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231화 (231/1,277)

##  231화

날짜가 바뀌고, 요일이 한 바퀴 돌며, 주말이 지나고, 한 주가 다시 시작됐다. 시간을 정의하는 수많은 기준들은 쉼 없이 흐른다.

그렇게 5월의 마지막 주가 달력에 남았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봄의 기운이 넘실거리는 모스크바의 하늘은 정말 맑고 따뜻했다.

내 블라우스는 조금 더 얇아졌고 넥타이는 밝아졌으며 스타킹의 데니어도 낮아졌고 단화는 더욱 가벼워졌다. 난 한결 편해진 차림으로 햇빛을 받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온몸이 노곤해진다. 봄 날씨가 너무 좋아서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였다.

“……아하하.”

그렇게 멍하니 벤치에 앉아 있다가 문득 아나스타샤가 생각나서 바보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빛과 소금을 피해야 한다고 주장하곤 했다. 사람에겐 필수일지 모르겠지만 때론 그저 피부를 망치는 자외선과 나트륨에 불과하다는. 그 주장은 나름대로 근거가 있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때문에 아나스타샤는 이것도 다 자외선이니 제대로 오일을 바르고 선탠을 할 것이 아니라면 되도록 햇빛을 피하라고 조언했다.

하지만 잘 모르겠다. 난 아나스타샤의 말이라면 무엇이라도 믿고 따르는 편이었지만, 이렇게 행복한 햇빛은 안 피해도 괜찮지 않을까?

실없이 웃으면서 광합성을 하다가, 자칫하면 이대로 벤치에 축 늘어져서 잠들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학교 어디에서 자건 내 자유겠지만, 아무에게나 자는 모습을 보이긴 싫었다.

할 일도 있었고.

“으…….”

가까스로 남은 힘들을 끌어모아 기지개를 펴며 벤치에서 일어났다. 아직도 조금 멍한 머리를 살짝 흔들어서 노곤함을 떨쳐 내고, 자판기 쪽으로 향했다.

애초에 난 지금 심부름을 나와 있는 상태였다.

자판기를 올려다보다가, 내가 마실 주스 한 캔과 탄산음료 두 캔을 뽑았다.

스터디룸에 있는 리처드와 한승우에게 줄 몫이었다.

내가 이렇게 혼자 심부름을 나와 있는 이유는 당연히 그들과의 내기에서 졌기 때문이었다.

“…….”

스터디룸에서 친구들과 모여 공부를 할 땐 보통 네댓 명 정도가 모인다. 하지만 오늘은 다들 일이 있었다.

발렌티나는 실기 시험 연습을 하러 갔고, 아나톨리는 콩쿠르 준비로 연습, 류보비와 사샤는 레슨, 아나스타샤도 레슨. 에르네스트는 원래 불참으로 리처드와 한승우 그리고 나 이렇게 세 명만이 모처럼 스터디룸에 모이게 되었다.

유학생 두 친구와의 스터디는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평안하게 흘러갔다. 우리는 실없는 농담을 던지기도 하고, 각자의 공부를 하기도 했다.

그리고 한승우의 시험공부를 도와주는 데에도 상당한 시간을 쏟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진급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다면 9학년으로 올라가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나와 리처드는 기껏 러시아어도 가르쳐 놓고 학교생활에 적응시켜 놓은 한승우가 1년 만에 진급 시험에 떨어져서 한국으로 돌아가길 바라지 않았다. 무엇보다 한승우 본인이 의지가 충만해서 도와줄 의욕이 나기도 했고.

그렇게 1시간 정도 공부를 하다가 잠시 휴식을 갖기로 했을 때, 우리 세 명은 당연하다는 듯 음료수 내기를 했다. 이러한 내기는 이제 일상적인 일이나 다름없었다.

어떤 내기를 할지는 꽤 중요한 문제였다.

힘으로 결정되는 내기를 하면 내가 무조건 지고, 퀴즈 같은 것을 내기로 하면 한승우가 무조건 지고, 다른 무엇도 아닌 운을 겨루는 내기를 하면 리처드가 거의 무조건 지곤 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어떤 내기가 공정하고 재미있을지 상의했고, 곧 하나를 골랐다.

바로 동전을 던져 멀리 떨어진 컵 안에 넣는 게임이었다. 다트 게임을 극도로 단순화시킨 느낌이다.

한승우는 그것도 내게 불리할지도 모른다고 말했지만, 리처드는 동전 던지는 데에 불리한 게 어디 있냐며 딱 잘랐다.

리처드는 내기에 있어서 늘 냉정하고 완고했다. 그는 자신의 운 없음도 변명 없이 받아들이는 만큼 내가 여자라고 해서 봐주는 법도 없었다.

나 역시 무언가 걸린 내기에 있어선 봐 달라고 할 생각 따위 전혀 없었다. 그게 무엇이든 상대가 누구든 신경 쓰지 않는다. 그런 부분에선 나와 리처드는 생각이 참 잘 맞았다.

“…….”

물론 형평성에 대해선 한승우의 생각이 옳았다.

한승우는 요령 좋게 두 번 만에 넣었다. 가만 보면 은근히 못하는 게 없다.

하지만 난 어딘가 거리 감각이나 운동 신경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동전 던지기에 재능이 없었고, 때문에 운이 없는 리처드와 번갈아서 열 번도 넘게 동전을 던지는 혈투 끝에 결국 패배하고 말았다.

그러곤 이렇게 내기를 이행하러 음료수를 사러 나오게 된 것이다.

별로 분하진 않다. 난 그 애들과 이렇게 어울리는 것이 늘 재미있었으니까.

교내의 자판기로 가려다가, 날씨가 너무 좋아서 밖으로 나와 햇빛을 쬔 것이 약 10여분. 그 애들도 날 기다리고 있겠지. 슬슬 돌아가야겠다.

“차가…….”

차가운 음료수 캔 세 개를 들고 가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양손에 하나씩 들어도 하나가 남아서 양손으로 세 개를 뭉쳐 들었더니 손이 차가웠다. 가방을 가지고 왔어야 했는데 동전만 챙겨 나온 것이 실수였다.

결국 난 캔 세 개를 한 번에 들고 가는 것을 포기했다. 복도 창가에 캔들을 올려놓고 동전을 꺼내 내 캔을 막 따서 마시는데, 계단에서 익숙한 얼굴이 막 올라오다가 날 보더니 손을 살랑거리며 흔들었다.

“타티아나, 뭐 해?”

“아나스타샤!”

활기차게 반기자 아나스타샤가 싱긋 웃었다.

가방을 한 쪽 어깨에 멘 그녀는 넥타이 없이 블라우스만 입고 있었다. 하나로 묶은 뒷머리가 찰랑거렸고, 귀와 목이 드러났다. 이전보다 훨씬 시원해 보인다.

“레슨 끝났어요?”

“응. 이제 막. 그런데 뭐 하는 거야?”

“내기에서 져서요.”

“응?”

아나스타샤는 복도에서 음료수를 꼴깍이고 있는 내가 대체 무슨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거 다 마셔야 하는 거야?”

“예? 아뇨, 하나만요. 이건 스터디룸에 있는 두 사람 몫이에요.”

“두 사람?”

“리처드와 한승우요.”

“걔네랑 내기를?”

“늘 있는 일이잖아요?”

“뭘 한 건데?”

“동전 던져서 컵에 넣는 게임이요.”

“……그런 걸 왜 했니?”

“그러게요…….”

내가 우울하게 중얼거리자 아나스타샤는 한숨을 쉬며 날 바라보았다.

다음엔 무슨 일이 있어도 운으로 승부하는 내기를 하던지 해야 할 것 같다. 아무래도 무언가 실력을 요구하는 것은 피아노 외엔 자신이 없다.

잠깐만, 나 피아노로도 리처드한테 처참하게 졌었던 것 같은데. 대체 난 그 애들을 뭘로 이겨야 하는 거지.

패배감을 곱씹다가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조만간 리처드와 피아노로 다시 한 번 대결을 해 봐야 할 것 같다. 다른 건 다 지고 살더라도 피아노에 있어서 지고만 있다는 건 자존심 상했다.

연주자로 살면서 패배감을 느끼는 일은 잦지만, 패배에 익숙해질 순 없었다. 피아노로 한 번쯤은 되돌려 주고 싶었다.

그렇게 결의를 불태우며 음료수를 다 마시고, 아나스타샤와 이러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우리는 자연스레 스터디룸으로 향했다.

그리고 스터디룸의 문을 열자마자,

“야, 도박사. 나랑도 내기해.”

아나스타샤가 다짜고짜 화끈하게 도전장을 던졌다.

앉아 있던 리처드와 한승우가 놀란 눈으로 이쪽을 바라봤다. 리처드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오자마자 무슨 소리야? 그리고 왜 내가 도박사야?”

“난 딱히 누구라고 지칭한 적 없는데?”

“…….”

보기 좋게 속아 넘어간 리처드가 입을 다물었다가, 투덜거렸다.

“……아나스타샤. 넌 가끔 정말 이상한 소릴 해. 알아?”

“알 게 뭐야?”

아나스타샤는 정말 알 게 뭐냐는 태도로 척척 걸어가선 리처드의 맞은편에 앉았다.

가방을 옆 의자에 던지고, 다리를 꼬고는 고압적인 자세로 쏘아본다. 맞은편 의자에 앉은 리처드와 같은 눈높이인데도 어쩐지 내려보는 듯한 느낌이 물씬 풍겼다.

그녀가 입꼬리를 올리며 도발했다.

“동전 던져 넣기 했다며? 나랑 하자고. 설마 안 한다고 하진 않겠지?”

“……?”

리처드는 그제야 아나스타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했는지 잠시 날 바라보았다.

난 아나스타샤가 갑자기 리처드에게 내기를 하자고 하는 모습을 보며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궁금하기도 했다. 적어도 아나스타샤는 나보단 훨씬 내기에 강했으니까.

내가 말리거나 끼어들지 않고 잠자코 있자 리처드가 피식 웃으며 삐딱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타티아나의 복수라도 하겠단 건가?”

“응.”

“그것도 재미있겠네. 좋아. 받아 주지.”

평소엔 정말 점잖은데, 속된 말로 한 번 이렇게 삘이 꽂히면 리처드는 정말 물불 가리지 않는 성격이었다. 난 그가 어디까지 막 나갈 수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는 조금 기분이 고양된 듯 아나스타샤를 쳐다보며 말했다.

“내기 내용은…….”

“됐고, 던지기나 해.”

“…….”

리처드는 약간 화가 났는지 인상을 쓰며 낮게 말했다.

“후회하지 마, 아나스타샤.”

자신만의 신조를 가지고 있는 리처드는 꼭 무엇을 하든 간에 규칙을 정하곤 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정말 아나스타샤의 콧대를 눌러 주고 싶은 모양이었다.

“…….”

아나스타샤와 리처드는 테이블 저편에 컵을 놓고 나란히 섰다.

난 한승우와 함께 두근두근하는 기분으로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물론 나는 아나스타샤를 응원한다. 그녀는 내 복수자를 자칭하고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한승우는 아마 리처드를 응원하겠지? 그를 슬쩍 보니 별생각 없는지 멍한 시선이다. 말을 걸어 볼까 하는데, 리처드가 동전을 들었다. 난 숨을 멈췄다.

한 손을 들어 올린 리처드가 집중하면서 전방을 응시했다. 그 모습은 흡사 활을 겨누는 궁수와도 닮아 있었다.

나와 이미 동전 던지기를 했었던 리처드는 나와 혈투를 벌여야 했을 정도로 상당히 형편없는 실력을 보여 줬었지만, 그만큼 연습을 했으니 이번엔 감을 잡고 잘할지도 모른다.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정신 집중을 한 리처드가 가볍게 손을 뻗었고, 동전이 포물선을 그렸다.

그러고는 아슬아슬하게 테이블에 맞고는 바닥에 떨어져서 쨍 소리를 냈다. 들어가는가 싶어 숨넘어가는 줄 알았다.

“…….”

“뭘 하지 말라고?”

리처드는 분하다는 듯 눈썹을 찡그렸고 아나스타샤는 비웃었다.

“던지기나 해. 네 차례니까.”

살짝 짜증이 난 리처드의 말에 아나스타샤는 매력적으로 웃으며 동전을 쥐었다.

그리고 별다른 준비 동작이나 정신 집중도 없이 엄지손가락으로 가볍게 동전을 튕겼다.

그것만으로도 마치 거짓말처럼, 동전은 빙글빙글 돌면서 그대로 컵 안으로 들어갔다.

리처드는 물론이고 나도 어이가 없어 아나스타샤를 쳐다보았다. 그녀가 어깨를 으쓱했다.

“쉽네.”

아나스타샤가 온갖 잡기에 굉장히 능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지금 보여 준 것은 정말 상상을 초월했다.

동전을 던져 컵에 넣는다는 것이 보기엔 단순하지만 직접 해 보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몸소 느낀 바 있는 나는 아나스타샤가 대충 엄지손가락으로 동전을 튕겨서 집어넣는 것을 보고 넋이 나갔다.

리처드도 할 말이 많은 듯했지만, 딱 한 마디만 했다.

“……연습했냐?”

“아니? 컵이 너무 크잖아?”

할 말이 없었다.

어쨌건 이 즉석 내기는 아나스타샤의 승리였고, 그녀는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자, 그럼 내가 이겼으니까 내 마음대로 한다.”

리처드는 아나스타샤가 뭐라고 하든 상관없다는 듯 얼굴을 굳히고 있었다. 그는 긍지 있는 승부사였다.

하지만 그 긍지는 아나스타샤가 탄산음료 캔을 신나게 흔들기 시작하자 대번에 흔들렸다.

손의 스냅을 이용해서 순식간에 한 백 번은 캔을 흔든 아나스타샤가 그것을 리처드 앞에 내려놓았다.

“여기.”

“……너무하지 않냐?”

“응? 뭐가?”

리처드가 흔들리는 눈빛으로 한때 탄산음료 캔이었던 폭탄을 바라보았다.

아나스타샤는 멀찍이 떨어져서 키득거리며 웃었다. 반짝반짝 빛이 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상쾌한 미소였지만 입에서 나오는 말은 그렇지 않았다.

“따. 빨리.”

“…….”

“싫어?”

싫다고 하면 다른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리처드는 물러서지 않고 캔을 쥐었다. 그리고 최대한 멀리 잡고 천천히 땄다.

아무리 천천히 따도 캔에서 터져 나오는 탄산을 잠재울 순 없었다.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새어 나오던 음료수는 결국 흘러넘쳐 리처드의 손을 적셨다.

장렬히 벌칙을 택한 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아나스타샤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아하하하하, 하하하.”

“웃겨? 어?”

“응! 너무 웃긴데!”

약간의 그림자도 없이 환한 미소가 리처드에게 향했고, 리처드의 얼굴이 더더욱 사나워졌다.

난 급히 그에게 휴지를 건넸다.

“리처드. 여기, 이걸로 닦으세요.”

“윽……. 고마워.”

리처드는 그제야 표정을 조금 풀고는 아직도 부글거리는 캔을 대충 내려놓고 손을 닦았다. 바닥과 테이블에 흐른 것은 나중에 닦아야 할 것 같다.

“손 씻고 올게.”

끈적이는 손을 닦기 위해 리처드가 나갔다. 그때까지도 아나스타샤는 내 복수를 할 수 있게 되어서 기분 좋은지 웃고 있었다.

“…….”

리처드에겐 미안하지만 결국 난 피식 웃어 버렸다. 웃으면서도 입으로는 아나스타샤를 살짝 나무랬다.

“조금 너무했어요.”

“그랬어? 그래도 재미있었지?”

“아나스타샤도 참…….”

다짜고짜 내기를 걸어서 이겨 버리긴 했지만 그래도 아나스타샤는 리처드에게 무언가 분위기가 안 좋아질 일을 벌칙으로 강요하거나 하진 않았다. 이렇게 적당히 재미있는 수준에서 잘 노는 아나스타샤가 난 가끔 부럽기도 했다.

아나스타샤는 피아노 외에도 워낙에 할 줄 아는 재주가 많다 보니 뭘 해도 잘 놀았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 솔직히 조금은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다. 아주 약간.

나도 뭔가 남자 친구들이랑 같이 놀 때 제대로 할 만한 걸 연습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 혼자 노는 데에야 피아노만 있다면 다른 건 필요 없었지만, 이럴 때 피아노는 별로 도움이 안 된다.

이전 같았으면 친구들과 뭘 하고 놀지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겠지만, 그간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지금까지 여러 취미를 시도해 보면서 딱히 흥미를 붙일 만한 것을 못 찾았더라도 이젠 일부러라도 만들어야겠다.

아예 정말로 다트를 해 볼까? 나쁘지 않을 것 같기도 하다. 운동량이 많은 게임도 아니고, 집중해서 하면 잘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러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한승우가 휴지로 책상 위에 흘러내린 음료수를 닦기 시작했다.

아나스타샤는 그걸 보다가, 문득 물었다.

“승우 한. 그러지 말고 너도 할래?”

“…….”

책상을 닦는 일은 그가 아닌 리처드가 해야 한다는 투였다.

하지만 한승우는 아나스타샤의 말을 부분적으로 알아들었는지 대답 없이 고개를 들고 잠시 무언가 해석하는 듯하더니, 바로 동전을 하나 꺼내선 테이블 반대편으로 갔다. 그리고 우리가 멍하니 보고 있는 사이 툭 던졌다.

그 동전은 아나스타샤가 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컵 안으로 들어갔다. 컵 안에서 동전이 청명한 소리를 내며 몇 번 구르더니 멈췄다.

아나스타샤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물었다.

“연습했니?”

“아니.”

한승우가 대답하며 다시 휴지를 잡았다. 아나스타샤는 물끄러미 그 모습을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 정도는 내가 해 주지 뭐.”

그러고는 한승우를 도와 책상을 닦기 시작했다. 물론 나도 동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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