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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270화 (270/1,277)

##  270화

하룻밤이 더 지나 주말이 왔다.

난 이틀을 쉰 만큼 빠르게 일상으로 돌아왔다.

새벽에 눈을 뜨자마자 몸 상태부터 파악했다. 살짝 뻐근하긴 했지만 기분 좋은 느낌이었다. 그대로 연습실로 가서 건반부터 쳐 보았다.

조금 다른 감각이 느껴진다.

음반을 만든 이후로 어쩐지 한층 더 음색이 또렷해진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건반은 보다 크게, 그리고 가볍게 느껴졌다. 내 손가락은 훨씬 더 정확하고 강력하게 음을 낼 수 있었다.

모든 것이 보다 자유로웠다.

정확히 알 순 없지만 몇 계단 정도 딛고 올라섰음을 어렴풋하게 느낀다. 난 조금 더 이 감각을 몸에 새기기 위해 몇 번이고 건반을 누르며 연습했다.

바흐의 평균율과 바르톡의 연습곡, 베토벤의 소나타와 리스트의 연습곡들이 함께했다.

여유 있게 3시간 정도 연습을 하고 샤워를 한 뒤에는 조금 일찍 주방으로 갔다. 드미트리는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난 앞치마를 매고 드미트리에게 요리 교습을 받았다.

드미트리는 내가 레시피에 맞춰 잘 따라 한다며 칭찬해 주었다. 몇 그램씩 준비해야 하는지까지 완벽하게 나와 있는 레시피에 맞춰 요리하는 것뿐인데, 드미트리는 그것도 쉬운 일만은 아니라고 말했다.

드미트리의 도움을 받아 아버지와 오빠의 아침식사를 만들고, 토요일인데도 회사에 가 봐야 한다고 하시는 아버지를 배웅했다. 주말엔 피곤하실 텐데, 그럼에도 아버지는 웃으며 출근하셨다.

다시 방으로 돌아왔을 땐 오전 8시였다.

일반적으로 토요일을 보내는 내 패턴대로라면 다시 연습실에서 아침 연습을 시작하거나 잠깐 책을 보면서 부족한 공부를 했을 것이다. 시험이 끝나고 방학이 되었어도 내 일상은 그리 달라질 것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특별한 날이었다.

난 아나스타샤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막 일어난 듯 졸린 목소리로 내 전화를 받았지만, 오늘 온다면 혹시 몇 시쯤 올 것이냐고 묻는 질문에 잠이 다 달아난 듯, 지금 당장 가도 되겠느냐고 답했다.

난 이쪽에서 차를 보내 주겠다고 말했다. 아나스타샤는 극구 사양했지만 난 그녀를 설득했다.

마음 같아선 내가 직접 차를 타고 가서 데리고 오고 싶었다. 하지만 빅토르와의 약속 때문에 난 집 밖으로 못 나간다.

어딘가 놀러 가는 것도 아니고 차 안에서 한 발자국도 밖으로 안 나가는 것 정도는 상관없을지도 모르겠지만, 난 그런 사소한 부분까지도 약속을 지키고 싶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예고르에게 부탁해서 차만 보냈다.

시간은 금방 흘러서, 아나스타샤를 맞이할 준비를 마치고 잠시 책을 보고 있는데 차가 저택 부지 안으로 들어와 본관 앞에 서는 소리가 들렸다. 난 얼른 책을 덮고 나갔다.

“……!”

빠른 걸음으로 밖으로 나가자 아나스타샤가 막 차에서 내리며 운전기사분에게 감사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싱그러운 봄 날씨를 상징하는 듯한 투피스에 재킷을 숄처럼 어깨에 걸친 아나스타샤는 커다란 가방을 휙 꺼내 들더니, 내 쪽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나 왔어.”

“아나스타샤!”

난 다가가서 팔을 뻗었다. 아나스타샤는 자연스럽게 나와 포옹했다.

차가운 눈과 겨울보다는 따뜻한 봄과 태양이 잘 어울리는 그녀는 한층 더 생기가 넘쳤다.

아나스타샤가 말했다.

“왜 이렇게 오랜만인 것 같지.”

“그러게 말이에요.”

그녀는 괜히 더 확인하는 듯 내 어깨를 매만졌다.

내 눈에 남아 있는 아나스타샤는 이틀 전 스튜디오에서 붉은 드레스를 입고 있는 모습이었다. 쓰러지던 순간 부스의 창 너머로 경악하던 그녀의 표정이 아직도 생생했다.

전화로 몇 번이고 사과를 하긴 했지만 그래도 조금 미안했다. 괜찮다는 듯으로 생긋 웃어 보이자 그녀는 아늑하게 웃었다.

“차 보내 줘서 고마워.”

“편안하셨나요?”

“응, 당연하지. 운전해 주신 분 실력이 얼마나 좋은지 승차감이 너무 좋아서 잠들어 버릴 뻔했다니까.”

“아하하하, 정말요?”

잠시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득 가방을 든 채로 이야기를 길게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들고 있는 커다란 가방을 내려다보자 아나스타샤가 말했다.

“나 이 가방은 네 방에 둬도 될까?”

“아, 그러세요.”

“응. 가자.”

그녀는 내 방이 어디에 있는지 잘 안다. 그리고 방 안이 어떤 상태인지도.

그간 몇 번이고 봤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없는 내 방을 보고도 별말은 없다. 아나스타샤는 화장대 옆에 내 가방들이 놓여 있는 곳에 가방을 내려놓고 어깨를 쭉 폈다.

방 안을 둘러보는 그녀를 보며 우선 뭘 해야 할까 생각하는데, 아나스타샤가 먼저 말했다.

“아저씨는 어디 계셔? 인사 드려야지.”

“아버지는 출근하셨어요.”

“토요일에도 바쁘시네. 힘드시겠다.”

“그래도 저녁엔 일찍 오겠다고 하셨어요.”

아버지에겐 아나스타샤가 올 것이란 이야기를 미리 해 두었다.

안 그래도 내가 2주간 밖에 안 나갈 작정이라는 말에 황당해하시던 아버지는 아나스타샤가 온다는 말에 눈에 띄게 안심하셨다. 오늘 저녁엔 무척이나 좋아해 주실 것 같다.

난 그녀의 손을 잡고 물었다.

“아나스타샤. 밖에서 차 드시겠어요?”

“좋아. 그러자.”

아나스타샤를 데리고 본관 옆 작은 정원의 테라스로 향했다. 지붕과 테이블이 있는 이 테라스는 티 파티만을 위해 마련된 장소였다. 그간 아나스타샤나 발렌티나가 오면 난 여기에서 함께 티 파티를 하곤 했다.

테라스엔 이미 웰컴 티 파티를 위한 준비들이 되어 있었다. 아나스타샤와 테이블에 앉고 잠시 기다리자 나제즈다가 트레이에 담긴 핑거푸드들과 찻주전자 등을 가지고 왔다.

“고마워요, 나제즈다.”

“별말씀을요. 아나스타샤 아가씨도 편히 머물다 가세요.”

“감사합니다.”

카페인에 약한 나는 캐모마일차를, 아나스타샤는 커피를 내렸다.

티타임을 즐기며 차 취향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생각이 나서 말했다.

“발렌티나는 못 오신다고 하셨어요. 들으셨나요?”

“응. 들었어.”

아나스타샤는 스마트폰을 꺼내서 다시 무언가 확인하며 말했다.

“그냥 오지 참, 얘도…….”

“일정이 있으신가 보죠.”

“없을걸.”

“……그런가요?”

어제 물어보니 발렌티나는 급한 일이 있는 사람처럼 거절하면서 아나스타샤와 있으라고 말했다. 일정이 없다면 우리 집에 놀러 와서 며칠간 같이 묵었어도 좋았을 텐데, 조금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난 아나스타샤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스튜디오에서 있었던 일, 음반 계약을 했던 일 등등 웃음과 담소가 오갔다.

웃음 사이사이에 맛있는 과자에 대한 탄성도 섞였다. 아나스타샤는 마시멜로와 아이스크림을 특히나 맛있다고 좋아했다. 작은 스푼으로 아이스크림을 찌르더니, 아나스타샤가 말했다.

“나 그냥 2주 내내 여기 있어 버릴까?”

“내내요?”

난 찻잔을 내려놓고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살짝 기울어진 채 날 보고 있었다.

별생각 없이 웃으며 답했다.

“그것도 좋겠네요.”

“너무 오래 있으면 폐가 되지 않을까?”

“폐라뇨? 전혀요. 괜찮아요.”

손님이 오래 있으면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아나스타샤라면 난 괜찮았다. 우리 가족도 흔쾌히 승낙해 줄 것 같았다. 아나스타샤는 절대 불편한 손님은 아니었다.

정말로 아버지에게 허락을 구하는 것까지 생각해 보고 있는데, 사실 허락을 구해야 할 건 아버지뿐만이 아니었다.

“방학 내내 계셔도 괜찮아요. 물론…….”

“물론?”

“아나스타샤의 부모님께 허락은 받아 오셔야 하겠지만요.”

“넌 그게 제일 걱정이지? 아하하.”

아나스타샤는 부모님이 뭐라 하든 마음대로 할 것 같아서 걱정이다.

그녀는 기분 좋게 웃어 보이며 손을 뻗었다. 그러고는 테이블 위로 올라가 있는 내 손을 맞잡았다. 따뜻한 체온이 손에서 전해져 온다. 연주자들이 믿고 있는 마음의 최전선은 손이다. 지금 나와 아나스타샤는 서로의 마음이 맞닿은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가 말했다.

“계속 있어도 된다고 말해 줘서 기뻐. 타티아나.”

“정말이에요.”

“그래도 그렇게 있을 순 없겠지?”

“……왜요?”

안 될 이유도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그런 뜻이 아니라는 듯 크게 웃으며 말해다.

“방학은 길잖아? 2주 후엔 다른 데로 놀러갈 거야. 전에 말했던 소치도 가 보고, 아니면 가까운 유럽에 가는 것도 괜찮겠다. 세상에 얼마나 좋은 도시가 많은 줄 아니?”

“아…….”

“네가 좋아할 만한 곳에 데려다줄게.”

평소 내색하지 않는 그녀의 속마음과 배려심이 조금 엿보인다. 난 거기에서 형언할 수 없는 포근함을 느꼈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고마워요.”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듯, 아나스타샤는 그보다 더 기쁠 수 없다는 듯 명랑하게 웃었다.

티타임을 마치고, 나는 아나스타샤와 잠시 산책을 했다.

도중에 벨카를 만나서 귀여워해 주기도 하고, 화원을 구경하기도 했다. 종종 걷는 산책로이지만 친구가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달랐다.

저택 부지 안을 그저 걷기만 해도 오늘 오전 시간을 다 보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걷기만 하는 것은 우리 집이 지닌 놀거리들을 전혀 활용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아나스타샤와 나는 잠시 걷다가 커다란 건물 앞에서 멈춰 섰다.

대부분 고풍스러운 형태의 건물이 많은 우리 집에서, 눈에 확 띌 정도로 신식으로 만들어진 건물이었다.

“체육관이라고?”

“예. 맞아요.”

아나스타샤는 놀라워하며 눈을 반짝였다.

우아하게 티타임을 즐기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운동이란 운동은 전혀 못하는 나와 달리 아나스타샤는 활동적인 것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들어가 봐도 될까?”

“물론이죠.”

이미 아나스타샤가 좋아해 줄 만한 곳들은 물색해 두었고, 그중 하나가 체육관이었다. 난 그녀와 함께 안으로 들어섰다. 안에 들어가자마자 두 명의 남자와 마주쳤다.

“타티아나 아가씨!?”

“안녕하세요. 레오니드, 야콥.”

“아, 안녕하십니까. 죄송합니다. 조금 놀라서…….”

경호원인 레오니드와 야콥이었다. 두 사람 다 민소매 셔츠에 반바지 차림이었는데 우리와 마주치고는 어쩐지 약간 쑥스러워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난 늘 슈트만 입고 있는 그들을 이런 편한 모습으로 만나는 것이 꽤나 즐거웠다.

스포츠머리에 호감 가는 인상의 레오니드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내 옆을 바라보았다.

“아가씨 친구분이셨죠? 먼발치에서 몇 번 뵈었던 것 같은데.”

“예. 반가워요. 아나스타샤예요.”

“인사가 늦었습니다. 레오니드입니다.”

“야콥입니다.”

아나스타샤가 내 친구라는 것은 거의 모든 고용인들이 알고 있는 일이었지만, 직접 인사를 나눈 사람들은 아직 그리 많지 않았다. 아나스타샤는 두 사람과 반갑게 인사했다.

난 마침 잘되었다는 듯 물었다.

“레오니드, 운동 중이셨나요?”

“하하, 운동이라 할 건 없고, 그냥 쉬는 날이라 몸 좀 풀러 나왔습니다.”

“몸 푸는 것으로는 평소 뭘 하시나요?”

레오니드는 팔짱을 끼고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글쎄요……. 그날그날 달라서요. 아, 얼마 전에 설치된 스크린 야구는 꽤나 재밌더군요. 스트레스가 쌓이면 화끈하게 풀기에도 제격이고요.”

“야구요?”

“예.”

“이 체육관에서 야구를 어떻게 하나요?”

“보시면 아실 겁니다. 보여 드릴까요?”

“아……. 그렇다면 부탁드려요.”

그리고 그는 안내해 주겠다면서 시원스레 앞장섰다.

난 스크린 야구가 무엇인지 궁금해져서 일단 따라가 보기로 했다. 아나스타샤는 만면에 웃음꽃을 띄우고 있었다. 정말 신난 듯했다.

레오니드를 따라가면서 체육관 안을 살펴보았다. 뻥 뚫린 가운데로 커다란 농구 코트와 배드민턴장이 가장 먼저 보인다. 그리고 복도 옆으로는 방들이 있었는데 탁구, 당구, 헬스 등을 할 수 있도록 거의 모든 기구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이미 시설을 이용 중인 사람들도 보였다.

한편에는 우리 가족만 이용할 수 있는 특별한 공간도 있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이 체육관은 전부 고용인들의 복지를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었다.

놀라워하는 아나스타샤와 함께 스크린 야구장에 도착했다.

넓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좁고 철망이 촘촘하게 막고 있는 공간이었다.

“여기인가요……?”

“제가 시범을 보여 드리죠.”

레오니드는 어깨를 휘휘 돌리며 풀더니 철망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난 아나스타샤와 함께 밖에서 구경했다. 구경을 하면서 난 이 스크린 야구장이라는 곳의 구조를 파악했다.

철망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사람이 설 수 있는 자리가 있었다. 공을 던지는 역할은 주어지지 않고, 그저 자리에 서서 배트를 들고 휘두르기만 하면 되는 것처럼 보였다. 치고 나서 뛸 필요도 없고, 오로지 무언가 쥐고 세게 휘둘러 맞힌다는 것만을 즐기면 되는 장소인 것 같다.

기세 좋게 들어간 레오니드는 배트를 쥐고 옆에 있는 스위치를 눌렀다. 오락실에서 날 것 같은 소리와 함께 앞에 있는 스크린에 야구장이 펼쳐졌다. 생각보다 꽤 실감나는 광경이라 재미있었다.

레오니드가 자신의 이름을 적고 잠시 기다리자 게임이 시작되었다. 스크린 가운데에 있는 투수 캐릭터가 눈짓을 한다. 그러더니 자세를 잡고 팔을 휘둘렀다.

“……!”

무언가 눈치채기도 전에 철망이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요동쳤다. 난 기겁해서 몸서리를 쳤다. 거의 소리를 지를 뻔했다.

반쯤 정신이 나갔다가 돌아오고서야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스크린 가운데에 있는 구멍에서 공이 발사된 것이다.

“아, 안 맞네.”

그것을 쳐 냈어야 했던 레오니드는 고개를 까딱거리더니 다시 자세를 잡았다. 난 모골이 송연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옆자리의 아나스타샤의 소매를 잡았다. 그녀가 날 보더니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다음 공이 발사되었다. 레오니드는 호쾌하게 배트를 휘둘렀고, 이번엔 깡 하는 맑은 소리와 함께 공이 날아가 스크린에 부딪혔다.

뭔진 잘 모르겠지만 그 소리만큼은 정말 시원시원한 맛이 있었다.

그 후로도 레오니드는 계속해서 배트를 휘둘렀다. 공이 상당히 빨라 보였는데 레오니드는 정말 잘 쳤다.

타율이라는 것이 3할을 넘으면 정말 잘 하는 것이지 않던가? 레오니드는 거의 8할에 가깝게 쳤다. 그리고 파울도 별로 없고 안타가 많았다. 굉장히 잘하는 편인 것 같았다.

한 게임이 종료되고, 철망 밖으로 나온 레오니드가 씩 웃으며 말했다.

“어땠습니까? 아가씨.”

스크린 야구를 보여 주는 것도 보여 주는 것이지만, 우리에게 칭찬받고 싶다는 욕구가 눈에 보일 듯이 뿜어져 나왔다.

저 정도로 잘했으면 조금 우쭐함을 느끼는 것도 괜찮았다. 잘하는 사람에겐 칭찬을 해 주는 것이 당연하지. 난 웃으며 박수를 쳤다.

“멋있었어요. 레오니드.”

“감사합니다. 아가씨.”

레오니드는 멋들어지게 인사를 했지만 입고 있는 것이 민소매 티셔츠에 반바지여서야 멋이 확 줄어든다. 난 그 모습이 재미있어서 또 웃었다.

그렇게 레오니드를 추켜세워 주고 있는데, 옆에 앉아 있던 아나스타샤가 일어섰다.

“저도 해 봐도 될까요?”

“예?”

레오니드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채 되물었다.

그는 잠시 나와 아나스타샤를 본다. 둘 다 치마 차림이었다. 이런 운동에 적합해 보이는 차림은 아니었다. 레오니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보였다. 그가 조심스레 말했다.

“음……. 안 될 건 없지만, 아까 공 속도 보셨잖습니까? 하실 수 있겠습니까? 다치시면 큰일 나는데.”

“괜찮을 거예요.”

“걱정이 되어서 드리는 말입니다. 여성분들은 어려워하시는지라.”

정말 솔직하게 걱정된다는 투였다.

아나스타샤는 매력적으로 웃으며 말했다.

“배려해 주시는 건 감사하지만 할 수 있어요.”

그 모습에서 믿음이 느껴졌는지 레오니드는 그렇다면 해 보라고 말했다. 대신 공의 속도를 조금 낮추겠다고 했다. 아나스타샤는 고개를 끄덕였다.

난 멍하니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나스타샤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갔다 올게. 보고 있어.”

재킷을 내려놓고, 그녀는 철장 안으로 들어갔다.

배트를 집어 슥 들어 올리고는 무게를 가늠하는 듯 흔들거렸다. 난 혹여나 그녀가 다치진 않을까 긴장했지만, 이 와중에도 아나스타샤는 린넨 투피스 차림으로 배트를 들고 있는 모습조차 잘 어울렸다.

아나스타샤가 게임에 이름을 적고 배트를 준비하자 레오니드가 말했다.

“시작하겠습니다.”

그리고 잠시 뒤, 약간 건들거리는 자세로 있던 아나스타샤의 상체가 번개처럼 움직였다.

깡 하는 소리와 함께 공이 멀리 뻗었다.

“……!?”

스크린에서 홈런이라는 글자와 함께 축하하는 이미지가 화려하게 펼쳐졌다. 난 얼이 빠졌다. 레오니드 역시 입이 떡 벌어졌다.

“……후.”

홈런을 치고도 아나스타샤는 별 감흥 없다는 듯 다시 유려하게 배트를 회수해서 어깨 뒤로 넘겼다. 자세만 보면 숙련된 타자라고 해도 믿어질 정도였다.

대단한 건 아나스타샤의 자세뿐만이 아니었다.

배트에서 터져 나오는 청명한 소리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공은 한 번도 철망에 맞지 않고 계속해서 스크린 쪽으로 뻗어져 나갔다.

나는 물론이고 레오니드와 야콥은 어이없어하면서 그녀가 계속 공을 때리는 것을 지켜보기만 했고, 마지막 공까지 쳐 내며 그녀는 10할의 타율을 기록했다. 비현실적인 스코어였다.

게임이 끝나고, 그녀는 철망을 열고 나오더니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스트레스 좀 풀리네.”

“아나스타샤……. 어릴 때 야구 신동이라던가 그랬나요?”

“아니? 전에 한 번 해 봤어.”

전에 한 번 해 봤는데 어떻게 이렇게 잘하나요? 말이 안 되잖아요?

믿기 어렵다는 눈으로 올려다보고 있자 아나스타샤가 산뜻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철망에 맞으면 네가 놀라잖아.”

“…….”

철망이 요동칠 때마다 내가 움찔거렸던 것을 기억하는 듯하다. 그걸로 날 놀리는가 싶으면, 또 그건 아닌 듯했다. 아나스타샤는 묘한 미소를 띠며 다가왔다.

아나스타샤는 은근히 내게 칭찬을 바라는 듯한 눈빛을 했다. 솔직히 그녀에게 무슨 칭찬을 해도 내가 하는 건 별로 의미 없게 들릴 것 같았다. 그렇게 멍하니 있는데 레오니드가 먼저 말했다.

“이, 이렇게 잘 치실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대단하시군요?”

“감사해요. 하지만 제가 제일 잘 치는 건 건반을 치는 일이에요.”

“……예? 피아노 치십니까?”

“……? 저 타티아나랑 같은 학교 같은 반인데요.”

“?”

레오니드는 황당하다는 듯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게임이라면 뭐든 잘하는 아나스타샤의 실력이 당혹스러울 정도라는 건 이해하지만 그건 조금 실례인데요. 레오니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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