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2화
잠시 악보를 읽으며 연구를 하고 있자 스튜디오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빅토르와 함께 나가 보니 검은 스키니진에 청재킷으로 캐주얼한 차림을 하고 있는 아나스타샤가 있었다. 그녀가 손을 들었다.
“나 왔어, 타티아나.”
“아나스타샤!”
난 다가가서 그녀와 덥석 포옹했다. 그것만으로도 복잡했던 머리가 조금 진정되는 것 같았다.
짧은 인사를 나누고, 그녀를 안쪽으로 들였다.
마카로프 프로듀서와 앉아 있던 메인컨트롤 룸 뒤쪽으로 그녀를 데리고 가자,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차를 타면서 이쪽을 보고 인사했다. 아나스타샤와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서로 초면이다.
“어서 오시죠.”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마카로프입니다.”
“아나스타샤예요.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요.”
“이야기요? 별것 없었을 텐데요.”
“실력이 굉장하다고 하던걸요.”
“거참……. 감사합니다.”
아나스타샤는 자신의 나이의 두 배도 넘고 거의 평생을 음악과 함께해 온 마카로프 프로듀서를 대하면서도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여유로운 웃음과 함께 편하게 말한다.
아나스타샤가 날 잠시 내려다보더니, 다시 고개를 들고 말했다.
“오늘 불쑥 찾아와서 실례인 건 알지만, 견학해도 괜찮을까요?”
“물론입니다. 앉으시죠.”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그녀가 온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에 편히 앉으라는 듯 소파 쪽으로 손짓했다.
난 아나스타샤와 함께 나란히 앉았다.
“아나스타샤, 허락은 받고 오신 것 맞죠?”
“아하하하, 그것부터 물어보는 거야?”
아나스타샤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약간 실례되는 질문을 했다는 것을 느꼈지만 그래도 중요한 일이었다. 어떤 이유가 있더라도 이 늦은 밤에 딸이 밖에 나간다는데 좋아할 부모님은 없을 것 같기 때문이었다.
내가 다시 확답을 받겠다는 듯 묻자 그녀는 정말 허락은 받고 온 것이니 걱정 말라는 듯 손을 흔들고는, 그보다 오늘 있었던 일이나 이야기하자고 했다.
“대체 몇 시간이나 있었던 거야?”
“10시간쯤 되었을까요? 그사이 두 곡을 녹음했거든요.”
“세상에.”
대답을 하자마자 아나스타샤는 탄성을 흘렸다. 그리고 방금 전까지 내가 보내던 걱정 어린 시선을 이번엔 그녀가 이쪽으로 보내왔다.
“내가 아니라, 너야말로 집에서 허락은 받았어?”
“루슬란 오빠가 보호자로 와 주실 것 같아요.”
“……네 오빠 천사니?”
아나스타샤는 또다시 믿을 수 없다는 눈을 하더니, 자연스럽게 자신의 오빠인 일리야의 이야기를 꺼냈다. 약간의 애증이 섞인 투덜거림이 귀엽다.
그런 이야기들을 하고 있는데, 똑똑똑 하는 노크 소리가 들리고는 문이 열렸다.
문 너머에는 각 잡힌 셔츠를 입고 구두를 신은 루슬란 오빠가 서 있었다. 언제나처럼 멋들어진 모습이다. 오빠는 아직 대학생이지만 사실 이렇게 보면 좀처럼 학생 같지 않기도 했다.
루슬란 오빠는 탐색하는 듯한 눈길로 전체를 슥 훑고는, 내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순간적으로 얼굴에 놀라움이 서렸다.
“…….”
하지만 그랬던 것도 잠시, 곧 태연하게 이쪽으로 다가오며 인사했다.
“안녕. 좋은 밤이라고 해야 하나.”
“안녕하세요, 루슬란.”
“음……. 아나스타샤, 네가 같이 있는 줄은 몰랐네. 진짜로. 전혀 들은 바가 없어.”
루슬란 오빠는 약간 변명하듯 그렇게 말했고, 아나스타샤는 싱그럽게 웃으며 답했다.
“방금 왔거든요.”
“그래……?”
묘하게 밝은 음색이다. 난 갑자기 묘한 후회감을 느끼는 것과 동시에 그렇게 밀려드는 감정에 약간 당혹스러워졌다.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루슬란 오빠는 아무것도 모르면서도 그저 나 때문에 여기까지 와 준 사람이었다. 거기엔 다른 어떤 이유도 없었다. 분명했다.
아나스타샤가 확인시켜 주었다.
“루슬란도 타티아나가 걱정되어서 와 주신 건가요?”
“그런 셈이야.”
“어쩜 우리 오빠랑 이리도 다를까?”
“일리야 말인가? 좋은 사람 같던데.”
“농담 마세요.”
두 사람이 사이좋게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은 보기 좋았다. 친구인 아나스타샤가 내 가족들과 친하게 지낸다는 것은 상당히 기쁜 일이었다.
그런데 어쩐지 두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면 들을수록 나는 심술궂게 굴고 싶어졌다.
나도 내가 왜 이렇게 못돼 먹었는지 모르겠다. 더 눈치 있게 굴진 못할망정, 자꾸 저 사이에 끼어들고 싶다.
새삼 내가 얼마나 이기적인 사람인지 느끼다가도, 이 반대 상황을 떠올렸다. 내가 일리야와 친하게 지낼 때 아나스타샤도 이런 기분을 느꼈을까?
가만 생각해 보자면 아나스타샤도 일리야를 대놓고 양아치라면서 내게서 멀리 떨어뜨려 놓으려고 하긴 했었다.
그럼 나도 평범한 건가?
“……”
모르겠다. 난 무엇이 평범한 것인지 늘 고민이 많지만, 가끔은 고민을 해도 답이 안 나오는 문제들이 있었다. 난 버릇처럼 그런 것들을 멀리 유예시켜 놓는다.
시선을 느꼈는지 루슬란 오빠가 내 쪽을 돌아보았다.
“아무튼, 아버지에게 허락은 받아 냈어, 타티아나.”
루슬란 오빠는 별것 아니라는 듯 말하고 있었지만 시간이 조금 걸린 것을 보면 아버지와 꽤 길게 이야기를 했을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바로 허락해 주시던가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네 보호자 역할을 한 적이 있었잖아. 그걸 말씀드리면서 내가 와서 보겠다고 했더니 그렇게 하라시던데.”
아버지에게 허락을 받아 내는 건 역시 루슬란 오빠가 도와주지 않고선 불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갈 때도, 그리고 지금 여기에서도 난 너무 많은 도움을 받고 있었다. 조금 삐뚤어지던 기분은 곧바로 되돌아왔다.
“정말 고마워요.”
“대신 여기서 잠드는 건 절대 안 돼. 졸린 것 같으면 강제로 데리고 갈 거야.”
“알았어요.”
어차피 난 잠이 그리 많지 않았으므로 잘 버틸 자신은 있었지만, 그래도 정신을 바짝 차리기로 했다.
루슬란 오빠는 마카로프 프로듀서와도 악수를 나누었다.
“오늘 제가 할 일은 없겠지만, 아무래도 동생이 어리다 보니 제가 옆에 있어 줘도 되겠습니까? 마카로프 일리예비치.”
“편하게 지켜봐 주시죠.”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사람 좋게 웃으며 말했다.
“동생분이 얼마나 대단한지 보시면 놀라실 겁니다.”
“저도 압니다.”
대체 뭘 놀라고 뭘 안다는 건지, 창피해 죽을 것 같으니 당사자를 앞에 두고 저런 말을 나누진 않아 주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마카로프 프로듀서와도 이야기를 마친 루슬란 오빠는 멀찍이 떨어져선 테이블 한쪽 옆에 가지고 온 노트북을 펼쳤다.
“타티아나.”
“예. 루슬란 오빠.”
“지금부터 난 노트북으로 내 일 하고 있을 테니까 넌 신경 쓰지 말고 피아노에 집중해.”
딱히 감시를 하러 오거나 한 것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난 짧게 대답했다.
“열심히 할게요.”
“넌 너무 열심……. 아니야, 그래.”
루슬란 오빠는 중얼거리더니 정말 방해를 하지 않겠다는 듯 노트북 화면을 바라보았다.
“…….”
솔직히 그 모습을 보면서 스스로가 조금 부끄러워졌다.
루슬란 오빠는 귀찮음을 감수하고 날 위해 여기까지 와 주었다. 그리곤 아나스타샤와 놀거나 하지 않고 내가 집중할 수 있도록 최대한 배려 중이다.
그렇다면 지금 나는 루슬란 오빠의 배려에 최선을 다해 답해야 했다.
눈을 돌리자 아나스타샤가 말을 걸었다.
“그래서, 뭐 하고 있었어? 타티아나.”
“데모 녹음을 두 번째 마치고 연구 중이었어요.”
“나도 들어 봐도 돼?”
“물론이죠.”
아나스타샤는 루슬란 오빠처럼 가만히 날 지켜보려고 온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내 친구이자 중앙음악학교 피아노과의 학생으로서 이 자리에 있었다. 그녀의 감상은 굉장히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나도 마카로프 프로듀서도 두 번째 데모곡을 들어 보진 않았기 때문에 우리 세 명은 함께 모니터링을 위한 시스템 앞으로 갔다.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컴퓨터로 녹음된 파일을 재생했고, 곧 스피커로 라흐마니노프의 파우스트 소나타가 재생되었다.
“…….”
직접 연주하면서 들었던 음향과, 지금 이렇게 스피커를 울리며 나오는 음향을 들으면서 또 다른 점들을 깨닫는다.
내가 피아노로 자아낸 이야기들은 그 뉘앙스가 미묘하게 변질되어 있었다. 당연한 차이였다.
난 그 점까지 고려하며 어떻게 하면 조금 더 완성된 주제를 음향적으로도 완벽하게 전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연주자의 기술로는 극복할 수 없는 근본적인 차이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무언가 조금이라도 더 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최선을 다해 본다.
그렇게 우리 세 명은 30분 동안 한 마디 말 없이 소나타를 들었다. 나와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노트를 들고 단편적인 단어나 문장들을 메모하기도 했다.
곡이 마무리되고, 아나스타샤가 웃으며 말했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소나타 1번. 겨울에 연습했었던 곡이네?”
“예. 맞아요. 콩쿠르 무대에 올릴 2번 소나타를 준비하면서 이 1번 소나타도 함께 레슨받았죠.”
고난이도의 대곡인 두 소나타를 동시에 연습하는 날 보면서 당시 아나스타샤는 조금 어이없어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익숙하다는 듯 웃을 뿐이었다.
“이 정도로 만들어 놓았을 줄은 몰랐는데. 내가 무슨 평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걸.”
“기탄없이 말해 주실수록 좋아요.”
내 곡은 아직 많이 부족했다.
한참을 고민하던 아나스타샤가 천천히 운을 떼었다.
“있잖아, 기억나? 타티아나.”
“기억요?”
“응. 너 작년에 처음 왔을 때, 날 붙잡고 연습실로 끌고 갔었잖아. 말로 하기 귀찮으니 피아노로 하겠다는 듯이.”
“그, 그건 조금 오해가…….”
“아무튼.”
집중적으로 러시아어를 교육받으면서, 난 반년 만에 일상회화엔 전혀 문제가 없는 수준까지 도달했지만, 사실 학기 초만 하더라도 긴 문장을 구사하며 무언가 설명하고 변명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그래서 그녀를 다짜고짜 연습실로 끌고 간 것이었다.
그땐 그것이 최선이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얼마나 이상한 짓이었는지 황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다행히 아나스타샤는 그때의 기억을 슬럼프를 넘길 수 있게 된 계기로 받아들여 주고 있었다. 그녀가 말했다.
“그때 내가 부탁해서 네가 쳐 줬던 곡이 라흐마니노프의 악흥의 한때 4번이었어.”
“기억해요. 정말 그때도 라흐마니노프였네요.”
“난 널 잘 알지도 못하면서 네가 그 곡을 분명히 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거든. 그냥 아무 이유 없이 그럴 것 같더라고.”
연주자의 인상에 따라 연주 스타일이나 선호하는 곡을 추리하는 건 별로 의미 없는 일이긴 했지만, 아나스타샤는 단순히 인상을 넘어서 그 이면의 무언가를 느끼는 것 같기도 했다.
아나스타샤가 웃으며 농담조로 말했다.
“나 꽤 예리하지 않아?”
“굉장히 예리하신 편이죠.”
“그래서 그런지 지금 이런 기분이 드네.”
아나스타샤는 약간 눈빛을 달리하며 진지하게 고했다.
“네가 바라면 바라는 대로, 이 곡을 연주할 수 있게 될 거야, 타티아나.”
“…….”
지금 내가 무언가 쫓고 있다는 것을 그녀도 느낀 것일까.
난 감상인지 응원인지 모를 말을 들으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아나스타샤는 상냥하게 웃었다.
“연주에서 네가 라흐마니노프를 정말 원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져.”
“1백 년만 이전에 태어날 걸 그랬어요.”
“안 돼.”
라흐마니노프가 살던 시대에 같이 살고 싶다는 뜻으로 농담을 했더니, 아나스타샤는 대뜸 단호하게 양팔로 엑스 자를 그렸다.
“그럼 내가 타티아나랑 못 보잖아.”
난 웃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옆에 있던 마카로프 프로듀서도 말을 더했다.
“자신이 바라는 이상적인 음악을 손수 만들어 내는 건 모든 연주자의 숙명이겠지요. 한 말씀만 드리자면, 전 본격적으로 기악을 전공해 본 적은 없습니다만…… 가끔 음악을 프로듀싱하다 보면 느끼곤 합니다. 멀리 도망치는 곡을 쫓아가서 움켜쥐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그렇게 쫓다 휘둘리기도 한다는 것을.”
난 마카로프 프로듀서의 말에 동의했다.
프레이즈 하나의 해석으로, 더 심하게는 음 하나의 색깔로 곡 전체의 흐름이 휘청거리는 일은 항상 있는 일이었다. 그렇게 곡이 휘청거리는 것을 손으로 움켜쥐고 바로잡으려다 보면, 거세게 저항하는 곡에 휘둘리기도 한다.
고개를 끄덕이자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이어 말했다.
“물론 타티아나는 아주 절묘하게 자신의 균형을 잡고 있죠. 정말 멋지게요. 헌데, 곡이 타티아나에게로 찾아오게 만드는 방법도 있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연주자의 스타일에 곡을 맞추라는 뜻이었다. 정말 숙련된 연주자는 몸 가는 대로 연주해도 그렇게 카리스마 있게 곡을 이끌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러 가지가 뒤섞이며 다시 일궈 낸 내 스타일은 그렇지 않았다.
짧은 시간에 처음부터 철저하게 설계도를 들고 기반부터 다져 나간 음악이다. 그사이 많은 것들이 섞여 들어가기도 했지만, 목소리를 내는 것 하나에서 정말 손가락의 근육 하나까지도 의식하고 연구하며 빠듯하게 틀을 갖춰 맞췄다.
내 실력은 그렇게 아카데믹하게 이루어져 있다.
문득 에르네스트가 떠올랐다. 정말 모든 시대의 작곡가들의 곡을 가져다주더라도 러시아 남자인 그는 러시아만의 격이 물씬 느껴지는 연주를 할 수 있었다. 가만히 듣고 있으면 그의 카리스마와 실력에 대작곡가들의 곡들이 매료되어 따라가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지, 지금의 난 잘 모른다.
“전 그렇게까지 천재가 아니라서요. 어렵네요.”
“뭐라고요? 하핫…….”
“타티아나……. 네가 천재가 아니면 대체 누가 천재야?”
아나스타샤가 헛웃음을 터뜨린다.
방금 생각한 에르네스트나 아나스타샤야말로 정말 천재였지만, 난 더 말하지 않고 그저 힘없이 웃어 버리고 말았다.
아나스타샤는 물끄러미 날 보더니 말했다.
“어쨌든 넌 이 연주가 마음에 안 드는 거지?”
“……조금 모자라다고 생각해요.”
“가자. 연구하러.”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 그녀가 상쾌하게 말했다.
그녀가 그렇게 먼저 말해 주는 것만으로도 기운이 샘솟는 기분이 든다.
나와 마카로프 프로듀서, 아나스타샤는 테이블에 둘러앉아서 분석과 연구를 시작했다. 아나스타샤는 내 연주를 한 번 들은 것만으로도 말하고 싶은 것이 많은 듯했다.
우리는 악보를 짚어 가면서 음 하나하나까지 세세하게 곡을 가다듬었다. 난 내가 느끼는 흐름을 말했고, 아나스타샤는 조금 더 세련된 표현을 제안했다. 아나스타샤와 곡 연구는 그간 수도 없이 했으므로 우리에겐 일련의 체계마저 잡혀 있었다.
거기에 풍부한 지식과 뛰어난 실력을 지닌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합세해서 우리가 큰 그림을 어떻게 이끌어 나가는 것이 좋을지 조언해 주었다.
혼자서는 미처 생각도 못했을 길이 눈앞에 펼쳐졌다.
혼자서는 디딜 엄두도 내지 못했을 걸음을 내딛는다.
“……”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이 스튜디오는 밖으로 통하는 창문이 없어서 시간의 흐름을 느끼기 힘들었다.
잠깐 고개를 들고 스트레칭을 하는데, 저편에 있던 루슬란 오빠와 눈이 마주쳤다.
난 고마움의 의미로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루슬란 오빠는 피식 웃더니 말했다.
“음악이 아니라 소설을 파고들기도 하는구나.”
“모티브가 된 원작이 있는 음악이라서요.”
“파우스트라. 음…….”
무언가 생각나는지 루슬란 오빠는 잠시 천장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말했다.
“거기에 보면 파우스트의 대사 중에 이런 말이 있을 거야.”
다시 날 보는 루슬란 오빠의 눈빛은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오래된 고서들에서 지식을 얻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진리를 향한 갈증을 해결해 주진 못하니, 결국 스스로의 영혼에서부터 진리를 찾아내야 한다고 말이지. 네 진리가 음악에 있다면 원작에 매몰……. 나 참, 내가 무슨 소릴 하는 거지. 네가 나보단 훨씬 알아서 잘할 텐데.”
말을 하다가 말고 갑자기 창피해졌는지 루슬란 오빠는 대충 말을 맺었다. 난 얼른 말을 붙였다.
“파우스트를 읽어 보신 적이 있으시네요?”
“남들도 다 읽어.”
대수롭잖다는 듯 말하고 있지만, 오빠는 파우스트를 그냥 읽어 본 것이 아니라 몇몇 대사를 외우기까지 하고 있었다.
이전에도 종종 시를 읊곤 하는 모습을 보며 루슬란 오빠의 문학적 소양이 상당히 높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런 모습은 볼 때마다 색다르다.
난 아예 조금 더 자세히 물어보기로 했다.
“저기, 루슬란 오빠. 그렇다면 오빠가 이해하고 있는 파우스트에 대해 이야기해 주실 수 있나요?”
“내 이야기 같은 건 도움이 안 될 텐데.”
“아뇨. 해 주세요.”
난 강하게 주장했고, 루슬란 오빠는 약간 주저했지만 우리 옆으로 와서 파우스트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천천히 해 주었다.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해 주는 해설과 비슷한 부분이 대부분이었지만, 곳곳에 마카로프 프로듀서도 짚어 내지 못한 날카로운 견해를 보이기도 했다.
특히 메피스토펠레스가 단순히 파우스트를 타락시키기 위해 등장하는 악마가 아니라, 그보다 조금 더 신학적인 부분에 닿아 있는 존재라는 설명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난 보다 다채롭고 깊이 있는 이미지들을 많이 얻어 낼 수 있었다.
한참 경청하고 있는데, 루슬란 오빠가 문득 물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가 도움이 되나 정말……?”
“예.”
피아노곡에 대한 연구를 하는 데 이렇게까지 소설에 깊게 파고드는 것은 별 소용없는 일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머릿속으로 이렇게 이야기 전체의 흐름을 다시 분석하고 그것을 정갈한 언어로 정리하고, 다시 내게 보다 익숙한 언어인 음악으로 승화시키면서 뚜렷하게 그것들을 가다듬고 있었다.
이 모든 것엔 내 주변에 모인 사람들의 도움이 스며들어 있다. 그 점은 분명하게, 음악으로 보일 일이다.
확신에 찬 어조로 재차 말했다.
“피아노로, 들려 드릴게요.”
루슬란 오빠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 말 없지만 믿음이 담긴 시선. 난 그 시선에 깊은 감사를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