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7화
막연히 느끼고 있던 부담감과 두려움은 다 같이 물에 들어감과 동시에 씻은 듯이 사라졌다.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도 모를 물장난이 오갔고, 난 나에게도 날아오는 물세례를 피해 도망쳐야 했다. 엄숙한 수영 교습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갑자기 전쟁터가 되어 버리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간신히 중앙에서 조금 벗어나서 상황을 보니 가운데에서 에르네스트가 집중공격을 당하고 있었다. 평소 업보가 얼마나 쌓여 있는 건가요, 에르네스트…….
살짝 껴서 에르네스트에게 포화를 퍼붓는 데에 일조하는 것도 좋겠지만, 그보다 재미있는 것이 생각났다.
난 풀 밖으로 나와선 수영복을 사면서 함께 산 도구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튜브와 펌프, 잠수용 고글 등 이것저것 많았다. 난 그중 물총 두 개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수영장에 있는 물을 채우고는 에르네스트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살짝 던져 주었다.
“에르네스트. 받아요.”
“어?”
알게 모르게 코너로 몰리던 에르네스트는 바로 앞에 떨어진 물총을 발견했다. 그리고 바로 눈빛이 돌변하더니 그걸 집어 들고 반격에 나서기 시작했다.
가장 신이 나 있던 리처드가 얼굴에 물총을 직격당하고는 발이 미끄러졌는지 뒤로 푹 잠기더니 한참 후에야 어푸거리며 일어났다. 난 깜짝 놀랐다. 이 물총 생각보다 너무 세다.
“다 죽었어.”
에르네스트는 음산하게 중얼거리며 펌프질을 했다.
난 아무것도 모르고 마왕을 깨워 버린 사람의 기분을 느끼며 슬그머니 그 자리에서 뒷걸음질 쳤다.
그 후로는 거의 일방적이었다. 에르네스트는 류보비를 제외한 나머지들에게 물총으로 복수를 하기 시작했다. 수영을 할 줄 아는 아나스타샤는 바로 잠수해 버렸고, 리처드와 한승우로부터 간헐적으로 반항이 있긴 했지만 맨손으로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걸 가만히 보다가, 나는 에르네스트의 옆머리에 물총을 겨누고 당겼다.
“……??”
촤악, 강력한 수압이 에르네스트의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게 만들었고, 그는 곧 이쪽을 바라보았다.
믿을 수 없다는 배신감으로 물든 얼굴이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정말 재미있었다. 원래 놀이라는 건 배신과 암투가 허락되는 유일한 일 아니겠는가. 난 장난스레 웃으며 곧바로 반격해 오는 물줄기를 피해 물속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한참 동안 우리는 물장난을 치며 놀았다. 물총이 있는 곳을 발견했으니 모두가 물총으로 무장한 건 당연한 일이었고, 아나스타샤는 잠수용 고글을 쓰고는 잠영하며 남자애들의 발을 걸어 넘어뜨리는 데에 재미를 붙인 듯했다.
가만 보고 있으면 멀쩡히 서 있다가 푹 물에 빠지는데, 물이 그리 깊진 않으니 괜찮겠지만 저러다가 물을 많이 먹진 않을지 걱정될 정도였다.
잠수한 아나스타샤의 그림자는 이곳저곳을 맴돌다가, 내게도 다가왔다. 새하얀 유선형의 무언가가 빠르게 다가오는 것을 보니 그것이 아나스타샤임을 알면서도 공포감이 느껴졌다. 아나스타샤가 날 넘어뜨리려 한다면 꼼짝없이 물에 빠져야 할 것이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내 코앞까지 오더니, 물보라를 흩날리며 물 밖으로 튀어 올랐다. 깜짝 놀란 내가 고개를 쭉 빼자, 아나스타샤는 한 손으로 젖어 있는 황금빛 머리칼을 뒤로 넘기며 환하게 웃었다.
조명을 받아 반짝거리는 그녀는 정말 물의 요정처럼 보였다.
그녀가 뒤편을 엄지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아, 수영을 제대로 할 줄 아는 사람이 없으니까 너무 시시해.”
“아나스타샤가 너무 잘하시는 게 아닐까요?”
내가 보기에 아나스타샤는 거의 수영 선수 같다.
그녀는 듣는 둥 마는 둥 히죽 웃더니 어깨를 돌리며 말했다.
“슬슬 수영 좀 가르쳐야 할 것 같네.”
“지, 지금요?”
“응.”
원래 수영을 조금 배우기로 했지만, 어쩐지 분위기가 바로 노는 분위기로 넘어가 버린 후였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이대로 유야무야 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아나스타샤가 소리쳤다.
“남자들! 그만 놀고 이리 와!”
“뭔데?”
물놀이가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고 모두 이쪽으로 다가왔다.
아나스타샤가 삐뚜름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수영 배우기로 했잖아. 안 배울 거야?”
“…….”
방금 전까진 그냥 장난을 치고 노는 데에 다들 정신이 팔려 있었던 것 같지만, 다들 한 번쯤 물속을 잠영하는 아나스타샤에게 발이 걸려 넘어진 경험들을 떠올리는지 갑자기 열의에 찬 표정이 되었다.
리처드가 대답했다.
“배워야지.”
“그럼 와서 풀사이드 잡아 봐. 뜨는 것부터 해 봐야지. 에르네스트, 아까 말했던 대로 네가 좀 가르쳐 줘.”
“……그래.”
에르네스트는 귀찮다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래도 약속을 어길 생각은 없는지 이러쿵저러쿵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그도 굉장히 성실한 사람인 것이다.
그렇게 남자 세 명을 에르네스트에게 맡기고, 아나스타샤가 말했다.
“타티아나, 류보비. 이리로 와.”
“예.”
“응, 언니.”
막 물놀이로 불타오르던 분위기는 수영 수업으로 바뀌고도 그 열기를 이어 갔다.
저 옆에서 에르네스트가 큰 소리로 가르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알아들을 수 있도록 딱 한 번 설명하고는 못 하면 물을 먹이는 한이 있더라도 강제로 뜨게 해 주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데, 가서 말리고 싶을 정도였다. 설마 정말 그렇게 강압적으로 하진 않겠지.
에르네스트를 믿으며 나와 류보비는 수영장 가장자리를 잡고 몸을 띄우는 연습을 했다. 지난 며칠간 아나스타샤와 함께 수영장에서 특훈을 받아 이제 간신히 조금 뜰 수 있게 된 나는 발장구 치는 연습도 병행했다.
류보비와 함께 잠수도 해 보았다. 한껏 숨을 들이마시고 잠수했는데 기절할 것 같아서 물 밖으로 나왔더니 20초 정도밖에 못 참아서 류보비에게 졌다.
나 수영할 순 있을까. 암담해졌다.
“…….”
그래도 아나스타샤가 이렇게 가르쳐 주는데 바로 못하겠다고 할 순 없었다. 난 조금 더 집중해서 아나스타샤의 지도에 따랐다.
무릎을 펴고 발장구를 치는 일이 이렇게 힘들 줄은 몰랐다.
얼마나 연습했을까. 난 물 밖으로 나와선 기다란 의자에 드러누워 버렸다. 꼴사납게 숨이 차올랐다.
아나스타샤가 옆에 다가와선 거의 기절 직전인 내게 빨대가 꽂힌 음료 잔을 건네주었다.
“잘 했어. 타티아나.”
“잘…… 해요……? 제가요?”
저질스러운 체력에 한탄하고 있는데 아나스타샤는 그 말이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체력은 하다 보면 길러질 거야. 그보단 네 자세가 참 예쁘더라고.”
“아……. 자세요?”
“응. 원래 그렇게 자세를 잡으려면 못해도 일주일에서 한 달은 배워야 할 텐데, 넌 정말 빠르게 배우고 있어.”
그건 조금 위안이 되는 말이었다. 적어도 자세 하나만큼은 가르쳐 주는 대로 할 수 있도록 기를 썼던 것이 그녀의 눈에 보였다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숨이 차고 다리가 아픈데도 웃을 수 있었다. 빨대를 물고 옆을 바라보았다. 같이 수영 연습을 한 류보비도 조금 지쳤는지 아나스타샤가 가져다준 음료를 마시고 있었다.
류보비는 달콤한 음료수로 목을 축이고 나자 조금 살 것 같다는 듯 눈을 반짝이며 이쪽을 돌아보았다.
“언니.”
“예, 류보비.”
“오늘 수영 수업은 여기까지죠?”
“…….”
류보비도 참 착하게도 아나스타샤가 수영을 가르쳐 주는 것을 수업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나 보다. 그녀는 이젠 놀고 싶다는 의지를 맹렬히 이쪽으로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내가 결정한 일이 아니었다. 난 그 눈빛을 받아 다시 아나스타샤 선생님에게 전달했다.
아나스타샤는 깔깔 웃으며 말했다.
“그래. 체력도 없고 힘들 텐데 그만하자.”
“고마워요…….”
“고맙다니? 누가 보면 내가 너희들 괴롭힌 줄 알겠어.”
“아하하…….”
난 힘없이 웃으며 저편을 바라보았다. 거기엔 아직도 물속에서 스파르타식으로 수영 교습을 받고 있는 남자들이 보였다.
리처드와 한승우는 물고문이라도 당했는지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친구 사이이긴 하지만 저 애들도 무언가 배운다는 기분으로 임할 땐 한없이 진지한 애들인 것이다. 그러니까 저기, 에르네스트. 제발 적당히 해 주시면 안 될까요?
아나스타샤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에르네스트에게 일단 이쯤 하자고 전했다. 에르네스트가 승낙했다.
짧은 수영 교습이 끝나고, 다시 물놀이에 돌입할 준비를 했다.
하지만 이번엔 힘이 다 빠져서 처음처럼 물싸움을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들 기진맥진해서는 휴식을 필요로 했다. 난 도구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 튜브와 펌프를 꺼내 왔다.
류보비가 말했다.
“튜브네요?”
“둥둥 떠다니면서 조금 쉬도록 하죠.”
“좋아요. 좋아요. 그런데 이건 뭐예요?”
“튜브에 바람을 넣을 펌프예요.”
난 풍선만 불어도 머리가 띵하게 아파 오곤 했다. 그렇게 폐활량이 바닥에 가까운 내가 튜브에 입으로 바람을 넣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펌프의 도움을 받더라도 결국 펌프질을 해야 하긴 하지만, 팔이 조금 아픈 것이 차라리 나았다.
“자, 어떤 튜브로 하시겠어요?”
“전 이거요!”
류보비가 고른 튜브는 분홍색으로 가장자리에 프릴처럼 날개가 달려 있는 튜브였다. 귀여운 것을 좋아하는 류보비가 고를 만했다.
난 그녀가 고른 튜브를 펌프에 연결하고, 손잡이를 위아래로 반복했다.
“……?”
하지만 손잡이는 어떠한 저항도 없이 손쉽게 왔다 갔다 하면서 바람 새는 소리를 내기만 했다. 당연히 튜브도 부풀어 오르는 일이 없었다. 난 펌프의 구조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이게 고장 나 있다는 건 알 것 같았다.
“고장 났어요?”
“그러네요……. 어쩌죠.”
조금 난감했다. 막 새로 받아 온 펌프가 불량일 줄은 미처 생각도 못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나와 달리 류보비는 바로 다음 대책을 찾아 행동했다.
“오빠!”
“?”
류보비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아무나 들으라는 듯 소리쳤다. 거기에 에르네스트가 반응하고는 이쪽으로 다가왔다.
물이 떨어지는 머리를 넘기면서 그가 말했다.
“무슨 일이야? 어……. 튜브 쓸려고?”
류보비가 붙임성 좋게 웃으며 말했다.
“예. 그런데 있잖아요, 원래 펌프를 쓰려고 했거든요?”
“응. 그런데?”
“펌프가 고장 난 것 같아서요. 오빠가 불어 주시면 안 될까요?”
이렇게 귀엽게 웃으면서 부탁하는데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
에르네스트는 손을 뻗어 펌프를 두어 번 조작해 보더니 역시 고장 났다고 판단했는지 긴 말 않고 류보비가 내민 튜브를 받아 들었다.
그러고는 숨을 들이쉬더니 튜브를 불기 시작했다. 가슴이 몇 번 크게 부풀었다가 수축하자 튜브가 금방 제 모양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류보비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난 평소에 에르네스트에게 캔이나 페트병을 열어 달라고 부탁하는 경우가 꽤 있었지만, 이렇게 튜브를 불어 주는 일은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누군가를 위해 수고를 해 준다는 것은 똑같은데 뭐가 다른지 설명하긴 어려웠지만, 그를 보면서 조금 묘한 감정을 느꼈다.
잠시 후, 에르네스트는 류보비의 튜브에 공기를 다 채워 넣었고, 꾹꾹 눌러서 확인까지 마쳤다.
살짝 숨이 차 보이긴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내색하지 않고 류보비에게 튜브를 건네주었다. 류보비는 활짝 웃으며 감사인사를 했다.
“고맙습니다!”
“별것 아니니까.”
“역시 펌프보다 오빠가 불어 준 게 더 잘 뜰 것 같아요.”
“똑같을걸? 튜브 안에 이산화탄소가 조금 많긴 하겠지만.”
“그게 좋은걸요.”
“?”
에르네스트가 어리둥절해하는 사이 류보비는 튜브를 들고 수영장으로 가서는 얌전히 물 위에 튜브를 올려놓고는 곧 우아하게 떠다니기 시작했다.
“…….”
나나 에르네스트나 둘 다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난 에르네스트가 튜브를 부는 것을 보며 왜 묘하게 느껴졌는지 깨달았다. 튜브 안에 누구의 숨이 들어간다는 것이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겠지만, 류보비의 말마따나 기분이 어떠냐고 따진다면…….
“타티아나.”
“으……. 예?”
뭔가 바보 같은 소리를 내고, 부끄러워져서 얼굴을 돌리자 그도 약간 주저했다. 하지만 조심스레 물어 온다.
“튜브 쓸 거야?”
“…….”
난 원래 튜브를 쓸 생각이었으나,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데도, 약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괜히 변명하듯 말했다.
“힘드시잖아요.”
“안 힘들어.”
에르네스트가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힘이 좋아도 이런 튜브 하나에 숨을 불어넣는 것이 힘들지 않을 리가 없었다. 두 개나 연달아 분다면 보통 힘든 일이 아닐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고 한다.
난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에르네스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진 모르겠지만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평소 그에게 무언가 해 달라고 부탁하는 일은 많았지만 이번엔 상황이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이게 다 류보비가 괜한 말을 한 탓이었다.
아무것도 안 했는데 약간 숨이 가빠진다. 여기서 괜찮다고 하는 건 간단한 일이었다.
하지만 난 손에 집히는 대로 튜브를 하나 들고 그에게 건네주었다.
“그렇다면…… 부탁드려도 될까요.”
류보비가 무슨 말을 했는지 이해한 것처럼 의식하면 정말 부끄러워질 것 같아서, 난 모른 체하고 그에게 청한다.
“알았어.”
에르네스트 역시 아무 말 하지 않고 내 손에서 튜브를 받아 갔다.
우리는 서로 더 이상 묻지도 대답하지도 않았다. 에르네스트는 말없이 눈을 감고 튜브에 바람을 불어넣었고, 난 그를 똑바로 보기가 약간 힘들어서 고개를 살짝 돌렸다.
하지만 아예 딴청을 부리면 무언가 읽힐지도 모른다는 마음이 애매하게 그를 시야에 담았다. 에르네스트는 이쪽을 보고 있진 않았지만 그의 가슴이 오르내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침묵 속에서 시간이 흐르고, 에르네스트가 가득 부풀어 오른 튜브를 손으로 만져서 확인하고는 내게 건네주었다.
“자, 여기.”
“……고마워요.”
천천히 그것을 받아 들었다. 품에 가득 안길 정도로 튜브는 커져 있었다. 그리고 에르네스트는 아까보다 조금 더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도 사람인데 안 힘들 리가 없었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하나도 힘들지 않다는 듯 씩 웃더니 수영장 쪽을 가리켰다.
“난 먼저 들어가 있을게.”
“예.”
그렇게 말을 마친 에르네스트는 무엇이 그리 급한지 수영장으로 가더니 그대로 수영 선수처럼 점프해서 물에 잠수해 버렸다.
난 멍하니 서서 품에 안긴 튜브를 만지작거렸다. 건네줄 땐 힘없이 축 늘어져 있던 튜브는 그의 손에서 부풀어 돌아왔다.
류보비의 말이 조금 이해가 갔다. 펌프로 바람을 넣은 튜브보다 이 튜브가 훨씬 더 잘 뜰 것 같았다.
“…….”
난 머리를 작게 흔들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