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8화
타티아나의 걸음은 조금 빨라졌다. 곧 두 사람은 응접실에 다다랐다. 복도 끝을 돌아, 안을 살피자마자 유리를 발견하고,
“아버지.”
기쁘게 다가가선 팔을 뻗었다. 유리는 갑자기 안겨 오는 타티아나를 보며 놀란 듯했지만, 곧 조심스레 타티아나의 뒷머리를 쓸어내렸다.
“무슨 일이냐, 타티아나. 갑자기.”
“아무 일도 없어요.”
“그래? 그렇다면 왜…….”
“아무 이유도 없어요.”
무슨 이유가 필요하겠는가? 서로를 끌어안은 부녀를 보며 아나스타샤는 미소를 머금었다. 공적인 자리에선 두 사람 다 뻣뻣하게 있지만 사적인 자리에선 그렇지도 않은 것이다.
“괜찮잖아요? 그렇죠?”
“괜찮다마다.”
유리 역시 타티아나가 힘들지 않도록 자세를 바꾸며 말했다.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것은 비단 아나스타샤뿐이 아니었다. 아나스타샤는 응접실 한편에 서 있는 니콜라이의 아버지, 콘스탄틴 올라비예비치 자이체프를 발견했다. 메이드인 올가는 분명히 말했다. 유리는 손님과 함께 그림을 보고 있다고.
타티아나는 응접실에 들어서자마자 유리를 발견하고 냅다 안겼기 때문에 그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한 듯했다.
콘스탄틴은 응접실 벽에 걸린 그림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눈앞에 펼쳐진 그림을 보고 감탄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유리에게 고개를 파묻고 있던 타티아나가 그 시선을 눈치챘다. 슬며시 고개를 든 타티아나가 옆을 돌아보고 콘스탄틴과 눈을 마주쳤다.
아나스타샤는 타티아나가 유리의 품에서 떨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본래 외로움을 많이 타는 편이고, 지금은 이렇게나 적극적이지만 사실 타티아나는 감정 표현을 이렇게 잘 하는 편이 아니다. 아나스타샤까진 괜찮겠지만 다른 누군가가 흥미로운 시선으로 보고 있다면 대번에 부끄러워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아나스타샤의 예상과 달리 타티아나는 더더욱 보란 듯 팔에 힘을 주었다.
마치 지금 보고 있는 모두가 증인이라는 듯, 분명하고 확실하게 지금 이 자리에서 자신이 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밝히고 지키겠다는 듯한 태도였다.
잠시간 있던 타티아나가 고개를 들고는 조용히 고했다.
“아버지가 제 아버지라서 전 너무 행복해요.”
짧지만, 아주 강렬한 표현이었다. 결코 쉽게 할 수 없는 솔직함과 애정이 진하게 묻어 나왔다.
하지만 유리의 반응은 딸에게서 그런 말을 들은 사람의 반응이 아니었다. 기쁨도, 부끄러움도 아닌, 명백한 당황함이 서린 유리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유리가 물었다.
“루슬란에게 무슨 말이라도 들었느냐?”
아나스타샤는 타티아나 대신 화를 낼 뻔했다. 아저씨 지금 뭐 하시는 건가요? 그게 지금 타티아나에게 할 말이에요? 저렇게나 애정을 갈구하는데. 아버지라는 사람이!
화가 나다 못해 눈물이 날 정도였는데, 타티아나는 별생각 없는지 고개를 저었다.
“아뇨? 무슨 말 말씀이세요?”
“그…… 아니다, 아무것도. 타티아나.”
다시금 당황하는 어투가 이어졌다. 유리는 타티아나의 눈치를 살피는 듯 묘한 시선으로 내려다보더니, 곧 굳어 있던 얼굴을 풀었다. 머리끝까지 치솟았던 긴장이 스르르 내려앉았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행복해 보이는 부녀 사이엔 아나스타샤가 모르는 것이 있었다. 때문에 아주 진실 된 사이로 보이는데도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서늘함이 느껴졌다.
그 살얼음판을 유지하는 건 두 사람의 배려와 조심스러움이었다. 진정을 되찾은 유리에게 설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지 타티아나가 입을 열었다.
“그저 연주회를 마치고 문득 깨달았을 뿐이에요…….”
약간의 고민, 타티아나는 지금부터 전해야 할 문장을 세심하게 정리하는 듯 했다.
이윽고 타티아나가 차분히 말했다.
“결정한 것을 약속드리고 싶어요. 후회하지 않기 위해.”
조금 풀어졌던 유리의 표정이 다시 굳었지만, 이번엔 조용히 딸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타티아나가 말을 이었다.
“제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든……. 어쩔 수 없겠지만, 제가 저인 한 설령 제게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아버지와 루슬란 오빠에게 상처를 주는 일은 없을 거예요. 약속드릴게요.”
아나스타샤는 다시금 느꼈다. 타티아나의 완성된 문장 속에는 불안과 두려움이 있었다. 혼란과 무력감, 공포. 하지만 타티아나는 도망치지 않는다.
“절대로, 절대로요.”
결의를 다지는 듯한 단호한 어투. 여기 있는 모두가 들었다.
“아버지, 제가 다시 깨어난 건 아마 그런 운명일 거예요. 전 그렇게 생각해요.”
말을 맺고, 타티아나는 고개를 숙여 이마를 유리의 가슴에 대었다.
아나스타샤는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타티아나의 말을 곱씹었다.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는 듯한 말과 다시 깨어났다는 말, 그리고 운명. 이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진 알 수가 없다. 그저 타티아나의 본질과 성격에 많은 영향을 준 이유들일 것이라 추측할 뿐이었다. 타티아나는 숨기고 있는 것들이 많았다.
유리는 가슴에 와 닿은 타티아나의 머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보다가, 입을 열었다.
“타티아나, 혹시…….”
말이 줄어들다가, 사라졌다.
“아니, 아니다.”
그렇게 무언가 말하려던 유리는 말하려던 모든 것을 취소했다. 아나스타샤는 이번에도 유리가 타티아나에게 이상한 말을 했다면 이번에야말로 화를 낼 작정이었는데, 다행히 그럴 일은 없었다.
유리는 양손으로 가볍게 타티아나의 어깨를 잡았다. 타티아나가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말없이 올려다보는 딸을 향해 유리가 말했다.
“나도 약속하마. 무슨 일이 있어도 난 널…… 지지한다, 타티아나.”
타티아나가 했던 말의 그대로, 유리는 타티아나에게 되돌려주었다.
아나스타샤는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주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그 정도면 저 무뚝뚝한 아저씨가 해 주는 말로는 충분했다. 타티아나도 상처받거나 할 것 같진 않았다.
하지만 이 대화를 듣고 있는 또 한 사람, 니콜라이의 아버지인 콘스탄틴은 같은 아버지로서 한마디 조언했다.
“멋지군요, 유리 알렉세예비치. 하지만 사랑한다고 해 주시는 게 어떻습니까? 이렇게 열렬한 애정을 어물쩍 넘기실 겁니까?”
“흠…….”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조언에 유리가 눈에 띄게 당황했다. 콘스탄틴은 여유로운 태도였다.
이 자리에서 누구의 편을 들라 한다면 아나스타샤는 당연히 콘스탄틴의 편을 들 생각이었다. 그 시선까지 더해졌는지 유리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내가 내 딸을 사랑하는 것이야 당연하지. 굳이 말로 해야만 하오?”
“말로 안 하면 모르는 것도 있습니다.”
“…….”
유리가 굳게 입을 닫았다.
하지만 침묵은 길지 않았다.
“사랑한다, 타티아나. 네 운명이 그러하듯 나 역시 네가 깨어나 준 것에 운명을 느낀다.”
“아버지…….”
“무뚝뚝하고 못난 아비이지만 난 단 한 번도 널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구나.”
은근히 기대하고 있던 아나스타샤는 그야말로 깜짝 놀랐고, 타티아나 역시 이렇게까지 유리가 답해 줄 줄은 상상도 못 한 모습으로 놀랐다.
타티아나는 무어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황망해했지만, 말로 안 해도 전해지는 것 또한 있었다. 유리는 인자하게 웃으며 타티아나를 다시 한 번 끌어안았다가 놓아주었다. 타티아나는 훌쩍거리며 울기 시작했다.
아나스타샤는 하마터면 따라서 울 뻔했다. 하지만 그녀는 우는 것보다 지금 광경을 똑바로 봐 두는 쪽을 택했다.
타티아나가 울음을 멈추고, 다시 웃음을 되찾자 콘스탄틴이 조금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어떠한 감정을 꾹 눌러 참는 듯한 모습이었다.
“운명이라……. 타티아나 유리예브나가 먼저 이야기한 것이었죠? 소녀들이 운명을 논하는 모습을 자주 본 것은 아닙니다만, 보통은 멋진 인연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밖에 못 들어 봤는데 말입니다.”
“……전 멋진 인연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맞아요.”
“하하, 그렇죠. 가족 역시 인연이니. 아름답네요,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프 부녀의 가족애에 연신 감탄을 표하며 콘스탄틴이 말했다.
“부럽군요, 유리 알렉세예비치. 제 아들은 늘 혼자 큰 줄만 알아서 말입니다.”
정말 부럽다는 투에 아나스타샤는 뜨끔했다. 문득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마지막으로 아버지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던 게 언제였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렇게 약간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데, 타티아나가 고개를 돌리더니 콘스탄틴에게 말했다.
“아들인지 딸인지 그건 상관없어요.”
방금까지 눈물을 흘리던 얼굴에는 환희와 피로가 혼재되어 있었다. 타티아나가 이어 말했다.
“실수하고 후회하게 되고 나서야…… 알 수 있는 것들도 많으니까요.”
“…….”
콘스탄틴이 조용히 입을 닫고 타티아나를 바라보았다. 떠오르는 것들이 많은 것 같았다.
이윽고 콘스탄틴이 쓴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실수와 후회……. 이거 참, 타티아나 유리예브나로부터 훌륭한 것을 배우는군요. 저야말로 아들 이야기를 할 게 아니라 이 못난 아들을 둔 늙으신 어머님을 찾아뵈러 가 봐야겠습니다. 고향이 멀다는 핑계로 자주 못 뵈는 게 죄스럽군요.”
“핑계…….”
타티아나는 중얼거린다.
“지금은…… 절대…….”
“타티아나?”
“예?”
어둡게 뇌까리던 타티아나는 유리의 부름에 정신이 들었는지 고개를 든다. 유리가 걱정스레 물었다.
“왜 그러느냐?”
“아니에요, 아버지.”
타티아나는 고개를 흔들흔들하더니 웃으며 말했다.
“제게 허락된 바 최선을 다해서 앞으로 세계적인, 정말 세계적인 피아노 연주자가 될게요. 세계 각지에서 연주회를 하고, 아버지의 자랑이 될 수 있도록.”
허락된 바 최선을 다한다는 말은 타티아나의 입버릇 같은 말이었지만, 오늘만큼은 정말 절실하게 들렸다. 마치 누군가에게 정말 허락을 구하는 듯한 간절한 목소리다.
평소 타티아나는 그 엄청난 실력을 지니고도 미래에 대해 이러한 말을 하는 일이 잘 없었는데. 오늘따라 자꾸만 많은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선언하고, 확인받고, 긍정받고 싶어 했다.
물론 여기 있는 모두가 오늘 타티아나의 무대를 보았으므로 그렇게 될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콘스탄틴에게서 꼭 될 수 있을 거라는 격려와 답례가 오갔다.
아나스타샤는 타티아나는 물론 니콜라이도 충분히 세계적인 연주자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곳까지 자신이 따라갈 수 있을지. 그리고 타티아나가 그곳에 이르면 그 옆에는 에르네스트가 당연하다는 듯 서 있지는 않을지, 그런 것들을 생각하며 약간 음울함을 느꼈다.
타티아나는 아나스타샤 역시 천재라고 몇 번이고 못 박았지만, 의심과 불안은 아나스타샤도 가지고 있었다.
이윽고 아버지를 찾아서 하고 싶은 말은 다 뱉어 낸 듯, 타티아나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배시시 웃는 미소만이 얼굴에 남아 있었다.
유리가 말했다.
“피곤한 것 같구나. 가서 쉬려무나, 타티아나.”
“아버지는요?”
“난 콘스탄틴 올라비예비치와 이야기를 조금 더 하고, 손님들도 쉴 수 있도록 해야지.”
두 아버지는 응접실에서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 같지만, 아마 지금부턴 다른 이야기가 오갈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유리는 다시 한 번 손으로 타티아나의 어깨를 감쌌다가 놓았다.
“그러니 걱정 말고 가거라.”
“예.”
타티아나가 고분고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것을 쏟아낸 사람처럼 정말 피로해 보였다.
그런 타티아나를 보다가, 유리가 문득 아나스타샤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아나스타샤.”
“아, 예. 아저씨.”
“항상 고맙구나.”
신뢰가 깃든 미소. 아나스타샤는 유리가 표하는 감사가 자신에게 향할 땐 그 온도가 유독 높아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유리가 이어 말했다.
“음, 그리고 혹 묵고 갈 생각이라면 어느 방을 쓰…….”
“그냥 타티아나의 방에서 자면 안 될까요?”
아나스타샤는 유리의 말을 자르면서 순간적으로 그렇게 말했다.
정말 충동적인 말이었다. 타티아나에게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 후로, 타티아나뿐이 아닌 자신에게도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자각했다.
그 후로는 부자연스러운 발렌티나의 도움 같은 것 없이 여유롭게 친구로서 대하기로 마음먹었는데, 자기도 모르게 생각 이전에 입이 그렇게 움직이고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스스로가 이해가 안 가고 신경질이 났다. 하지만 뱉었던 말을 도로 거두지 못했다.
유리는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고 가볍게 허락했다.
“그러거라.”
“감사합니다.”
“감사는 내가 해야지.”
딸의 친구에게 보이는 신용에 아나스타샤는 가슴 한편이 찌릿하며 아픈 것을 느꼈다. 이 입장과 상황을 너무 좋을 대로만 누리고 합리화하고 있다.
잘 안다. 치사하지. 하지만 어쩌겠는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이 정도뿐인 것을.
부유한 집에서 다양한 방면의 재능을 타고나 남부러울 것 없이 살아온 아나스타샤는 자신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무엇이든 할 순 없었고, 그보다 훨씬 많은 것을 할 수 있을 것이 분명한 타티아나조차 허락된 것과 해야 하는 것이라는 개념들을 엄숙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지켜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복잡한 생각을 하고 있는 아나스타샤를 보며 타티아나는 무방비하게 웃었다.
“아나스타샤.”
“응.”
“다 보셨나요?”
뭘 묻는 건지 모르겠지만 아나스타샤는 답했다.
“다 봤어.”
“고마워요.”
타티아나는 그렇게 말하며 아나스타샤의 팔을 잡았다.
막 그렇게 돌아서려는 두 사람을 향해 콘스탄틴이 인사말을 건넸다.
“편히 쉬세요, 아가씨들.”
“예, 콘스탄틴 올라비예비치도요.”
“저는 음, 유리 알렉세예비치. 저도 오늘은 유리 알렉세예비치와 오래토록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묵고 가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오. 손님은 언제든 환영이오.”
“고맙습니다. 연회장에 있을 식구들에게 일단 이야기를 해야겠군요.”
콘스탄틴이 웃으며 발걸음을 돌렸고, 유리도 잠시 아나스타샤와 타티아나를 일견하더니, 콘스탄틴을 따라갔다.
응접실에 남은 두 사람은 잠시간 서 있다가 서로를 마주 보았다. 아나스타샤는 웃으며 말했다.
“방으로 갈까?”
타티아나는 마주 웃음으로써 답했다. 아나스타샤는 타티아나의 방이 어디인지 잘 알고 있었다. 1층 복도 끝에 위치한 방.
두 사람은 그곳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