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217화 (217/1,277)

##  217화

연회는 점점 무르익어 갔다.

집에서 즐기는 홈파티보다는 거의 전문 연회장 수준의 장소와 대접이었지만, 이러한 분위기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여기에 없었다. 곳곳에서 대화와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나스타샤는 잔을 내려놓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잔잔한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식사를 마친 사람들은 모여서 다과와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거나, 본격적으로 술을 마시기도 했다.

술자리가 벌어진 테이블을 힐긋 보니 아버지들은 물론이고 그 자리에 낀 일리야와 루슬란은 거의 의기투합해서 술잔을 나누고 있었다. 저 둘이 저렇게 친해질 줄은 미처 몰랐다.

두 오빠가 부어라 마셔라 하는 것을 보며 아나스타샤는 타티아나를 바라보았다. 술은커녕 커피도 못 마시는 타티아나는 찻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녀가 웃었다.

“일리야 있죠, 저희 오빠랑 친해진 것 같네요.”

“응. 그러게. 희한한 조합이긴 하네.”

“희한? 왜요?”

타티아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나스타샤를 바라본다. 뭐가 이상한지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아나스타샤는 척 봐도 양아치인 일리야와 척 봐도 귀공자인 루슬란이 저렇게 어울리는 게 신기하지 않느냐고 되물어보려다가, 그만두었다.

타티아나는 오늘따라 유난히 긴장을 풀어놓고 행복해하고 있었다. 괜히 오빠 흉을 볼 마음이 들지 않았다.

아나스타샤가 경쾌하게 말했다.

“아니야. 희한할 것도 없지. 저 둘이 친해지면 좋잖아? 우리가 친구인 것처럼 말이야.”

“그래요. 그래요.”

“너 오늘 진짜 기분 좋아 보인다?”

“아하하하, 오늘은 기뻐해도 좋은 날이잖아요? 안 그런가요?”

찻잔을 내려놓으며 타티아나가 웃음을 터뜨렸다. 한창 시끌시끌한 연회장을 바라보는 눈빛엔 애정이 가득했다.

“여러분과 무대에 오를 수도 있었고, 이렇게 가족분들을 모셔와 식사를 할 수도 있고, 너무 행복해요. 이게 제 현실이고 제가 여기에 있다는 것이…….”

기분 좋게 미소를 짓던 입술이 멈칫하다가, 다시 움직였다.

“아뇨, 다른 건 잘 모르겠어요. 그냥 오늘만, 생각하지 않을래요. 괜찮겠죠? 아나스타샤.”

타티아나는 밝게 웃으며 찻잔 끄트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유난히 밝다고만 생각했던 웃는 얼굴 너머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것을 느꼈다.

아나스타샤는 순간 그녀를 껴안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대체 왜 행복하다고 말하는 지금 이 순간에도 불안해하는거야, 타티아나. 무엇 때문에?

테이블에 앉아 있던 에르네스트는 가만히 지켜보다가 입을 열었다.

“타티아나.”

“예?”

“디저트 조금 더 받아 올까.”

에르네스트는 테이블 위의 빈 접시를 가리키며 말했다. 타티아나는 묘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곧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푸딩 갖다줘.”

“이때다 싶어 부려먹는 거야?”

“아, 콜라도.”

“푸딩, 콜라. 돌겠네 진짜. 제발 네 혀를 소중히 여겨.”

아나스타샤의 주문에 에르네스트는 한숨을 푹 내쉬었고 타티아나는 결국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에르네스트가 디저트를 더 가져왔고, 세 사람은 탱글탱글한 푸딩과 달달한 터키쉬 딜라이트를 먹으며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타티아나는 지금은 아직 기본적인 요리를 배우고 있지만, 실력이 늘어서 이러한 디저트를 만드는 방법도 배우게 되면 아나스타샤는 물론이고 에르네스트와 다른 모두에게 만들어서 나누어 주겠다고 말했다.

스스로 먹는 건 지금도 그리 즐기는 것 같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에게 해 주는 건 참 좋아하는 성격이다.

한창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자, 연회장 내에 잔잔히 흐르던 음악이 몇 번 바뀌더니 왈츠로 바뀌었다. 음악에 민감한 모두가 눈치챘다.

춤곡이 흐르자 분위기가 조금 흥겨워졌고, 잠시 후 분위기를 타고 연회장 가운데로 나와 왈츠를 추는 부모님들이 있었다. 우아한 음악에 맞추어 황홀한 춤사위가 연회장을 누볐다. 어둡고 시끄러운 파티장과는 달리 밝고 고전적인 파티장의 모습이다.

그 모습을, 이야기를 나누던 세 명 역시 지켜보고 있었다. 딱히 누군가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아도 분위기를 알아차렸다.

테이블 한가운데로 눈빛들이 마주치고, 누군가 먼저 말을 꺼내려는 찰나.

“타티아나 후배님. 우리 춤출까요.”

“……?”

타티아나가 고개를 드니 어느새 옆에 다가온 니콜라이가 손을 내밀고 있었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

에르네스트가 그 끝을 절묘하게 낚아챘다.

“그것도 좋겠네. 타티아나, 나랑 추자.”

니콜라이는 당돌한 후배에게 화를 내거나 인상 한 번 쓰지 않고 담담히 말했다.

“미안하지만 에르네스트 후배님. 제가 먼저 제안했는걸요.”

“그게 무슨 상관인데요?”

“그리고 에르네스트 후배님은 아나스타샤 후배님이 있으시잖아요? 두 커플로 같이 추면 되겠네요.”

“뭐라고요?”

에르네스트가 기가 막히다는 듯 되물었다.

아나스타샤 역시 조금 충격을 받았다. 선배가 보기엔 그렇게 보였단 말인가? 에르네스트와 보다 가까운 사이라고?

어이가 없어 뭐라 할 말도 안 떠올랐지만, 그래도 어처구니없는 오해에 대해 말은 해야 했다. 아나스타샤는 일단 니콜라이를 불렀다.

“선배 잠깐…….”

“니콜라이 선배님.”

얌전히 돌아가는 상황을 보던 타티아나가 불쑥 입을 열었다.

잠시 모두가 조용해졌고, 타티아나가 미안하다는 듯 옅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죄송해요.”

“음.”

명백한 거부에 니콜라이도 약간 당혹스러워했다. 하지만 곧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대답했다.

“그래요. 저보단 에르네스트가 편할 수도 있겠죠. 이해합…….”

“아뇨, 그게 아니에요. 저 왈츠를 출 줄 몰라요.”

“……그래요?”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는지 니콜라이가 황당해했다.

에르네스트 역시 할 말을 잃었는지 멍하니 타티아나를 바라보았다. 사교를 위한 춤 정도는 당연히 배웠을 것 같은 타티아나가 그중 가장 기본적인 왈츠도 못 춘다고 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아나스타샤만이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언젠가 빈 연습실에서 타티아나에게 왈츠를 가르쳐 준 적도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그때를 떠올렸다. 정말 어색한 발놀림과 동작이었다.

타티아나가 머쓱하게 말했다.

“아나스타샤, 미안해요. 저번에 가르쳐 주셨는데 잊어버렸어요. 저 바보인가 봐요. 아니면 몸치거나요.”

“둘 다거나.”

“아나스타샤……! 너무해요.”

아나스타샤는 킥킥 웃었고 타티아나는 괜히 아나스타샤의 소매를 잡고 흔들었다.

에르네스트는 그 모습을 보다가 어차피 여기에서 같이 왈츠를 출 만한 또래 여자애라곤 둘밖에 없는데 한 명은 아예 못 추고 한 명은 오해를 더 키울 일은 절대 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뭐 항상 이렇지, 에르네스트는 당장 정리해야 할 말부터 니콜라이에게 했다.

“어쨌든, 선배. 저 아나스타샤랑 그냥 친구입니다. 그건 알아 두시죠.”

“그냥 친구라고요?”

“예. 그냥 친구.”

“호오…….”

니콜라이는 흥미롭다는 듯 에르네스트를 보더니, 고개를 에르네스트 쪽으로 향하고는 작게 이야기했다. 작은 목소리였지만 그 목소리는 아나스타샤에게도 다 들렸다. 마치 들으라고 하는 모습이다.

“에르네스트 후배님은 이렇게 매력적인 여성분들을 그냥 친구로 대하실 수 있으신가 보군요?”

“……꼭 그런 것만도 아닌데요.”

“꼭 그렇지 않다……. 그 말인즉슨 한 분은 다르다? 이 말씀이신가요?”

“제가 그걸 말할 이유가 있어요?”

“물론 없지요.”

뾰족한 에르네스트의 대꾸에 니콜라이는 다시 사람 좋게 웃으며 물러섰다.

그가 말했다.

“재미있네요.”

뭐가 재미있다는 건진 모르겠지만 아나스타샤는 그 말이 그리 기분 좋게 들리지만은 않았다. 한 마디 해야 할까 생각하는데, 니콜라이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음, 왈츠를 추고 싶은 기분이었는데, 잠시 테라스에서 바람을 쐬어야겠군요.”

그러고는 지체하지 않고 테이블을 떠났다. 특유의 가벼운 발걸음으로 니콜라이는 연회장과 연결된 테라스 쪽으로 나갔다.

에르네스트는 그 뒷모습을 끝까지 보다가, 아나스타샤에게 말했다.

“저 선배 약간 제정신 아니지?”

“독특한 스타일이긴 하지.”

“독특?”

“왜, 뒷담화 하고 싶어?”

“그건 아니고. 그냥.”

딱히 동의를 구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는지 에르네스트는 바로 그만두고는 쿠키를 집어 들었다.

타티아나는 니콜라이가 자리를 떠나게 된 것이 자신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건지 조금 석연찮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시간을 확인했다. 10시 30분. 슬슬 이 자리도 파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많이 늦은 시간은 아니었고, 내일도 휴일이었으니 더 늦게까지 있어도 되겠지만 연주회 뒤풀이를 너무 길게 할 이유도 없었다. 연주회로 연주자들은 분명 지쳐 있을 테고 가족들 역시 피로가 쌓였을 테니 파티로 무리하지 않고 적당히 휴식을 취하는 것이 훨씬 좋았다.

타티아나도 말은 하지 않고 있지만 꽤나 지쳐 있을 것이다. 아나스타샤는 타티아나에게 어떻게 돌아가 쉬자고 말해야 하나 잠시 말을 골랐다. 그리고 그때, 연회장을 두리번거리던 타티아나가 입을 열었다.

“아버지는 어디 가셨죠……?”

“아버지?”

“예.”

아나스타샤는 타티아나의 시선을 따라 연회장을 보았다. 왈츠를 추는 부모님들이 두 쌍 있었고, 테이블에 앉아 있는 분들도, 또 모여서 칵테일에 여념이 없는 일리야와 루슬란도 보였지만 타티아나의 아버지인 유리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안 계시네.”

“…….”

입을 꼭 다물고 무언가 생각하던 타티아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나스타샤 역시 자동적으로 같이 일어섰다.

“아버지를 찾으러 갈래요.”

“잠깐만, 나도 갈게.”

에르네스트는 홀로 테이블에 앉아서 아나스타샤와 타티아나를 올려다보았다. 에르네스트가 물었다.

“그대로 가서 쉴 거야?”

“그래야겠지.”

“……그래.”

더 놀자고 붙잡지 않고 에르네스트는 짧게 대답하며 옆 테이블을 바라보았다. 아나스타샤는 혹시나 싶어 말했다.

“술 마시면 안 돼. 실례야.”

“알아.”

그것으로 충분했다. 아나스타샤는 그 이상 에르네스트에게 주의를 주지 않고 타티아나를 따라갔다.

“…….”

타티아나와 아나스타샤는 연회장 밖으로 나갔다.

밝게 밝혀진 복도, 타티아나는 아버지를 찾는지 천천히 걸었다. 눈에 보이지 않으니 대신 발소리나 목소리라도 찾으려는 듯 조심스러운 움직임이다.

그렇게 주의 깊게 복도를 걷는 두 사람에게 가장 먼저 포착된 건 유리가 아닌 고용인인 메이드였다.

“어머, 아가씨.”

“올가.”

이 저택엔 수십 명의 메이드가 있었는데, 타티아나는 그 모두를 알고 있었다. 타티아나는 올가라고 부른 메이드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오늘 정말 고생하셨어요, 올가.”

“아뇨, 아가씨. 무슨 말씀을 하세요? 제 일인걸요.”

“그래도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올가는 허둥지둥 답했지만 타티아나는 어디까지나 진심이었다. 옆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미소가 절로 지어지는 것을 느끼며 아나스타샤가 가만히 그 옆을 지켰다.

올가는 타티아나와 아나스타샤를 번갈아 보고는 말했다.

“아가씨들은 이제 쉬시려고요?”

“음, 올가. 혹시 아버지를 못 보셨나요?”

타티아나가 묻자 올가는 곧장 답을 말해 주었다.

“유리 님은 응접실에서 손님과 함께 그림을 보고 계세요.”

“응접실에 계셨군요?”

이 저택을 모두 헤집고 다닐 필요는 없어졌다. 타티아나가 다시 감사를 표했다.

“언제나 고마워요, 올가.”

“우후후, 저야말로요. 저희 고용인들이 이렇게 즐겁게 일할 수 있는 건 다 아가씨 덕분인걸요.”

“제 덕분요? 전 아무것도 한 게 없어요.”

“없긴요.”

타티아나는 정말 영문을 모르겠다는 투였지만 올가는 그저 온화하게 웃을 뿐이었다. 딱히 타티아나가 정확히 뭘 했다고 이야기할 생각은 없는 듯했다.

올가는 타티아나의 손을 놓고는 말했다.

“유리 님을 뵙고 좋은 시간 보내세요, 아가씨. 아나스타샤 아가씨도요.”

그렇게 메이드는 멀어져 갔다. 아나스타샤는 타티아나를 이끌었다.

“가자. 응접실로.”

“예. 아나스타샤.”

타티아나가 대답했다. 아나스타샤는 1초라도 빨리 타티아나를 유리에게 데려다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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