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263화 (263/1,277)

##  263화

새벽 1시.

다시 피아노 앞에 앉았다. 건반을 내려다보니 마음이 차분해진다.

머릿속에는 조금 전까지 들었던 온갖 정보들이 어지럽게 얽혀 있다.

괴테와 소설 파우스트에 대한 해설들, 그것을 주제로 하여 음악으로 승화시킨 라흐마니노프의 의도와 해석. 세심하고도 복잡하게 구성된 이야기들의 구조와 짜임새. 각각의 이야기들이 지향하는 하나의 방향.

그 모든 정보들을 합쳐서 음악으로 이루어 낸다. 머릿속에는 방금 전과는 또 조금 달라진 파우스트가 흐른다.

“…….”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머릿속에서 순간적으로 몇 번이고 되풀이된 이 음악을, 시간의 제약이 있는 현실에 재현해내야 한다.

그 순간 음악은 비틀리고 곳곳이 부스러진다. 현실의 제약은 비단 시간뿐만이 아니라서 팔은 무겁게 느껴지고, 손가락은 느리고, 건반은 둔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피아노 소리만큼은 가능한 최고의 소리로 만들어 내야만 했다.

잠시 기다리니,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다는 신호를 주었다.

난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소나타 제1번, 파우스트 소나타의 세 번째 데모 녹음에 들어갔다.

전자 악보는 필요 없었다. 이제 완벽하게 암보한 악보를 손으로 짚어 나갈 뿐이다. 극도로 신경을 집중한다. 건반의 깊이를 느끼며 내게 허락된 모든 것들을 표출해 냈다.

오로지 연주에만 집중하며 30분이 흐르고, 세 번째 녹음이 마무리되었다.

손을 내리고, 고개를 숙인다. 건반을 노려보았다. 아직 한 발자국 모자라다. 전체적인 완성도에다가 중요한 무언가를 꽂아 넣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인데, 약간 아리송하다.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부스 안으로 들어와서는 사과하더니 마이크 위치를 조금 손보겠다며 레이저 거리측정기까지 동원해서 섬세하게 마이크의 위치와 각도를 움직였다.

많이 움직인 것도 아니고 뒤로 5cm 정도에 각도는 한 2도 정도 움직인 것 같다. 하지만 음을 잡아 놓는 이 부스 안에서 저런 마이크 위치의 조정이 생각보다 엄청난 차이를 가져온다는 것을 난 안다.

“…….”

프로듀서가 내 소나타에 맞추어 마이크를 조금 손보는 사이 밖으로 나와서 잠시 목을 축였다. 아나스타샤는 내게 음료를 가져다주고는 잠시 앉아서 쉬자고 했다.

아나스타샤는 신기하다며 내 손을 만지작거렸다. 다른 사람에게 손을 내어 주는 건 내 목을 조를 수 있도록 내어 주는 일보다 심각한 일이었지만, 난 아나스타샤라면 정말 내 목에 손을 대더라도 상관없었다.

그녀가 내 손을 만지며 간질거리는 느낌이 나쁘지 않다. 아나스타샤는 내 손으로 대체 어떻게 그런 소리를 내는지 모르겠다며 연신 모르겠다는 말만을 반복했다.

난 더 깊어야, 더 깊어야 한다고 대답했다.

내가 타고난 신체적 조건은 결코 연주자로 살기에 적합하지 않다. 하지만 지금 이루어 놓은 수준에서 조금 나아가 더 잘할 수 있음을 믿는다. 테크닉이 날 건반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만들 수준에 이르긴 어렵겠지만, 이전과는 다른 가능성을 느낀다.

30분 정도 쉬면서 직전 연주에 대한 짧은 감상 등을 받고, 새벽 2시. 네 번째 녹음에 들어갔다.

시간이 흐를수록 내 감각들은 예민하고 날카로워졌고, 손가락은 보다 가볍게 휘둘러도 피아노를 부숴 버릴 것만 같은 소리를 뽑아내었다. 턱걸이로나마 기술적 한계의 그 너머를 엿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보다 집중해서 연주에 임했다. 거대한 서사시가 보다 선명해진다.

네 번째 녹음이 끝나고,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부스로 다시 뛰어 들어와선 내게 사과했다. 마이크를 조정한 것이 아무래도 괜한 일이었다는 것 같다. 난 상관없다고 웃어 보이며 프로듀서의 사과를 받았다.

나야말로 프로듀서에게 사과해야 했다. 이 스튜디오는 음악을 녹음하는 곳이지 이렇게 집에서나 해야 할 연습을 하는 곳이 아니었다.

난 이 훌륭한 장비들이 내 곡의 연구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 분명해서, 그리고 그 도움을 받는다면 정말 코앞에 아른거리는 것을 낚아챌 수 있을 것 같아서 부탁을 하고 있었다.

내 고집에 많은 사람들이 함께 밤을 지새우고 있지만, 지금 난 여기서 나갈 수 없었다.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내 말을 듣고는 스튜디오의 부스를 연습실로 사용한다고 해서 자신이 손해 볼 것도 없다고 답했다. 내가 의아함을 표하자 그는 내 연주가 횟수를 반복할 때마다 나아지는 것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굉장한 전율을 느낀다고 말했다.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그렇게 생각해 준다면, 마음이 조금 편해진다.

프로듀서는 다시 마이크를 고쳐 주었고, 2시 50분에 다섯 번째 녹음에 들어갔다.

1악장의 파우스트의 표현에 조금 더 공을 들였다. 호롱불에 일렁이는 파우스트의 그림자가 느껴지도록, 책상 위에 놓인 책이 펼쳐지며 나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파우스트의 웃음소리에 서린 광기가 보다 또렷하게 느껴지도록.

토해 내고, 쏟아 냈다.

음악은 뭉쳐서 하나의 덩어리를 이룬다.

그 형태를 갖추고, 스르르 일어선다.

내가 연주하는 음악에 따라 이야기를 지닌 검은 형태가 춤을 추고 농담을 지껄였다. 듣기에 괜찮았다.

녹음을 마치고, 이번엔 정말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기술로 최상의 곡을 최고의 형태로 펼쳐 내었다.

객관적으로 보아도 이 정도라면 큰 무대에 올려도 자존심 상하지 않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느슨해진 머리에 약간의 자부심마저 끼어든다.

시간을 보니 3시 20분이었다. 이렇게 다섯 번째 녹음으로 마무리를 짓더라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다. 난 확신했다.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만족하고, 아나스타샤는 기뻐하고, 루슬란 오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것이다.

하지만, 난 다시금 되뇐다.

정말 최선이었나?

이 정도로 내 열다섯 살을 영원히 기록해서, 내 긍지는 만족할 수 있는가.

“…….”

잠시 생각해 보고 고개를 저었다. 조금 풀어지는 정신을 다잡았다. 흐트러질 때가 아니었다.

연주회의 무대였다면 어쩔 수 없이 이 곡으로 만족하고 앙코르 곡을 몇 곡 연주한 뒤에 내려왔을 것이다. 난 에르네스트처럼 앙코르에 깐깐한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본무대와 상관없이 앙코르를 연주하는 편이다.

하지만 이곳은 무대가 아니었다. 스튜디오의 부스였다.

더 잘할 수 있다면 앞으로도 몇 번이고, 몇 백 번이고 내 녹음을 도와줄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있었다.

그렇다면 거기에 응해 주는 것이 연주자로서의 내 책임이었다.

밖으로 나와서 잠시 쉬면서 다시 연주를 되풀이해 들었다. 이번엔 마카로프 프로듀서도, 아나스타샤도 별다른 말이 없었다. 이전까지 나누었던 연구들은 잘 피드백되어 내 연주에 스며들어 있었다.

다시 악보를 보고 있어도, 두 사람은 그 누구도 내게 잘 안 되고 있냐고 묻지 않았다. 잘되고 있었다. 이보다 더 잘될 수가 없을 정도로. 그건 확실했다.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 이것이 아니라 생각할 뿐이다.

그 최선은 절대적인 기준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어서 무작정 시간을 쏟아붓는다고 하여 끝없이 높게 올라가진 않았다. 어느 곡이나 연주자의 테크닉과 표현력의 한계를 증명하는 완성도는 존재했고, 난 그 부분을 찾고 있었다.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다과와 차를 다시 가져다주었다. 루슬란 오빠는 말없이 노트북으로 자신의 일을 하고 있었고, 아나스타샤는 내 옆에 있어 주었다. 난 혼자서 다시 악보에 몰입했다.

3시 50분경. 여섯 번째 녹음을 마카로프 프로듀서에게 부탁했다.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내 곡의 완성도에 대한 이야기는 일절 하지 않고 그저 내가 하자는 대로 들어주었다.

다시 연주를 마치고, 난 잠시 숨을 고른다. 양팔을 스트레칭했다.

몇 번이나 연주하면서 몸에는 피로가 쌓인 데다가 잠까지 못 잔 탓에 눈이 뻐근했다. 항상 스스로의 컨디션을 잘 지켜야 하는 연주자로서 난 지금 당장 폭신한 이불에 들어가 잠들 의무가 있었다.

하지만 온몸의 신경은 그 어느 때보다 예민해졌고, 심장은 그 어느 때보다 거세게 뛰고 있었으며, 머리는 그 어느 때보다 차갑게 식어 있었다.

한 걸음만 더, 더 내디디면 무언가 꼬리를 밟을 수 있을 것 같다.

잠들어 버릴 순 없었다. 잠든 사이에 멀리 도망가 버리면 잡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다시 집중한다. 난 부스에서 일어나지 않고 그대로 다시 마카로프 프로듀서에게 다음 녹음을 준비해 달라고 부탁했다. 곧바로 일곱 번째 녹음이 시작되었다.

***

마카로프는 부스 안의 타티아나를 보며 감동마저 느꼈다.

연주도 연주이지만, 일곱 번의 녹음을 하면서 매 녹음마다 분명하게 한 발자국씩 나아간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귀와 테크닉이 훌륭한 천재 연주자들은 재녹음을 할 때마다 확실히 이전의 실수를 피드백할 줄 알고, 그래서 몇 번 녹음하면 훨씬 훌륭한 음원을 뽑아내곤 했지만, 타티아나 같은 경우엔 그 정도가 상상을 초월했다.

일곱 번의 녹음을 하면서 중간에 한 번의 기복도 없이 차분히 계단을 오르는 듯했다. 높이 매달려 있는 무언가를 향해 손을 뻗듯, 그렇게 타티아나는 계속해서 올라갔다.

“…….”

음악을 정확하게 듣는 귀, 예술적 소양에서 비롯되는 해석력, 기본적으로 좋은 머리에서 나오는 이해력, 그리고 이해한 모든 것을 악기를 통해 현실에 구현해 낼 수 있는 기술까지.

타티아나는 천재 연주자들이 으레 갖추어야 할 모든 것들을 갖춘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마카로프는 시계를 살폈다.

새벽 5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간.

그녀도 인간이라면 지칠 수밖에 없다.

마카로프는 수많은 아티스트들과 작업을 하면서 이렇게 새벽을 꼬박 새우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보통 그런 경우엔 저녁 늦게 만나서 저녁을 먹고 작업을 시작하곤 했다.

하지만 타티아나의 경우엔 오후 2시에 스튜디오에 와서는 줄곧 연구와 피아노에 매달려 있었다. 스튜디오에서만 15시간이었고 전화를 걸어왔던 아침부터 대체 몇 시간을 깨어 있었던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렇게 오래 집중력을 혹사시키다 보면 성인들도 지쳐 쓰러진다.

마카로프도 같은 시간을 깨어 있었던지라 피곤함을 느끼고 있었다. 레코딩에만 신경 쓰고 있었던 그도 이렇게 지쳤는데, 직접 어마어마한 대곡을 몇 번이나 연주해 낸 타티아나는 말 할 것도 없이 지쳤을 것이다.

“…….”

하지만 타티아나는 여전히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 눈빛엔 형형한 귀기가 서려 있었고 건반을 짚은 손가락은 갈수록 신묘해지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열다섯 살의 소녀에게 피아노라는 악기는 크고 무거우며 다루기 힘든 악기로밖에 보이지 않는데도, 타티아나는 자신의 열 배 가까운 피아노를 집어삼키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있었다.

마카로프는 곡의 클라이막스에 다다른 타티아나를 바라보면서, 피아노 앞의 그녀는 몇 날 며칠을 두어도 지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마저 했다. 그녀도 사람이니 그럴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비상식적인 생각이 자꾸만 든다.

그렇게 뚫어져라 부스를 바라보던 마카로프는 타티아나가 일곱 번째 연주를 마치는 것을 확인하고, 그 모든 여운까지 담아낸 뒤 녹음을 끊었다.

이번에도 기가 막힐 정도로 수준 높은 연주였다. 하지만 고개를 숙이고 있는 타티아나는 만족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또다시 여덟 번째 연주를 하겠다고 할까? 그렇다면 연달아 1시간 30분을 내리 연주에 임하는 격이다. 프로 연주자들도 혀를 내두를 수준이다.

“……아나스타샤.”

그런데 부스 안의 타티아나가 갑자기 아나스타샤를 불렀다. 그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마카로프는 깜짝 놀랐다.

벽에 기대어 팔짱을 끼고 서 있던 아나스타샤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아나스타샤는 부스 쪽으로 향하는 마이크로 말했다.

“응. 듣고 있어.”

“정말 죄송한데……. 티슈가 있다면 가져다주시면 안 될까요. 부탁드려요.”

“……티슈?”

마카로프는 약간 이상함을 느꼈다.

티슈를 가져다주는 것 정도는 쉬운 부탁이었지만, 타티아나는 쉬운 일이라 해서 마구 부탁해 대는 성격이 아니었다. 티슈가 필요하다면 직접 나와서 챙겼을 것이다.

똑같은 이상함을 느꼈는지, 아나스타샤가 티슈 상자를 휙 들고 부스로 곧장 향했다. 마카로프와 루슬란도 뒤따라갔다.

부스 안에 먼저 들어선 아나스타샤가 타티아나의 어깨를 붙잡으며 말했다. 숫제 비명이다.

“타티아나! 너 괜찮아?”

“……괜찮아요. 현기증이 조금…….”

말은 괜찮다고 하고 있었지만 안색이 창백했다.

타티아나는 입과 코를 손으로 가리고 있었는데, 빨갛게 핏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아나스타샤가 기겁을 하며 그녀의 손을 떼어 냈다. 각혈이라도 했다면 당장 응급실로 데려갈 생각을 하고 있는데, 다행히 코에서 나는 피였다.

일곱 번째 녹음에 들어설 때만 해도 괜찮아 보였는데 연주에 쏟아붓던 집중이 풀어지자 급격히 컨디션이 나빠졌고 그 여파가 닥친 듯했다.

아나스타샤는 당황해하며 티슈로 타티아나의 손과 얼굴을 닦아 주었다. 다행히 심하지는 않아서 몇 장으로 닦아 낼 수 있었다.

코에서 흐르는 피는 틀어막지 않고 바닥으로 흐르게 두었다. 바닥에 핏자국이 번져 갔다.

마카로프는 현기증을 느끼는 타티아나를 화장실로 데려가는 대신 생수병과 수건을 가지고 와서 씻을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아나스타샤가 타티아나의 손과 얼굴을 닦았다. 타티아나는 자신이 할 수 있다며 달라고 했지만 아나스타샤는 절대 내어 주지 않았다.

몇 분 정도 시간이 지나자, 타티아나의 코에서 피가 멎었고, 옷과 바닥에 남은 핏자국을 빼면 깨끗해졌다.

여전히 멍한 시선의 타티아나가 중얼거리며 말했다.

“목이 말라요…….”

“물 여기 있어. 마셔 봐.”

“고마워요, 아나스타샤.”

그냥 물병을 건네주었더니 타티아나는 물병의 뚜껑을 열지도 못했다. 저 손으로 도대체 피아노를 어떻게 쳤는지 기가 막힐 따름이다.

뒤늦게 알아차린 아나스타샤가 뚜껑을 열어 주자 타티아나는 조심스레 물병을 들고 꼴깍이며 마셨다. 힘없이 들어 올린 팔이 가늘게 경련했다. 마카로프는 그 모습을 보곤 인상을 썼다. 역시 지쳐 버린 것이다.

그녀는 도저히 지치지 않을 것 같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던 스스로를 저주하며 마카로프는 오늘 녹음은 여기서 중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프로듀서이기 이전에 어른으로서 그녀를 내버려 두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몇 모금도 안 마신 물병을 내려놓고 타티아나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조금 놀랐네요……. 미안해요.”

부끄럽다는 듯 말하고 있지만,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었다.

타티아나는 대곡을 몇 번이나 연주하면서도 초인적인 집중력을 유지해 냈다. 단지, 이제 정말 한계에 다다른 것이다. 컨디션은 어느 순간 한 번에 무너진다.

아나스타샤가 그녀를 다독이며 말했다.

“쉬자, 타티아나.”

“…….”

“일어나. 자.”

“아나스타샤…….”

타티아나는 가장 친한 친구인 아나스타샤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기꺼이 따르곤 했지만, 지금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간절한 눈으로 아나스타샤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모습으로도 눈빛만큼은 강렬하게 빛나고 있었다.

다시 한 번 강하게 말하려던 아나스타샤는 순간 그 눈빛에 압도당했는지 멍하니 타티아나를 내려다보았다. 친구에게 약한 것은 아나스타샤 역시 마찬가지였다.

여기서 한 사람, 타티아나를 강제할 수 있는 사람이 나섰다.

“타티아나.”

루슬란이 엄격한 얼굴로 다가갔다. 어둡게 표정을 굳히고 있는 루슬란은 언뜻 아버지인 유리를 닮아 있었다. 그 목소리까지도.

낮게 울리는 목소리가 명령했다.

“집에 가자.”

“루슬란 오빠…….”

타티아나의 부름에도 루슬란은 엄하게 말했다.

“이쯤 하면 되었다곤 하지 않을게. 난 음악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서 네 기준을 알 수가 없으니까. 하지만 오빠로서 말할 순 있겠지. 그만해야 해. 타티아나.”

격렬하게 갈등하는 얼굴로 타티아나가 루슬란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다가 다시 한 번 말한다.

“저…… 정말 괜찮아요. 지금 순간적으로 집중력이 흐트러져서…….”

“집중력의 문제가 아니잖아. 넌 내가 바보로 보여?”

“…….”

루슬란은 단호했다. 곡에 집중하고 싶다는 동생을 응원하고 지켜보기 위해 왔지만, 이렇게 완전히 지쳐서 허덕이는 모습을 보면서까지 마냥 응원하고 있을 오빠는 없었다. 더군다나 피까지 본 루슬란은 조금 예민해져 있었다. 아직도 타티아나의 원피스엔 핏자국이 얼룩져 있었다.

타티아나도 그 마음은 이해하는 듯했지만, 여전히 미련이 남는지 다시 한 번 간곡히 청했다.

“알았어요. 하지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해 볼 수 있도록 해 주세요……. 부탁해요.”

“넌 네가 부탁하면 다 내가 들어줄 거라고 생각하지?”

“제발요.”

“…….”

마카로프는 체력이 완전히 바닥에 달한 타티아나가 왜 이렇게까지 억지를 쓰는지 이해하고 있었다.

억지가 아니었다. 일곱 번 연주하면서 타티아나는 일곱 번 성장했고 그 폭은 하룻밤 만에 일어났다기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격차를 보였다.

마카로프가 듣기에도 분명하게 느껴지는데, 연주하는 본인인 타티아나가 느끼지 못할 리 없었다. 여덟 번째로 발돋움할 곡은 그야말로 비상할지도 모른다. 이전까지 녹음들을 딛고, 차원이 다른 곡을 만들어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확답할 수도 없고 설명하기도 힘들지만, 타티아나는 그것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절실한 타티아나를 바라보면서 루슬란은 마음이 흔들리는 듯 입을 꾹 다물고 있었지만,

결국 고개를 저었다.

“안 돼.”

“…….”

타티아나는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루슬란이 타티아나를 집에 데리고 가서 재우는 것으로 오늘 밤이 끝나려는 순간, 가만히 베르체노프 남매를 지켜보고 있던 아나스타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루슬란. 저도 부탁할게요. 타티아나가 한 번만 더 해 볼 수 있도록 해 주세요.”

“아나스타샤……?”

루슬란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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