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0화
스타니슬라프가 잠시 나가고, 휴식 시간 사이 단원들의 이야깃거리 중심엔 단연 로만이 있었다.
살짝 이야기를 듣자하니 로만이 스타니슬라프의 말문을 막히게 한 것은 이번 한 번뿐만이 아니라고 한다. 단원들은 로만을 일종의 비밀병기로 여기고 있었다.
그 바늘도 안 들어갈 것같이 강철 같은 스타니슬라프가 말 한마디에 침몰하는 것을 구경하는 것이 재미있단다.
이러한 일종의 장난도 모두들 사이에 신뢰가 없고 스타니슬라프가 받아 주지 않으면 성립되지 않을 장난일 테니, 이 상트페테르부르크 챔버 오케스트라가 얼마나 신뢰가 깊은 집단인지 알 수 있었다.
떠들썩한 단원들 사이에 낄 순 없어서 멀찌감치에서 보고 있는데, 크리스티나가 말했다.
“시끄럽지? 타티아나.”
“아니에요. 좋아요.”
“후후, 다행이네.”
그녀도 조금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턱을 괴고 단원들을 지켜보았다. 오케스트라의 악장은 심장이자 어머니이다. 크리스티나가 보는 단원들은 한 명 한 명 모두 특별할 것이다.
크리스티나는 다시 한 번 더 단원들 사이에 웃음 폭탄을 던져 넣은 로만을 보며 히죽 웃었다.
“저기 있는 로만은 음악학교를 나오지 않았거든.”
“정말인가요?”
“원래 수학을 전공하려고 했다던가……. 그러다가 피타고라스 음률에 반해서 음악을 시작하고, 화성학과 대위법 등 작곡기법을 거쳐서 바이올린을 직접 잡았다지.”
로만이 음악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정말 난생처음 듣는 계기였다.
보통의 연주자들은 아주 어릴 때부터 쉽게 손에 잡고 소리를 낼 수 있는 악기를 쥐면서 본능과 재능에 의해 음악을 시작하게 되고, 이후 이론적인 화성학 등을 배우게 된다. 로만의 경우엔 정반대였다.
“……일반적인 경우는 아니네요?”
“특이한 친구지. 대신 실력은 알아줘. 유명 학교를 나왔다고 거들먹거리다간 단번에 무너질 정도로.”
음악학교를 나오지 않았다고 소개한 것은 무시하고 흉을 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더더욱 로만을 추켜세우기 위해서였다.
어려서부터 영재교육이 기본적으로 자리 잡혀 있는 이 러시아에서 늦은 나이에 이론부터 시작해서 성공적으로 연주자의 삶을 살고 있는 로만을 보니 조금 신비하다는 기분마저 들었다.
새삼 흥미롭게 단원들 쪽으로 눈길을 던지자 그중 한 명이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 단원은 씩 웃더니 크리스티나를 향해 말했다.
“악장님. 저희 흉보시면 안 됩니다?”
“어머, 들렸어?”
“망했군.”
크리스티나가 능청스레 대꾸하자 남자가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는 과장스럽게 팔을 뻗으며 로만을 지적했다.
“로만 너 때문이야.”
“또 나냐?”
“아까 회의할 때만 하더라도 우리 분위기 좋았었다고. 네가 스타니슬라프의 시적 비유를 무너뜨리기 전까지.”
분명 굉장히 진지하고 건설적인 회의 시간이긴 했다.
“그렇지 않아요?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내게 결정권이 넘어왔다. 은근히 기대하는 시선들이 느껴진다.
그 시선에 부응해 조금 더 위트 있게 답변할 수도 있겠지만, 아직 그렇게 친한 것도 아닌데 다른 단원들과 동조해 30대 선배 음악가인 로만에게 장난을 걸 수 있을 정도로 사교적이진 못했다.
분위기가 확 달라진 건 사실이지만 일부러 그쪽으로 대답하지 않고 평범한 대답으로 돌렸다.
“아니에요. 저도 지금까지 태양은 당연히 불탄다고 생각해 왔거든요. 상식이 깨어진 기분이에요. 대단했어요. 정말로요.”
거짓말하는 건 아니었다. 난 불타는 태양이라는 말 자체가 틀린 말이라곤 상상도 못해서 정말로 깜짝 놀랐다.
로만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물끄러미 날 바라보았다.
그 역시 평범하게 별것 아니라고 하거나, 혹은 태양에 대한 다른 과학 이야기를 더 시작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가 툭 던지듯 말했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가 훨씬 대단합니다.”
“……제가요?”
“물리학으로 설명이 힘든 일을 해냈으니까요.”
난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했다. 어제 내가 피아노의 현을 끊어 놓은 일에 대한 것이었다.
로만이 보기에 내가 한 일은 이해할 수 없는 범주에 속한 일인 것 같았다. 그에게 있어서 그건 대단한 일이었다.
딱히 설명을 요청하거나 하진 않았지만 그는 굉장히 흥미롭다는 듯 날 바라보았다. 난 잠시 고민하다가 빙그레 웃었다.
로만의 지적 욕구 충족을 위해 내가 시간을 조금 들여서 정확히 무엇을 느끼고 무슨 일을 한 것인지에 대해 감각적으로나마 설명해 줄 순 있지만, 그렇게 하긴 싫었다.
마술은 마술, 서커스는 서커스일 뿐.
말없이 미소로만 대답하자 로만은 더 이상 무언가 묻거나 하지 않았다.
갑자기 단원들 사이에서 다시 웃음이 터졌다.
“하하하하, 우리 오케스트라의 비밀병기가 물리학님으로도 설명이 불가능하다면서 입을 다무는 경우가 다 있군!”
“내가 여기 있으면서 이렇게 통쾌한 장면을 보게 될 줄은 몰랐어.”
“설명이 불가능한 일도 해냈지!”
“러시아에 불가능이란 말은 없다!”
단원들, 특히 남자 단원들은 러시아를 연발하며 떠들썩해졌다.
중간중간 나에 대한 경외의 시선이 조금 더 늘어난 것 같아서 조금 부담스러웠다. 어제 내가 한 일은 그들에게 정말 인상적이었나 보다. 장소가 프랑스라는 점이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런데 그 와중에 로만만이 평정을 지키고 한마디 내뱉었다.
“러시아의 이름을 말하면서 프랑스의 침략자가 한 말을 인용하는 건 그다지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은데.”
“아, 나폴레옹. 젠장.”
“로만 제발 닥치고 있어주면 안 되겠어?”
“우리는 안 돼…….”
다 함께 노래라도 부를 것처럼 고취되었던 분위기는 다시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로만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다. 다양한 의미로.
결국 짧게 몇 마디 나누다가 담배나 피우러 가자며 단원 몇몇이 나가 버렸고, 몇 명밖에 남지 않은 연습실은 곧 조용해졌다.
크리스티나가 실없이 웃으며 말했다.
“남자들이란…….”
“좋은 분들 같아요.”
“그렇게 봐 줘서 고마워. 타티아나.”
크리스티나도 단원들에게 굉장히 애정이 많은 사람인 것 같다.
사람들이 줄어들어서 훨씬 한적해진 연습실에서 난 다시 크리스티나와 함께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그녀는 내게 궁금한 것이 많은 것 같았고, 때문에 오가는 이야기들은 대부분 음악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사적인 이야기들이었다.
그녀는 내 옆에 있는 아나스타샤에게도 관심을 가졌다.
“아나스타샤라고 했었지? 두 사람, 계속 같이 다녔니?”
“그렇죠.”
“파리는 어땠어?”
“전 두 번째인데, 타티아나가 재미있어해 줘서 다행이죠.”
“아, 그러니?”
“저 애는 프랑스가 처음이거든요.”
“아하하, 나도 프랑스는 스무 살 넘어서 처음 와 봤어.”
크리스티나와 아나스타샤는 굉장히 친밀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아나스타샤는 내 친구이지만 연주회 관계인은 아니라 회의를 견학하는 중엔 정말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와 여행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로 주제를 옮겨 온다면 얼마든지 말할 것이 많은 것이다.
두 사람은 프랑스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내가 미처 따라가지 못하는 부분도 많았다.
오늘 처음 대화를 나누고 있지만, 나이를 뛰어넘어서 크리스티나와 아나스타샤 두 사람은 잘 맞는 부분이 있는 듯했다.
그렇게 대화를 하던 중, 문득 크리스티나가 더 가까이 다가오더니 의미심장하게 물었다.
“두 사람 다 추근거리는 남자는 없었어?”
“추, 추근요?”
“분명히 있었을 텐데? 프랑스 남자들은 우리들보다 훨씬 적극적인 편이거든.”
조금 당황해하자 크리스티나는 얼른 말해 보라는 듯 눈짓으로 재촉했다.
하지만 난 생각나는 것이 있어서 당황한 것이 아니었다. 되레 정말 깔끔하게 아무것도 없었다.
“한 명도 없었어요.”
“정말? 믿을 수 없네.”
“빅토르가 있어 줬기 때문일 거예요.”
“빅토르?”
“제 경호원이에요.”
크리스티나는 아, 하고 입을 벌리더니 무언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경호원을 대동하고 다닌다는 것을 이해한 듯했다.
그녀가 약간 부럽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것 참 다행이네. 난 사실 가끔은 조금 곤혹스럽기도 해서.”
“무슨 일이 있으셨나요……?”
“아니, 별일은 없었는데. 음……. 우리들은 비쥬bisou 자체가 익숙하지 않잖니? 가끔 하긴 해도.”
“비쥬가 무엇인가요?”
“프랑스인과 인사해 본 적 없니?”
“…….”
난 잠시 생각하다가 놀랐다.
프랑스의 에펠탑, 루브르 박물관 등 문화재라고 할 수 있는 곳들은 여럿 돌아다녔지만 막상 프랑스 사람들과 이야기는 제대로 해 본 적이 없는 것이다.
이전에 파리의 사람들에 대해 혼자 생각해 본 적이 있는데,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을 두고 뭘 한 건지 모르겠다.
내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크리스티나가 손가락으로 자신의 볼을 쿡쿡 찌르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볼을 맞대는 인사 있잖니.”
“아, 알아요.”
프랑스뿐만 아니라 이탈리아나 스페인 포르투칼 등의 나라에서 볼 인사가 문화적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다만 그것이 어떻게 불리는지 몰랐을 뿐이다.
“우리는 가족, 친척이나 정말 친한 친구끼리 아주 특별할 때 아니면 하는 일이 없는데, 여기선 만나서도 비쥬 헤어질 때도 비쥬. 가끔 보면 딱따구리들 같다니까.”
딱따구리 같다는 농담에 웃으려다가, 기분이 이상해졌다.
크리스티나의 말대로 러시아에서도 보통은 잘 하지 않지만 특별한 인사로 볼 인사가 종종 쓰인다. 하지만 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다른 누군가와 볼 인사를 해 본 기억이 없었다.
“…….”
왜지?
갑자기 이상해져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간 스쳐 지나간 사람들은 제외하고, 가장 가까운 사람들만 떠올렸다.
친척은 아예 한 명도 본 적이 없었지만 아버지와 오빠는 내게 있어서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 다 내게 무뚝뚝한 인사를 하는 편이었다.
그리고 내 가장 친한 친구, 아나스타샤. 그녀는 조금 더 친근하게 나와 포옹으로 인사를 하긴 하지만 볼 인사를 해 본 적은 없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게 이상한건가?
지금까지 어색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냥 각각 집마다 스타일이 있을 것이고, 겨우 인사방법일 뿐이다. 나는 볼 인사를 하지 않는 집에서 살고 있을 뿐일지도 모른다. 객관적으로 말해 우리 집은 평범한 집이라고 하긴 힘드니까.
난 아나스타샤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무표정하게 앉아 있었다.
약간 과거 기억들을 떠올리느라 멍하니 있는데, 크리스티나는 간만에 할 말이 많다는 듯 계속 비쥬 문화에 대해 말했다.
“그냥 인사면 다행이지. 속셈이 훤히 보이는 녀석들도 얼마나 많은데? 초면에 내가 잘 모를 거라 생각하고 볼이 닿게 맞대 버린다던가.”
“닿으면 안 되죠…….”
“그렇지. 나 참.”
기계적으로 맞장구를 쳐 주자 크리스티나가 작게 한숨을 폭 내쉬었다.
“거절하고 싶을 때도 많은데 예전에 이탈리아에선 그랬다가 한 번 분위기가 안 좋아진 적이 있어서. 그렇게도 못 하겠더라고. 남부 유럽 쪽은 영 어려워.”
크리스티나는 영 문화적으로 가까워지기 어렵다는 듯 난감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나도 덩달아 난감해질 와중, 그녀가 돌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도 재미있는 사람들이 많지.”
“예……?”
“조금 짜증나는 구석도 있지만, 특색 있잖니.”
그리고 크리스티나는 프랑스부터 시작해서 자신이 만나 본 사람들마다 스테레오타입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들을 이야기해 주었다.
선입견을 심어 줄 생각은 없는지 몇 번이나 자신의 개인적인 생각이라며 못을 박긴 했지만, 연주회로 다양한 국가를 오간 그녀가 정말 생생하고 보고 겪은 이야기라 실감이 넘쳤다. 프랑스, 이탈리아, 네덜란드, 독일, 스웨덴, 미국 등 많은 나라가 언급되었다.
한창 흥미롭게 듣고 있는데, 연습실 문이 열리며 스타니슬라프가 들어왔다. 크리스티나는 말을 멈추고 시계를 보더니 아쉽다는 듯 중얼거렸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나.”
그런데 스타니슬라프뿐만이 아니었다. 그 뒤로 낯익은 두 남자가 따라 들어왔다.
에이전트 베르너 위넬과 피아노 연주자 루이 디아라였다.
베르너가 날 보자마자 사과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괜찮아요.”
“바로 왔어야 했는데, 도중에 디아라 씨와 할 말이 조금 있어서 말입니다.”
난 베르너의 옆에 있는 루이를 보았다. 그는 어제 보았던 턱시도가 아닌 편안한 차림으로 서 있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고는 생긋 웃어 보였다.
새삼 그가 이 파리 음악원의 학생이었다는 점이 생각났다. 이 연습실을 빌릴 수 있게 해 준 것도 그이다 보니 인사차 온 것 같았다. 방금 전까지 프랑스 사람들에 대한 뒷담화도 조금 있었는데, 약간 찔린다.
베르너가 물었다.
“스타니슬라프에게 들었습니다. 프로그램에 대한 회의는 일차적으로 끝내신 것 같습니다만?”
“예. 정하진 못했지만요.”
“하루 만에 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앞으로도 맞춰 봐야죠. 그렇지 않습니까?”
“맞아요.”
연주회 프로그램이란 하루 만에 만들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보통은 오랜 고민과 조언을 받아서 이루어진다. 특히 협연이라면 정말 깊은 의견 교류가 필요했다. 난 오늘 하루 만에 모든 것을 마무리 지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오늘 하루 만에 정말 많이 이야기를 진행하기도 했다. 나와 스타니슬라프는 눈을 마주쳤다.
우리는 프로그램은 물론이고 음악가로서 각각 어느 정도에 다다라 있는지 조금씩 파악했다. 스타니슬라프와 내 나이 차이는 세 배도 넘게 나겠지만 그런 건 관계없이 음악가로서 깊이를 가늠하는 일은 무척이나 중요했다.
시간은 1시간 정도였지만 정말 많은 것을 주고받았다. 오늘은 이 정도면 되었다고 생각하는지, 스타니슬라프가 말했다.
“베르너가 왔으니 오늘은 이제 연주회 일정에 대한 이야기를 하도록 하지.”
“아, 그럴까요.”
“앉게.”
그리고 다른 단원들을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연주회 일정에 대한 회의가 시작되었다.
사실 그리 길 것도 없었다. 어느 시기에 어느 홀에서 연주회를 열 것인지에 대해선 에이전트인 베르너가 거의 혼자 말했기 때문이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고개만 끄덕거리면 되었다.
몇 분도 지나지 않아 베르너가 대충 알겠다는 듯 말했다.
“다음 미팅 때 다시 만나서 더 자세한 일정은 차차 정해 보도록 하죠. 프로그램에 따라 조정해야 할지도 모르니까요.”
“좋군.”
“좋아요.”
딱히 더 이상 할 말도 없이 그렇게 깔끔하게 모든 회의가 끝났다.
잠시 후 들어온 단원들은 회의가 끝났다는 데에 조금 어이없어했다. 하지만 쉬고 싶은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인지 딱히 반론은 없었다.
“잘 가요,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다음엔 러시아에서.”
단원들 한 명 한 명과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모두와 식사라도 하면 어떨까 싶었지만 아쉽게도 식사는 다음에 하기로 했다.
그렇게 열 명 정도와 인사를 나누고, 난 이 자리에 있는 딱 한 명의 프랑스인과 마주했다.
“…….”
눈이 마주치자마자 알았다.
루이 디아라가 내게 동의를 구하고 있다는 것을.
내가 가만히 있는다면 몇 초 지나지 않아 그는 볼을 맞대는 비쥬로 내게 인사할 것이다.
그건 이 나라, 프랑스의 평범한 인사였으니 아무 의미도 없겠지만 내가 러시아인이라는 것을 뻔하게 아는 루이가 굳이 비쥬로 인사하길 바라는 것 같은 눈치를 보인다는 것은 약간 다르게 느껴졌다.
이게 크리스티나가 말했던 남자들의 속셈이 훤히 보인다는 건가. 아니면 순수한 인사문화를 내가 폄훼하고 있는 걸까.
짧은 시간 동안 많은 고민이 오갔다.
프랑스에서 며칠이나 보내면서도 프랑스의 인사인 비쥬를 다른 누구와 주고받아 본 적도 없었기에 한 번쯤은 프랑스인과 프랑스식으로 인사를 해 보고 싶기도 했다. 색다른 기분이 들 것이다.
평생 동안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으니 재미있을 것 같다. 프랑스에 오면 프랑스의 방식대로 하는 것이 옳기도 했고.
하지만 지금은 싫다.
“…….”
난 루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가 먼저 행동을 취하기 전에 내 쪽에서 악수를 청해 버린 것이다.
루이의 얼굴에 약간의 당황, 낙심, 이해 등이 뒤섞인다. 은근히 알기 쉽고 순수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런 감정 등은 잠시 드러났다 사라졌을 뿐이다.
“□ □□□□ □□□□.”
그는 웃으면서 내 악수를 받았다.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다음에 보자는 것 같다. 다음에 보면 그와 비쥬로 인사를 나눌지도 모르겠다. 공평하게 이번엔 평범한 러시아식이었으니 다음엔 프랑스식인 것도 나쁘진 않겠지.
“…….”
그렇게 모두와 인사하고, 뒤편을 보니 아나스타샤가 기다리고 있었다.
난 그녀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을 물어봐도 되는지 고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