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269화 (269/1,277)

##  269화

침대에 걸터앉아 멍하니 있자니 아직도 온몸이 욱신거렸다.

기절한 뒤로 하룻밤이 더 지났다. 잠은 충분히 잤기 때문에 정신적인 피로는 거의 풀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난 무리를 했던 것에 대한 대가를 치르고 있었다.

물론 그만한 성과는 있었다.

오늘 날이 밝자마자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직접 계약서를 들고 집에 찾아왔다. 하루 만에 녹음을 마쳐 버린 음반의 제작과 판매 등에 대한 이야기들을 아버지와 하기 위해서였다.

분명 내 음반이긴 하지만 난 아직 미성년자이기 때문에 아버지의 동의가 필요했다.

이야기가 그리 어렵진 않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아버지는 결코 쉬운 분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마카로프 프로듀서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하시곤 어디론가 전화를 하셨다. 10분도 되지 않아 법무팀 소속의 변호사라는 분이 집으로 찾아왔다.

그렇게 변호사가 함께한 채로 아버지는 검토에 들어가셨다. 특히 음반에 연주자의 정보를 전혀 넣지 않고 내겠다는 말에 자세한 프로젝트 계획서를 요구하시고, 몇 번이고 날카로운 질문들을 던지셨다.

사실 마카로프 프로듀서와 함께하는 이 음반 프로젝트는 상업적 성공을 바라고 시작한 것이 아니었다. 나도 마카로프 프로듀서도 그 부분에 대해선 뜻이 정말 잘 맞았기 때문에 지금까지 누구도 의문을 표하지 않고 오로지 음반 제작에만 매달릴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수십 개나 되는 기업들을 이끄는 아버지의 입장에서 이런 프로젝트는 그리 좋게만 보이진 않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몇 번이고 갑론을박과 설명이 오갔다.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충분히 준비를 많이 해 온 듯 유려하게 프레젠테이션을 해냈지만 그러다가도 가끔 까다로운 아버지의 질문엔 버벅대기도 했고 엉뚱한 말을 하기도 했다.

음반사의 사장이니만큼 이런 비즈니스에 밝은 건 사실이어도 결국 레코딩 엔지니어 쪽에 가까운 사람이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내 의사도 물어보셨다.

난 기존 그대로 진행하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난 사업도 계약도 아무것도 모른다. 다만 음반을 녹음한 내게 발언할 자격이 있다면,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수많은 나날을 고심하며 만들었을 이 프로젝트를 그대로 진행할 수 있도록 돕고 싶었다.

내가 그렇게 단호하게 나서자마자 아버지는 바로 도장을 찍었다. 허무할 정도로 흔쾌한 허락이라 조금 벙찔 정도였다.

그렇게 음반 계약서가 작성되고, 공증인인 변호사분을 통해 공증까지 완료되었다.

모든 일들이 끝나고,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아버지와 내게 순서대로 악수를 청했다. 그리고 긴 시간도 필요 없고 딱 한 달만 기다려 보라며 호언장담을 했다.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말이 앞서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가 호언장담을 할 정도라면 조금은 기대를 해도 좋을 것 같았다.

음반 프로젝트에 있어서 내가 할 일들은 오늘로 모두 끝났다.

그리고 오늘부터 빅토르와 자하르, 소로킨은 휴가다.

딱히 출발일이 정해져 있진 않아서 부랴부랴 떠날 필요는 없었지만, 빅토르는 후딱 갔다 오겠다며 오늘자로 휴가를 신청했다.

소로킨은 가족들과 함께 저택에 찾아왔다.

난 소로킨의 가족분들을 처음 뵙는 것이었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 예우했다. 아내분은 처음엔 날 조금 어려워하는 듯했으나 내가 직접 차를 끓여 대접하고 그간 쉴 틈도 없이 소로킨을 부려 먹어서 죄송했다고 사과하자 편하게 날 대해 주셨다. 상냥한 분이었다.

잠시 그렇게 티타임을 가진 뒤, 내 경호원들은 모두 떠났다.

앞으로 2주 동안은 연락도 하지 않을 생각이다. 편하게 휴가를 즐겨 주었으면 좋겠다.

“…….”

그리고 편안해진 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4개월이나 프로그램을 준비했던 음반도 녹음을 마치고 이제 내가 할 일은 없었고, 그간 쭉 신경 쓰고 있었던 내 경호원들에 대한 일도 휴가를 줌으로써 조금 덜어졌다.

6월인 지금부터 9월까지 이어지는 긴 여름방학의 시작으로는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으음…….”

방에 멍하니 있다가 이렇게 또 드러누워 버릴 것 같아서 밖으로 나왔다. 지나다니던 고용인 분들이 인사를 해 주셨다. 정답게 인사를 주고받으며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엔 아무도 없었다. 혼자서 주전자에 물을 끓여서 캐모마일차를 타고 선반에서 과자를 몇 개 꺼냈다. 누군가에게 부탁할 수도 있었지만 난 이렇게 직접 차를 타는 것도 좋아했다.

그렇게 편한 실내용 원피스에 숄만 걸치고, 차와 다과까지 준비한 나는 거실로 나와선 느긋하게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틀고 차를 홀짝였다.

“…….”

평소 텔레비전을 잘 보진 않지만 그냥 멍하니 시간을 때우고 싶었다.

아무렇게나 채널을 돌리자 텔레비전에선 요리사들이 나와 각자 요리로 대결을 하는 프로그램이 나왔다. 난 리모컨을 내려놓고 방송을 시청했다.

그렇게 가만 보다가 문득 요리의 세계가 생각보다 굉장히 치열하고 무섭다는 것을 느꼈다. 그냥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서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먹이는 것만이 요리의 전부가 아니었다.

때론 엄격한 심사위원들 앞에서 다른 요리사들과 경쟁하고, 보다 맛있고 특이한 요리를 하기 위해 많은 연구를 해야만 했다.

보면 볼수록 내가 전공으로 하고 있는 연주자의 업과 비슷했다. 사실 비단 요리뿐만 아니라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직업들이 이와 비슷할 것이다. 그 본질은 경쟁에 있지 않지만 결국 경쟁을 해야만 하는 것들.

그 경쟁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었다. 난 되레 경쟁을 사랑하는 편이다. 경쟁은 곧 상대보다 잘해야 살아남을 수 있음을 뜻하고, 그건 노력과 발전을 의미한다. 결국 자기계발의 일환으로 아주 중요한 요소인 것이다.

간만에 한가로워서 그런지 이런저런 쓸데없는 생각들을 하고 있는데, 옆에서 인기척이 느껴진다.

“타티아나. 뭐 해?”

“아, 루슬란 오빠.”

셔츠 차림의 루슬란 오빠가 어슬렁거리며 나오다가 날 발견하고는 멈춰 섰다. 그 눈빛이 조금 심상찮다. 마치 미지의 생물을 본 듯한 느낌이다.

내가 뭘 잘못했나 생각하고 있는데 루슬란 오빠가 피식 웃었다.

“네가 혼자 텔레비전을 보고 있고. 별일이네.”

“연습실에 있는 줄 아셨나요?”

“어? 아니……. 뭐 꼭 네가 연습실에 하루 종일 있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고.”

딱히 나라고 늘 연습실에만 있어야 하냐고 따지는 투는 아니었는데 루슬란 오빠는 괜히 변명하듯 그렇게 말했다.

난 웃으며 소파 옆자리를 손짓했다. 루슬란 오빠는 다가와선 털썩 앉았다.

옆자리에 앉은 오빠에게 내가 왜 오후에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지 설명했다.

“피아노는 아까 조금 쳐 봤는데 일단 오늘 정도는 더 쉬는 것이 낫다는 판단이 들어서요.”

“제대로 쉬기로 했구나?”

“연주자는 자기 컨디션과 몸 관리도 잘 해야 한답니다.”

“……네가 그런 말 하는 게 왜 이렇게 어색하지.”

“…….”

할 말이 없다. 루슬란 오빠는 내가 밤새도록 연주를 하다가 결국 혼절해 버리기까지 한 것을 바로 옆에서 본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것도 옛날 일도 아니고 바로 어제.

어제 새벽의 일은 나도 조금 필사적일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고, 평소엔 그래도 나름대로 컨디션 지켜 가면서 하고 있다고 이야기하려 했지만 오빠는 내가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연습을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해도 별로 설득력 있게 들릴 것 같진 않았다.

멍하니 있다가 문득 권했다.

“차 드릴까요.”

“아니, 괜찮아.”

“예…….”

거절당하고 나니 할 게 없었다.

난 다시 찻잔을 기울이며 텔레비전을 바라보았다. 옆에 앉은 루슬란 오빠도 말없이 소파에 파묻힌 채 텔레비전을 보았다. 채널을 돌려 보자는 둥 그런 요구도 없었다. 그냥 틀어 놓은 걸 보는 것으로 상관없는 듯했다.

그렇게 멍하니 우리 남매는 한동안 텔레비전만 바라보았다.

아무 말 없이 있어도 그리 어색하거나 하진 않았다. 평화로운 공기에 기분이 차분해진다. 간간이 루슬란 오빠가 과자를 집어 먹는 소리만이 내 귀에 분명히 잡혔다.

힐끔 옆을 바라보았다. 언제나처럼 말끔한 얼굴은 무표정하게 과자를 우물거리고 있었다.

혹시 배가 고프다면 과자 말고 다른 걸 만들어 드릴 테니 드시지 않겠느냐고 물어보려는 찰나, 오빠가 내 시선을 느꼈는지 먼저 말했다.

“네 경호원들에게 휴가를 줬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아, 예. 그랬어요.”

“잘했어. 말 안 해도 네가 신경 쓰고 있었구나.”

기특하다는 듯 루슬란 오빠가 웃었다. 오빠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한 일은 아니었지만 기분이 좋았다.

루슬란 오빠가 이어 물었다.

“그런데 말이지, 그사이 내내 넌 집에만 있을 거라고?”

“그렇게 하려고 해요.”

“꼭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은데……. 뭐 상관없지. 그래도 방학에 아예 계획이 없는 건 아니지? 방학 내내 집에서 피아노만 치고 있으면 내가 널 끌고 나가야 할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는데.”

“예? 아하하하, 그것도 재미있겠는데요.”

“재미?”

“그럼요. 루슬란 오빠와 외출하는 일은 언제나 즐겁죠.”

“……그래?”

나를 잘 배려해 주는 루슬란 오빠와 함께 다니는 것은 늘 좋았다. 크게 신경 쓸 일도 없고 불편하지도 않았다.

루슬란 오빠 역시 나와 함께 돌아다녔던 일들을 떠올리는지 히죽 웃었다. 오빠가 물었다.

“어쨌든…… 그래서 방학엔 뭘 할 건데? 연주회 같은 거 해?”

“제가 조금 더 부지런했다면 계획이 있었겠지만, 아직은 아무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아요.”

“난 네가 더 부지런하지 않아서 천만다행이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네요.”

“아무것도 아냐. 아무튼 난 이번 방학에 딱히 여행 약속 같은 것 없이 집에 있으려는데 너도 비슷할 것 같네.”

루슬란 오빠야말로 방학에 친구들과 여행이라도 가 보셔야 하는 게 아닐까 싶은데, 오빠는 별생각이 없어 보였다.

저번 겨울에 집에 찾아왔었던 오빠 친구를 생각해 보면 친구가 아예 없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조금 의외였다. 경영수업 때문에 바빠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난 미지근한 찻물로 목을 축이며 말했다.

“아마도요. 방학 동안엔…… 그냥 피아노 연습을 하거나 친구들과 놀지 않을까 싶어요. 아, 맞아요. 그러고 보니 말씀드리는 것을 깜빡했는데 내일 아나스타샤가 놀러 올 거예요.”

어제 아나스타샤와 전화로 언제든 놀러 와도 괜찮다고 말하고 하루가 지나 아나스타샤는 우리 집에 오는 일에 대해 상세하게 메시지로 물어 왔다. 며칠간 같이 묵어도 되겠냔 메시지였다.

이전에도 아나스타샤가 우리 집에 온 적은 몇 번 있었고 자고 간 적도 있었지만, 학교 신경 쓰지 않고 이렇게 방학 때 며칠간 쭉 놀러 오는 건 처음이었다.

흔쾌히 좋다고 답장하긴 했지만, 솔직히 걱정이었다.

루슬란 오빠가 웃었다.

“네가 못 나가게 되었으니 놀러 오기로 했나 보네.”

“예. 뭘 하고 놀아야 할진 잘 모르겠지만요. 며칠 자고 간다고 했었는데 그간 내내 연습실에 있을 수도 없고, 제 방도 재밌지 않고. 걱정이에요.”

“그게 다가 아니잖아?”

“?”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며칠 동안이나 아나스타샤를 지루하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걱정인데, 루슬란 오빠는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우리 집은 여자애 두 명이 며칠이고 돌아다녀도 놀거리 정도는 충분해. 디저트나 차는 드미트리가 매번 다르게 만들어 줄 수 있고, 게임 같은 게 하고 싶으면 나한테 오면 되고. 뭔가 활동적인 것을 원한다면 체육관 쪽으로 가 봐. 뭘 좋아할진 모르겠지만 실내에서 가능한 거의 모든 것들을 할 수 있으니까.”

“아……! 그렇네요, 체육관이 있었네요.”

체육관이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평소 운동을 하러 갈 일이 없다 보니 떠올릴 수가 없었다.

갑자기 할 수 있는 일이 잔뜩 생겼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아나스타샤는 못하는 것이 없어요. 정말 뭐든 잘해요.”

“그래? 그럼 할 게 많겠네. 그리고…….”

루슬란 오빠는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말해 주었다. 내가 관심이 없어서 모를 뿐이지 밖으로 안 나가고 집에서만 놀아도 할 것이 정말 많았다. 우리 집은 보통 집들과 달라서 별의별 것들이 다 있었기 때문이다.

자기 집에서 뭘 하고 놀 수 있을지조차 혼자선 떠올리지 못한다는 데에 한심하단 생각마저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난 머릿속 메모장에 그것들을 차곡차곡 메모했다.

난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갑자기 용기가 생겼어요.”

“무슨 용기까지 필요해……?”

“전 필요했거든요. 고마워요.”

내가 밖으로 안 나감으로써 활동적인 편인 아나스타샤를 집에 묶어 놓고 며칠 동안이나 심심함으로 고문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느끼고 있었는데, 이젠 괜찮았다. 정말 뭣할 때 루슬란 오빠를 찾아가 놀아 달라고 하면 놀아 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안도감마저 생겼다.

루슬란 오빠는 아나스타샤를 그냥 내버려 둘 것 같진 않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다가 우뚝 생각이 정지했다.

항상 저 멀리 밀어 두고 있는 생각이지만, 난 루슬란 오빠가 아나스타샤에게 꽤 좋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걸 모른다고 할 순 없었다. 그렇다면 알고 있는 입장에서, 동생이자 친구로서 난 뭘 해야 할까.

거짓말이라도 두 사람을 응원한다고 할 순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부러 아예 만날 기회도 생기지 않도록 갈라놓겠단 생각이 드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나 자신도 잘 모르는 이기심과 충동을 조금씩 느낄 뿐이다. 거기에 휩쓸리는 게 좋은 일은 아니겠지.

그 때문에 어제 스튜디오에서도 두 사람을 자연스럽게 내버려 두었다.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마도.

다시 조금 복잡한 감정을 느끼며 난 루슬란 오빠를 불렀다.

“루슬란 오빠.”

“응.”

“샌드위치라도 만들어 드릴까요?”

차는 마시지 않겠다고 했지만 연신 과자를 먹는 것을 보니 저녁 식사 전에 무언가 먹고 싶은 것 같긴 했다.

루슬란 오빠는 놀랐는지 바로 대답도 못 하고 날 바라보더니, 곧 세상에서 가장 행복해 보이는 미소로 답했다. 난 그 미소가 너무 좋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