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305화 (305/1,277)

##  305화

익숙한 이불의 감촉을 느끼며 잠에서 깬 나는 눈을 비비며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3시. 익숙한 시간이다.

“…….”

잠시 스마트폰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어젠 정말 별일 없었는데도 행복한 하루였다.

내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미리 응접실에 나와서 날 환영해 주었던 루슬란 오빠와, 집에 와 있는 날 보시곤 웃어 주시던 아버지. 오랜만에 가족들이 함께 하는 식사와 드미트리가 한껏 솜씨를 발휘해 근사하게 만들어 준 요리들.

특별한 환영회 같은 것 없이 평범한 금요일 저녁 같은 분위기였지만 난 그게 제일 좋았다. 전화를 통하지 않고 직접 얼굴을 보며 여행지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아늑함을 안겨 주었다.

특별한 일이라면 한 가지 있긴 했다. 모두를 위해 내가 프랑스와 독일에서 사 온 기념품들을 선물로 나누어 주었던 것이다.

막 퇴근하는 고용인분들을 응접실에서 잠시 붙잡고 손수 선물들을 건네주었다. 값비싼 물건들보단 실용적인 물건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모두들 정말 좋아해 주어서 다행이었다.

당연히 아버지와 루슬란 오빠에게 줄 선물도 있었다. 슈트 액세서리인 커프링크스와 타이바는 그리 부담도 가지 않고 그날그날 상황에 따라 바꿔 쓰기 때문에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액세서리이기도 했다.

물론 마음 같아선 아버지에게 잘 어울릴 고급 시계 같은 것을 선물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아버지가 준 카드로 사서 거꾸로 선물하는 건 전혀 의미 없는 일이라 생각해, 철저히 내가 벌어들였던 상금으로 살 수 있는 수준에 맞췄다.

앞으로도 돈 많이 벌어서 좋은 선물들을 많이 해 드리겠다고 말씀드렸더니 아버지가 보여 주신 표정이 일품이긴 했다.

“……후후.”

농담처럼 한 말이긴 했지만 내 진심이기도 했다.

내가 누리는 것들이 절대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늘 생각하고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것은 내게 의무처럼 주어져 있었다.

정말 열심히, 열심히 해야 하니까.

어제 여행에서 막 돌아왔다고 피곤해하고 게으름을 부릴 생각도, 겨를도 없다.

“…….”

이제 모스크바로, 일상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내 무의식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아나스타샤와 여행을 다니면서 묘하게 잠이 늘었고 뒹굴뒹굴하는 시간도 많아졌기 때문에 너무 축 늘어진 것이 아닌지 걱정을 하기도 했었는데, 며칠 적응할 것도 없이 바로 다음 날부터 난 완벽하게 하루를 시작할 준비를 갖출 수 있었다.

익숙한 감촉의 이불을 젖히며 상체를 일으켰다.

침대 위에서 기지개를 켜며 가볍게 스트레칭으로 온몸을 풀고, 목걸이를 목에 찬 다음 침대 밑으로 내려와서 슬리퍼를 신는 것까지, 난 평상시 아침에 일어나면 해 왔던 루틴을 그대로 행했다.

이렇게 정해진 습관처럼 되어 있는 일과는 집중력을 찾고 몸을 움직이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된다.

그런 내 집중력이 향할 곳은 오직 한 곳뿐이다.

일단 욕실로 가서 간단히 씻은 후에, 다시 방으로 돌아와선 옷을 갈아입었다. 한여름 날씨였지만 그래도 밤에는 춥기 때문에 흰 카디건을 걸쳤다. 충분했다.

싸늘한 밤바람을 맞으며 별관으로 향했다.

매일같이 이렇게 방에서 나와 별관으로 가는 것보다 아나스타샤의 방처럼 아예 방에 피아노가 있는 편이 편하지 않겠느냔 생각을 한 적도 있었지만, 새벽에 방에서 피아노를 치면 온 저택에 피아노 소리가 울릴 것이다. 충분히 거리가 떨어져 있는 별관으로 가는 것이 나로선 훨씬 편했다.

어차피 그리 멀지도 않았다. 익숙한 길을 따라 걷기도 잠시, 밤바람으로 정신을 조금 더 날카롭게 세운 나는 별관의 연습실에 도착했다.

“…….”

피아노를 보자마자 희열에 찬 웃음이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난 다시 한 번 손을 풀며 스트레칭을 했다.

***

해가 떠오르고 새소리가 들릴 무렵,

“…….”

잠시 곡을 놓고 악보를 읽고 있는데 똑똑 하는 노크 소리가 내 집중력을 가져갔다.

그제야 나는 손을 놓고 고개를 들었다.

“들어오세요.”

“아가씨.”

나제즈다였다. 그녀는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왔다.

“연습이 한창이신데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곧 아침 식사를 하실 시간이라 알려 드리러 왔습니다.”

“아, 알려 주셔서 고마워요.”

“……아가씨, 오늘은 연습하실 양이 조금 많으신가 보네요?”

“하고 싶은 것이 조금 있어서요.”

“그래도 어제 막 돌아오셨는데 조금 쉬시지……. 이렇게 말해도 안 들으시겠지만요.”

시계를 보니 7시 30분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난 조금 더 일찍 연습을 마치고 벨카와 아침 산책을 한 다음 주방으로 가서 드미트리에게 요리를 배웠을 것이다. 둘 모두 빼놓을 수 없이 중요한 일이었고, 그것이 내 평상시의 아침 일과였다.

그런데 오늘은 연습에 집중하다 보니 약간 중요도가 치우쳐져 있었다.

“…….”

멍하니 건반을 내려다보다가 문득 웃음이 나왔다.

나제즈다가 식사 시간을 알리러 오지 않았다면 난 아마 점심때까지도 계속 피아노를 붙잡고 있었을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버텼는지 모를 정도로 난 연습에 굶주려 있었다.

파리의 풍경에서 느꼈던 것들, 독일이라는 클래식의 성지를 여행하면서 느꼈던 고전적인 색체와 정서들.

책으로 배우거나 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중구난방이었고 말로 미처 표현하고 정리할 수 없는 부분도 정말 많았다. 하지만 내겐 말이나 글이 아닌 감각적으로 정리하고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음악이라는 도구가 있었다.

난 바흐의 평균율부터 천천히 연주하면서 표현해 보려 노력했다.

러시아에 살면서 러시아 음악가들에 대해 더 잘 이해하게 된 것처럼, 프랑스와 독일에서 얻은 이미지들은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나는 내 해석에 덧붙일 풍부한 색들을 많이 얻어 냈다.

모든 것을 더 심도 깊게 고찰하면서 내가 피아노로 할 수 있는 일들을 보다 갈고 닦았다.

보다 아름다운 해석을 찾아 떠나는 방황이었다.

당장 며칠 해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연주자들은 평생을 이런 목적지 없는 방황에 매달린다. 그것이 연주자로서의 업이었다.

단지, 어제의 연주보다 좋아질 수 있도록 노력할 뿐이다.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음반 녹음으로 지금 한 발을 올린 이 계단에 머잖아 양발을 다 올리고 다음 계단을 넘볼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챔버 오케스트라와 회의한 협주곡 레퍼토리에 대해서도 공부했다.

내 협주곡 레퍼토리는 빈약하기 짝이 없었고, 오케스트라 역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곡을 다 연주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우리는 서로 양보도 하고 협조도 하고 때론 고집을 부리면서 연주회에 올릴 프로그램을 잘 골라야 했다. 난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을 정말 잘 하고 싶었으므로, 되도록 협조적으로 되고 싶었다.

그렇다면 해야 할 일은 명백했다. 미리 다양한 협주곡들을 공부해서 의견을 내고 어떻게 하면 좋은 연주회로 만들 수 있을지 연구하는 것뿐이었다.

다행히 나는 구세프 선생님이 협주곡의 중요성을 강조하시며 날 단련시켜 주신 덕분에 총보독법에도 상당한 진전을 보이고 있었고, 악보 자체를 읽는 속도도 엄청나게 빨라져 있었다. 때문에 조금 쉬운 협주곡들, 특히 내가 평소에 자주 듣곤 하는 협주곡들은 악보를 보고 초견으로 어느 정도 연주할 수 있었다.

깊은 해석 등에서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기 때문에 단순히 손가락을 잘 놀리는 건 의미가 없을지도 모르지만, 일단 피아노로 쳐 보고 내가 어떤 음악을 하는지 귀로 듣는 것은 곡을 익히는 데에 있어서 굉장한 차이가 있는 일이었다.

프로그램을 정하고 첫 리허설이 빠르면 빠를수록 연주회를 열 수 있는 날짜도 빨라질 테니 열심히 할 필요가 있었다.

할 일이 정말 많았다.

마음이 급하지 않을 수가 없었고, 때문에 난 다른 일들은 미처 생각치고 못하고 몇 시간이고 피아노 앞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햇살이 들이치는 창문을 보다가, 웃으며 사과했다.

“미안해요 나제즈다. 정말 너무 오래 있었네요.”

“참…….”

적당한 연습시간을 지키는 것으로 내 컨디션을 조절하는 것 또한 연주자로서 내가 지켜야 할 의무였다. 특히 나 같은 사람은 더더욱.

“아하하……. 미안해요.”

“저야말로요. 그보다, 아침 식사는 어떻게 할까요?”

“당연히 가야죠. 이쯤 할 생각이었어요.”

“알겠습니다.”

내가 아침 식사를 할 것이라는 걸 확인한 나제즈다는 먼저 돌아갔고, 난 잠시 피아노를 내려다보다가 건반 덮개를 닫았다.

아침 식사는 아버지, 루슬란 오빠와 함께였다.

“오늘은 쉬지 그러느냐.”

아버지도 똑같은 말씀이시다.

난 웃으며 말했다.

“충분히 쉬려고 해요. 아, 그리고…… 내일은 외출할 예정이에요. 아버지.”

“외출? 누구와?”

누구냐고 물으시는 것을 보니 친구와 나간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다. 하지만 그런 계획은 아니었다.

“친구는 아니에요. 상트페테르부르크 챔버 오케스트라와 회의가 있어서요.”

“……그렇군. 연주회를 계획하고 있다고 하였지.”

“예. 파리에서도 만났었고요. 말씀드렸었죠?”

“타티아나 네가 무대에 올랐다는 것도 들었다.”

“아, 아하하하…….”

전화로 아버지에게 말씀드렸다간 경을 칠 것 같아서 모른 척하고 파리의 아름다움과 멋진 연주회에 대해서만 말했는데, 어떤 경로를 통했는지 이미 아버지에겐 다 보고가 올라간 것 같았다. 보나마나 내 경호원들이겠지만 그들로선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그래도 아버지가 날 혼내거나 하셨다면 배신감을 조금 느낄 뻔했는데, 다행히 아버지는 별말 않고 넘어가 주셨다.

사실 한 소리를 들어 마땅한 일이었는데도 그냥 넘어가 주시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 사람이 얼마나 간사한지 모르겠다.

아버지는 무덤덤하게 포크를 잠시 내려놓으시더니 말씀하셨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오케스트라라……. 훌륭한 오케스트라겠군. 그렇지 않느냐?”

“예. 정말 대단한 오케스트라였어요. 아, 어제 차이코프스키 콘서트홀에서 연주회가 있었는데, 관람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요.”

“아쉽구나.”

내가 귀국한 어제 모스크바 차이코프스키 콘서트홀에선 상트페테르부르크 챔버 오케스트라의 연주회가 있었다. 그것도 보러 갔으면 좋았겠지만, 나도 아버지도 시간이 맞지 않아서 어쩔 수 없었다.

나도 약간 아쉬움을 느끼고 있는데, 아버지는 돌연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딱 잘라 말씀하셨다.

“상관없지. 네 연주회를 보러 가면 될 테니.”

오케스트라의 연주는 어차피 내 연주회에서 협연으로 볼 수 있을 테니 상관없다는 말씀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꼭 내 연주회를 보러 와 주시겠다는 말씀이기도 했다.

누군가는 부모가 자식의 연주회를 보러 가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느냐고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세상에 당연한 것은 하나도 없다.

“항상 감사해요. 아버지.”

“……내가 하는 일이 무어 있겠느냐.”

아버지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언제나처럼 무뚝뚝하게 말씀하셨지만 난 바쁜 아버지가 시간을 내시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정말, 정말로 감사해야 할 일이었다.

아버지가 다시 나이프를 드셨고, 이번엔 루슬란 오빠가 날 불렀다.

“타티아나.”

“예.”

“내일 회의라는 건 구체적으로 뭘 하는 건데?”

“그게…….”

루슬란 오빠는 구체적인 설명을 요구했지만 정말 구체적으로 말해 봐야 이야기가 길어질 것만 같아서 간추려서 설명했다.

일정을 정하고 프로그램을 선정하고 리허설을 하고 해석을 맞추고 조화를 이루는 일련의 과정을 짧게 이야기했더니 루슬란 오빠는 사뭇 심각한 표정으로 그것을 듣다가 불쑥 말했다.

“같이 가 줄까.”

“예?”

“보호자가 있는 편이 낫지 않겠어?”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다들 좋은 사람들이고요…….”

“한 번 봤을 뿐이잖아.”

“…….”

무슨 걱정을 하는진 알겠지만, 적어도 음악가 대 음악가로서 그 사람들은 날 무시하거나 하지 않았다. 내가 파리에서 보여 준 것이 일종의 실력 행사가 되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난 정말 괜찮았다.

하지만 루슬란 오빠는 마치 날 따라오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는 듯 날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싫다고 거절하면 두 번 말하진 않을 테지만, 난 그렇게 매몰차게 루슬란 오빠가 필요 없다고 말할 순 없었다.

저번 달, 음반을 녹음했을 때 전화를 하고는 찾아와서 보호자로서 같이 밤을 새워 준 사람이 누구던가. 루슬란 오빠였다.

“그렇다면 내일 한 번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좋아. 시간 비워 둘게.”

“고마워요.”

연주자로서 만들어야 하는 음악이란 레슨을 받고 조언을 받아도 결국은 피아노 앞에 앉아 홀로 해내야만 하는 외롭고 고독한 일일지 모르지만, 난 환하게 웃으며 감사를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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