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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252화 (252/1,277)

##  252화

점심이 되자마자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는 타티아나를 데리고 식사를 하러 가버렸다. 에르네스트는 그런 그녀들을 붙잡지 못했다. 늘 자신만만한 그도 지금만큼은 자신이 없었다.

“…….”

에르네스트는 일단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내일만 지나면 학기가 끝나고 방학이 시작된다.

지금은 학교에서 서로 얼굴을 마주하기라도 하지, 방학이 되어서 정말 연락도 제대로 못하게 된다면 얼마나 서먹서먹해질지 상상도 안 갔다.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렇게 고민하는 와중, 전화벨이 울렸다. 동생인 사샤였다.

에르네스트는 지금 다른 누구와 전화를 할 기분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린 동생의 전화를 무작정 무시할 수는 없어서 전화를 받았다.

사샤가 밝은 목소리로 대뜸 물었다.

- 형 시험 끝났지?

“어.”

- 밥은?

“안 먹었어.”

- 언제 먹을 건데?

네가 언제부터 내 점심을 챙겼다고 이래?

에르네스트는 그렇게 물어보려다가, 갑자기 맥이 풀려서 중얼거렸다.

“생각 없다…….”

- 왜?

“…….”

평소에도 점심은 빵으로 대충 때우는 경우가 많았지만 오늘은 속 편하게 입에 무언가 넣을 기분이 아니었다.

안 그래도 점심 내내 할 일이 많았다. 친구들과 함께 점심을 먹을 타티아나가 조금이라도 기분이 나아진다면 어떻게 더 기분을 풀어 줄 수 있을지 고민해야 했다.

그렇게 빠르게 머리를 굴리던 에르네스트는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것이 떠올렸다.

여자애들이 화가 났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남자의 입장에서 가르쳐 주는 프로그램이었다. 재미삼아 멍하니 봤었던 프로그램이지만 비상사태인 지금은 그 장면이 하나하나 또렷하게 기억났다.

분명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평소 원하던 선물을 해 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건 선물을 준비하기까지 시간이 걸리고 미리 무엇을 좋아할지 알아 둬야 할 필요가 있었다.

때문에 대증요법으로 즉효성이 있는 방법으로 프로그램에서 추천한 것은 일단 달달한 것을 먹이고 보라는 것이었다. 그 이유를 설명하던 사람은 아프면 진통제를 먹어야 한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처럼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그렇게 주장했다.

솔직히 그리 신빙성은 없어 보이지만, 지금은 뭐라도 해야 할 때였다.

“사샤.”

- 응.

“어제 내가 스위스에서 사다 준 쿠키 바로 먹어 봤었지?”

- 응.

“어땠어? 그거.”

그렇게 물으면서 에르네스트는 가방에 손을 넣었다. 네모난 상자가 잡혔다. 친구들에게 나눠 주기 위해 스위스에서 기념으로 사 온 쿠키였다.

기념 선물 같은 건 미처 떠올릴 틈도 없어서 잊고 있었는데, 지금은 이게 가방 안에 들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어제 집에 돌아오자마자 사샤부터 하나 줬었기 때문에 사샤는 이걸 먹어 봤다. 그렇다면 할 말이 있을 것이다.

사샤가 말했다.

- 과자였어.

“아니 쿠키가 과자인 건 당연한 거고. 맛이 어땠냐고.”

- 맛이 과자였다고 말한 거야.

“……잠깐만.”

머리가 이상해질 것 같다.

평소에도 어린 사샤와 이야기하면 이런 식이었지만 오늘따라 에르네스트는 갑갑해 죽을 것 같았다.

질문을 단순화하기로 했다.

“달았지?”

- 응.

“음……. 혹시 네가 기분이 나빠져 있을 때 그걸 먹으면 어떨 것 같아?”

- 화가 나 있을 때?

“어.”

- 달겠지.

“…….”

살면서 한 번도 이런 생각을 해 본 적은 없었지만, 에르네스트는 사샤가 오늘만큼은 여동생이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결국 남자 둘이서 이야기해 봐야 답이 안 나올 문제였던 것이다. 에르네스트는 한숨을 쉬었다.

“됐다. 알겠어.”

- 뭘?

“네가 도움이 안 된다는 걸.”

- 너무해. 엄마한테 이를 거야.

“이르든가.”

사샤가 무어라 칭얼거렸지만 에르네스트는 듣지 않았다. 열 살도 안 된 동생에게 도움이 안 된다고 말하는 게 과연 형으로서 할 짓인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런 걸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결국 텔레비전에서 가르쳐 줬던 대로 무작정 이 쿠키를 가지고 가서 먹여 봐야 하나, 그 먹이라는 말이 약을 먹이듯 강제로 입을 벌리고 집어넣으라는 말이 아닐 텐데 그럼 어떻게 건네주어야 하나 따위의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사샤가 물었다.

- 근데 형.

“어.”

- 누굴 화나게 한 거야?

“……!”

에르네스트는 등 뒤가 오싹해짐을 느꼈다. 순간적으로 뒤를 돌아보았으나 아무도 없었다.

일곱 살이나 차이가 나지만, 가끔 사샤는 이렇게 몇 단계나 뛰어넘는 통찰력을 보이기도 했다.

사샤가 작게 중얼거렸다.

- 누굴까.

“너랑 상관없잖아.”

- 아나스타샤 누나인가?

“아닌데?”

- 그럼 발렌티나 누나?

“왜 여자애들뿐인데?”

- 남자랑 싸우고 쿠키를 주려고 할 리가 없잖아.

“…….”

생각해 보니 통찰력이라 할 것도 없었다. 에르네스트가 자신의 입으로 모조리 실토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한참이나 어린 사샤가 그걸 예리하게 읽어 낸 건 대단한 일이었다.

그리고 사샤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진지하게 덧붙였다.

- 설마 타티아나 누나는 아니길 바랄게.

“……야, 너.”

- 타티아나 누나를 화나게 할 수 있다면 형은 정말 대단한 사람일 거야.

그래, 내가 그 대단한 사람이다.

아나스타샤도 그렇고 사샤도 그렇고 타티아나를 화나게 만드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처럼 말하고 있었다.

맞는 말이었다. 머리가 아파 온다.

에르네스트는 더 통화를 해 봐야 한숨만 쉴 것 같아서 이만 끊기로 했다.

“시끄러워. 끊는다.”

- 아, 잠깐만.

사샤는 무어라 말했지만 에르네스트는 듣지 않고 통화를 종료했다.

“…….”

더 무언가 고민할 생각은 없었다.

에르네스트는 가방에 있는 쿠키 상자를 들고는 일단 교실 밖으로 나갔다. 앉아 있다가 두 다리로 걷기 시작하니 조금 더 빠르게 머리가 도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바로 어디로 가야 할지 조금 고민하다가 식당으로 가 보기로 했다. 타티아나는 한 번도 점심 식사를 학교 급식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무작정 식당 쪽으로 간 에르네스트는 슬쩍 식당 안을 엿봤다. 아니나 다를까, 타티아나는 아나스타샤, 발렌티나와 함께 있었다.

그녀가 식당에 있다는 것을 확인한 에르네스트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기다렸다. 타티아나가 그녀의 친구들과 함께 있다면 말도 걸기 힘들지도 모른다. 타티아나가 혼자 나와 주었으면 좋겠는데.

“…….”

막연히 그렇게 바라다가, 문득 헛웃음을 흘렸다.

살면서 누군가에게 말을 거는 데에 이렇게까지 고민해 본 적이 없는 에르네스트는 아까부터 어딘가 자신이 많이 이상하다고 느꼈다. 정말 많이 이상했다.

죄 지은 사람이라고 해서 위축되어 있을 정도로 에르네스트는 소심한 성격이 아니었다. 이렇게 기다릴 것이 아니라 당장 식당 안으로 들어가서 대놓고 이야기하는 것이 그의 스타일이었다.

옆에 누가 있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사실 수십 명이 둘러싸고 안 좋은 말들을 해도 에르네스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스스로가 소심하게 느껴졌다. 조금 긴장되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했다. 그 와중에도 그만둘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는 것이 우스웠다.

에르네스트는 괜히 상의 주머니에 넣은 상자를 만지작거렸다.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학생들이 몇 나오고, 타티아나가 밖으로 나왔다.

무표정한 얼굴로 식당 문을 열고 나온 타티아나는 잠시 그 옆에 서서 스마트폰을 내려다보았다.

“타티아나.”

“!?”

살며시 다가가서 말을 걸자 깜짝 놀란다.

가끔은 일부러도 타티아나를 이렇게 놀래곤 하지만, 오늘따라 놀라는 그녀에게 미안해진다.

타티아나는 다시 감정들을 저 밑으로 밀어 넣고는 쌀쌀맞게 눈을 뜬다. 간담이 서늘해졌지만 에르네스트는 용기를 내어 다시 말을 걸었다. 교실에서부터 이걸로 세 번째였다.

“잠깐 이야기 좀 할래.”

“……하세요.”

“여기선 조금 그렇고, 저쪽으로 가자.”

“…….”

복도 저편을 가리키자 타티아나는 잠시 그를 올려다보더니,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싫다고 고개를 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까지 에르네스트가 싫진 않은 모양이었다.

두 사람은 식당에서 조금 떨어진 복도 구석에 다다랐다. 이 정도 떨어져 있으면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가 대화 도중에 갑자기 끼어들 일은 없을 것이다.

타티아나는 뒷짐을 진 채 창밖을 한 번 보고는 에르네스트에게 물었다.

“무슨 이야기신가요? 아침의 일이라면 전 이해했…….”

“타티아나.”

타티아나가 냉소를 흩뿌리기 직전, 에르네스트가 급히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리곤 기습적으로 상의에서 쿠키 상자를 꺼내 내밀었다.

“받아.”

“……이게 뭔가요?”

“스위스에서 사 온 기념품이야. 원래는 아침에 주려고 했었는데……. 잊고 있어서.”

타티아나는 이런 건 생각도 못했는지 눈을 깜빡였다. 당황한 것 같다.

약간 떨떠름해하는 태도이지만 결국 그녀는 상자를 받아 주었다. 포장을 본 타티아나가 말했다.

“쿠키네요.”

“응. 쿠키 좋아하지?”

가끔 디저트를 먹을 때 보면 타티아나는 쿠키류를 즐겨 먹곤 했다.

“예. 좋아해요.”

어쨌거나 그녀의 입에서 좋아한다는 말이 나왔으니 반쯤 성공이라고 생각했다.

타티아나는 약간 고민하는 듯한,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선물을 받았으면 반드시 감사 인사를 하는 사람이었다.

“고마워요. 감사히 받을게요…….”

“지금 먹어 봐.”

“예?”

“하나 먹어 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어……. 네 입에 안 맞을지도 모르니까?”

일단 어떻게든 저 입에 쿠키를 먹여야 한다는 일념으로 에르네스트는 그렇게 되는 대로 말했다. 말을 맺고 나서는 옆에 있는 창문틀에 머리를 박고 싶을 정도로 창피해졌지만 이미 튀어나간 말이었다.

타티아나는 이상하다는 듯한 눈초리를 했지만 별 경계 없이 포장을 뜯고는, 하나 집어서 입에 넣었다.

그 모습을 뚫어져라 보고 있던 에르네스트가 조심스레 물었다.

“어, 어때?”

“달아요.”

사샤가 했던 말과 똑같은 것 같은데.

어쩌면 사샤는 정확한 대답을 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텔레비전 쇼프로 따위를 믿었던 게 잘못인 걸까. 잘 모르겠지만 타이밍은 지금뿐이었다. 에르네스트는 다시 진지하게 사과의 말을 건넸다.

“타티아나, 아까 아침엔 정말 내가 바보 같았어. 다신 그럴 일 없을 테니 용서해 줄래.”

“……이 쿠키는 대가성이 짙네요.”

“어? 아,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원래 주려고 했던 거니까.”

“그런가요?”

“그래도 먹고 화를 풀어 주었으면 좋겠는데.”

타티아나는 희미하게 웃음기를 띠고 있었다. 여전히 말에는 가시가 뾰족했지만 어쩐지 조금 부드러워진 것 같기도 했다. 에르네스트는 텔레비전을 신봉하기로 했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모든 것이 무너졌다.

“죄송하지만 전 그렇게 단순하지 않아요.”

“……!?”

타티아나는 쿠키 상자를 내려다보고는 비웃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에르네스트는 텔레비전을 증오하기로 했다. 이런 것으로 그녀를 다시 되돌려 놓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얕은 수가 모두 간파당한 것이다.

타티아나는 여전히 옅은 미소를 짓고 있지만 체온이 25도 정도 되는 사람처럼 보였다.

에르네스트가 급히 말했다.

“……잠깐만, 오해가.”

“애초에 화가 나지도 않았고요. 화가 난 건 에르네스트였죠.”

“아니…….”

그 부분부터 부정해버리면 도저히 할 말이 없는데.

말문이 막힌 에르네스트는 다음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복잡하게 생각이 얽히고설키던 머리가 결국 백기를 들었다.

에르네스트는 그냥 몸이 움직이는 대로 행동하기로 했다.

“……?”

타티아나가 들고 있는 쿠키 상자로 손을 뻗은 에르네스트는 다짜고짜 쿠키를 하나 집고는 자신의 입에 넣었다.

선물로 줬던 것을 빼앗아 먹는 행동에 타티아나가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했다. 달라고 한다면 못 줄 것도 없지만 갑자기 무슨 짓이냐고 묻는 듯했다.

에르네스트는 신경 쓰지 않고 쿠키를 먹었다. 바삭거리는 단맛이 입안에 퍼졌다.

묵직한 침묵이 흘렀고, 그것은 에르네스트가 쿠키를 다 삼키기까지 계속되었다.

타티아나는 삐딱하게 보다가 상자를 내밀었다. 더 먹고 싶으면 더 먹으라는 것 같다. 에르네스트는 손을 젓고는 말했다.

“자, 봤지?”

“……뭘 하신 건가요?”

“연주회로 조금 짜증나 있던 거, 지금 이거 먹고 다 잊었어. 앞으론 신경도 안 쓸 거야. 화가 나지도 않고, 아침에 그런 바보 같은 일을 반복하는 일은 당연히 없을 거고.”

“…….”

살짝 찡그리고 있던 타티아나의 표정에 이채가 서렸다.

그녀는 그게 저랑 무슨 상관이냐고 되묻지 않았다.

에르네스트는 그저 마음이 가는 대로, 작게 웃으며 사과했다.

“한 번만 봐줘, 타티아나. 미안해.”

“…….”

솔직한 그대로의 감정이 느껴지는지 타티아나가 입을 다물고 가만히 바라보았다. 자신이 한 실수에 대한 순수한 후회와 사과는 무시하기 힘든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언제나 진솔함이란 가장 큰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말없이 에르네스트를 바라보던 타티아나는 휙 등을 돌렸다. 그리고는 스마트폰을 꺼내 조용히 화면을 꾹꾹 눌렀다.

“어……. 타티아나?”

“…….”

불러도 돌아보지 않고 타티아나는 스마트폰만을 만졌다.

무시당하는 에르네스트는 급격히 불안해졌다. 아직도 화가 안 풀렸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렇게 안절부절못하고 있자 이윽고 타티아나가 살짝 목을 돌리며 말했다.

“따라오세요.”

“응?”

“아무것도 묻지 말고 따라오세요.”

여전히 착 가라앉은 목소리는 싸늘했다.

텔레비전뿐만 아니라 인터넷 등에서도 여심을 되돌리기 위한 조언 같은 것은 널리고 널려 있었다. 하지만 평소에 딱히 관심을 가지고 보지도 않았고, 그 어떤 것도 지금 상황엔 무의미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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