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7화
표트르 일리치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
이미 한 번 검토하고 후순위로 미뤄 두었던 곡이긴 하지만, 몇 안 되는 내 협주곡 레퍼토리 안에 있는 곡이었다.
“…….”
살짝 긴장이 된다. 지금 여기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와 악장, 단원들이 모여 앉아 있었다. 내가 피아노 앞에 앉는 것은 곧 이 선배 음악가들 앞에서 시험을 치루는 것과 같았다.
음악원 연습실에서의 리허설이니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모두의 마음속에 있는 채점지에 점수를 매기게 될 시험이다. 그건 앞으로의 내 발언권과 의견 수용 전부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아주 중요했다.
그렇게 단 한 번의 기회로 모든 것을 붙잡을 수도 있는 시험이자 무대라는 생각이 들자,
천천히 집중력이 날카로워지기 시작했다.
“…….”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 3악장 피아노 솔로.
신청받은 곡은 분명했고, 그렇다면 다른 생각을 할 틈은 없었다.
난 말없이 피아노로 향하면서 곡의 첫 시작을 떠올렸다. 기억 아래에 잠들어 있는 음악들을 일깨우고 악보 위에 내려놓는다.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협주곡이 그리고 있는 거대한 그림이 내 주변으로 차차 완성되어 간다.
그 모든 것들을 두르고, 피아노 앞에 앉는다.
“…….”
건반 덮개를 열고 팔 위치를 가늠하고 의자에 앉아 높이를 조절하고 원피스 자락이 방해되지 않도록 정돈했다.
피아노는 스타인웨이. 음악학교 연습실마다 있는 브랜드이긴 하지만 난 이 피아노를 잘 모른다.
건반을 하나 살며시 눌러 보았다. 들릴락 말락 하는 소리가 살짝 울린다. 난 건반과 해머의 무게, 그리고 현의 울림을 느꼈다. 그것만으로도 이 피아노가 어떤 세월과 연주자들을 겪었는지 어렴풋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좋은 피아노였다. 이대로 스케일을 한 번 쳐 보는 것도 괜찮겠지만, 굳이 집중력을 깨뜨리고 싶지 않았다.
천천히 양손을 들었다가,
재빠르게 떨어뜨렸다.
***
상트페테르부르크 챔버 오케스트라의 악장 크리스티나 안드레예브나 나미코바는 타티아나를 지켜보았다.
몇 번이고 느낀 점이지만 참 자세가 곧고 아름다운 아이였다. 좋은 집안에서 좋은 교육을 받고 잘 자랐는지 말씨도 곱고 행동도 부드러운데, 그러면서도 흠잡을 곳 없는 기품이 드러나서 함부로 대하거나 우습게 생각하기 어려운 분위기가 있었다.
그리고 타티아나의 진가는 그 외양에만 있지도 않았다. 그녀의 진가는 피아노에 앉았을 때 비로소 제대로 나타난다.
평소 얌전한 태도는 바로 피아노에 앉았을 때의 격차를 보여 주기 위한 가면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타티아나는 강렬하고 인상적인 연주자였다.
그리고 콩쿠르에서도, 프랑스에서도 보여 줬듯 타티아나는 이번에도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연주에 들어갔다.
“……!”
타티아나가 시작한 연주의 첫 음을 듣자마자 크리스티나는 하마터면 입을 열고 말을 할 뻔했다. 한 소절이 아니라, 양손으로 첫 화음을 찍는 순간 그녀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아차리고는 경악했다.
타티아나가 오케스트라로 시작했어야 할 곡의 시작을 피아노로 열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스타니슬라프는 피아노 솔로를 들려 달라고 했지, 타티아나에게 지휘자들이나 할 법한 총보독법을 보여 달라고 하지 않았다. 그러니 오케스트라 파트는 제외하고 피아노만의 독주를 보여 주면 될 일이었다. 대부분의 피아노 연주자들은 신경 쓰지 않고 그렇게 한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단순히 연주가 가능한지를 보려는 지금 이 시간에도 음악을 만들어 내려고 하고 있었다.
마치 무대에 선 피아니스트 같다.
타티아나가 피아노로 옮겨 낸 오케스트라가 이 거대한 피아노 협주곡의 3악장을 열고, 그 가운데로 피아노의 독주가 시작되었다.
그 모든 것은 피아노 한 대로 이뤄진 음악이었지만 크리스티나는 분명하게 오케스트라와 피아노의 구분을 느꼈다.
“…….”
타티아나의 실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오케스트라 없이 홀로 달려 나가기 시작한 피아노 독주도 굉장히 높은 완성도를 자랑하고 있었다.
똑같은 리듬으로 반복되는 3악장의 첫 주제를 연주하는 어린 연주자들은 꾸밈음을 뭉개 버리거나 리듬감을 잃어버리곤 하는데, 타티아나는 정확한 리듬을 지켜 연주하고 있었다.
메트로놈처럼 딱딱한 느낌은 아니었다. 재치 있고 탄력 있는 그녀만의 해석과 그림이 느껴졌다. 너무나 뚜렷해서 다음에 어떻게 이어질지 절로 상상이 갈 정도였다.
크리스티나는 과거엔 몇몇 지휘자들이 직접 피아노를 치면서 이 화성의 악기로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기도 했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러면 아무래도 전문 지휘자가 지휘봉을 들고 지휘하는 것보단 곡의 완성도에 하자가 있지 않겠나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저렇게나 확고하고 뚜렷한 해석이 있다면 오케스트라가 몇 십 명이건 지휘하지 못할 수가 없다.
그리고 넓은 대로를 행진해 나가는 듯한 주제가 피아노 파트로는 끝나고 관현악으로 이어지면서,
순간 음색이 변화한다.
크고 웅장하게, 타티아나는 오케스트라의 맞받아침을 묘사해 냈다.
마치 이렇게 할 것이라는 것처럼.
이렇게 해야 하지 않겠냐는 것처럼.
“…….”
이 애는 천재다.
크리스티나는 할 말이 없었다.
기본적으로 이 협주곡은 2관 편성에 금관악기도 많이 필요하고 퍼커션도 들어간다. 타티아나는 그 소리 하나하나를 모두 표현해 낼 순 없으니 절묘하게 하나로 뭉친 오케스트라의 소리 그 자체와 비슷한 소리를 구현해 냈다. 그러면서도 정확하게 각 파트별 악기들이 느껴진다는 것이 기가 막힌 노릇이었다.
바이올린과 첼로, 비올라, 콘트라베이스의 현악기들은 물론이고 악보에 기록된 음과 실음이 다른 이조악기인 트럼펫과 호른의 소리도 명확했다. 미리 총보를 읽어 놨다는 것은 알겠지만 어떻게 그 모두를 외우고 이 와중에도 손가락 하나를 사용해 내성부로 표현해 내는지, 이해가 안 간다.
이 협주곡을 피아노 솔로로 쳐 내기 위해 작정하고 시간을 들여 편곡을 하고 암보하지 않고서야 이런 연주가 가능하다고 생각되진 않았다.
하지만 타티아나의 연주를 자세히 듣던 크리스티나는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오케스트라가 저음부를 맡고 피아노가 이후를 받아 주는 곳도 혹시 피아노 하나로 다 연주하나 싶었지만, 그땐 피아노에만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완전히 사운드가 비어 버리는 공간만 오케스트라를 대신해 채움으로서 음악이 아니게 되는 것을 막을 뿐이지, 기본적으로는 자신의 피아노 솔로를 보이고 있었다.
크리스티나는 타티아나가 이 연주를 즉흥적으로 하고 있음을 확신했다. 치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이 협주곡 자체를 혼자서 해치울 생각이었다면 피아노 솔로 또한 몇 음을 삭제하고 그 사이 오케스트라의 소리를 섞어서 전체적인 구조를 새로 만들었을 것이다. 충분히 그럴 만한 실력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타티아나는 그렇게 하진 않았다.
소리가 비면 오케스트라를 끼워 넣고,
아니면 피아노에 집중한다.
그뿐이었다.
그뿐이었지만, 열다섯 살의 실력이라기엔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과시하지 않고 철저하게 자신의 음악만을 하면서도, 이렇게나 뛰어남을 드러내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도 감동적인 일인가.
지금 이렇게 보란 듯이 실력으로 오케스트라와 피아노를 넘나드는 것은 절대 실력 과시 같은 것이 아니었다. 크리스티나는 그것을 분명하게 느꼈다.
그저 연주자가 리허설에도 진지하게 임할 뿐이었다.
크리스티나는 타티아나가 어쩌면 피아노로 과시를 하는 성격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평소 모습으론 도저히 상상할 수 없지만, 사람이란 겉모습으로만 알 수 없는 일이었고, 실제로 프랑스 파리에선 피아노 현을 끊어 버리는 무지막지한 일을 해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단순히 어린 치기라고 치부하기엔 굉장히 복잡한 일이 있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무대에서 관심을 받고 음악을 도구로 자신을 과시하는 성격을 갖지 않고서야 그런 일을 하긴 어려우리라 판단했다.
하지만 지금 이 정직한 협주곡을 들으면서, 크리스티나는 달리 생각했다.
정직하게 자기 실력과 음악을 보이는 것을 과시라고 생각하는 건 정말 큰 착각일 수도 있다는 것을.
“…….”
주제는 조금 더 커졌다. 오케스트라의 파트였다. 피아노 연주자는 손을 내려놓고 잠시 숨을 고를 시간이지만, 타티아나는 리듬을 잃지 않고 오케스트라를 그려 낸다.
웅장한 행진곡이 뻗어 나가다가, 장면이 전환된다.
피아노가 감미롭게 홀로 노래하는 장면은 행진을 구경하는 구경꾼 무리 사이의 아이의 모습이었다.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서 행진을 구경하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자리를 찾으러 헤맨다.
어른들 사이에서 발돋움을 하고 고개를 내밀면서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가려고 한다. 그리고 성공한다.
바로 앞에서 지나가는 행렬에 눈을 크게 뜨고 경탄하는 듯한 음색으로, 타티아나가 건반을 어루만졌다. 정말 가볍게 지나가는 듯하지만 풍성한 소리가 눈앞에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아이가 행진과 같은 방향으로 뛰며 발을 구르는 소리.
피아노로 귀엽게 흘러내리는 스케일로 표현되고,
곧이어 오케스트라의 소리로 표현된다.
타티아나는 피아노를 멈추고 플루트와 호른의 산들바람 같은 소리를 묘사한다.
그리고 다시 피아노.
그다음은 현악기들의 쏟아지는 스케일이다.
똑같이 연주해도 이상하지 않을, 피아노로는 두 번만 연주하면 될 부분을 타티아나는 총 네 번을, 그것도 오케스트라의 파트는 각각 들릴 정도로 세심하게 묘사해 낸다.
분명 한 대의 피아노 소리였지만, 분명히 달랐다.
이 협주곡을 몇 번이나 연주해 본 크리스티나는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곡의 진행과 지금의 연주를 느끼면서 타티아나가 얼마나 절묘하게 건반을 고르고 터치를 조절하며 음색의 차이를 만들어 모든 것들을 구분해 내는지 알았다.
천재적인 터치 컨트롤. 열다섯 살의 연주자가 아니라 노련한 프로 연주자들이나 할 수 있을 법한 예술적 기교다.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는 실력이다.
“…….”
다시 주제가 반복되었다. 똑같은 주제였지만 타티아나는 살짝 변화를 주어 이번엔 다시 한 번 같은 주제를 조금 멀리서 크게 바라보는 듯 가볍게 손을 놀렸다.
크리스티나는 멍하니 타티아나가 연주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전에 몇 번 실력을 보기도 했고, 그 배경도 굉장했으니 분명 앞으로 크게 될 연주자라고 생각했다. 때문에 지금부터라도 친하게 해 두어서 절대 나쁠 것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 정도가 아니었다.
타티아나가 세계에 서게 되었을 때, 어설프게 해선 상대나 해 줄지 의문이었다.
그렇게 열다섯 살 연주자의 실력을 기가 막혀하면서 듣고 있는데, 뒤편에서 살며시 문이 열렸다.
“……?”
소음이 나지 않도록 설계된 연습실 문은 정말 소리 없이 열렸고 그 너머에서 들어온 사람은 크리스티나도 아는 사람이었다.
풍채 좋은 중년 아저씨로만 보이지만, 실은 모스크바 음악원의 피아노 교수인 아르카디 세르게예비치 피메노프였다.
약간 놀라기도 잠시, 그 뒤로 한 명 더 따라 들어왔다. 크리스티나는 그 남학생도 알았다.
바로 오늘처럼, 어린 천재 연주자들과 협연을 하게 되면 종종 놀랄 일이 있곤 한데, 몇 번 안 되는 기억 속에 아주 강렬하게 새겨져 있는 연주자였다.
알은척을 할까 생각하고 있는데, 아르카디 교수는 오케스트라 단원 모두의 시선을 받더니 입가에 손가락을 대며 조용히 하라는 제스쳐를 취하곤, 여전히 연주에 집중하고 있는 타티아나를 가리켰다.
누가 오든, 심지어 교수조차 이 연주를 중지시킬 순 없었다.
“…….”
음악은 중반부를 넘었고 템포가 바뀌었다. 트란퀼로tranquillo. 온화하게 연주되는 음악은 피아노이지만 피아노가 아닌 오케스트라의 합주로 묘사되었다.
타티아나가 보여 주는 그림은 가까이에 있지 못하고 높은 건물 등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들리는 것처럼 들렸다.
보통 음악의 셈여림을 조절함으로서 연주자들은 사람의 마음을 들었다 놓았다 하곤 하지만, 타티아나는 거의 원근감을 조작하고 있는 것처럼 들리기까지 했다.
점점 가까워지고, 가까워지다가,
발랄하게 피아노가 발을 뗀다.
오케스트라도 찍어 누를 듯한 거대한 옥타브의 연타가 쏟아졌다.
“…….”
라흐마니노프를 연주하는 것을 보면서 타티아나가 테크닉적으로 대단한 완성도를 갖췄다는 것은 충분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 놀라진 않았지만, 단순히 빠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풍부한 음량과 색채감을 품고 있다는 점이 놀라웠다.
사실 타티아나에게 있어서 이 정도는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크리스티나는 직감했다. 이 정도 연주와 강렬함은, 1관 오케스트라로 커버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곧바로 오케스트라가 폭발하며 클라이맥스로 향해 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크리스티나는 사람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바이올린 8대? 부족하다. 16대는 필요했다.
“…….”
그런 계산을 하며 크리스티나는 조금 더 집중해서 들었다.
타티아나는 격렬하게 피날레를 연주해 나갔다. 피아노가 노래했다. 뒤따라 오케스트라가 받아 주고, 다시 피아노가 내리꽂힌다.
화려하게 내려앉는 스케일은 한 번에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리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무너짐 없이 확고한 형태를 쌓고 다시 상승한다.
곡의 마무리를 짓는 웅장한 화음이 울리고,
타티아나가 손을 떼었다.
총 35분 남짓의 협주곡 중 7분가량을 차지하며 짧지만 확고한 주제가 담긴 마지막 악장이, 피아노 한 대와 한 명의 연주자로 충실한 음악으로 구현되었다.
“……와우.”
처음엔 그저, 협연할 연주자의 실력이 얼마나 되는지 보고 어떻게 맞춰야 할지 지극히 냉정하게 평가할 생각이었는데, 감탄밖에 나오지 않았다.
“브라바.”
지휘자 스타니슬라프가 가장 먼저 박수를 쳤고, 곧이어 다른 단원들도 박수를 쳤다.
협연자의 실력을 보고 냉정해야 하는 입장에선 너무 과하게 환호하거나 박수를 치는 것이 그리 좋지 않겠단 생각은 있었지만, 박수를 보내지 않곤 참을 수 없었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환호성 없이 담백한 찬사가 이어졌지만, 크리스티나는 어쩐지 귓가에 환성이 들리는 것 같다는 착각을 느꼈다.
“감사합니다.”
타티아나는 7분 동안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넘나드는 격렬한 연주를 해냈음에도 불구하고 흐트러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선 가볍게 허리를 숙였다.
그녀에게 있어선 이 리허설도 무대였던 것이다.
크리스티나는 이 멋진 연주자와 함께, 정말 잘 해 보고 싶었다.
그렇게 멋지게 자신의 실력을 보이면서 동시에 연주회에 대한 기대감과 열정까지 불어넣어 준 타티아나는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해냈는지에 대해선 별생각이 없는지 자신만만해하거나 뿌듯해하지도 않았다. 그저 겸허하게 평가를 듣겠다는 듯 똑바로 설 뿐이었다.
그런데 그 평정에, 순간 금이 갔다.
“에르네스트……?”
아르카디 교수와 함께 들어온 남학생을 보고 타티아나는 처음으로 당황해했다. 깜짝 놀라 어깨를 떠는 모습을 보며 크리스티나는 비로소 타티아나가 피아노 치는 요정이 아니라 사람 같다는 엉뚱한 생각을 했다.
“안녕.”
러시아 피아노계의 신성이라 불리는 천재. 에르네스트 스테파노비치 베샤스트니흐는 전혀 당황하는 기색 없이 담백하게 인사했다.
타티아나는 한동안 당혹스러움을 금치 못하고 허둥지둥하더니 잠시 후에야 제정신을 차렸다.
“어……. 음, 저 지금 연주회 회의 중이라서요. 나중에, 나중에요.”
“나중에 뭘?”
“나중에……. 어…… 글쎄요…….”
평상심을 되찾았던 타티아나는 다시 중얼거리며 급속도로 혼란스러움에 빠져갔다. 보는 크리스티나가 다 안쓰러워질 정도였다.
아르카디 교수도, 다른 단원들도 흥미롭게 지켜보고만 있었다.
스타니슬라프만이 진지하게 타티아나에게 응답했다.
“아주 도전적인 연주군. 타티아나.”
조금 뜬금없이 들리기도 했지만, 연주회 회의를 하고 싶어 하는 타티아나에게 건네진 동아줄이기도 했다.
타티아나는 얼른 붙잡았다.
“도전적이라 하심은……?”
“연주자들은…… 피아노 솔로를 보여 달라고 하면 열에 아홉은 자신의 파트만 툭 잘라 내어놓곤 하지. 가장 자신 있는 부분이 이 부분이라는 듯. 하지만 음악이라는 것이 그렇던가?”
“아니죠.”
“하지만 안다고 해서 아는 모든 것을 내어놓지도 않지. 그런 의미에서 도전적이라는 걸세.”
타티아나가 보여 준 것은 약간 삐딱하게 보면 기분 나쁘게 보일 수도 있는 행위였다. 오케스트라를 앞에 놓고 피아노 연주자가 보란 듯이 실력 과시를 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었다. 조금 심하게는 마치 오케스트라 따위는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정말 성질 더러운 사람을 잘못 만난다면 제대로 밉보일 확률도 높았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정말 순수하게, 자신의 음악성 자체를 보이고 제대로 평가받고, 좋은 음악으로 오케스트라와 함께 하고 싶어 했을 뿐이었다. 그것이 진정성으로 받아들여졌기에, 그 모든 것을 통틀어 스타니슬라프는 칭찬을 하고 싶어 한 것이다.
스타니슬라프와 오래 있었던 크리스티나는 그 마음을 잘 알았지만 타티아나는 아니었다. 때문에 이 무뚝뚝한 지휘자의 칭찬을 조금 풀어서 좋게 설명해주어야 할까 생각하는데, 스타니슬라프가 툭 덧붙였다.
“차이코프스키는 안 되겠군.”
“……?”
“뭐라고요?”
이 아저씨가 지금 뭐라는 거야?
크리스티나는 어이가 없어서 저도 모르게 되물었지만, 스타니슬라프는 말이 없었다.
타티아나는 딱히 표정 변화 없이 있었지만, 담담한 게 아니라 그냥 멍한 것 같았다.
놀라지도 반박하지도 못하고 타티아나는 넋을 놓고 섰다. 갑자기 음악원의 교수와 친구가 참관하고, 칭찬을 하던 지휘자는 평가를 싹 바꾸는데 과한 혼란에 머리가 멈춰 버릴 만도 했다.
하루 종일 칭찬을 해 줘도 모자랄 판에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크리스티나는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골치가 아팠다. 그녀는 정말 몇 년 만에 스타니슬라프와 싸워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