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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261화 (261/1,277)

##  261화

현재 시각 11시 30분. 순간적으로 머릿속에서 수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간다. 반사적으로 떠오르는 변명들을 걷어 내며 전화를 받았다.

전화 너머에서 루슬란 오빠의 목소리가 들렸다.

- 타티아나.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그렇게 무서울 수가 없었다.

딱딱하게 굳어 있자, 오빠가 이어 말했다.

- 언제 와?

“그게…….”

- 지금 몇 시인 줄은 알고?

난 아무리 늦어도 9시 전후로는 꼭 집에 들어가곤 했다. 12시가 다 되어 가는 지금 시간은 늦어도 너무 늦은 것이다.

몇 시인 줄을 몰라서가 아니라 변명할 말이 없어서 입을 다물자 루슬란 오빠가 무섭게 말했다.

- 빅토르 좀 바꿔 줄래.

“잠시만요, 루슬란 오빠.”

- 잠시고 자시고, 차라리 친구들과 논다면 모르겠어. 무슨 일을 이렇게 오래하는 거야?

“집중하다 보니…….”

- 네가 음악에 정말 진지하다는 건 알아. 하지만 넌 아직 열다섯 살이야, 타티아나.

루슬란 오빠가 날 인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굉장히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느껴졌다.

오빠가 차갑게 말했다.

- 네게 화를 내려는 건 아닌데, 솔직히 거기 있을 사람들은 조금 이해가 안 가네. 전에 봤던 음반사 사장도 있겠지? 대체 무슨 생각들을 하는 거야?

“화, 화나신 거죠?”

- 아니라니까? 빅토르부터 순서대로 전화나 바꿔 줘.

집에 돌아갈 시간이 되었는데도 내가 이러고 있는 것에 대한 책임을 날 수행하는 빅토르에게 물을 모양이었다.

힐긋 빅토르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아무 말 않고 서 있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손을 내밀었다. 그냥 바꿔 달라는 의미였다.

난 고개를 저었다. 빅토르가 언제나 날 지켜 주었다면 가끔은 내가 빅토르를 지켜야 할 때도 있어야 했다.

“루슬란 오빠. 제게 화내실 일은 제게 화내 주세요.”

- 뭐?

“오늘은 모두 제가 고집부리고 있기 때문이니까요.”

- 타티아나, 너 진짜 내가 화내는 거 보고 싶어?

루슬란 오빠는 차분하게 말하던 목소리를 조금 키우며 으르렁거렸다. 조금 더 고집부리면 정말 화낼 것 같다.

그리고 어차피 그렇게 될 것이라면, 미리 말해버리기로 했다.

“나중에 말씀드리면 안 될 것 같으니 차라리 지금 말씀드릴 게 있어요.”

- 무슨 소리야 그게?

“저 오늘 여기서 밤샐지도 몰라요.”

- ……뭐라고?

어이가 없다는 듯 루슬란 오빠가 반문했다. 난 지금 내가 제대로 말하고 있는지 확신이 없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말했다.

“오늘 결론은 못 내더라도 최소한 만족할 만한 데모는 녹음하고 싶…….”

- 타티아나, 일단 들어와.

“……예?”

- 집에 들어오라고.

도저히 더 두고 못 보겠다는 듯한 단호한 목소리가 날 잡아끈다. 내가 다시 한 번 거부하면 그대로 강제로 끌고 가기라도 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오빠…….”

- 내 말 안 들을 거야?

“…….”

이런 힘 싸움으론 내가 루슬란 오빠를 이길 수 있을 수가 없다.

세상 다른 누구라면 뭐라 한들 듣지 않고 멋대로 해버릴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아버지나 오빠에게 그럴 순 없었다. 후회도 절망도 다신 느끼고 싶지 않다.

하지만 이대로 집으로 돌아가더라도 후회할 것은 분명했다.

난 마지막으로 루슬란 오빠를 설득해 보기로 했다.

“루슬란 오빠. 전 지금 파우스트 소나타라는 대곡을 녹음하고 있어요.”

- …….

이조차도 안 되면 포기하겠다는 내 심정이 전해졌는지, 루슬란 오빠는 내 말을 무시하거나 하지 않고 들어 주었다.

난 계속해서 말했다.

“상식적으로는 충분한 노력과 시간을 들여서 완성한 뒤에 녹음하는 게 옳겠죠. 딱히 시일이 정해져 있진 않으니깐요.”

- 그래, 그래서?

“그렇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지 못하면 아마 굉장히 후회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 그 성과라는 게 언제 나오는 건데?

“저도 몰라요…….”

-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느낌으로밖에 설명드릴 수 없는 부분인걸요. 막 손에 잡힐 것처럼 느껴지긴 하지만 그게 그저 제 오만한 착각일 뿐일지도 모른다는 건…… 알아요. 그 정도 자각은 있어요.”

난 나 자신을 그렇게까지 믿지 않는다. 지금 거머쥘 수 있을 것 같이 느껴지는 것들이 사실은 그렇지 않고, 날 얼마나 괴롭힐 수 있는지 잘 안다.

그 무엇 하나 쉽지 않다.

그래도 당장은 어려울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그만두고 내일을 기약할 정도로 내가 계산적이고 미련 없이 결단이 빠른 인간이었다면, 지금 이렇게 연주자를 이어 하고 있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해 보지 않으면 모르잖아요.”

- …….

“해 보고 싶어요.”

단순하기 그지없다. 해 보고 싶다. 더 잘하고 싶다.

지금 간질거리는 무언가를 느끼고 있는 목마름을 해소하길 원했다. 스튜디오는 녹음을 하는 곳이지 연습을 하는 곳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당장 여기에 피아노가 있고 날 도와줄 사람이 있었다. 지금 하고 싶었다.

더 이상 뭐라 할 말도 없었다. 난 거기까지 전하고는 조용히 말을 마무리했다.

“제 이야기 들어주셔서 고마워요. 하지만 그래도 안 된다고 하신다면 집으로 돌아갈게요. 걱정을 끼치고 싶진 않아요.”

- 하아…….

루슬란 오빠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전화 너머로 노이즈가 생기며 천둥 치는 듯한 소리가 들린다.

잠시 기다리자 오빠가 투덜거렸다.

- 네가 그렇게 말하면 내가 뭐라고 해?

하지만 그 투덜거리는 목소리에는 약간의 웃음기가 녹아 있었다.

- 일단…… 알겠어.

“정말이신가요?”

- 그래. 네가 어렴풋하게 무언가를 느끼고 밤새토록 집중하고 싶다는 거,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 강제로 그걸 못하게 해서 원망 듣느니 허락해 주는 게 낫지.

“원망이라뇨, 그럴 일은 없어요.”

- ……그래. 나도 알아. 못 들은 걸로 해 방금 건.

루슬란 오빠는 헛기침을 했다.

난 오빠에게 허락을 받아 낸 것으로 조금 안도했다. 하지만 오빠에서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 아무튼, 난 그렇다 치고 아버지는 어떻게 할래?

“아버지요?”

- 그래. 아직 안 주무시고 너 기다리고 계신데. 솔직히 오늘 분위기 좀 살벌해.

“…….”

루슬란 오빠는 내가 밤새워 뭘 하든 응원해 줄 수도 있는 모양이지만, 아버지는 어떠실지 모른다.

아버지는 내가 하고자 하는 모든 것들을 지원하고 응원해 주시지만 오늘은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전화해서 허락을 구하기가 겁난다.

그때, 오빠가 말했다.

- 타티아나.

“예…….”

- 마음 약해지지 마.

“……?”

- 밤새 피아노로 무언가 건져 올릴 수 있을 것 같다며. 하고 싶다며. 그럼 해.

“그치만…….”

내가 웅얼거리자 루슬란 오빠가 킥 하고 웃더니 말했다. 이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유쾌한 목소리였다.

- 좋은 아이디어가 생각났는데, 타티아나.

“무슨 아이디어요?”

- 오늘 스튜디오에 있다고 하지 말고 네 친구 집에서 자고 온다고 해. 그래 봐야 아나스타샤 정도겠지만.

오빠의 제안에 난 기겁했다.

“거, 거짓말을 하란 말씀이세요?”

- 그게 뭐 별거야? 솔직히 말해서 네가 그렇게 거짓말을 치고 어디 다른 곳에 있는 것도 아니고. 잠깐만……. 나 너 믿어도 되는 거야?

“정말 여기 스튜디오 맞아요! 영상통화 할까요? 마카로프 프로듀서 바꿔 드려요!?”

- 하하하, 아니, 믿어. 믿어.

당황해서 목소리를 높이자 루슬란 오빠가 폭소를 터뜨리며 말했다.

난 루슬란 오빠의 제안에 어이가 없어서 말을 못 잇고 있다가, 문득 생각해 보니 남매가 합심해서 부모님을 어떻게 속일지 궁리하는 것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루슬란 오빠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하는지, 아니면 아버지를 속인다는 일 자체에 흥미를 느끼는지 조금 장난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 아무튼 그런 방법도 있다는 거지.

“…….”

경솔하게 대답하지 않고 모든 상황을 떠올려 보았다.

아버지에게 아나스타샤의 집에 머문다고 거짓말을 하려면 일단 아나스타샤에게 말을 맞춰 달라고 부탁을 해야 했다. 그리고 당장 여기에 있는 빅토르와 소로킨 그리고 자하르에게도 내게 맞춰 거짓말을 해 주길 요구해야 한다.

아버지 한 분에게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난 내가 어차피 거짓말의 화신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알지만, 강한 거부감을 느꼈다.

“차라리 돌아갈래요.”

- 고지식하기는.

“예……?”

루슬란 오빠는 짧게 웃더니, 내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말했다.

- 알았어. 내가 도와줄게.

“오빠가요?”

- 못 미더워?

“아뇨! 그렇지 않아요.”

그냥 뭘 어떻게 도와줄 수 있는지 궁금할 뿐이다. 오빠는 간단하게 말했다.

- 내가 아버지에게 말해 줄게.

“거짓말은 안 돼요, 오빠.”

- 안 해. 정확하게 네가 스튜디오에서 날밤 새우고 피아노 붙잡고 있을 거라고 말할 거야.

“…….”

정확한 말이었지만, 조금 객관적으로 생각하니 아버지가 불같이 화를 낼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저녁에도 계약서도 안 쓰고 뭐 하는 짓이냐고 하셨던 것 같은데…….

“허락해 주실까요?”

- 대신 너도 감수해야 할 게 있지.

“무엇인가요?”

내가 묻자 루슬란 오빠가 해결책을 내놓았다.

- 내가 거기 갈 거야.

“……예?”

- 거기 가서 너랑 같이 밤샌다고.

순간 난 모든 것을 이해했다.

빅토르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아버지 다음 보호자인 오빠가 직접 와 있겠다고 설득한다면 아버지도 허락해 주실 확률이 높았다.

어쩌면 이 방법뿐일지도 모르겠다.

그러한 상황들을 이해한 나는 괜한 소리들을 단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그럴 필요까진 없다거나,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는 말은 겸양이 아닌 기만이 될 뿐이었다.

난 그저 내 고집을 받아 주고, 도와주겠다고 기꺼이 나선 루슬란 오빠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고마워요…….”

- 그래. 조금 이따가 보자.

“예.”

이야기를 마친 루슬란 오빠는 쿨하게 통화를 끊었고, 난 스마트폰을 내려놓고도 한참 동안 내려다보았다.

고개를 드니 빅토르가 보인다. 난 헤실거리며 말했다.

“루슬란 오빠가 온다네요.”

“늦게까지 아가씨에게 고언을 올리지 못한 절 죽이러 오신답니까?”

“아뇨? 아뇨. 절대 그런 일은 없어요. 빅토르는 제가 지켜 드릴 테니까요.”

깜짝 놀라서 말했지만 말하고 나니 굉장히 창피하게 들리는 말이었다.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이자 빅토르가 폭소했다.

“하하하하.”

“……웃지 말아요.”

“아니, 하하, 죄송합니다. 아가씨.”

무엇이 그리 웃긴지 빅토르는 한참이나 웃는다. 옆에 있던 마카로프 프로듀서도 웃으며 날 바라보고 있었다.

어쨌든, 두 사람 다 내가 지금 강제로 붙잡고 있는 것 같아서 얼마나 미안한지 알기나 하는가 모르겠다.

난 루슬란 오빠와 통화를 마치고 바로 다시 연습에 들어가는 대신 잠시 홍차를 마시며 휴식을 취했다. 연구에서 연주까지 3시간 남짓 한 번도 안 쉬고 미친 사람처럼 했더니 솔직히 조금 피곤했다.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면서 잠시 메시지를 답장하고 있는데, 답장하자마자 아나스타샤가 다시 답장해 왔다.

[그런데 지금 집에서 뭐 해?]

답장에 3시간이나 걸렸더니 뭐하는지 궁금한 모양이었다.

난 솔직하게 답했다.

[집이 아니에요.]

[그럼 어딘데?]

[스튜디오요.]

[?????]

물음표와 함께 기겁하는 토끼의 이모티콘이 몇 개나 올라왔다.

그리고 다시 메시지를 보내기도 전에 전화가 걸려왔다. 바로 받았다.

“아나스타샤?”

- 스튜디오라고? 지금? 이 시간에?

“예…….”

아나스타샤는 기가 막히다는 듯 물었다.

- 뭐하는데 대체?

“오전에 말씀드렸다시피 음반 작업을 하고 있었어요.”

- 이 시간까지? 평소에 해도 저녁 전에 마무리하곤 했었잖아?

“오늘은 조금 오래하게 되었네요.”

집에서 스튜디오로 출발하기 전에 난 아나스타샤와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오늘은 스튜디오에서 녹음을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렇게 하루 내내 남아 있을 줄은 나도 미처 몰랐다.

- 아직도 하고 있어?

“지금은 휴식 중이지만요, 더 해 보고 싶어요.”

- 타티아나……. 너 쉬어야 해. 우리 어제까지만 해도 시험 쳤었고 오늘은 방학 첫날이잖아.

“아하하…….”

시험이 가져다준 피로가 아직 남아 있다는 건 잘 안다. 하지만 그런 건 지금 내게 아무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가끔 그럴 때 있지 않나요? 아나스타샤. 곡 하나에 깊게 파고들면서 일체감 비슷한 것을 막 느낄 것 같은 기분이 들 때요. 그만두고 자러 간다는 것이 농담처럼 느껴질 때 말이죠.”

- 무슨 말인진 알겠는데…….

역시 아나스타샤는 연주자이다 보니 내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래도 그녀는 조금 마뜩잖다는 듯 말했다.

- 그래서 밤새는 거야?

“밤샐 수도 있지 않나요? 전 그렇게 생각해요.”

- 그냥 내일 하면 안 돼?

“그렇겐 못 있겠어요.”

- 음반 제작하는 데에 정해진 날짜가 있는 거야?

“아뇨. 그냥 제 마음이에요.”

- 하아아…….

아나스타샤는 방금 전 루슬란 오빠가 했던 것과 똑같이 닮은 투로 한숨을 쉬었다. 난 그 원인이 나라는 것을 알면서도 약간 뿔이 났다.

내가 미성년자라서 그런가? 3년 후에는 내가 밤새 스튜디오에서 녹음을 하든 뭘 하든 상관하지 않을까?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니 3년이 아니라 10년이 지나 스물다섯 살이 되더라도 똑같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

문득 그렇게 먼 미래를 생각하다가, 아무리 상상해 보려 해도 잘 모르겠어서 멍하니 있는데, 아나스타샤가 날 불렀다.

- 타티아나.

“예, 아나스타샤.”

- 너 거기 어디라 그랬지?

“스튜디오요?”

- 응. 메시지로 주소 보내 줘.

“……?”

갑자기 주소를 왜 필요로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자 아나스타샤가 말했다.

- 나도 갈래.

“……주무셔야죠, 아나스타샤.”

내 말이 진짜 웃기게 들린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나와 함께 밤을 샐지도 모르는 사람은 마카로프 프로듀서, 내 경호원인 빅토르와 소로킨, 자하르. 그리고 루슬란 오빠까지였다.

마음 같아선 마카로프 프로듀서를 제외한 다른 분들은 내 신경 쓰지 않고 편히 잤으면 했다. 하지만 난 내가 멋대로 이렇게 하면서 내 일에 신경 쓰지 말라고 말할 수 없는 입장이라는 것을 잘 안다.

빅토르는 경호원으로서 내 옆에 있을 의무가 있었고, 루슬란 오빠는 내 오빠로서 내 옆에 있기로 했다. 결국 내 고집에서 비롯되긴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유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친구인 아나스타샤에겐 그런 의무가 없었다.

어떻게 아나스타샤에게 말할까 생각하는데, 그녀는 간단히 말했다.

- 잠 안 와. 가서 구경할래.

“구경요……?”

- 응. 그리고 한 번에 녹음 못 한 거면 연구가 필요할 텐데, 같이 연구나 하지 뭐.

순간 솔깃했다.

아나스타샤가 이 파우스트 소나타에 대한 어떤 해석을 가지고 있는진 모르겠지만, 그녀는 선험적인 센스와 천재적인 음악성을 지니고 있어서 그녀와 함께 하는 곡 연구는 항상 내게 굉장히 많은 도움이 되곤 했다.

난 나도 모르게 아나스타샤의 제안을 바로 받아들이려다가, 멈칫했다.

“…….”

- 타티아나? 들려?

“저 조금 고민되는데요, 아나스타샤.”

- 무슨 고민?

“아나스타샤를 부르는 게 너무 이기적인 행동이 아닌가 싶어서요.”

- 응?

그녀가 도움이 된다고 해서 바로 부를 정도로 난 뻔뻔하지 못했다. 한낮이었다면 부탁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내 녹음을 들려주고 감상을 듣고 싶다는 충동이 자꾸만 치밀었다. 난 스스로의 간사함에 조금 기분이 나빠졌다.

아나스타샤는 잠시 말이 없더니, 피식 웃었다.

- 그래서 내가 필요해, 안 필요해?

방금 전 루슬란 오빠가 투덜거렸던 말이 떠올랐다.

저렇게 물어 오면 대체 어떻게 답하란 말이에요?

“……필요해요.”

- 그럼 갈게.

결국 미안함을 느끼면서도 솔직하게 말하자 아나스타샤는 쾌활하게 말했다.

“고마워요. 정말로요.”

- 고맙긴.

아나스타샤는 신경 쓰지 말라는 듯 킥킥 웃었다.

- 바로 택시 타고 갈게.

그녀는 쿨하게 말을 맺고 통화를 종료했다.

이렇게 루슬란 오빠에 이어 아나스타샤까지 두 사람이나 이곳에 더해지게 되었다.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마카로프 프로듀서와 미친 듯이 곡을 연구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약간 머리가 복잡해져 있는데, 빅토르가 물었다.

“아나스타샤 아가씨도 오신다고 하십니까?”

“예, 미안해서 어쩌죠.”

빅토르는 내 말에 엉뚱한 소리를 했다.

“어쨌든, 그러면 오늘 아나스타샤 아가씨와 있었다고 해도 딱히 거짓말이 되진 않겠군요?”

무슨 말인가 했더니 아까 아버지에게 할 수도 있었던 거짓말에 대한 이야기였다.

장소가 스튜디오일 뿐이지 아나스타샤와 함께 있는 건 맞지 않냔 말이었다.

난 살짝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

“명백한 거짓말이에요.”

“멋지십니다.”

조금 빅토르를 흘겨보자 빅토르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하여간 장난기는.

그렇게 상황을 일단락하고, 책상을 내려다보니 메모가 빼곡한 노트와 전자 악보가 보였다. 난 무엇을 해야 할지 깨달았다.

“좋아요…….”

조금 후에 두 사람이 오기로 했고, 다 함께 내 고집에 휘말려 밤을 새우게 되는 것은 나중에 어떻게 답례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정말 미안한 일이지만, 결국 내가 할 일이 바뀌진 않는다.

난 목을 스트레칭하고는 마카로프 프로듀서에게 요청했다.

“마카로프 프로듀서. 조금 전 녹음된 연주를 재생시켜주실 수 있나요.”

“시작합시다.”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그 말만을 기다렸다는 듯 바로 일어나 컴퓨터로 향했다.

몇 번 만에 원하는 바를 조금이라도 얻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냥 끝내는 일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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