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4화
9월 초 학기가 시작되기 전까지 시간적 제약이랄 것이 없이 무계획이었던 여행에 계획이 생겼다.
언제까지라도 아나스타샤와 유럽을 돌아다니고 싶은 마음도 분명 있었지만, 사실 그건 막연하고 조금은 불안하기도 했다. 모스크바로 돌아갈 날짜가 정해지고 나서야 아무래도 마음이 조금 편해지는 것을 보면, 난 분명히 모스크바를 돌아갈 집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날 밤, 나와 아나스타샤는 남은 일주일간 프랑스에 있는 것보단 다른 나라에 가 보기로 정했다. 수십 개도 넘는 유럽 국가들 중에서 최종 결정된 곳은 독일이었다.
결론적으로 독일 여행은 아주 만족스러웠다.
거의 파리에만 있었던 프랑스 여행과 달리 독일에선 프랑크푸르트와 드레스덴, 뮌헨, 본, 아이제나흐를 돌아보았는데, 모두 볼 만한 가치가 있었다.
과거 신성로마제국이었던 땅답게 오래된 고성도 많았고 조금 더 고딕적인 모양의 건물들이 많았다.
전체적인 느낌은 프랑스보다 조금 점잖고 딱딱한 느낌이었고, 그런 건물이나 도시의 분위기에 맞춰 가는지 사람들도 무게감 있게 보였으나 분명 그만한 멋 또한 있었다. 보다 고전적이고 묵직한 느낌이 좋았다.
그리고 이러한 독일의 인상이 집대성되어 향한 곳은, 당연히 클래식 음악이었다.
사람들은 독일을 맥주와 소시지의 나라라고 칭하기도 하지만, 사실 음악가들에게 있어서 독일은 누가 뭐라 해도 바흐와 베토벤의 나라였다. 각각 바로크와 고전 클래식 음악의 시작을 연 위대한 음악가 두 사람이 바로 독일 출신인 것이다.
그 외에도 브람스, 슈만, 멘델스존 등등 수많은 독일 출신 음악가들이 유럽 클래식 음악을 이끌어 나갔다.
때문에 클래식 음악에 관심이 많은 사람에게 독일은 사실 성지나 다름없는 곳이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내 개인적으로 가 보고 싶었던 성지라 할 만한 곳도 있었다.
바로 드레스덴이라는 도시였다. 1906년 라흐마니노프가 모스크바를 떠나 3년간 머문 도시이기 때문이었다.
당시 라흐마니노프가 걸었을 거리, 보았을 건물들을 따라가면서 그가 이곳에서 교향곡 2번과 피아노 소나타 1번을 작곡했음을 떠올렸다. 정말 색다른 느낌이 들었다.
특히 피아노 소나타 1번, 파우스트 소나타는 내가 음반에 녹음했을 정도로 애정이 깊은 곡이라 그만큼 연구도 꽤 깊게 했다고 생각하지만, 음표와 문자 등으로 배우고 연구하는 것 이상으로, 이 도시를 둘러보는 것만으로 느껴지는 것들이 많았다. 애초에 파우스트를 쓴 괴테 역시 독일인이었으니 독일의 정서가 묻어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드레스덴을 둘러보고 나선 바흐의 생가였던 아이제나흐와 베토벤의 생가인 본에도 들렀다.
진즉에 독일에 와 봤어야 했다는 생각을 했다.
이 정서, 분위기라는 것은 문자나 말로 형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바흐와 베토벤을, 그리고 그 외의 음악가들을 그렇게나 열심히 공부했지만 직접 와서 한 번 본 것으로 그간 몰랐던 것들을 얼마나 많이 얻어 가는 기분인지 모른다.
아나스타샤 역시 혼자 왔을 때보단 동료 음악가라 할 수 있는 나와 함께 의견을 교류하며 도시를 둘러보니 달리 보이는 게 많다며 재미있어했다.
클래식 피아노 연주자로서 이 독일 여행은 단순히 즐겁게 여행하는 것뿐만이 아닌, 우리가 음악가로서 한층 더 나아가는 계기가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200년 전 음악가들에 대해 다시 한 번 공부하고, 현대의 독일 클래식 음악가들에 대해서도 공부하기 위해 연주회가 열리는 콘서트홀을 찾았다.
현대에 와서도 클래식, 특히 피아노에 있어선 러시아와 함께 최고를 달리는 나라가 바로 독일이었다. 피아노 연주자나 음악원의 교육 수준은 문자 그대로 세계 최고 수준으로, 러시아에 비해 절대 밀리지 않을뿐더러 피아노 중 최고로 치는 스타인웨이 역시 독일 함부르크에서 만들어진다.
클래식 음악의 명맥이 끊어지지 않도록 이어 나가는 커다란 기둥 중 하나인 것이다. 그런 독일에 와서 클래식 연주회를 듣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연주회를 딱히 까다롭게 고르진 않았다. 뮌헨에서 머물다가 리사이틀이 있다는 콘서트홀을 무작정 찾아갔을 뿐이다.
아나스타샤는 묘하게 불안해하면서 이번에도 이상한 사건에 휘말려서 내가 무대 위로 올라가는 일이 생기진 않을지 염려하는 것 같았지만, 파리에서 있었던 일은 매우 특수한 경우였다. 기본적으로 난 연주회 내용이 좋으면 박수를 치고 나쁘면 실망하고 잊어버리는 얌전한 청중이다.
그리고 독일에서 처음 본 연주회는, 기대를 훨씬 상회하는 만족감을 주었다.
독일 연주자들은 러시아와 비슷한, 페달을 아끼고 약간 건조하고 차가운 느낌의 연주를 많이 하는 편이라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었는데, 프란츠 뢰브라는 이름의 연주자는 기가 막힐 정도로 부드럽고 상냥한 멘델스존을 연주함으로서 날 감동시켰다.
아나스타샤도 놀라고 감동했는지, 연주회를 마치고 나온 우리는 프란츠 뢰브의 음반을 구매하고 사인까지 받았다. 앞으로도 이 연주자는 꾸준히 주시할 생각이었다. 늘 좋은 연주자에 목말라 있는 우리에겐 정말 생각치도 못한 수확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거의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를 정도로 유익하게 독일 여행을 했다. 클래식 음악가인 그녀와 내겐 정말 행복하고 좋은 시간이었다.
“…….”
오늘은 독일 여행 마지막 날.
도시의 야경을 내려다보며 아나스타샤와 나는 마지막이 될 수 있는 티타임을 즐겼다.
아나스타샤가 날 보며 말했다.
“내일 이맘때면 모스크바겠네.”
그녀는 아쉽다는 듯 고개를 기울이며 빙그레 웃었다.
“조금 아쉽지만, 그래도 더 길어져서 지겹다고 생각되는 시점에서 여행을 마치는 것보단 훨씬 나은 것 같아. 안 그래?”
“지겨워져서 그만두게 되는 일은 없을 거예요.”
난 고개를 저으며 반론했고, 아나스타샤는 그렇게 말할 생각은 아니었다는 듯 피식 웃더니 정정했다.
“응. 내가 말실수했네. 두 달 내내 돌아다녔어도 너랑 같이 다녔다면 지겹지 않았을 거야.”
“그렇죠?”
“갈 곳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아나스타샤는 따뜻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는 함께 다니면서 그 흔한 말다툼도 한 번 없이 잘 지냈다. 여행이 길어지더라도 서로에게 지치거나 피곤해할 일은 없을 것이란 확신 정도는 있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하고 싶다고 해서 뭐든지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스스로 목줄을 채우긴 했지만 특히 시간과 관계된 것이라면 더더욱.
아나스타샤도 그 정도는 안다는 듯 말했다.
“그래도 우린 아직 학생이니까. 방학엔 연습도 해야 하고. 그렇지?”
“예.”
마냥 놀 순 없었다.
우린 연주자였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실력에 녹이 슨다.
관광 중간에 짬을 내어 연습실에 가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여행지에서 연습실에 들러 두어 시간쯤 연습을 하는 것으론 조금씩 무뎌지는 감각을 다시 날카롭게 세우는 것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독일에서 느낀 것들을 조금씩 표현해 보려 하지만, 현상 유지 정도가 한계였다.
레퍼토리를 늘리고, 곡의 완성도를 높여야 하는 우리들에겐 집중해서 피아노를 연습하고 연구할 시간이 필요하다.
“이 정도가 딱 좋아. 약간 아쉬워도 제일 즐거울 때, 즐거운 추억만 가지고 모스크바로 돌아가자. 여행은 다음에 또 와도 되니까.”
“다음에 또 같이요.”
“응.”
아나스타샤는 활짝 웃으며 약속했다.
그렇게 우리는 여름방학을 맞아 떠난 여행의 마지막 날을 웃음으로 마무리 지었다.
***
전용기는 모스크바 셰레메티예보 공항에 착륙했다.
안전벨트를 굳이 할 필요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가볍게 착륙한 전용기는 활주로를 슬슬 돌더니 전용기 터미널에 멈춰 섰다.
잠시 기다리자 내려가도 좋다는 기내 방송이 흘러나왔고, 나와 아나스타샤는 전용기 밖으로 나왔다.
“…….”
어쩐지 공기부터 달라진 것 같다는 기분이 든다.
프랑스와 독일의 공기보다 조금 더 차갑게 느껴지는 공기를 크게 들이쉬었다.
“가시죠, 아가씨.”
입국 수속을 순식간에 마친 빅토르가 우릴 안내했다.
이미 공항엔 검은 리무진이 준비되어 있었다.
2주나 해외에서 여행을 했고, 그간 이것저것 산 것도 많았으며 심지어 하루는 날을 잡고 다른 사람들에게 줄 선물을 사느라 온종일 쇼핑만 하기도 했지만, 바퀴가 달린 트렁크를 무겁게 질질 끌고 갈 필요는 없었다. 전용기 짐칸에 있는 모든 짐들은 나중에 집으로 올 예정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핸드백만 하나씩 들고 차에 올랐다.
“여행은 즐거우셨습니까? 아가씨들.”
아나스타샤는 빅토르의 물음에 웃으며 답했다.
“즐거웠죠. 그리고 살면서 이렇게 편하게 여행해 본 건 처음이었어요.”
“다행입니다.”
“모두들 너무 감사해요.”
아나스타샤는 단지 나뿐만이 아니라 여행 내내 우리와 함께 했던 빅토르와 소로킨, 자하르에게 감사를 표했다. 빅토르는 별말씀을 다 하신다며 기분 좋게 웃었다.
공항에서 아나스타샤가 사는 프리스넨스키 지구까지 가면서 우리는 여행지에서 찍었던 사진을 잠시 돌려보며 추억들을 다시금 되새겨 보았다. 사실 그렇게까지 긴 시간이라 할 수는 없었던 것 같은데, 정말 소중한 추억이 많이 생겼다.
그리고 아나스타샤와 잠시 헤어질 때가 왔다.
“다 왔네.”
아나스타샤는 창밖을 보더니 팔을 쭉 뻗으며 말했다. 그녀가 사는 아파트 앞이었다.
난 여행에서 충분히, 정말 충분히 만족했지만 그래도 정말 그녀와 헤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약간 아쉽고 울적해져서 아나스타샤를 따라 내렸다.
차에서 내린 아나스타샤는 잠시 아파트를 보고, 다시 내 쪽을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아늑하게 웃으면서 나와 포옹했다.
“갈게.”
“잘 가요.”
“응.”
“주말 지나면 또 봬요.”
“그러자.”
아나스타샤는 두어 번 내 등을 토닥이고는 포옹을 풀고 물러섰다.
그러고는 아파트 정문을 향해 걷다가, 중간에 또다시 날 돌아보고는 그만 들어가라는 듯 손짓했다. 난 도리질 쳤다. 끝까지 그녀가 가는 뒷모습을 보고 있을 작정이었다.
아나스타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날 잠시 보더니 다시 손을 한 번 흔들고는 계단을 마저 올라, 문 너머로 사라졌다.
“…….”
베르너 위넬에게 전화를 해서 오케스트라와의 일을 추진하는 것으로 의무의 족쇄를 찬 건 나 자신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 생각 않고 그냥 아나스타샤와 함께 있고 싶다는 생각이 남아 있었다.
정말 이중적이고 이기적이고 불성실한 생각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나스타샤는 그만큼 내게 있어서 크고 소중한 사람이었으므로.
어쨌든, 잘한 것이다. 스스로를 의무로 옭아매겠다고 결정한 것도, 아나스타샤와 즐겁게 여행을 하고 약간 아쉽다는 생각이 들 시점에 모스크바로 돌아온 것도. 모두 좋았다.
이 작은 아쉬움은 또 아나스타샤와 시간을 함께할 때 풀어놓는 것으로 보다 큰 기쁨이 되어 돌아와 줄 것이다. 난 그렇게 믿었다.
“집으로 가 주세요.”
“알겠습니다. 아가씨.”
집으로 가면서 잠시 말없이 모스크바의 거리를 보며 사색하다가, 빅토르와 농담을 주고받기도 했다. 적적함은 덜해지고 또 다른 안도감이 차오른다.
저택에 도착하니 빅토르가 날 에스코트해서 내리게 하고는, 장난스레 경례를 올려붙이며 말했다.
“고생하셨습니다. 아가씨. 푹 쉬시죠.”
나 역시 웃으며 경례로 받아 주었다.
“제가 무슨 고생을요? 빅토르야말로요.”
“하하, 알겠습니다.”
“소로킨도, 자하르도요. 편히 쉬세요.”
“알겠습니다. 아가씨.”
내가 무슨 쉬라고 명령이라도 한 것처럼 소로킨과 자하르는 깍듯하게 말했다.
난 손을 내리곤, 웃으며 다가가서 그들 모두를 한 번씩 안아 주었다.
“정말 고생 많았어요.”
“…….”
소로킨은 뻣뻣하게 굳어 있었고 자하르는 거의 펄쩍 뛰었지만 난 아랑곳하지 않고 정말 힘껏 안았다. 어차피 내 힘으로는 아무리 세게 안아도 아프지 않을 테니 부담이 없었다.
반면에 빅토르는 킥킥 웃더니 나와 마주 포옹했다. 살짝 안는 정도였지만 충분히 서로 감사를 주고받는다는 기분이 전해졌다.
내 경호원들을 돌려보내고, 저택 안으로 한 걸음 들여놓았다.
구두가 닿으며 탁 소리가 난다.
“…….”
익숙한 대리석 바닥의 소리.
저택은 조용했다. 평일이었기 때문에 아버지나 루슬란 오빠는 없을지도 모른다. 일단 방에 들어가서 가방을 놓아야겠단 생각을 하며 응접실로 들어서는데,
“루슬란 오빠?”
“왔어?”
응접실 소파에 루슬란 오빠가 앉아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테이블엔 과자와 음료수가 보였다.
루슬란 오빠는 부스스 일어나서니 말했다.
“타티아나.”
무표정한 얼굴에 무심한 어투였지만, 아무 관심 없이 응접실에 나와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가 날 맞이한 것이 아니란 것쯤은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몇 번 전화상으로 듣던 목소리에 실체가 더해지자 이루 말할 수 없이 반가웠다.
그리고 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루슬란 오빠.”
“어, 그래. 잘 갔다 왔어?”
난 대답하지 않고 바로 달려가선 루슬란 오빠의 어깨를 붙잡았다. 무표정에 갑자기 당혹감이 서린다.
“뭐야.”
뭐라고 하든 말든 무시하고 고개를 내밀었더니 루슬란 오빠는 기겁해서 뒤로 피했다.
“뭐냐고 갑자기!?”
“오랜만인 것 같아서요.”
“그건 알겠는데 지금 뭐 하는 거냐고!”
“왜요?”
난 깔끔하게 무시하고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섰다. 키가 너무 크다. 조금 낮춰 주면 좋겠는데, 아무래도 당황한 루슬란 오빠는 지금 뭔가 기본적인 에티켓을 떠올릴 겨를이 없는 모양이다. 어쩔 수 없이 난 발돋움을 해서 루슬란 오빠의 오른쪽 뺨에 내 뺨을 맞대었다.
“……!?”
혹시나 했는데, 우리 집은 정말 볼 인사를 안 하는 집이었나 보다. 루슬란 오빠는 작년 모습이 생각날 정도로 어색하게 내 인사를 받았다.
오른쪽, 왼쪽, 오른쪽.
세 번 맞대면서 살짝 스치기도 했지만 이 정도는 괜찮았다.
오랜만에 보는 루슬란 오빠와 인사를 마치고 떨어지자 루슬란 오빠는 깜짝 놀란 얼굴로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난 루슬란 오빠를 정말 좋아하지만, 어쩐지 제대로 골려 준 것 같아서 헤죽 웃었다. 내 웃음을 보고 나서야 루슬란 오빠가 제정신을 찾았다.
“놀랐잖아…….”
“조금 놀랄 만도 하더라고요.”
“…….”
그제야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한 듯한 눈빛으로 루슬란 오빠가 날 내려다보았다.
프랑스와 달리 러시아에선 정말 특별한 날에나 하는 볼 인사이긴 하지만, 그래도 우리 집은 너무 어색해했다.
난 그것이 약간은, 두렵기도 했다.
왜냐하면 아버지와 루슬란 오빠는 내가 아닌 그녀와 사이가 정말 안 좋았었고, 때문에 내가 노력을 아무리 하더라도 결국 어느 정도 과거의 그림자가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단 생각이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또한 내가 감내하기로 한 것이었으니 상관없지만, 1년이 아니라 10년이 지나도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두렵지 않을 수가 없다.
아버지도 루슬란 오빠도 날 정말 아껴 준다는 것을 잘 알지만, 그런 두려움이 조금은 있었고, 그래서 조금 용기를 내어 한 발자국 더 내디뎠다.
그녀가 못한 만큼 그리고 내가 후회한 만큼, 최선을 다하기로 다짐했으니까.
루슬란 오빠는 한동안 날 보더니, 조금 변명조로 말했다.
“아버지나 나나 무뚝뚝하잖아. 알지.”
“아뇨, 그렇지도 않은걸요.”
“……아무튼 그래.”
잘 모르겠다.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지금 루슬란 오빠의 표정을 보니 마음 속 어딘가가 따스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우리 남매는 잠시 말없이 미소를 지으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더 이상 불필요한 말은 필요 없을 것 같았다.
루슬란 오빠가 다시 소파에 앉으며 손짓했다.
“그래서, 여행은? 재미있었어?”
“물론이죠. 얼마나 즐거웠는데요. 사진 보여 드릴까요?”
“그래.”
방에 가방도 둬야 하고 씻기도 해야 하는데, 그런 것들은 다 미뤄 두고 나는 그 옆에 가서 앉으며 오빠에게 전화로 미처 못 했던 이야기들을 꺼내 놓기 시작했다.
비로소 집에 돌아왔다는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