 피아노를 치는 동생을 가진 오빠들끼리 조금 친해질 수도 있는 것 아니겠는가?
“타티아나 멋지지 않았습니까? 보니까 같이 합주한 바이올린과 첼로는 선배라고 하던데요. 전혀 위화감 같은 건 못 느끼겠더군요.”
“아무렴 그 애가 누구 동생인데요.”
일리야의 칭찬 공세에 얼굴이 조금 풀어진 루슬란이 대답했다. 하지만 곧 자신이 한 말을 깨닫곤 헛기침을 했다. 창피한 듯하다.
루슬란이 다시 답했다.
“흠, 아나스타샤도 대단하더군요. 그…… 음, 좋았습니다.”
“굳이 무언가 수사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도 클래식이라면 문외한이나 다름없으니까요.”
“그렇습니까?”
“동생이 피아노 연주자인데도 말이죠.”
그제야 루슬란은 옅게 웃음을 보였다. 일리야와의 공통점을 자각한 것 같았다.
“공부를 해야겠군요. 창피당하지 않으려면.”
“글쎄요, 아나스타샤는 종종 그러더군요. 공부 같은 것으로 선입견을 지니지 않고 온전한 음악만을 감상할 수 있는 순수한 뇌가 부럽다고 말입니다.”
“그거 욕 아닙니까?”
“듣기에 따라선 그렇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요. 하하하.”
“뭐……. 생각해 보니 타티아나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있긴 합니다. 있는 그대로 들어 달라고 하더군요.”
루슬란과 일리야는 그렇게 편안해진 분위기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두 사람은 공유할 수 있는 것들이 꽤나 있었다.
그렇게 연주와 동생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와중, 에르네스트의 아버지인 스테판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20분 정도 주어진 인터미션 사이 나가서 바람도 쐬고 샴페인도 마시자는 제안이었다.
“인터미션에 샴페인 한 잔씩 하는 것이 또 묘미 아니겠습니까?”
“그렇죠. 저번에 비엔나에선 아예 객석에 가져다주더군요. 음, 이 홀은 그런 서비스는 없나 봅니다.”
“자선 연주회 아닙니까? 하하하.”
이러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객석 안내인인 어셔usher가 다가와서 말했다.
“샴페인 리셉션을 찾으십니까?”
“그렇소만? 라운지로 가면 됩니까?”
“아닙니다. 라운지가 아닌 연회장으로 가시면 vip 리셉션 케이터링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모쪼록 이용해 주시지요.”
“오호, 그렇습니까?”
스테판은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라는 듯 반겼다.
어셔는 vip좌석에 앉은 사람들을 vip용 서비스가 준비되어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그렇게 열두 명의 학부형들은 돔 무지키의 연회장으로 향했다.
일리야는 이전에 다른 공연을 보러 돔 무지키에 와 본 적이 있긴 하지만 연회장은 처음이었다.
연회장은 거의 홀만큼이나 크고 화려했다. 고풍스러운 테이블들과 샹들리에가 반짝이며 빛난다.
그 한편에, 중앙음악학교 자선 연주회라는 안내판이 보였다. 이미 몇몇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스테판을 필두로 모두가 그쪽으로 향했다.
예쁘게 차려진 테이블에 꽃들이 데커레이션되어 있었고 크레페, 브라우니, 초콜릿과 같은 핑거푸드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샴페인용 잔도 수십 개나 가지런히 놓여 있고, 샴페인과 와인 등을 서비스하는 중이었다.
원래는 사야 하는 것들인데 vip 전용 리셉션은 무료로 제공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그대로 마셔도 되고, 들고 나가 야외 테라스로 나가서 마셔도 된다.
“어머나, 이 카나페 좀 보세요. 상당히 신경 썼는걸요?”
“음……. 난 주스나 마셔야겠군.”
“전 샴페인 한 잔 주시죠.”
그렇게 저마다 음료와 핑거푸드를 받아 갔다. 일리야도 준다는 걸 마다할 생각은 없었기에 샴페인을 한 잔 받았다.
한 모금 마셨더니 새콤한 향이 입안에 퍼지며 갈증을 달래 준다.
일리야는 이런 것도 참 멋진 문화라 생각했다.
다만 이렇게 제공되는 서비스의 가격 역시 티켓값에 들어가 있을 텐데, 그럼 자선 연주회의 의미가 조금 퇴색되는 것이 아닌지 생각했다.
샴페인을 홀짝이며 이걸 다 마시면 화장실에나 갔다 올까 생각하고 있는데, 일리야는 한편에 놓인 상자를 발견했다. 모금함이었다.
일리야가 그쪽을 바라보니 직원이 설명했다.
“본 자선 연주회에 전달되는 모금함입니다.”
역시 그냥 무료로 제공되는 건 아니었구먼? 일리야는 이것도 괜찮은 방법이라 생각했다.
라운지에도 이런 샴페인 등은 팔고 있다.
하지만 조금 특별하게, vip 티켓을 구매한 사람들에겐 무료로 제공하되 자발적으로 기부를 할 수 있는 모금함을 놓은 것이다.
일부는 이렇게 제공되는 디저트와 리퀴드에 쓰이고 나머지는 기부되는 시스템인 것 같았다.
이 샴페인의 가격으로 얼마를 넣으면 좋을까 고민하고 있는데, 직원이 재차 말했다.
“꼭 이곳에서 제공하는 것들에 대한 것만 생각하지 않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무슨 말이죠?”
직원이 방긋 웃는다.
“중앙음악학교의 연주자들이 자선 연주회를 통해 어려운 이들을 돕고자 하는 일에 티켓값 이상으로 도움을 주실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연주회에도 앙코르가 있듯 말이죠?”
“하하, 물론 자유롭게 하실 문제이지만, 연주회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도 1부가 마음에 드셨다면 주저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당당하게 직원이 말했고, 일리야는 왜 이렇게 당당한지 이해했다.
다섯 명의 학생들이 보여 준 연주는 정말 티켓값 이상의 돈을 주어도 안 아까울 정도로 좋은 연주였기 때문이었다.
잘 모르는 일리야도 그 정도는 느낄 수 있었다.
“연주회가 마음에 든 만큼 기부하면 되는 것이오?”
“……!”
갑자기 일리야 옆으로 커다란 그림자가 다가왔다. 일리야는 흠칫 놀라며 옆을 올려다보았다.
타티아나의 아버지, 유리가 서 있었다.
일리야의 앞에선 여유로운 미소를 잃지 않았던 직원이 유리를 두고는 조금 당황하고 있었다.
“그……렇죠? 아, 물론 강요하는 건 아닙니다. 절대 아니죠.”
“강요?”
유리가 되물었고 직원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감히 누가 이 남자에게 무언가를 강요할 수 있단 말인가?
일리야는 물론 이 기부금을 받는 시스템을 이해했지만, 유리가 어떻게 생각할지는 몰랐다. 마음에 안 들어 한다면 어쩔 수 없다.
이 무서운 아저씨가 어떻게 반응할지 걱정 반 기대 반으로 지켜보고 있는데,
“…….”
유리는 말없이 품에서 지갑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말 그대로 손에 잡히는 모든 지폐를 꺼내서 모금함 안에 넣었다. 직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유리는 지갑에서 수표를 한 장 빼 들었다.
그리고 만년필을 꺼내어 잠시 고민하다가, 옆에 멀거니 서 있는 일리야를 바라보았다.
“일리야.”
“예, 예!”
“내가 천만 루블을 적으면 과한가?”
일리야는 황당했다. 아저씨, 이 연주회의 티켓값을 다 합쳐도 천만의 절반도 안 될 건데요?
과하다 수준이 아니라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일리야는 간신히 정신을 가다듬고 대답했다.
“과……하지 않을까요?”
“아닐세.”
유리는 딱 잘라 말하고는 만년필로 수표에 숫자를 휘갈겨 썼다.
사인까지 마친 후, 유리가 모금함에 수표를 넣었다.
일리야는 그만 쥐고 있던 샴페인 잔을 떨어뜨릴 뻔했다. 수표에 얼마가 적혔는지 보진 못했지만, 천만 루블이 적혔다는 확신이 들었다.
아니, 마음대로 넣으실 거면 왜 물어보셨대?
그보다 타티아나, 잠깐 나와서 좀 봐봐. 네 아버지가 지금 모금함에 고급 스포츠카를 한 대 넣으셨다고.
하지만 혼란한 생각은 생각으로 맴돌 뿐, 일리야는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을 뻐끔거렸다.
유리는 다시 지갑과 만년필을 품에 집어넣고는, 서서 모금함을 지키고 있는 직원에게 말했다.
“잘 전달해 주었으면 좋겠소.”
“……예! 그…… 걱정 마십시오!”
직원이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을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유리는 이렇다 저렇다 더 말도 없이, 태연하게 왔던 그대로 다시 물러가서 샴페인을 들고 사람들 사이에 섰다.
“…….”
일련의 과정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이 광경을 지켜본 것은 직원과 일리야 둘뿐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방금 지나간 게 대체 뭐였는지 눈으로 의사를 나누는 중이었다.
결국 일리야가 먼저 말했다.
“그…… 저도 할게요. 천 루블 정도면 괜찮죠?”
“물론입니다. 감사합니다.”
일리야는 적당해 보이는 금액을 말했고 직원 역시 갑자기 확 돌아온 현실적인 액수에 정신을 차린 듯했다.
두 사람은 방금 봤던 것을 못 본 것으로 하기로 했다.
“……”
일리야는 천 루블을 모금함 안에 넣고 연회장 한편에 가서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태연하려 했지만 자꾸만 타티아나의 아버지인 유리에게 시선이 갔다.
일리야는 일부러 그쪽을 보지 않으려 연회장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음, 난 아무것도 몰라. 그냥 천 루블을 넣었을 뿐이야.
그렇게 샴페인을 마시고 있자니 연회장 문이 열리며 또 다른 사람들이 들어왔다.
막 들어온 사람들은 찾고 있는 사람이 있는지 주위를 살피더니 말했다.
“아, 저기 계시는군. 유리 알렉세예비치.”
아저씨 아시는 분인가?
그런데 어쩐지 일리야는 방금 들어온 남자들이 어디선가 본 것 같다는 기분을 느꼈다.
***
스테이지 매니저가 다시 무대 세팅을 피아노 트리오를 위한 세팅으로 마치고는 내게 돌아와 알렸다.
“정말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무대를 관리하는 직원인 스테이지 매니저는 무대 위에 모습을 드러내야 한다는 이유로 슈트를 입고 있었다.
그가 말했다.
“인터미션에야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인걸요. 음, 1부 중간에 세팅을 바꾸는 프로그램을 하시겠다고 전달받았을 땐 조금 당황했지만.”
“죄송해요.”
“아닙니다. 해 보니까 괜찮았고, 관객들 반응도 엄청나게 좋지 않았습니까? 피아노 트리오와 피아노 듀엣이 그렇게까지 뚜렷하게 대비되는 구성은 제가 여기서 5년간 일하면서 처음 봤습니다. 대단한 프로그램이었다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보통이라면 1부는 피아노 트리오로 2곡을 연달아 하고, 인터미션 이후에 피아노 두 대를 놓고 2부를 피아노 듀엣을 하는 것이 편했다.
우리가 1부 도중에 무대를 옮긴 것은 고집에 가까웠다. 하지만 스테이지 매니저는 아랑곳하지 않고 웃으며 우리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고마운 사람이다.
그가 사람 좋게 웃으며 말했다.
“다음 무대는 완벽히 준비해 뒀으니 부디 좋은 무대 보여 주시길 바랍니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스테이지 매니저님.”
“하하.”
그는 손을 흔들며 사라졌고, 옆으로 막심 선배가 다가왔다.
“다 됐대?”
“예.”
“이제 마지막 곡이구나. 앙코르는 뭐……. 너희가 하고.”
“막심 선배님이 하셔야지요?”
“사람들이 바라는 대로 해야겠지.”
앙코르 곡도 몇 곡 생각하고 있긴 한데, 모르겠다.
막심 선배도 당장 우리 프로그램도 안 끝났는데 앙코르를 생각하는 건 우습다고 생각하는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어쨌든, 최선을 다해 보자고.”
“물론이지요.”
“아, 맞다. 그거 알아? 밖에 기부함 설치되어 있는 거.”
막심 선배는 뜬금없이 그런 이야기를 꺼냈다.
난 처음 듣는 소리였다. 기부함? 자선 연주회니까 기부함이 있는 것도 이상하진 않지만…….
“그런가요?”
“응. 그래서 우리가 잘하는 만큼 기부금 액수로 나타날 거야. 어때 의욕이 조금 생기지?”
“어……. 음. 그런가요?”
약간 상황 파악을 못 해서 어물거리며 대답하자 막심 선배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상대를 잘못 잡고 이야기했네.”
“그, 그렇지 않아요? 이 연주회는 자선 연주회고…… 그만큼 중요한 이야기니까요.”
“그래, 그래.”
막심 선배는 대충 대답했다.
너무한 태도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