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2화
빈틈없이 짜인 연주회 프로그램 중간에 낀 휴식시간인 인터미션에 청중들은 샴페인도 마시곤 하지만, 연주자인 우리가 샴페인을 마실 순 없었다.
사실 무대를 더욱 완벽하게 만드는 데에 도움이 된다면 긴장 완화의 목적으로 담배를 피우건, 술을 마시건, 베타 차단제를 복용하건 상관없는 일이긴 하다.
아무 부작용이 없다면 말이다.
문제는 연주를 앞두고 그렇게 섭취하게 되는 것들이 반드시 좋은 효과만 보이진 않는다는 것이었다.
긴장을 풀기 위해 먹었던 것들은 정말 긴장을 풀어 주기도 하지만 반대로 사람을 흥분시켜서 평소 할 수 있던 음악들을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게 만들어 놓기도 한다.
그렇게 무대를 망치는 연주자들도 정말 많았다.
특히 나는 그런 부작용에 극도로 취약한 사람이다.
“디카페인 허브티라도 구해 놓을 걸 그랬네.”
“괜찮아요.”
“그래도 말이야.”
휴식을 취하면서 커피를 마시던 두 선배들은 내가 멀거니 앉아 있자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별로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되는데.
난 실없이 웃으며 물었다.
“선배들은 괜찮으신 거죠?”
“난 이거 없으면 바이올린 못 켤지도 몰라.”
“음……. 전 커피 정도는 괜찮은 것 같아요. 적당히 집중도 되는 것 같고.”
평범한 반응이다.
커피와 담배, 술은 음악가에게 있어서 악기만큼이나 자주 접하게 되는 기호품들이었고, 나도 그것에 완벽히 동의하고 있었다.
다만 내게 있어선 해당 사항이 없을 뿐이다.
앞으로도 이럴 것이라 생각하니 약간 아쉬웠지만, 그뿐이었다. 체질을 어떻게 할 순 없는 것이다.
“…….”
어쨌든 선배들이 하는 생각의 흐름도 비슷비슷했다.
커피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연주자로서 텐션을 컨트롤하는 이야기로 넘어가고, 곧 효과가 있는 기호품의 이야기로 넘어갔다.
막심 선배는 이제 성년을 앞둔 사람답게 무서운 소리를 했다.
“음……. 난 나중에 술 마시고 무대에 한번 올라 보고 싶은데. 재미있을 것 같기도 하고 말이야.”
“프리한 연주회라면 그래도 되겠지. 하지만 클래식 연주회에서 그랬다간 재즈를 배워야 할걸.”
“재즈? 하, 니콜라이. 너 내가 작년까지만 해도…….”
말을 하던 막심 선배가 날 돌아보았다. 난 싱긋 웃어 보였다. 이제 와서 뭘 숨기시나요? 교내에 하나뿐인 밴드부 부장이었다는 건 이미 다 아는데.
학기말 파티에서 무대에 올라 유로비트를 불러 젖히던 밴드가 생각났다.
한때 그 밴드부에 속해 있었을 막심 선배가 록이나 메탈은 물론이고 그 외에 얼마나 많은 장르들을 소화해 냈을지 난 상상도 안 간다.
언젠가 막심 선배가 바이올린으로 클래식 말고 다른 걸 연주하는 것도 보고 싶다.
약간 기대감 어린 내 눈빛을 느꼈는지 막심 선배가 우물거렸다.
“이젠 안 한다고……. 난 돌고 돈 결과 클래식으로 돌아왔으니까.”
“돌아온 탕자야?”
니콜라이 선배는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런 사람이 음주 무대 이야기를 하는 거야?”
“그건 그거고. 야, 19세기엔 안 그랬는 줄 알아? 음악회에서 신사숙녀들 모여 앉아서 술 마시고 담배 피우고, 그땐 그게 교양이었어, 교양.”
“타임머신 타고 돌아가고 싶다는 것 같네?”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클래식은 그 시절의 팝이었잖아. 그때처럼 열광적인 인기를 되살리려면 아무래도 조금 더 격식 없이 편해질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거지. 이 또한 하나의 기호품이라면 말이지.”
기호품에 대한 이야기가 살짝 변화하며 클래식이라는 장르에 대한 근본적인 이야기로 바뀌었다.
클래식도 인간이 향유할 수 있는 하나의 기호품이다. 막심 선배의 말도 틀리진 않았다. 현실적인 이야기였다.
하지만 난 사실 근래 생기는 혁신적인 물결에 있어선 약간 의문을 표하는 쪽이었다.
지키는 것도, 발전시키는 것도 어렵지만, 우리가 지금까지 클래식을 누릴 수 있는 건, 그 특정 시대 음악의 가치를 지키자고 하는 의지가 더 강했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그 가치는 즐거움을 찾고 누리길 바라는 인간의 욕망 그보다 더 깊은 곳에 잠재되어 있으리라 믿는다. 사람들이 지켜 내고 싶어 할 정도로.
잠시 이러저런 생각을 해 본 나는 막심 선배에게 조심스레 내 의견을 말했다.
“그것도 그렇지만, 이미 클래식이라는 이름이 붙어버렸고, 현대 클래식에 대중적인 인기는 없지요.”
막심 선배가 날 돌아보았다. 우린 가끔 의견이 안 맞아서 언쟁을 벌이기도 하지만 이렇게 음악에 대한 진지한 이야기들은 거침없이 하는 편이었다.
“사실 이제 와서 200년이나 된 음악들을 다시 유행시킬 수는 없을 거예요. 다만…… 근본적인 감동이라는 건 퇴색되지 않고 이어져 오니까요. 저희 같은 연주자들이 지켜야 하는 건 그 음악 자체에 대한 감동과 존중이라고 생각해요.”
이제 내가 할 말은 다 했으니 반론이 있을 차례다. 가만히 기다리는데,
“꿈이 작네, 타티아나.”
“예?”
막심 선배는 히죽 웃을 뿐이었다.
혁신적인 주장을 한 선배이니만큼 보다 공격적인 반론이 나오리라 생각했는데, 선배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클래식 음악 자체에 감동이 존재한다면 왜 다시 못 유행시키겠어? 난 할 수 있다고 봐. 다른 무언가가 아닌 클래식 음악이 지닌 감동은 그 정도 힘이 있으니까.”
“……!”
난 기본적으로 오해하고 있었다.
막심 선배는 과격한 개혁파 같은 것이 아니었다.
막심 선배는 나처럼 클래식 외골수가 아닌 다른 음악 장르들도 여러 접해 보았다.
그리고 진지하게 클래식 음악만의 강점을 따져 보고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세계에 다시금 유행시킬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막심 선배가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말했다.
“사람들의 마음에 파고드는 건 정말 어렵지. 그래서 우린 미친 사람처럼 죽도록 연습하고. 또 옥석만 남기기 위해 서로 경쟁해서 깨져 나가기도 하는 거잖아.”
“…….”
“아직은 깨지는 도중이지만, 그렇게 세상 어디서든 악기 하나만 있으면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는 힘을 얻게 되어서도 거기서 그칠 거야?”
그런 힘을 얻고 나서 생각해도 늦지 않냐는 말을 할 순 없었다. 막심 선배의 강인함이 너무나 눈부셨기 때문이었다.
먹먹한 감동마저 느껴진다.
난 클래식 음악에 내 전부를 바쳤고, 이 음악 없이는 나도 없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클래식 음악이 말 그대로 인간의 영혼에 통하는 음악이라고 믿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믿으면서도 현실적으로 전 세계 사람들에게 클래식을 유행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진 않았다.
이미 시장의 규모와 통계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음악으로 날 증명하고, 내 무대를 보러 온 청중들을 충분히 만족시키는 것 정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심 선배의 포부는 나와는 차원을 달리할 정도로 크고 넓었다.
“해 보자고, 타티아나. 또 알아? 한 200년쯤 지나선 21세기에 다시 화려하게 부활한 클래식 음악의 연주자들로 우리들이 언급될지.”
그리고 막심 선배는 나뿐만이 아니라 니콜라이 선배, 에르네스트, 아나스타샤를 차례로 바라보았다.
마치 이 모두가 이름을 남길 수 있으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사람처럼.
모두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중엔 나처럼 의심을 품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아나스타샤 같은 경우엔 조금 식은 눈으로 막심 선배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달랐다.
경쟁심으로 불타는 눈빛으로 막심 선배를 바라보고 있었다.
난 알고 있다. 에르네스트는 러시안 피아니즘의 선두주자가 되고 싶어 한다.
다시 전 세계에 클래식을 유행시키고 싶다는 선배의 말에 자극받은 것 같다.
“하……. 아하하, 하하하핫.”
난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 자신감들, 정말 부러웠다. 난 모두가 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에르네스트도, 막심 선배도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으리라.
그건 정말 보고 싶었다.
“멋져요……. 정말 멋지네요.”
눈가가 시큰해서 손을 대 봤더니 물기가 맺혀 나왔다. 상상만 해도 이렇게나 행복해진다. 웃음이 멎질 않는다.
“저도 그런 세상이 오길…… 바라요. 정말로.”
“누구나 그럴 거야.”
“아하하.”
한참이나 그렇게 웃다가,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좋아. 정말 좋은 이야기를 들었다.
난 환하게 웃으며 막심 선배에게 말했다.
“일단 말이에요. 그렇다면 저희를 찾아 주신 클래식 애호가 여러분들을 충분히 만족시켜 드려야겠죠?”
“자신 있지?”
난 늘 자신에 차 있는 경우가 드물었지만, 지금만큼은 활기차게 답했다.
“물론이죠.”
대답을 하기가 무섭게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 중앙음악학교 자선 연주회 2부 시작까지 4분 남았습니다. 인터미션 이후엔 입장하실 수 없으므로 미리 입장 부탁드리겠습니다. 다시 한 번 알려 드립니다. 자선 연주회 2부 시작까지 4분 남았습니다.
인터미션 사이 휴식과 웃음으로 조금 느슨해진 연주자 대기실 안의 분위기는 크게 바뀌진 않았지만, 모두들 조금씩 긴장감을 되새겼다.
선배들은 마시다 만 커피를 다 마셨고, 초콜릿도 몇 개 집어 먹었다.
대신 난 다른 방법으로 무대에 오를 준비를 한다.
“…….”
앉은 자세 그대로 목과 허리에 신경을 집중했다.
약간 느긋하게 흐트러졌던 자세가 다시 펴지면서 쓸데없는 긴장이 사라지고 적당한 긴장이 깃들었다.
자세를 바로 하고 연주자로서의 태도를 되찾는 데에 크게 오버스러운 동작은 필요 없었다. 과한 스트레칭은 몸을 상하게 할 뿐이다.
난 살짝 어깨를 돌려 가슴을 펴고, 양손을 편안하게 스트레칭했다. 팔도, 손목에도 통증이나 떨림은 없다. 컨디션은 좋았다.
거대한 피아노를 통제하기 위해선 우선 그것을 다루는 몸을 올바르게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몸 전체를 자각해 나가고, 온몸을 새끼손가락 끝까지 온전히 의지 아래에 둘 수 있음을 확인한다.
턱을 당기고, 숨을 내쉰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기까지 단 몇 초.
난 자리에서 일어섰다. 기분 좋은 고양감이 온몸을 감쌌다.
내 준비가 완료되었다는 것을 가장 먼저 알아차린 것은 아나스타샤였다. 그녀가 다시 내게 다가왔다.
“보고 있을게.”
“예, 아나스타샤.”
옆에 서 있던 에르네스트도 말했다.
“보여 주고 와.”
“고마워요.”
두 사람은 더 이상 불필요한 말은 하지 않았다.
막심 선배가 바이올린을 들고 앞장섰다.
“가자, 타티아나.”
그 모습은 마치, 음악으로 세계를 정복하러 가는 사람처럼 보였다.
***
객석에 착석하고 휴대전화를 꺼 달라는 안내 방송이 이어지고, 청중들은 모두 돌아와 홀을 채웠다.
사회를 맡은 미하일은 객석이 차는 것을 지켜보다가, 문득 연주자 대기실 쪽을 바라보았다. 문은 이미 열려 있었고, 다음 무대에 설 세 명의 연주자들은 마치 장전된 총의 탄환처럼 대기실 문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타티아나, 막심, 니콜라이.
미하일은 천천히 세 사람을 살폈다. 세 사람 모두 나이에 걸맞지 않다고 느껴질 정도로 굉장한 실력을 지닌 학생들이었다. 문제가 생긴다면 아마 멘탈적인 부분에서 생기게 될 것이다.
연주자는 감기나 부상 같은 신체적인 문제가 아닌 정신적인 문제에도 굉장히 많은 영향을 받는다. 때문에 미하일은 세 사람의 표정을 주의 깊게 보았다.
“…….”
모두 아무 문제없어 보였다. 너무 자만하거나 풀어져 있지도 않고, 무대에서 실수 없이 가진 바 전부를 끌어내야 하는 연주자로서의 적절한 긴장감이 서려 있다.
미하일은 저 정도의 멘탈적 강함을 갖추려면 얼마나 많은 경험을 필요로 해야 하는지 잘 안다. 특히 막심이나 니콜라이라면 몰라도 타티아나는 이 연주회가 첫 연주회다.
열다섯 살이 갖추기엔 정말이지 노련한 태도다. 문득 웃음이 나왔다.
처음 데리고 올 생각을 했을 때부터 그랬다. 타티아나는 기억상실이라는 치명적인 일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집 응접실을 하나의 무대로 삼아 연주회를 하고 있었다. 공식적인 연주회가 처음일 뿐이지 사실 타티아나는 정말 무대에 익숙했다.
눈이 마주친 타티아나가 방긋 웃었다.
기분 탓일까. 어쩐지 평소보다 더 즐거워하는 것 같다.
미하일은 선생으로서 약간 남아 있던 걱정이 모조리 증발하고, 기대가 샘솟는 것을 느꼈다.
세 사람이 1부에서 보여 주었던 브람스의 피아노 트리오 3번은 수십 번의 리허설과 레슨 중에서도 가장 완벽했다. 세 천재는 선험적으로 무대에서 자신의 실력을 어떻게 발휘해야 하는지 깨닫고, 유감없이 뽑아낼 줄 알았다.
“…….”
미하일은 굳이 가서 무언가 격려를 해 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 학교 선생이 해야 할 일은 없다. 미하일은 다만 사회로서 해야 할 일을 깨달았다.
500명의 청중이 보다 몰입할 수 있도록, 인터미션간에 풀어진 긴장과 기대를 다시금 무대로 집중시키는 일. 그것이 해야 할 일이었다.
“준비하십시오.”
무대 옆에 있던 스테이지 매니저가 말했다. 미하일은 고개를 끄덕였고, 잠시 후 신호가 떨어졌다.
미하일은 단상에 올라 마이크를 잡고 차분히 말했다.
“인터미션을 마치고 음악회 2부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신사숙녀 여러분, 어셔 분들의 안내에 따라 자리에 착석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막이 오르고, 중앙음악학교 자선 음악회 2부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