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8화
수영장 위에 튜브를 띄웠다. 평범하게 잘 뜬다.
튜브를 잡고 물속으로 들어간 다음 빠져나와 어렵사리 다리를 걸쳤다. 튜브 위에 앉은 자세로 떠다닐 수 있게 되었다.
“…….”
다리를 쭉 뻗자 한결 편해졌다. 사실 이래서야 물에 들어간 건지 아닌지도 잘 모르겠지만, 둥둥 떠다니는 느낌이 재미있긴 했다. 그리고 에르네스트가 기껏 불어 준 튜브를 제대로 쓰지 않는 건 실례일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도 모르게 에르네스트를 찾았다. 그는 저편에서 리처드, 한승우와 함께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고 있자니 문득 작년 생각이 났다. 그때만 해도 에르네스트는 저 애들과 거의 제대로 된 이야기를 하지도 않았다.
한승우는 거의 무시했고 리처드와는 눈만 마주치면 으르렁거리고 싸우기 바빴다. 말다툼을 하는 건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요 1년 사이 그가 정말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그리고 나도.
“…….”
1년 전에 다짐했던 마음가짐은 지금과 그리 다를 바 없다. 난 가벼운 마음으로 대충 살지 않는다. 피아노 하나를 택하고 나머지 모두를 순응하기로 했던 것, 지금도 다르지 않다.
하지만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열네 살에 생각하며 미뤄 두기로 했던 것들이 지금은 보다 가깝게 느껴진다. 시간은 천천히, 확실하게 흐른다. 공고히 쌓아 둔 내 벽은 자꾸만 날 흔드는 이들에 의해 흔들렸다.
그중에서도 가장 내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여기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수영장을 넓게 바라보았다. 내게 부여되고 허락된 일이 무엇인진 아직 알 수 없지만, 저 애들을 위하는 것이 내가 여기에 있는 이유 중 하나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이 중에서도 내가 조금 더 깊게 신경 쓰는 친구는 두 명일 것이다. 난 이전처럼 나 자신에 대한 의심과 불신을 가지는 대신 조금 더 솔직해지기로 했다.
하나로 줄일 순 없는지, 또 두 사람에게 향하는 마음이 같은지. 아직은 알 수 없다. 하지만 난 유심히 지켜보았다.
물론 그렇다고 실제로 그들을 뚫어지게 보겠다는 뜻은 아니었는데, 내 눈이 그리 향하고 있자 에르네스트가 시선을 느꼈는지 이쪽을 돌아보았다. 그러더니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다가왔다.
순간 도망칠까 생각이 들었지만 그건 그거대로 이상했다.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되레 더 똑바로 바라봤다.
멋진 수영 솜씨로 순식간에 다가온 에르네스트가 내 옆에 멈춰 섰다. 누워 있는 자세로 그를 바라보는 것이 어쩐지 어색했지만 일어날 방법이 없었다.
움직이지 않는 게 아니라 움직이지 못해서 가만히 쳐다보고 있자니 에르네스트가 물었다.
“왜 멀리 떨어져 있어?”
“딱히 멀리 있으려던 건 아니에요.”
“그럼?”
“튜브에 실려 표류중이죠.”
“푸하하하.”
대충 대답했더니 에르네스트가 난데없이 빵 터졌다. 약간 황당했다. 내가 정처 없이 떠다니고 있다는 게 그리 웃긴가?
한참을 웃던 에르네스트가 킥킥거리며 말했다.
“그런데 여기엔 파도도 바람도 없는데 어떻게 하려고?”
“그러게요……. 아무것도 없으니 넓은 태평양이나 좁은 수영장이나 제겐 다를 바가 없네요.”
그를 한 번 웃겼으니 두 번 웃겨 볼까 싶어 쓸데없는 소리를 했다.
그런데 에르네스트는 이번엔 시원하게 웃는 대신 가늘게 미소를 지었다.
“내가 파도가 되어 줄 수도 있는데.”
“예?”
무슨 시적 표현인가 싶어 순간 이해하지 못하고 반문했더니 그가 손을 뻗어 내가 누워 있는 튜브를 툭 짚었다. 그 힘에 내 몸이 둥실 밀린다.
“밀어 주면 되잖아?”
“……??”
“저쪽까지 밀어 줄게.”
“잠깐, 잠깐만요.”
난 이제껏 태연을 가장하고 있던 표정을 풀어 버리고 허겁지겁 상체를 일으켰다. 하지만 제대로 되지 않아서 괜히 주변에 물만 튀겼다. 바동거리는 것도 웃기게 보일 것이 분명했기에 난 팔을 멈추고 말했다.
“시, 싫어요.”
“왜?”
“창피하잖아요.”
굳이 왜냐고 묻는 그가 얄미웠다. 몰라서 물어요, 지금?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내가 류보비만 한 나이라면 또 모를까. 에르네스트가 밀어 주는 대로 튜브에 실려 가는 모습을 다른 친구들에게 보이는 건 사양하고 싶었다.
에르네스트는 날 괴롭히기로 작정한 듯 장난꾸러기처럼 사악한 미소를 짓는다. 잠깐만, 지금 나 도망칠 방법이 없는 것 같은데.
“음, 그럼 어쩌지……. 어!?”
중얼거리던 에르네스트가 외마디 비명과 함께 물에 쑥 빠졌다. 난 깜짝 놀라서 머리를 들어올렸다.
물에 빠졌던 에르네스트는 잠시 후 다시 수면 위로 빠져나오더니 물 밑을 향해 소리를 쳤다.
“아나스타샤!”
그것이 무슨 소환 주문이라도 되는 양, 물의 요정이 치솟아 올랐다.
아나스타샤는 팔을 들어 머리를 쓸어 넘기고는 짓궂은 표정으로 말했다.
“무릎이 약하네. 에르네스트.”
“그렇게 잡아당기면 누가 안 넘어져!”
“불만이면 너도 하던가?”
“적당히 해 진짜.”
에르네스트는 아나스타샤의 도발에 짜증스레 답했다. 아나스타샤는 킥킥 웃었다.
“자신 없겠지. 솔직히 수영 실력으로는 내가 너보다 낫잖아?”
“그럼 수영 선수 하든가. 솔직히 내가 보기에 넌 운동선수를 했어야 했어.”
“그런 이야기 많이 들어.”
역시 아나스타샤에게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많은 듯했다. 그녀는 못하는 것이 별로 없었으니까.
아나스타샤가 손가락을 까딱이며 말했다.
“왜 고리타분한 클래식을 하느냐고 말이지.”
“……누가 그래? 네 피아노를 고리타분하다고?”
“아하하, 역시 에르네스트. 그 부분을 짚고 오는구나?”
“…….”
살짝 발끈한 에르네스트를 향해 아나스타샤는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는 듯 말했고, 에르네스트는 입을 다물었다.
나도 에르네스트도 아나스타샤가 왜 피아노에 몰두하는지 알고 있다.
그녀가 지닌 천부적인 그 음악성은 도저히 음악을 하지 않고는 버틸 수 없도록 되어있기 때문이다. 다른 부분에서 보이는 천재적인 재능들을 모두 눌러 버릴 정도로 아나스타샤의 음악성은 뛰어나다. 그녀는,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잘 안다. 그뿐이었다.
잠시 말이 없어진 에르네스트를 보며 아나스타샤는 싱긋 웃었다.
“어쨌든 난 수영 선수가 아니라 피아노 선수니까……. 글쎄, 조만간 피아노로 너도 잡을 생각인데.”
“피아노를 들어서 날 패겠단 말은 아니지?”
“너 또라이니?”
말도 안 되는 무리수에 아나스타샤가 눈을 흘겼고 에르네스트는 헛소리였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듯 양손을 들었다.
그러고는 피아노라면 물러설 생각 없다는 듯 노려봤다.
“……어쨌든 그런 거라면 오늘 당장이라도 좋은데? 해 보시지.”
“지금은 됐고.”
“뭔데 대체.”
“수영 대결이나 해 보는 건 어때?”
그 제안에 에르네스트가 인상을 팍 썼다.
“무슨 소리야. 불과 몇 초 전에 수영 실력으로는 네가 낫다면서 지금 대결을 하자고?”
“어머, 난 네가 승산 없는 싸움은 무조건 피하는 겁쟁이인 줄 몰랐는데.”
“……열 받게 하네.”
너무 단순해요 에르네스트…….
정말 말도 안 되게 살짝 도발했을 뿐인데도 에르네스트는 승부욕에 불이 붙었는지 어깨를 휘휘 돌리며 풀었다.
“해. 하자고.”
“그래. 벌칙은 바에 가서 여기 애들 숫자대로 음료수 받아 오기야.”
“좋아.”
벌칙으로 30분간 잠수하기 같은 것이 걸렸더라도 에르네스트는 거절하지 않고 무조건 받아들였을 것 같다. 그렇게 성난 황소처럼 대결을 받아들인 에르네스트는 아나스타샤와 함께 나란히 섰다.
“……출발하세요.”
힘없는 내 신호와 함께 두 사람은 반대편 수영장 벽까지 헤엄치기 시작했다.
난 갑자기 무슨 일이 시작되는 것인지 잘 이해도 안 돼서 멍하니 두 개의 물보라를 바라보았다.
우울하게 음료수를 받으러 간 것은 에르네스트였다.
승부를 간단히 끝내 버리곤 다시 돌아와 내 튜브를 잡고 놀고 있던 아나스타샤는 활짝 웃으며 에르네스트가 주는 작은 페트병을 받았다.
“고마워.”
“…….”
에르네스트는 잇소리를 내며 내게도 작은 페트병을 건네주었다. 수영장에 흘릴 수도 있으니 잔이나 캔보다는 뚜껑을 여닫을 수 있는 페트병이 낫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그런데 내 손에 페트병을 쥐어 주기 직전, 그는 다시 그것을 가지고 가더니 내게 보여 주는 듯 병뚜껑을 열었다가 다시 살짝 닫았다.
“자.”
“…….”
난 세심하게 날 배려하는 그에게 감사를 표했다.
“고마워요. 에르네스트.”
굳이 이렇게 하지 않아도 상관없지만, 그가 신경을 써 준다는 것이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
실내 수영장에서 한참 동안 놀다가 샤워를 하고 다시 밖으로 나와선 티가든으로 돌아갔다. 시간은 딱 애프터눈 티를 즐기기에 좋은 시간이었다.
가지각색의 차와 디저트 등이 준비되었다. 점심 식사 후에 한참이나 시간이 흘렀고 그사이 승마와 사격, 수영까지 많은 것들을 즐겼기 때문에 모두들 배고파했다.
리처드가 크림 케이크를 한 입 먹더니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 케이크 너무 맛있는 거 아냐? 이것도 드미트리 셰프가 만드는 거야?”
“예. 맞아요. 드미트리는 파티셰기도 하거든요.”
“그 사람 대체 뭐지. 요리의 신인가?”
리처드가 혀를 내둘렀고 난 적극 동의했다. 그리고 요리의 신을 스승으로 두고 있으니 나도 열심히 더 배워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드미트리에 대한 찬사와 담소가 오갔다. 대부분이 승마장과 사격장에서 있었던 일과 수영을 배웠던 것에 대한 이야기 등이었다. 난 친구들을 위해 준비했던 것들을 모두 즐겁게 즐겨 준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아졌다.
이다음에는 잠시 쉬다가 아버지가 돌아오시면 저녁 식사를 하고 이브닝 파티를 할 생각이었다. 이미 시간은 적절하게 배분을 해서 계획하고 있었으니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 간과한 것이 있었다.
“……류보비?”
“앗, 네. 언니.”
“피곤하신가요?”
“아뇨?”
한 잔의 로즈마리 차와 몇 개의 쿠키를 집어 먹은 류보비는 갑자기 졸음이 쏟아지는지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대답은 빠릿하게 하고 있지만 졸음을 참느라 힘겨워하는 것이 빤히 보인다. 난 그런 류보비를 보며 웃었다.
오늘 이른 아침부터 데리고 와서는 이리저리 데리고 다니며 많이 걷기도 했고, 수영장에서도 한참 동안 놀기도 했으니 어린 류보비의 입장에선 무척이나 피곤하고 졸릴 만도 했다. 나나 다른 친구들의 기준에서만 생각해선 안 되는 것이었다.
사샤도 말없이 콜라만 홀짝이는 게, 보기엔 괜찮지만 피곤한 건 마찬가지인 듯했다.
난 잠시 시간을 확인했다. 저녁 식사 전까지 시간은 아직 몇 시간 남아 있었다.
“여러분.”
테이블 위로 모두를 부르자 내게 시선이 쏠린다. 난 간단히 말했다.
“티타임은 슬슬 파하고 이후 저녁 식사 전까지 뭘 할지에 대해서 말인데요. 저쪽에 좋은 정원이 있으니 그곳에 가 보는 건 어떨까요?”
“좋은 정원?”
“예. 정말 아름다운 곳이에요.”
“사자 같은 게 있는 건 아니지?”
“……예?”
“아니야, 미안.”
리처드는 바보 같은 소리를 하더니 미안하다며 곧장 사과했다. 하지만 그 눈엔 얼핏 기대감이 스쳤다. 승마장과 사격장, 수영장을 보여 준 내가 이다음 무엇을 보여 줄지 기대하는 듯했다.
하지만 별것 없었다.
“풀밭 위에 자리를 펴고 잠시 낮잠을 자면 어떨까 해서요.”
“낮잠?”
“예. 어떠신가요?”
내 제안에 다른 모두가 서로를 바라보았다.
류보비가 급히 내 소매를 잡아당겼다.
“언니! 저 정말 괜찮은데…….”
“아하하, 괜찮아요.”
류보비는 지금 자신 때문에 모두들 낮잠을 자게 생겼다고 생각했는지 당황해했다. 하지만 류보비가 얼마나 피곤해할지 생각해 두지 않은 내 책임이었다.
그런 나와 류보비를 본 다른 네 사람도 눈치가 빠르다. 아나스타샤가 상황을 알겠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조금 잘까?”
“나도 뭘 좀 먹고 났더니 졸리네. 흐암.”
에르네스트가 뒤따라서 하품까지 해 가면서 장단을 맞추었다. 리처드와 한승우, 사샤도 모두들 좋은 제안이라며 동의했고 우리는 열심히 논 만큼 낮잠을 자기로 했다. 사실 낮잠이라기엔 조금 늦은 시간이기도 했지만, 상관없었다.
나제즈다에게 부탁해서 풀 위에 깔 피크닉 매트를 몇 개 받았다. 가볍게 먹을 샌드위치와 음료도 함께였다.
길을 따라 걸으면서 나는 풀밭으로 모두를 이끌었다. 졸려 하는 류보비를 보자마자 떠올렸던 곳이다. 주변보다 살짝 높게 동산처럼 되어 있으며 가운데엔 커다란 나무가 몇 그루나 있어서 햇빛을 가려 주는, 멋진 곳이었다.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모두가 탄성을 냈다. 바로 여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나는 피크닉 매트를 깔고 샌드위치가 든 바구니를 내려놓았다. 아나스타샤와 함께 류보비와 둘러앉았다.
류보비가 날 힐끔 보더니 정말 자도 되냐고 물었다. 난 걱정 말고 누우라고 했다. 팔베개를 해 준다면 좋겠지만 그 대신 무릎을 꿇고 허벅지를 내어 주었다.
류보비는 그럴 순 없다면서 극구 거부했지만 난 거의 강제로 류보비를 내 허벅지 위에 눕혔다. 류보비는 내 허벅지를 베고도 한참 동안이나 머뭇거리다 작게 자장가를 불러 주자 순식간에 잠들어 버렸다. 정말 피곤했던 모양이었다.
기분 좋은 바람이 스쳐 지나간다.
난 흐뭇하게 류보비의 이마에 흐트러진 머리칼을 손끝으로 정리해 주고, 고개를 들었다.
“사샤.”
“네?”
“사샤도 눈 좀 붙이겠어요?”
멀찌감치 있던 사샤가 날 보더니 다가왔다.
사샤 역시 졸리긴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류보비보다 한 살 더 어린 사샤는 씩씩하게 버티고 있긴 하지만 그 눈에 이미 졸음이 와 있었다.
사샤는 천천히 다가오더니 매트 위에 올라왔다. 내가 웃으며 손짓하자 가까이 오더니 내 옆에 모로 누웠다. 이럴 줄 알았으면 베개도 챙겨 오는 것이었는데, 미처 생각을 못 했다.
대신 옆에 있던 아나스타샤가 팔베개를 해 주겠다고 말했지만, 사샤는 괜찮다며 거절했다.
그렇게 류보비와 사샤를 재운 뒤 천천히 노래를 불러 주고 있자 아나스타샤가 자기도 졸리다면서 눈을 비볐다.
“넌 안 자도 돼? 타티아나.”
“…….”
난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편엔 남자들도 앉아 있었다. 무언가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만 조금 내버려 두면 잠들지 않을까 싶다.
“전 괜찮아요.”
“그래도…….”
“주무세요. 괜찮아요, 아나스타샤.”
아나스타샤는 자기도 괜찮다면서 자신 있게 말했지만 재잘거리길 몇 분 지나지 않아 내 옆에 스르르 기대어 잠들어 버렸다. 편하게 눕는 것이 좋을 텐데, 불편한 자세로도 아나스타샤는 잘만 잤다.
정말 꼼짝도 못 하게 된 채로 고개를 돌리자 저편의 남자들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약간 난감하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난 신경 쓰지 말라는 뜻으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얼른 조금이라도 눈을 붙이라는 뜻으로 작게 손짓하자 한두 명씩 자리에 누웠다.
에르네스트만이 마지막으로 남아 있었다. 내가 재차 손짓하자 그제야 그도 마뜩잖다는 눈빛으로 누웠다.
“…….”
얼마 지나지 않아 주변이 조용해졌다. 나뭇잎 사이로 햇빛이 간간히 스며들고, 불어오는 바람에 작게 들리는 숨소리들만이 실려와 귓가를 간질였다.
옆을 돌아보았다. 곤히 잠든 아나스타샤는 무슨 꿈을 꾸는지 웃고 있었다. 저편에 있는 이들도. 자고 있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내 마음은 따뜻해져 왔다.
난 다시 들릴 듯 말 듯 작게 허밍하며, 저녁 전까지 잠깐이지만 평안하게 잘 수 있기를 기도하는 노랫소리를 바람 위에 살짝 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