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9화
긴장된다.
“우리 정규 연주회 다음 스케줄인 거죠?”
“아마 그렇게 될 것 같아. 이 정도면 알맞지.”
“콩쿠르 우승하자마자 했으면 좋았을 텐데. 타이밍도.”
“느긋한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커다란 합주 연습실에서 난 자연스레 칠판 바로 앞에 앉았다. 아나스타샤가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았고, 내 바로 옆엔 지휘자 스타니슬라프와 악장 크리스티나가 앉아 있었다.
옆을 보다가 슬쩍 고개를 돌리니 저마다 이야기를 나누는 열 네 명의 단원들이 있었다.
오늘은 공식적으로 나와 오케스트라가 만나는 첫날이라 모두 참석했다고 한다.
오늘 바로 협연을 해 보거나 하진 않을 테니 긴장하지 말라고는 하지만, 긴장을 안 할 수가 없었다.
“…….”
난 협연에 대해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늘 거의 혼자 쌓아 왔던 음악을 열 명도 넘는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부담이었다.
물론 여러 명이 음악을 만드는 것은 혼자선 할 수 없는 거대한 감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일이며, 앞으로도 연주자로서 살아 나갈 생각이라면 협연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도 난 조금 어색하다.
어쩌면 알고 모르고, 혹은 익숙하고 안 익숙하고의 차이가 아니라 단순히 성향의 차이일지도 모르겠다.
“음.”
하지만 성향이 어쨌건 부딪쳐야 했다.
협연을 아예 하지 않고 리사이틀만 하는 음악가로 살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난 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선 더욱 노력하고, 해 보기로 다짐했다.
성격 같은 건 부딪치다 보면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것이다. 보다 좋아질 수 있다. 난 그것을 안다.
그렇게 다시 마음을 다잡으며 분위기에 익숙해지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지휘자 스타니슬라프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잡담은 이쯤 하고.”
“…….”
그 말 한마디에 모든 말소리가 사라졌다. 강렬한 카리스마였다.
흩어져 있던 모든 시선이 앞에 있는 스타니슬라프와 크리스티나, 그리고 내게 향한다. 소름이 끼칠 정도의 단결력이었다.
모든 집중이 쏠린 가운데 큰 키에 머리가 희끗한 중년의 지휘자, 스타니슬라프가 날 바라보았다.
“타티아나. 몇 가지 이야기를 해 보지.”
무뚝뚝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약간 압박감을 느끼긴 했지만 러시아엔 이런 분들이 많아서 그리 어렵게 느껴지진 않았다.
결정적인 이유는, 이렇게 무뚝뚝하지만 결국 모두 음악에 진지한 사람들이라는 걸 믿고 있기 때문이다.
“……예. 지휘자님.”
“중앙음악학교 8학년이라고 했었나.”
“맞아요.”
“협연 경력은?”
“오케스트라와 협연은 처음이에요. 실내악 연주회는 있어요.”
“무슨 곡을 했었지?”
“브람스의 피아노 트리오 3번과 슈베르트의 피아노 트리오 2번을 했어요.”
“브람스 트리오 3번?”
“예.”
“흠……. 상당한 난곡인데.”
“난곡이죠.”
정말 열심히 연습했던 기억이 있다. 학교에서 선배 둘과 하루에 적어도 2시간씩은 꼬박꼬박 합을 맞춰 보곤 했었다. 집에 돌아가서도 혼자서 열심히 연습했고.
그렇게 노력한 것은 성공적인 연주회로 보답받기도 했지만, 내 레퍼토리가 되어 이렇게 다른 음악가와 이야기를 할 때 도움이 되기도 했다.
학교에서 하는 자선 연주회는 내 커리어라고 하기엔 조금 부족했으나 이렇게 곡 이름을 전하는 것만으로도 내가 연주자로서 계단의 어디쯤에 발을 딛고 있는지 간접적으로 추론하는 것 정도는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스타니슬라프는 그것 말고도 내 실력을 직접적으로 본 적이 있었다. 그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실력은…… 직접 봤으니 말할 것도 없군.”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 정도 실력을 지니고도 협연 경력이 없다는 건 조금 이상한데.”
내가 중앙음악학교에 편입해서 음악을 시작하게 된 나이가 열네 살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은 조금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적어도 한두 번쯤, 아니면 에르네스트처럼 몇 십 번도 경험이 있는 연주자들도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굳이 내가 작년부터 음악을 시작했다고 시시콜콜 털어놓고 싶진 않았다.
그때, 지켜보고 있던 크리스티나 악장이 살짝 끼어들며 말했다.
“스타니슬라프도 참. 그런 이야기는 베르너가 말해 줬었잖아요? 상트페테르부르크 청소년 콩쿠르에서 대상과 특별상을 모두 타기도 했고. 뭘 물어 보시는 건가요?”
“오케스트라와 협연 경력이 없다는 말은 처음 듣는데.”
“없을 수도 있죠.”
크리스티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고, 스타니슬라프는 그런 그녀를 잠시 바라보더니 괜히 길게 이야기할 생각은 없다는 듯 말을 맺었다.
“상관없지. 열다섯 살이니.”
“아, 맞다. 그리고 그거 아세요? 타티아나가 중앙음악학교에서 수석이기도 하다는 것?”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크리스티나는 나에 대해 알게 된 정보를 슬쩍 풀어놓았다. 내가 말한 적은 없는데, 어디선가 들은 듯하다.
스타니슬라프는 처음 듣는다는 듯 날 돌아보더니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머리가 좋은가 보군.”
“삭막한 감상은 그게 단가요? 와, 난 학교 다니면서 수석 같은 거 해 본 적이 한 번도 없는데.”
“나도 없네.”
“그러니까요.”
선배 음악가 두 사람이 서로 수석을 해 본 적은 한 번도 없다면서 한탄을 하긴 했지만 그런 건 아무 상관없었다.
스타니슬라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자랑하는 챔버 오케스트라의 머리라 할 수 있는 지휘자였고, 크리스티나는 심장이라 할 수 있는 악장, 즉 제1바이올린의 수석 주자였다.
난 크리스티나에게 말했다.
“크리스티나도 바이올린 파트의 수석이시잖아요.”
“어머나,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마워.”
“수석이라…….”
스타니슬라프는 무언가 생각하는지 팔걸이에 팔을 기대고 잠시 천장을 올려다보다가 문득 내게 물었다.
“혹시 에르네스트 스테파노비치 베샤스트니흐라는 연주자를 아나?”
“……예?”
난데없는 친구의 이름에 깜짝 놀라 반문했다.
내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싶었지만, 스타니슬라프는 에르네스트의 부칭과 성까지 완벽하게 말했다.
얼떨떨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친한가?”
“제 친구예요.”
“중앙음악학교의 수석이라고 하니 갑자기 그 건방진 친구가 생각나서.”
난 또다시 조금 놀랐다. 이 근엄한 중년의 지휘자가 친구라고 발음하는 것은 꽤 어색하게 들리면서도, 친근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멍하니 바라보자 그가 드물게 픽 웃으며 말했다.
“좋은 기억이지.”
“아…….”
“흠.”
뜬금없이 친구의 이름을 꺼내서 내가 당황하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스타니슬라프가 자세를 고치고는 이야기를 다시 되돌렸다.
“음악 이야기를 하도록 하지. 원하는 곡이 있나?”
“…….”
난 이제야 정말 본론에 들어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스타니슬라프도 나도 서로의 음악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조금 두서없이, 그렇게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제 협주곡 레퍼토리는 그리 넓지 않아서요.”
“레퍼토리를 묻는 게 아니라, 원하는 곡이 있느냐고 물었는데.”
정말 원하는 곡을 묻는 것이라면 깊게 생각할 것도 없었다.
“라흐마니노프를 좋아해요.”
“흠.”
스타니슬라프는 커다란 손을 턱에 가져다 대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는 단호하게 내게 말했다.
“그건 어렵겠군.”
“…….”
“곁가지를 많이 쳐 내고 빈 공간을 메우더라도 라흐마니노프의 그 장대한 협주곡을 연주하려면 완벽성에 너무 많은 흠집을 내야 할 테지. 안 하는 게 낫네.”
“아…….”
약간 오해했다는 것을 느꼈다.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같은 세기의 난곡을 열다섯 살인 내가 소화해 낼 수 없다고 여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스타니슬라프의 말은 내 쪽이 아니라 오케스트라 쪽을 향하고 있었다.
15명 정도로 편성되는 1관 오케스트라로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의 거대함을 충분하게 이룰 수 없다는 뜻이었다.
스타니슬라프가 물끄러미 내 얼굴을 들여다보더니 조용히 말했다.
“요구하는 것들을 반드시 들어주겠노라 약속할 순 없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를 하면서 최대한 맞춰 보는 것이 지금 우리가 할 일이겠지.”
“왜 그렇게 말을 어렵게 해요? 스타니슬라프. 그냥 프로그램 짜자고 말하면 될 것을.”
“뭐가 어렵지?”
“나 참.”
크리스티나가 유쾌하게 핀잔을 주었고 스타니슬라프는 인상을 찡그렸다. 지휘자와 악장 두 사람은 꽤 친근하게 서로를 대하고, 존중하는 듯했다.
그렇게 내가 가능한 레퍼토리와 오케스트라가 가능한 레퍼토리를 조금씩 꺼내며 비교하고 교집합을 찾아보는 시간이 있었다.
상당히 중요한 시간이다.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하게 된다면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는 어지간해선 피아노 연주자의 의견을 들어 주고 지휘를 할 때에도 피아노 연주자의 해석을 기준으로 지휘를 하게 되겠지만, 그건 정해진 룰 같은 것이 아니었다.
지휘자는 음악가이며 가지고 있는 해석이 있고 전문으로 하는 레퍼토리가 있으며, 단원들 또한 그렇다. 그 모두가 어우러진 오케스트라엔 특유의 색이 있다.
나 역시 한 명의 음악가로서 다른 누구의 것이 아닌 내 연주회를 위해 이 자리에 있고, 관철시키고 싶은 색이 있었다.
낙관적으로 보면 두 색이 섞인 예쁜 색을 쉽게 찾아낼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음악의 색은 그림의 색처럼 다루기 어렵다. 현실은 꽤나 까다로운 편이다. 난 그걸 너무나 잘 알았다.
진지하게 회의를 하다 보니 이야기는 조금 길어졌고, 내 레퍼토리는 금방 바닥났다.
독주곡이라면 오늘 하루 종일 이야기해도 모자라겠지만, 협주곡은 할 수 있는 곡이 몇 곡 안 되기 때문이었다.
“브람스? 안 하는 게 낫네.”
마지막으로 물어본 브람스 역시 적어도 2관 이상의 오케스트라 편성이 필요한 곡이다.
난 스타니슬라프가 그렇게 말하리란 것을 예상하고도 일부러 물어서 확인을 마쳤다. 이것으로 내 레퍼토리는 완전히 끝났다.
이제부턴 새로 배워야 할 것이다.
“어떤 곡이 좋을까요?”
기존에 연습한 곡을 선보일 수 없다는 건 조금 아쉽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대로 된 완성도를 만들어 낼 수도 없는데 억지를 쓸 이유는 전혀 없었다.
200년 넘게 쌓아올려진 클래식 음악은 넓고도 깊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챔버 오케스트라라는 이 거대한 집단을 하나의 취향과 음악성을 가진 음악가라고 생각하고, 어떤 음악으로 우리가 진정으로 이어질 수 있을지 생각하는 건, 조금 어렵게 생각되면서도 두근거리는 일이었다.
이전 같았으면 조금 짜증을 냈을지도 모르겠다. 1관의 챔버 오케스트라가 아니라 2관 이상의 심포닉 오케스트라라면 이렇게 머리 아플 일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조금 달랐다.
스타니슬라프가 제시하는 수많은 피아노 협주곡들을 모두 알진 못한다.
하지만 난 바로 스마트폰으로 곡을 찾아서 들어 보기도 하고, 내가 알고 있는 곡이면 어떤 부분에 신경을 써야 할 것 같은지에 대해 적극적으로 어필하며 의견 교류에 나섰다.
새롭게 곡을 익혀야 한다는 것은 상관없었다. 어차피 모두 내 목소리가 되어 줄 곡들이라 생각하면 도전 욕구를 자극하는 일이다.
한참 동안 그렇게 나와 스타니슬라프는 협조적으로 프로그램 구성에 대해 열띤 토론을 이어 나갔다. 수십 개도 넘는 피아노 협주곡이 지나갔다.
스타니슬라프가 가만히 날 보더니, 불쑥 말했다.
“타티아나.”
“예?”
“상당히 도전적이군.”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멍하니 있는데 그가 피식 웃었다.
“칭찬이네.”
“아……. 감사합니다.”
“새 곡을 배우는 데에 거리낌이 없고…… 무대에서의 열정도 당차고 진취적이야. 멋지군.”
스타니슬라프는 허공에 떠도는 무언가를 헤아리듯 손가락을 흔들거리더니 돌연 강렬한 카리스마로 내게 말했다.
“불타는 태양처럼 말이지.”
난 늘 아나스타샤를 태양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비유가 내게 어울린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쁘진 않았다. 아나스타샤와 같은 사람이 될 순 없겠지만, 영향을 받는 것이라면 정말 기쁘다.
조금 기분이 좋아져서 어떻게 답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갑자기 단원 중 한 분이 말했다.
“스타니슬라프.”
“뭔가.”
그사이 피아노 협주곡들을 늘어놓고서 각 악기 주자들에게 조언을 구하기도 하며 여러 이야기가 오갔기 때문에 이번에도 특별한 조언이 있나 싶었다.
하지만 이번엔 조언이 아니라 지적이었다.
“태양은 불타고 있는 게 아닙니다.”
“?”
“불타기 위해선 산소가 필요한데 우주엔 산소가 없으니 태양은 불탈 수 없습니다. 그저 핵융합을 하며 빛을 낼 뿐이죠.”
“…….”
“…….”
순간 연습실이 통째로 북극에 던져진 것처럼 싸늘해졌다.
스타니슬라프가 이 썰렁함을 지울 연료가 필요하다는 듯 손가락으로 문제의 단원을 가리켰다.
“자네를 불태워 버리고 싶군.”
“푸하하하!”
연습실 전체에 폭소가 터졌다. 모두가 우스워 죽겠다는 듯 배꼽을 잡았고, 그 와중에 스타니슬라프는 진지한 얼굴 그대로여서 더 웃겼다.
난 어지간해선 웃음을 참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이 웃고 말았다. 이 상황에 저항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웃음소리 사이에 간간히 부탁의 말들도 오갔다.
“미치겠군, 로만. 제발 작작 좀 해.”
“우릴 다 웃겨 죽이려는 건가? 빌어먹을, 이렇게 죽으면 보험금도 안 나온다고.”
부탁이라기엔 조금 과격했지만 그 또한 단원들 사이의 애정 표현처럼 느껴졌다.
로만이라고 불린 단원은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왜 내가 말을 하면 다 웃는 거야?”
“아니, 안 웃게 생겼어?”
“스타니슬라프는 안 웃잖아.”
“대신 널 불태워 버리겠다고 하잖아!”
“사람은 생각보다 그렇게 쉽게 불태울 수 없어. 화장을 하려고 해도 천 도 이상의 고온에서 1시간을 넘게 태워야…….”
“제발!”
다시 한 번 단원들이 거의 기절 직전으로 웃어 댔다. 로만은 도대체 뭐가 웃긴지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갸웃거렸다.
정말 특이한 사람이다. 하지만 난 그가 다른 단원들에게 왜 사랑받는지 알 것 같았다.
“잠깐 쉬지.”
스타니슬라프는 이런 분위기에서 더 이상 회의를 진행하는 것보단 잠깐 쉬는 게 낫다고 판단했는지 휴식을 선언했다.
회의를 시작할 땐 단 한마디로 모든 단원들을 휘어잡았던 그의 카리스마로도 이 분위기를 잡는 것은 힘든 일인 것이다.
난 그제야 시간이 1시간도 훌쩍 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옆을 돌아보았다. 회의가 계속되는 내내 한 마디도 안 하고 앉아 있던 아나스타샤가 걱정되었다.
“심심하시지 않으셨나요? 아나스타샤.”
“응?”
아나스타샤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아직도 농담과 웃음이 오가는 단원들을 향해 살짝 어깨를 기울이며 말했다.
“재미있는 사람들이네.”
그녀는 밝은 얼굴로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