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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268화 (268/1,277)

##  268화

빅토르에게 무언가 하려던 건 아니었지만 살금거리며 다가가다가 딱 걸리고 나니 곧 죽어도 결백하다고 말할 상황이 아니었다.

“저기, 그게…….”

“크크…….”

안절부절못하고 있자 빅토르가 낮게 웃더니 소파에 바로 앉으며 말했다.

“괜찮으니까 너무 당황하지 마시죠.”

“다, 당황요?”

“명백히 당황하고 계십니다만? 너무 그러진 마시죠. 아가씨가 제게 장난 같은 걸 치실 분이 아니라는 건 잘 아니까요.”

빅토르는 내가 손에 무기를 들고 있었더라도 철석같이 믿는다는 듯 그렇게 신뢰로 가득 찬 말을 건넸다.

하지만 장난 같은 건 절대 치지 않을게 뻔하다는 말투에 약간 반항심이 들었다. 머리가 아닌 입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난 새침하게 말했다.

“장난치려고 했었는데요?”

“오……. 정말입니까?”

놀라워하는 빅토르의 반문에 무작정 고개를 끄덕끄덕하면서도 머릿속으로는 비상사태에 돌입했다. 대체 어쩌자고 스스로의 결백을 내던지는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머리를 굴려 보았지만 이런 소릴 한 마땅한 이유도, 이후의 답도 모르겠다. 난 왜 이럴까.

빅토르는 재미있다는 듯 물었다.

“무슨 장난입니까?”

“그게……. 음, 주무시고 계신 사진을 찍으려고 했어요. 맞아요. 그랬어요.”

“제 자는 모습이 이상했습니까?”

“예? 아뇨?”

“그럼 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러게요……?”

스스로가 멍청이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자고도 어젯밤 후유증이 머리에 남아 있나 보다. 제대로 생각할 수가 없다.

빅토르는 킥킥거리며 웃더니 손을 늘어뜨렸다.

“자는 척이라도 해 드릴까요.”

“괜찮아요. 미안해요……. 그보다 빅토르, 어떻게 눈을 감고도 저인 줄 아셨나요?”

“자면서도 그 정도는 해야 이 일을 하죠. 저기 자는 척하는 놈처럼 말이죠.”

초능력자 빅토르는 손가락으로 옆 소파를 가리켰다.

거기에 널어놓은 빨래처럼 드러누워 있던 자하르가 번쩍 눈을 떴다. 순간 너무 놀라서 소름이 다 돋았다.

자하르가 빅토르를 향해 말했다.

“왜 그러십니까? 일부러 눈치껏 가만히 있었는데.”

“눈치는 무슨 눈치야. 헛소리 말고 일어나. 아가씨 앞이다.”

“나 참…….”

자하르도 소파에서 몸을 휙 일으키더니 제대로 앉았다.

난 놀라다 못해 약간 무섭기까지 했지만, 트레이닝복 차림의 두 사람이 투닥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놀랐던 가슴은 금방 진정되었다.

그렇게 일어난 자하르까지 세 명은 잠시 휴게실에 앉아 담소를 나누었다. 대부분의 이야기가 간밤에 있었던 일들에 대한 것이었다.

나와 빅토르가 스튜디오에 있는 사이 소로킨과 자하르는 루슬란 오빠의 경호원분들과 함께 스튜디오 전체와 그 근처를 철통같이 경호하고 있었다고 한다.

내가 집에 들어가지 않으면 경호원분들이 함께 밤을 새울 것이라는 건 각오하고 있었던 것이었으나 이렇게 자하르가 당연한 일이라는 듯 담담하게 말하는 것을 들으니 가슴이 조금 아팠다.

그리고 내가 쓰러진 뒤의 이야기로 이어지려는 찰나였다.

“…….”

자하르가 한순간 입을 다물었다. 눈치채기도 힘들 정도로 짧은 침묵 후에 그가 빠르게 덧붙이듯 말했다.

“아가씨가 쓰러졌던 것은 정말 큰일이긴 했지만, 그래도 다행이었죠. 급히 병원으로 모시니 단지 수면 부족과 피로로 쓰러지신 것이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유리 님의 결정에 따라 바로 집으로 모셔 온 것이 전부입니다.”

“그것뿐이었나요?”

“……? 그렇습니다만.”

자하르는 프로 중의 프로였고 나 같은 애에게 속내를 들킬 정도로 어수룩하지 않았으나, 난 일종의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이 시간에 일부러 숙소까지 온 것도 그것 때문이었다.

“자하르와 빅토르는요? 별일 없었나요?”

“…….”

아예 대놓고 물어보자 자하르가 아예 조금 더 방어적으로 대답했다.

“저희 일 같은 건 아가씨께서 신경 쓰실 일이 아닙니다. 중요한 건 아가씨의 건강 문제뿐입니다.”

“아뇨, 자하르. 제가 신경 써야죠. 제가 아니면 누가 신경 쓰나요?”

“아가씨…….”

“빅토르도, 소로킨도 똑같아요. 절 신경 써 주시는 만큼 제가 신경 써 드릴 거예요.”

몇 번이고 다짐한 바 있는 일이다. 이 사람들이 날 지켜 주는 만큼 이 사람들을 지키는 건 나여야만 했다. 물론 나 혼자 이렇게 생각할 뿐이고 내 경호원들은 단순히 월급 받고 내 안전을 지키는 일을 할 뿐인진 모르겠지만, 난 그게 전부만은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

자하르는 날 멀거니 바라보더니 대뜸 한숨을 쉬었다.

“하…….”

사람을 앞에 두고 한숨을 쉬지 말아 달라고 할 수도 있었지만, 같은 한숨이어도 지금 자하르는 한심하다거나 귀찮다는 느낌이 아니었다.

난 기세를 몰아 다시 물어보았다.

“말씀해 주세요. 혹시라도 크게 문책당하거나 하시진 않았나요?”

“곤란합니다, 아가씨.”

“…….”

이것도 괜한 짓일까, 자존심을 건드리는 짓일까. 잘 모르겠다. 다만 난 밤새 내 고집에 어울려 고생만 했을 뿐인 사람들이 괜한 불이익을 당하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자하르는 말을 삼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말하기 껄끄러운 듯 했다.

그 대신 빅토르가 시원스레 대답했다.

“아침엔 유리 님이 머리끝까지 화가 나시긴 했었죠. 예고르도 심각했었고. 아가씨에 대해선 걱정이 많으신 분들이시니.”

“역시…….”

아버지가 루슬란 오빠에게 화를 내시던 것을 보고 직감한 것이 옳았다.

아버지가 내 경호원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단순 경호 그 이상이었다. 내 주변의 인간관계를 파악한다든지 하는 일은 기본처럼 있었고 그 외에도 온갖 일들이 맡겨지곤 했다. 그리고 거기엔 미성년자인 데다가 체력도 그리 안 좋은 내 건강을 체크하는 일도 포함되어 있었다.

분노한 아버지가 내가 기절해 있는 사이 무슨 말을 했을진 모르겠지만, 조금 걱정이 된다.

감봉이라도 당했으면 어떻게 하나 걱정하고 있는데, 빅토르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래야만 할 상황이었고, 점심 즈음 아가씨가 일어나신 후로는 다들 한시름 놓았으니까요.”

“아, 그런가요……. 정말 괜찮은 건가요?”

“예. 걱정 마시죠. 그나저나 아가씨.”

“예?”

“아가씨야말로 유리 님께 크게 혼나시진 않았습니까?”

반대로 빅토르가 물었다.

점심에 잠깐 깨어났을 때 있었던 일들을 떠올렸다.

처음에 아버지는 분명 차가운 분노를 흩뿌리시면서 날 변호하려던 루슬란 오빠를 윽박지르고 화를 내시기도 했지만, 사실 내게 크게 무어라 하시진 않았다.

“음……. 별로요.”

“아침에 유리 님이 노발대발하시는 것을 본 저로선 믿기 어렵군요. 유리 님이 그냥 넘어가실 분도 아닌데.”

빅토르의 말을 듣고 생각해 보니 약간 묘했다. 분명히 훨씬 더 혼나고 벌을 받았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었는데, 아버지는 그저 내가 괜찮다면 되었다며 넘어가 주셨다. 난 그때를 떠올리며 말했다.

“그저…… 잘못했다고 말씀드렸을 뿐이에요. 벌을 받아야 한다면 받겠다고도…….”

“…….”

내 말에 빅토르가 잠시 말없이 날 올려다보더니, 실없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유리 님이 난감하셨겠군요.”

“……왜요?”

“흠, 말씀드리진 않으렵니다.”

“왜요??”

“전 지금 그런 아가씨가 좋으니까 말이죠.”

장난스럽게 하는 그의 말이, 꽤 기분 좋게 들렸다. 나도 이렇게 편하게 이야기해 주는 빅토르가 좋았다.

빅토르가 이야기를 하다 말긴 했지만 더 캐물어 볼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 때문에 내 경호원들에게 심한 문제가 생긴 것 같진 않았고, 빅토르는 날 아낀다.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빅토르 역시 아무 문제없다는 듯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트레이닝복 차림에 선글라스도 끼지 않은 빅토르는 그 어느 때보다 더 친밀하게 느껴졌다.

“아무튼 모두 잘 마무리되지 않았습니까? 아가씨도 괜찮으신 것 같고, 음반은 잘 모르는 제가 들어도 전율이 일 정도로 잘 녹음되었고요. 이제 아가씨는 방학만 잘 즐기시면 되겠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아, 방학. 그래서 말인데요. 빅토르. 자하르도.”

“예. 아가씨.”

난 한참 동안 준비해 두었던 선물을 말했다.

“휴가 가세요.”

빅토르가 얼빠진 얼굴을 했다.

“뭐라 하셨습니까?”

“갑자기 무슨 휴가 말씀이십니까?”

자하르도 어이가 없는지 물었다.

놀라는 두 사람을 보며 내가 더 어이가 없었다. 그간 내가 몇 번이나 말하지 않았는가? 방학이 되면 알아서 집에 틀어박혀 있을 테니 휴가를 다녀오라고. 차 안에서 자하르도 몇 번 들었을 것이고, 빅토르에겐 대놓고 말했으니 모를 리가 없다.

그런데 이제 와서 처음 듣는다는 듯 반응을 하니 무슨 깜짝 서프라이즈를 준비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뭐야 도대체 두 사람 다.

“왜 그렇게 놀라시나요? 방학이 되면 휴가를 보내 드리겠다고 제가 몇 번이나 이야기 드렸지 않았던가요?”

“아니, 그거 농담 아니었습니까?”

“진담이라고도 몇 번을 말했는데요?”

빅토르는 끝까지 내 말을 농담으로 듣고 싶은 모양이었다. 난 황당했다.

그렇게 우리 두 사람은 한참이나 여름휴가 건을 놓고 언쟁을 벌였다. 빅토르는 필요 없다는 쪽이었고 나는 반드시 이번 기회에 보내야겠다는 쪽이었다.

빅토르가 정말 말도 안 된다는 듯 손으로 자신의 허벅지를 치며 말했다.

“세상에 어떤 경호원이 고용주를 집에서 못 나가게 하고 휴가를 갑니까?”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요.”

“어쩔 수 없는 일이 어디 있습니까? 애초에 저희 생각은 하실 이유가 없…….”

“제 생각도 조금은 해 주세요. 1년 내내 제대로 된 휴가도 한 번 못 드렸는데 제 마음이 편할 것 같나요?”

“…….”

순간 빅토르가 말문이 막혔는지 입을 다물었다.

밤낮없이 격무에 시달리는 그에게 휴가를 주는 것으로 내 마음도 편해질 수 있다는 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어차피 난 집에 있는 것이 그리 큰 페널티도 아니었다. 그러니까 빅토르는 편하게 생각해도 괜찮았다.

하지만 그는 고심했다.

“그래도 제가 없는 사이 집에만 계신다는 건…….”

“꼭 나가야 할 일이 있으면 다른 분에게 잠시 부탁하면 되지 않을까요.”

“아뇨, 안 됩니다.”

중얼거리던 그는 내 말에 갑자기 정색을 하며 딱 잘라 말했다.

그러더니 스스로 실수했다고 생각하는지 고쳐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제 말은…… 제가 아가씨에게 된다 안 된다 하는 건 주제넘는 일이고, 물론 모두들 실력은 믿을 수 있지만 아무래도 아가씨 근처를 경호하는 건 그간의 정보나 노하우가 있는 제가 낫지 않나…….”

“무슨 말인지 알아요, 빅토르.”

수많은 경호원들 중 굳이 빅토르에게만 개인 경호를 맡길 이유는 없다. 그가 휴가를 떠난다고 해서 내가 꼼짝도 못 하고 있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나와 빅토르는, 서로 말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 각자의 마음을 이해하고 있었다.

“절대로 안 나가고 집에만 있을게요. 약속할게요.”

“그러니까 그게 문제가 아닌…….”

끝까지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하며 고개를 젓던 그는 내가 강하게 몇 번이고 밀어붙이자 결국 포기한 듯 소파 뒤로 축 늘어졌다.

잠시간 그러고 있던 빅토르는 조금 불량스러운 시선으로 날 보더니, 일부러 그러는 듯 말했다.

“그래서, 얼마나 주실 겁니까?”

트레이닝복 차림의 그는 다리까지 꼬고 손가락을 까딱였다.

“3박 4일?”

“어, 최소 한 달은 드리려고 했는데요.”

“뭐라고요?”

왜 또 이러실까. 몇 번이나 말했던 건데.

빅토르는 불량스러운 태도를 고치며 양팔을 교차시켰다.

“절대 안 됩니다.”

“여름 방학이 석 달 가까이 되잖아요. 제가 마음 같아선 방학 내내 보내 드리고 싶은데…….”

“석 달 월급 못 받으면 휴가가 아니라 굶어 죽습니다, 저희들.”

“아, 그건 걱정 말아요. 당연히 유급휴가예요. 보너스도 드릴 거고요.”

“맙소사. 유급휴가를 달 단위로요?”

빅토르는 입이 떡 벌어졌지만 이미 한참 전에 예고르에게 물어본 일이었다. 방학 동안에 집에서 피아노 연습이나 열심히 하면서 그사이에 경호원들에게 휴가를 주고 싶다고 말했더니, 예고르는 내가 그렇게까지 생각해 준다면 휴가 보너스도 챙겨 주겠다고 말했다.

“…….”

역시 이렇게까지 말하면 흔들리지 않을 수가 없다. 빅토르와 자하르의 눈빛이 고뇌에 잠기기 시작했다. 그들을 시험하려는 검은 의도는 전혀 없었다.

그저, 당연한 말이겠지만 그들도 사람인 것이다. 난 그것을 이해했고, 되도록 내 고마움을 담아 대우해 주고 싶었다. 늘 말로만 고맙다고 하는 건 결국 말로 끝날 뿐이다.

한참 고민하던 빅토르가 말했다.

“4박 5일. 그 이상은 안 됩니다.”

“겨우 그 정도로 어떻게 푹 쉬겠어요? 어디 해외라도 다녀오시려면 몇 주는 있어야죠. 그럼 3주는 어떠세요?”

“너무 깁니다!”

“하나도 안 길어요!”

평소 같았으면 빅토르가 길다고 하면 길구나 하고 납득했겠지만, 오늘만큼은 물러날 생각이 없다. 난 고집스럽게 몇 주일은 되어야 한다고 말했고, 빅토르는 절대 그럴 수 없다고 반대했다.

옆에 앉아 있는 자하르는 고용주인 나는 길게 보내 주려고 하고 피고용인인 빅토르는 되도록 짧게 가려고 싸우는 것을 보며 어이없다는 시선을 하고 있었다.

상관없었다. 자하르도 이참에 푹 쉬려면 저한테 붙으셔야 할걸요? 생각 잘 하세요?

그렇게 적절한 여름휴가는 과연 며칠인가에 대해 격한 토론을 나누고 있는데, 내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잠시만요. 전화가 왔네요.”

전화를 막 받는 순간까지 빅토르는 입 모양으로 끝까지 절대 안 됩니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난 듣지 않겠다는 뜻으로 혀를 내밀었다. 빅토르가 골치 아프다는 듯 손으로 옆머리를 짚었다.

그렇게 잠시 전화로 소강상태에 이르렀다. 전화를 걸어 온 것은 아나스타샤였다.

“아나스타샤!”

반갑게 전화를 받자 아나스타샤도 반갑게 인사했다.

- 바로 받았네. 다행이다. 몸은 어때?

“아, 괜찮아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 괜찮은 것 같아 다행이야.

메시지로 괜찮다는 이야기는 이미 해 뒀는데, 그럼에도 내 목소리를 듣고서야 정말 안심한 듯했다.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 그래서 말인데 타티아나. 내일까진 일단 푹 쉬어.

“그러려고 해요.”

- 모레는 어디 가지 않을래?

“모레요?”

- 응. 방학이잖아?

아나스타샤는 방학을 즐기고 싶은 열다섯 살이었다.

그녀는 내가 하루 정도 더 쉬어야 한다는 것은 이해했지만, 이후 빠르게 근육통에서 벗어나려면 맛있는 것도 먹고, 스파에 가서 마사지도 받고, 수영장에 가서 노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녀의 제안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정답인 것 같긴 했다.

아나스타샤는 즐겁게 재잘거렸다.

- 가고 싶은 곳이 많아. 수영장도 얼마 전에 생긴 좋은 곳 알아냈고, 아예 소치로 놀러 갈까 싶기도 하고.

“소치……요?”

- 응. 거기 해변 정말 괜찮다?

소치는 러시아 극서에 위치하여 흑해와 닿아 있는 휴양도시였다. 이름은 들어 본 적 있었지만 가 본 적은 없었다. 정말 가 보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난 그녀의 제안에 바로 따를 수 없었다.

“저기, 있잖아요, 아나스타샤.”

- 왜?

“정말, 정말 미안해요.”

- 가, 갑자기 왜 그래.

아나스타샤가 당혹스러워했고, 나는 자초지종을 말했다. 내 경호원들에게 휴가를 주고 싶고, 그사이에 난 경호원 없이 나돌아 다닐 순 없으니 꼼짝 않고 집에 있을 생각이라는 것을 설명했다.

내 설명을 끝까지 들은 아나스타샤가 말했다.

- 아……. 그래?

“미안해요.”

- 아니, 아니야. 미안할 게 뭐 있어? 그분들도 내내 정말 수고하셨으니까 당연히 휴가를 다녀오셔야지. 네가 하는 게 옳아. 어……. 그런데 빅토르나 다른 분들이 휴가 가면 널 경호해 줄 사람은 없는 거야?

“그건…….”

그녀도 그건 조금 이상하게 느껴진 모양이었다. 난 빅토르가 어디 나가 있는 사이 마음대로 돌아다녀서 그를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는 조금 상식적이지 않은 이유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조금 머뭇거렸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깊게 묻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

- 아무튼 무슨 말인진 알겠어. 그래서 그 휴가는 얼마나 되는데?

그걸 지금 당사자와 협의 중이었어요.

그런데 아나스타샤는 1초 만에 답을 제시했다.

- 한 2주일쯤 돼?

빅토르와 내가 주장하던 기간의 중간이기도 하고, 어쩐지 아나스타샤가 말하니 굉장히 합리적인 기간으로 들렸다. 난 나도 모르게 무언가에 홀린 듯이 대답했다.

“예. 맞아요.”

- 그럼 어디 가는 건 그 후에 하자. 집에서 쉬어. 아니다, 그사이 내가 놀러 갈까?

“놀러 오시려고요?”

- 안 돼?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안 될 리가 없었다. 곧장 대답했다.

“환영이에요!”

- 아하하하, 고마워. 알았어.

높은 웃음소리가 기분 좋게 울려 퍼진다.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져서 웃었다.

- 메시지 할게, 타티아나.

“예. 아나스타샤.”

우리는 서로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야 난 어떠한 중요한 사항을 멋대로 정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 빅토르, 자하르.”

빅토르를 보자 그가 삐딱하게 날 올려다보았다.

난 천천히 말했다.

“휴가 말인데요. 2주일로 정해 버렸어요.”

“아가씨는 결단력이 있으신 건지 아닌 건지…….”

“예?”

“아닙니다.”

빅토르가 다시 소파에 파묻히면서 말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제 결정된 거예요. 알았죠?”

“알겠습니다. 음……. 저희도 저희지만 소로킨은 정말 기뻐하겠군요.”

“다행이에요. 그간 가족들과 시간을 잘 보내지도 못했을 테니까요.”

솔로인 빅토르나 자하르는 몰라도 소로킨의 아내분과 아들은 이 휴가를 소로킨과 정말 잘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난 조금 더 기분이 좋아졌다.

정말 기간을 더 늘렸어야 했던 게 아닐까 싶지만, 적어도 4박 5일보단 2주가 훨씬 나은 건 사실이었다.

그렇게 여기에 없는 소로킨을 생각하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물었다.

“아버지도 제가 2주간 집에서 얌전히 있는다고 하면 기뻐하시지 않을까요?”

“……아가씨 정말 뭘 모르시는군요.”

“예? 제가요?”

빅토르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는 듯 손가락을 좌우로 까딱이며 말했다.

“유리 님이 아가씨를 모르실 것 같습니까? 집에 계시면 하루 종일 연습실에만 계실 텐데 좋아하실 리가 없잖습니까?”

“그것도 그렇네요?”

“세상에서 외출금지가 가장 의미 없는 사람 중 하나가 아가씨일 겁니다.”

“……너무해요.”

“하지만 반박은 못 하시겠죠.”

“저한테 왜 이러세요, 정말?”

그간 고마움을 생각해서 휴가도 길게 주려 하는데 짧게 며칠이면 된다고 나랑 싸우질 않나, 이젠 대놓고 선을 넘으며 괴롭히질 않나. 빅토르가 갈수록 내게 너무 심해지는 것 같다.

하지만 걱정이 되진 않는다. 난 이런 관계가 즐거웠다.

용건은 끝났지만, 난 빅토르와 자하르에게 평소 쉴 땐 뭘 하고 노는지 가르쳐 달라고 했다.

자하르는 텔레비전에 연결된 게임기를 보여 주었다. 팀을 나눠 축구를 하는 게임이었다. 축구를 하기도 하고 보는 것도 모자라서 게임으로도 하다니 나로선 조금 이해가 안 간다.

하지만 어쨌든 어떻게 하는 게임인지 보여 주겠다며 게임 패드를 잡은 두 사람을 보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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